비의식적 사고

(Nonconscious Thinking)

 

역동적 기억: Roger Schank 저서, 신현정 역, 시그마프레스, 2002 (원서 : Dynamic Memory Revisited, Cambridge Univ. Press, 1999), Page 247~265

 

(참고 : unconsciousness 는 무의식) 

만일 비의식적 지식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이 유형의 지식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그리고 이 지식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곳은 어디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말해 줄 수 없는 내용을 가르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비의식적 지식이 모두 들여다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제 11 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잠드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는 자신들의 마음이 어디론가 내달리고 있다고 보고한다. 마찬가지로 원하는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실패할 때,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일들이나 아니면 회피해 왔던 주제나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또 다른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느낌은 사람들이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참조하는 대상과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을 수가 있다. 사람들은 반쯤 깨어있는 상태에 있을 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보지만, 그 생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의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의식이 의미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것은 묘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는 있지만, 그 사고과정 자체를 제어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원한다면 사고과정에 개입하여 중지시키고는, 마음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더 강도 높게 생각하기 시작하여서는 마음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을 차단시키고 생각하는 내용에 질서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상한 일은 이렇게 다양한 상태를 기술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제 11 장에서 제안하였던 어휘를 사용하여, 이렇게 반쯤 깨어 있는 사고가 표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음하여 보자. 이것이 합리적 사고가 아님은 확실하다. 정서적 사고도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고가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지 때문이다. 내가 하의식적 사고라고 명명하였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의식적 선택을 하는 데 직접적으로 수반된 사고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수반된 것도 없으며 사람들이 사고하는 동안 전혀 무의식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목록에서 단 하나의 가능성, 즉 비의식적 사고만이 남게 된다. 나는 앞에서 비의식적 사고가 가장 기본적인 심적 활동이라고 언급하였다. 비의식적 사고가 비의식적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비의식적 지식의 몇몇 측면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나는 의도적으로 반쯤 깨어 있는 상태에 비추어서 이리저리 내달리고 있는 마음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왜냐하면 내달리고 있는 마음을 특징짓는 반쯤 깨어 있는 사고가 꿈과 어떻게 다른지를 물음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꿈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흔히 사람들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기묘한 일로 기술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제외시키고자 한다. 나의 주장은 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상적인 인지활동과 유사하다는 것이다.나아가서 꿈이 반쯤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내달리고 있는 마음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지를 밝혀 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알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비의식적 지식을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한 상태에서의 사고를 분석하는 것은 생각나기를 분석하는 것과 아울러서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과정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삶을 주도하는 비의식적 사고의 몇몇 측면들을 고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다음의 이야기를 제시하겠다. 나는 언젠가 네덜란드의 엔쉐데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기차가 노르드 (Nord) 다음에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이름의 역을 통과하였는데, 내 마음은 갑자기 초등학교 6 학년 때 알고 있던 한 소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나아르덴 (Naarden) 이었다. 그 이름은 네덜란드 이름이었으며 다른 친구들의 이름과 구별이 되어 주의를 끌었었다. 왜냐하면 두 개의 a 가 연속해서 들어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같은 반의 다른 친구들은 인종적으로 동질적이어서 모두 동유럽의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다음 역을 통과할 때 나는 그 아이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의 이름이 바로 나아르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가능한 유형의 설명 중의 하나를 만들어 내기가 십상이다. 첫 번째 유형은 합리적 설명이다: 아마도 직전의 역에서 "다음 역 - 나아르덴" 이라는 표지판을 보았는데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니면 두 번째 유형의 설명에서는 무엇인가 신비로운 것으로 빠져들어 갈 수도 있다. 이 유형의 설명이 많은 사람들 간에 아주 흔한 것으로써, 데자뷔 (déjà vu), 천리안 (second sight), 또는 초감각지각 (ESP)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다음 역에 대한 표지판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후자의 설명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세 번째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를 무척이나 놀라게 만들었다.

2 년 전에 나는 그로닝겐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기차를 타고 갔었다. 엔쉐데는 네덜란드 동부에 있으며 그로닝겐은 북쪽에 있다. 암스테르담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두 기차여행이 동일한 노선에 있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리는 논리가 아니다. 중간에 물길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두 노선은 아메르스보르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나는 기차가 이 역에 정차하였을  때의 일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기차가 이 역에 정차했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인식하지도 않은 채 이 도시의 이름을 들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잠시 생각하였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명백해졌다. 나는 나아르텐을 아메르스보르트와 연계시켰으며, 노르드는 이것을 생각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어느 것도 의식되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동일한 노선에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나아르덴을 아메르스보르트와 연계시켰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였다. 실제로 나는 나아르덴을 결코 들어본 적도 없었으며 그런 도시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어떤 부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의식적 과정이 내가 의식적으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세부사항들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나의 의식적 지식이 비의식적 지식과 달랐을 뿐이다. 비록 다른 유형의 지식 (사실적 지식이 아니라 처리과정적 지시과 같은) 에도 이것이 참이라는 사실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사실적 지식에서도 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하겠다.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시점에서도 (또는 동물 들이 여전히 말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고는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경우에 사고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명백한 답은 사고를 하되 언어로는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답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오히려 사고는 자신이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진행되는 과정이다. 잠시 언어로 사고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 보라. 만일 머리 속에서 모든 단어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미지, 감정, 태도, 기대 등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깨어 있으면서 각성된 상태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실제로 이완, 명상, 그리고 다른 "마음 세탁" (mind cleaning) 기법들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단어가 없는 사고를 의식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항상 꿈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반드시 언어로 구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항상 꿈을 꾼다. 꿈은 의식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지칭하는 과정이며, 나는 이것이 다른 비의식적 과정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때때로 내가 나아르덴으로 가는 기차여행에 관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꿈을 구성하는 성분들은 깨어있을 때 사용하는 비의식적 지식과 동일한 지식에 의존한다. 비의식적 사고와 비의식적 꿈간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꿈은 비의식적 사고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실의 규칙들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그 기차여행에 대해서 내가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유형의 비의식적 지식은 보편적인 사고 과정에서 중요한 측면이 된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식할 수가 없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하는 지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지식보다 삶에서 상당히 덜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아주 기본적인 생존기술이 아닌 한에 있어서는  나아르덴에 관한 지식도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예컨대, 운전면허 필기 시험을 치를 때 고속도로에서 앞차와의 안전거리 등에 대한 의식적 지식을 생각해 보자.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암기하여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능숙한 운전자는 운전하면서 앞차와의 거리를 계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단지 언제 너무 가깝게 접근하였는지를 알뿐이다. 이러한 비의식적 지식은 차를 감속시키기 위해서는 브레이크를 얼마의 압력으로 밟아야 하는지, 차를 완전히 정지시키려면 얼마의 거리가 필요한지, 돌발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브레이크를 지나치게 밟아서 차의 회전을 제어할 수 없게 될 가능성 등에 대한 또 다른 비의식적 지식에 의존한다.

이 모든 것들이 비의식적 지식이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운전하면서 배운다. 결코 명시적으로 획득되지 않는 지식은 명시적으로 회상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운전교습생에게 차를 정지시키려면 차의 시속에 해당하는 만큼의 피트 단위의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 교습생은 암기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회상할 수가 있다. 브레이크에 가할 압력이 얼마인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면, 회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교습생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요한 시점에 알고 있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 그 지식을 떠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나아르텐이 아메르스보르트 다음 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운전자도 차를 정지시키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압력을 브레이크에 가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 반대도 참이다. 만일 학생들에게 도시의 위치 또는 차를 정지시키는 데 필요한 거리에 대한 숫자적 사실을 암기하도록 강요한다면, 시험을 위해서 그사실을 회상할 수는 있겠지만, 그 지식이 정말로 요구될 때, 마음에 떠올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바로 불활성 지식 (inert knowledge) 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diSessa, 1982; Bransford et al., 1989; Reif & Larkin, 1991; Lampert, 1995).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안,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지, 다양한 유형의 행위를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어울리는 것인지, 어떻게 의사소통하는 것인지, 어떻게 추리하는 것인지 등등을 어떻게 학습하는 것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학습해 왔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게 해주는 지식은 단지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작가, 교사, 전도사, 상담자 등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지식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들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한다. 때로는 이렇게 명시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의식적 지식을 비의식적 지식으로 변환시킬 수 있느냐는 점이 된다. 왜냐하면 의식적 지식 자체만은 그렇게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늘상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MOP, TOP, 스크립틀릿, 그리고 장면들은 의식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대도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있어서는 가끔씩 의식되기도 하지만, 어린 아동에게도 의식적일 가능성은 없다. 필요한 지식이 엄청나게 많다든지, 지식이 본질적으로 매우 세부적이며 아동이 그 지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기 훨씬 전부터 필요하다든지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이 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개는 자기 집을 찾고, 먹고,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신체를 기동시키며, 교미하는 등의 행위를 잘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개는 그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며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그러한 행위를 할 필요만 있을 뿐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에게 비의식적 지식이 필요하며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사고과정을 고찰하려고 하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의식적 지식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것이다. 그 역할이 실제로는 얼마나 사소한 것이지 느껴보기 위해서 비의식적 지식을 보다 상세하게 들여다보도록 하자.

사람들은 문장을 이해할 때 - 예컨대 바로 이 문장을 읽을 때 - 비의식적 지식을 사용한다.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항상 그렇듯이 사람들이 언어에 대해서 배운 것 (언어에 대한 의식적 지식) 과 자각하지는 않지만 항상 사용하고 있는 것 (언어에 대한 비의식적 지식) 간에는 물론 커다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명사, 동사, 통사분해, 개념,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어이해가 작동하는 방식을 가르칠 때 "John prevented Mary from leaving the room" 이라는 문장을 종종 사용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문장에서 지칭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개념만을 사용하여 말해 보도록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존이 한 것은 무엇이냐고 내가 물으면, 학생은 prevent 라고 말한다. 나는 그 답을 인정하지 않는 다. prevent 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문장이 묘사하고자 하는 행위를 상상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제 존이 실제로 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물음할 수 있다. 학생들은 존이 메리를 때렸거나, 문을 막아섰거나, 아니면 고함을 질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존은 이러한 행위를 하였을 수도 있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문장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알려 주는 것은 prevent 일 뿐이며, prevent 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행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좌절하고 만다. 도대체 prevent 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보도록 요구한다. 이 시점에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존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이며, 그 행위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메리가 방을 떠날 수 없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prevent 의 진짜 의미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prevent 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종류의 의미인가? 내가 이 물음을 던졌을 때 어느 학생도 prevent 의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그 의미를 묘사해 내는 것은 항상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느 학생이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인식하게 되면 곧바로 다른 학생들도 동의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학생들이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인가? 학생들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일상적 표현에서 prevent 라는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할 수도 있고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내가 시범보인 방법을 통해서 의식은 비의식적 지식을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 유형간에는 여전히 상당한 괴리가 있다. 이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by 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도록 하자.

만일 위의 학생들에게 by 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이들은 by 에 대해서 아무 것도 규정할 수가 없다. 단지 용례를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위의 예시 문장에서 존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 재차 물음을 던지고, 존이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학생 모두가 결론 내린 후에는 by 가 문장속에 있다면 그 의미를 알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만일 문장이 "John prevented Mary from leaving the room by offering her ice cream" 이라면, 학생들은 존이 실제로 한 행위를 알게된다.

학생들은 물론 존이 한 행위를 by 라는 단어 뒤에서 찾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by 의 의미가 기능적이라는 사실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by 는 문장을 구성성분들로 적절하게 분해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규칙은 prevent 라는 단어 후에 나오는 by 는 어떤 행위이든 prevent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차단된 행위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나타내며, 그렇게 차단된 행위 자체는 from 이라는 단어 다음에서 찾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사분해 (parsing) 지식이다. 언어사용자는 누구든지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나의 학생들도 모두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적으로 알았던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모두 비의식적인 것이다. 나아가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상세화 되어 있다. 누구나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영어문장을 분석하기 위해서 그러한 지식이 요구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Riesbeck, 1975; Schank, 1975; Birnbaum, 1985), 우리는 언어이해에 필요한 지식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언어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명시적으로 배운 것에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사람들은 명사와 동사를 의식하며, 시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의식하며, 들었던 감명적인 이야기를 의식한다. 그러나 언어의 기제, 즉 작동방식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 기제를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지과학자들이 아직 공식적으로 그것을 찾아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찾아 냈더라면, 이미 교과과정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컴퓨터가 출현하고 그 컴퓨터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기 전에는, 인지과학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과학 분야가 아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by 가 어떻게 작동하며, prevent 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암기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암기는 오늘날 학교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문장을 분해하고 동명사와 같은 것을 이해하게 만들려는 시도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일단 비의식적 지식이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면,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

이제 너무나 명백해진 것은 비의식적 지식이 의식되지 않고도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한 내용을 명시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적어도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지만, 그 가치는 별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내용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유용할는지도 모르지만, 가르치려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유용한 것이 아니다.

한 예를 but 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학생들에게 but 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앞에서 제시한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멍청하게 쳐다보기 십상이다. 물론 학생들은 but 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컴퓨터가 영어를 이해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but 라는 단어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비의식적 지식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유용하게 된다.

실제 비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but 의 의미는 어느 명제이든 but 에 뒤따르는 명제는 선행된 명제가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함의를 부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내가 "It was cloudy all day but it didn't rain" 이라고 말한다면, 정상적으로는 비를 기대하였는데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만일 내가 "John hit Mary but she didn't cry" 라고 말한다면, 메리가 맞은 후에 울 것이라고 기대하였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언어를 전공하는 학생은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그지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but 라는 단어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예컨대, "John hit Mary but it didn't rain" 이라는 문장은 바보스럽게 보인다. 때리기는 비를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단어 (예컨대, hit) 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만일 내가 "John hit Mary but his hand didn't touch her" 라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만일 내가 "John hit Mary but nothing at all ever came in comtact with her" 라고 말한다면, 이 문장은 어색할 뿐만 아니라 참일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but 를 포함하고 있는 문장들을 들여다봄으로써, 단어에 대해서 알고 있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컨대, 위와 같은 문장으로부터 hit 의 의미에는 대상과 대상간의 물리적 접촉이 포함되며, 행위자의 손과 대상간의 접촉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참이 아닐 수도 있으며, 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알수 있게 된다.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마음을 연구하고 그 작동기제를 연구하는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hit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but 에 대한 검증이 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지식은 비의식적이며, 지능적 인간이 의미하는 것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의식적 지식이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의식하는 것은 언어사용자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려운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집단으로서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보다 많이 가지게 됨에 따라서,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그 지식이라고 믿게 된다. 사회집단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육시스템이 수행해야만 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Strauss & Shilony, 1994). 만일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실들을 이해한다면, 그 지식을 후대에게 가르쳐야만 한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작동방식을 안다는 것이 그것을 더 잘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커브볼이 왜 곡선을 그리는지를 이해한 사람이 반드시 공을 던지는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며, 멋진 커브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볼을 던질 때 그 볼이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언어사용이 분명한 사람이 by 나 from 이라는 단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의 표현이 분명한 것은 사용자로서 언어를 연습하였기 때문이지, 과학자로서 언어를 연구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학교교육이 의식적 지식에만 몰두하는 한, 실제적인 효과가 전혀 없게 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물론 여기서 내가 언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주변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 수준에서 알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예컨대, 식당에 들어가서 테이블을 찾아 앉고는 무엇을 먹을지를 결정할 때,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식당을 알아보는 것인지, 누가 웨이트리스인지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이 무엇이고 테이블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를 말할 수가 없다. 테이블에 다가가서 스스로 앉을 수 있도록 신체를 움직일 수는 있지만, 누군가가 어떻게 걷거나 앉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게 된다. 주문한 음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합리적 설명을 내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저 햄버거나 하나 먹고 싶을 때라면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기술한 모든 것들은 비의식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생각할 때 그 지식을 사용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거나 집이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최소한도 이러한 결정은 의식적 사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결정에서도 무의식의 영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Tversky & Kahneman, 1981; Langer, 1990; 그리고 Freud, 1904도 참조).

잠을 자고 싶은 데도 사람들을 깨어있게 만드는 내달리는 마음도 비의식적 지식에 근거하여 작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때로는 그 생각을 자각하기도 하지만, 그 생각이 근거하는 지식은 자각하지 못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대인관이나 사건들의 기억과 같이 이러한 생각에 사용되는 비의식적 지식은 문장을 읽거나 어떻게 앉는 것인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비의식적 지식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신체를 앉아있는 자세로 바꾸려면 그 신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방식에 대해 알고 있는 무의식적 지식을 사용하여)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들도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지식인가?

사람들이 다루고 있는 지식의 유형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서 자동차 운전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동물들은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다. 운전을 가르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교통사고를 일으키지 않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고는 자동차를 망가뜨리며, 망가짐은 그 자동차를 귀중하게 여길 때만 나쁜 일이 된다.) 누구에겐가 운전을 가르칠 때, 사람들은 마음 속에 명시적으로 표상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말로 외현화 시키려고 애쓰게 된다. 브레이크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 회전한 후에 바퀴의 방향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방법 그리고 정지신호에서 정지하는 정확한 방법은 조금 더 앞으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세화하려고 애쓴다. 나는 전문적인 운전선생들이 이 모든 것들을 운전 교습생들에게 정확하게 말해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확신한다. 내가 시카고 거리에서 아들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애쓸 때 복잡한 도시의 거리에서 정지신호를 통과하는 방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회상할 수 있다. 나중에 아들이 차에 없을 때,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관찰하고는 아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도록 그 내용을 기억해야만 하였다. 내가 정지신호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을 때 아들은 상당히 귀찮아하였다. 그러나 만일 아들이 정지신호에서 한 번만 정지한 후에 출발할 것을 고집한다면, 접촉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운전하는 것을 의식하는가? 의식의 표준적인 정의에 따르면, 나는 의식한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지는 못한다. 나는 비의식적 지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으로 운전해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동료가 물을 때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나의 주장은 의식으로 통용되는 것이 -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며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말할 수  있는 것 - 실제로는 인간 사고에서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인간의 사고과정은 비의식적인 것이다. 비의식적 사고과정은 통제할 수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전혀 자각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사고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이러한 비의식적 사고과정이 언급하고 있는 것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흥미진진하고 중요한 지식은 의식적 자기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지식으로 통용되는 것은 의식적 지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의식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 어떤 감을 가지고 있다. 글을 읽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학교에 간다. 이 모든 경험은 합리적이고 명시적인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학습하는 것보다 행위를 통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학습한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Dewey, 1916).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서 학습할 때 지식을 획득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꿈을 꿀 때도 학습을 한다.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꿈이기는 하지만), 그 경험 속에서 행하는 "가상적" (virtual) 행위를 통해서 학습하는 것이다. 학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세화 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경험을 통해서 학습하는 것과 동일한 유형의 것들을 학습하는 것이 틀림없다. 비의식적 지식은 비의식적 지식일 뿐이다. 이 지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획득될 수가 있다. 어떻게 꿈을 꾸면서 비의식적 지식이 획득되는 것이지, 그 지식은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다음 장의 주제이다.

또 다른 형태의 무의식은 내가 "내달리는 마음"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달리는 마음은 세 가지 기본 상황에서 일어난다. 첫째, 전혀 졸리지도 않고 내달리고 있는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느낄 때 일어난다. 둘째, 조용하고 혼자 있으면서 시각 및 청각 자극이 박탈되어 있으면서 마음이 스스로 떨어져나가는 것을 발견할 때 일어난다. 셋째,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는데 마음이 방황하고 있을 때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때로는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보고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사라져 버렸기가 십상이다.

전형적으로 사람들은 내달리는 마음을 귀찮아한다. 내달리는 마음의 생각은 부적절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데 마음이 제멋대로 내달릴 때 (전형적으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또는 그 사람이 너무나 오래 말하거나 많이 말함으로써 마음이 내달릴 때, 사람들은 나쁜 짓을 했다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선생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이 내달릴 때 사람들은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백일몽" 을 꾸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쓸모 없는 짓을 하는 것인가? 비의식적 지식의 획득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면, 학생이 교실에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학습하는 것보다 백일몽을 꾸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학습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그럴 듯해 보인다.

내달리는 마음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생각나기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내달리는 마음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뛰어 넘어가는 데는 아무런 순서도 없어 보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사례기반 추론에서 작동하는 과정과 아주 동일한 과정이 작동한다. 마음이 한 사례를 찾기 위해서는 표지를 구성해서 그 표지를 가지고 있는 사례들을 탐색하여야 한다. 이 과정이 의식적 마음에서는 "생각나기" 로 구현된다. 또한 이 과정은 대화에서도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되말할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제 3 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상대방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을 생각나게 만들 수가 있다.

마음이 내달릴 때도 동일한 생각나기 과정이 관여한다. (실제로는 비의식의 흐름 stream of nonconsciousness 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이라고 불러왔다.) 마음이 내달릴 때, 그 과정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외부상황이나 상대방의 진술이 마음으로 하여금 대응되는 사례들을 찾도록 만들 때 작동하는 과정과 동일한 것이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들을 생각나게 해준다. 이러한 생각나기는 표지의 구성과 생성에 근거하는 일련의 질서정연한 규칙에 따라서 일어난다. 모든 경우에 생각나기 과정은 비의식적이다. 생각나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례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사례들을 특징짓고 인출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비의식적 지식이 추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지식일 가능성이 있다. 나중에 이 문제를 보다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흔히 "배짱추리" (gut reasoning) 라고 불리는 현상도 비의식적 사고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배짱추리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의사결정의 유형을 말한다. 사람들은 행위를 하고 난 후에 그 행위를 설명해 보라고 요구받으면, 왜 그렇게 결정한 것인지를 말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설명은 실제로 진행된 의사결정과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십상이다.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은 사랑, 기아, 또는 분노와 같은 아주 기본적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정서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정서에 대한 결정이 실제로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이유, 매력을 느끼는 사람 앞에서 바보처럼 행동하는 이유, 무엇인가가 분노하게 만들었을 때 분을 참지 못하는 이유, 아니면 정서상황에서 과잉반응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결정이 실제로는 전혀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인 방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내가 배짱추리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이 내달리는 것에 비해서 보다 의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사람들은 정서라는 차원에서 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한 일들을 의식적으로 반추할 수 있는 능력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 순간에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상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 예컨대 세상을 바라다보는 방법을 바꾸어보려고 시도한다. 불행하게도 세계관에 근거하는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음식을 먹는 방식이나 데이트할 때 행동하는 방법 등은 MOP 를 구성하는 장면 속에 들어 있는 스크립틀릿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성인의 마음 속에 특정한 형태로 자리 잡은 것들이다. 의식적으로 행동을 변경시켜보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Gallwey 가 말하는 테니스 선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좌절되기가 십상이다. 음식 접시를 깨끗하고 비우려고 하는 자기 자신에게 "적게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원하는 효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비의식적 변화는 MOP 속에 들어있는 기대가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실패함으로써 형성되는 습관화를 통해 서서히 장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결정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비의식적 지식은 그 지식이 생성한 기대가 반복적으로 실패함으로써 더 이상 정확한 지식이 되지 못할 때 변화하게 된다.

비의식적 지식의 유형들간의 한 가지 가능한 차이는 그 지식이 사용자에게 투명한 정도에서 나타난다. 비의식적 지식을 사용할 때,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 지식이 무엇인지를 의식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 그런데 배짱추리에서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긴장했다는 표시를 나타내면서도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선택을 하면서도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위험을 회피하거나 흥미거리를 추구하면서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라거나 아니면 왜 자신들이 그러한 행동패턴에 빠져들어 간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 하지만, 내놓은 이유는 마음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기 십상이다. 여기서 동원된 지식이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비의식적 지식은 사람들이 주변적으로만 자각하는 의사결정에서 결정적이다. 차를 운전하면서 방어적 행위 (예컨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정상 차선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하는 것) 를 취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무의식적 의사결정 장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장치를 따를 뿐이며, 나중에 가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를 의식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그 상황에 있었으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을 보았는지를 (여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기술하고 있는 것인지, 의식적 의사결정을 되뇌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도 그렇게 한다. 즉, 동물들도 명시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하도록 결정한다. 그러한 행동은 생존에 극히 기본적이며, 의식적 사고를 동원하여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달리기, 먹기, 또는 공을 던지고 받기와 같은 많은 신체적 행위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지도 모르는 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하였던 행위들을 항상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자기 행위의 관찰자이며, 모든 목격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매우 중요한 비의식적 과정 중의 하나가 기본 이해과정이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사람들은 의식이라는 착각으로 고통받기 십상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듣는 것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다. 이해능력이 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그렇다면 듣고 있는 개별 문장들을 이해할 때 사람들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에 대해서 질문 받을 때 명사와 동사에 관한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능력, 즉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는 능력이 사용자에게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과정인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비의식적 과정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사람들은 응답할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반응의 배후를 이루는 아이디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었는가?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찾아내는 것인가? 무엇을 찾을 것인지를 어떻게 아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오직 인지과학자들만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고 희망하는 물음들이다. 보통사람들은 힘 안들이고 이러한 일들을 해내며 어떻게 해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이해하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의식적이지 않다.

수행과제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 의식적 지시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학습하는 과제와 의식적 지시 없이 학습하는 과제. 두 유형은 모두 불투명하고 비의식적 과정인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의식적 지시에 따라 학습한 과제는 사람들이 그 과제를 수행할 때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잘못 믿게 만드는 혼란을 일으킨다. 후자의 범주에는 걷기, 먹기, 관찰하기, 돌아다니기 등 유아기에 학습하였거나 생득적으로 그렇게 하는 과정들이 포함된다. 전자의 범주에는 색소폰 연주하기, 야구공 치기, 노래부르기, 수영하기 등 명시적 훈련을 받았던 것들이 포함된다. 훈련을 받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훈련에는 어떤 권위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수행하는 방법을 의식하고 있다고 잘못 믿게 만드는 혼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머리 속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선생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선생도 자신이 하였던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해도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정지신호를 가르칠 때의 나처럼, 선생들도 자신이 하는 것을 들여다본 다음에 적법한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을 명세화 할 필요가 있다. 지도를 받는 학생은 선생의 조언에 따라 계속해서 시도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과제 수행이 전혀 의식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과제를 수행해 보는 것이다. 학생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학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형의 행동은 의식을 반영하면서도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비의식적 행동의 가장 매혹적인 형태의 하나가 작문과정이다. 사람들은 말하고 글을 쓰며, 말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로 인해서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많다. 글을 쓸 때는 도중에 잠시 멈추고 무엇을 썼는지를 보기 위해서 이미 쓴 내용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말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무엇을 말할지를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으며, 어떻게 사용할 올바른 단어들을 찾아 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 (또는 쓰는 것) 을 들을 (읽을 ) 수 있을 만큼 뜸을 들임으로써 말하거나 쓰는 내용을 편집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 과정이 의식적인 것이라면,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실제로는 단어가 생성되기전까지는 그 과정이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이 편집을 하는 시간이다. 즉, 내버려두면 비의식적 과정이 될 과정에 의식이 개입되는 시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작문은 의식적이다. 예컨대,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썼던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의식적이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대부분이 의식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적절한 사용 (문법의 사용, 단어의 선택 등을 포함한) 은 확실히 비의식적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보았다. 그런데도 대부분 글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표현하는 아이디어가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표현된 것이라고 믿도록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쓰는 사람들이 "작가의 걸림돌" (writer's block) 을 경험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글쓰는 사람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적절한 무드, 적절한 마음의 틀걸이, 적절한 상황에 놓여 있을 필요가 있다. 즉, 일련의 관련된 생각나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출발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글쓰기가 의식적 과정이라면 어째서 그래야 하겠는가? 사람들은 항상 마음먹은 대로 의식적 과정을 조정할 수 있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비의식적 과정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아이디어들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디어 생성과정이 비의식적인 것이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때도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요구가 있을 때 그 아이디어를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사람들이 "독창적 아이디어" 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전문적으로 도와 주는 회사들이 있다. 아이디어 생성과정에는 자극이 필요한데, 이 회사들은 어떤 자극이 필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글쓰기 과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그것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그것이 또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만든다. 글쓰기는 나로 하여금 아이디어를 갖도록 도와준다. 어떤 아이디어를 갖지 않고서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갖기가 어렵다. 이 말이 순환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렇다. 비의식적 과정은 순환적이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는 그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되는 것은 편집하기 과정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편집하기 과정이야말로 의식의 요체가 된다. 말하기 전에 말할 것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아니면 글을 쓴 후에 (물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기 전에) 쓴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의식적 편집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하기 과정은 의식의 핵심이다. 이 과정은 글쓰기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도 일어나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가능성 있는 잠재적 행동의 자기 수정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백방으로 궁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적인 것이 어떤 진화적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 의식은 비의식적 사고의 노예가 되지 않는 능력일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개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아이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는 자신의 잠재적 행동을 스스로 편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서술하는 의식의 정의에 따른다면 개는 의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행동을 나타내기 전에 그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궁리해 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정수 (精髓)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의 연장선상에서 침팬지와 고릴라의 의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가 행위에 대해서 곰곰이 궁리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Cheney & Seyfarth, 1990). 아무튼 그 동물들이 그렇게 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의식에서의 핵심 물음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한 것이 어떤 면에서든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변경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궁리하기 시간" 또는  반추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즉, 충동과 행위 사이에 휴지기를 삽입하여 그 시간을 자기 편집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점에서 Gallwey 가 말한 것과 차이가 있다. Gallwey 에 따르면, 의식적 지식은 테니스를 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은 신체를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가 없다. Gallwey 는 자신의 신체에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문제는 마음과 물리적 신체가 이러한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다. 신체적 행동을 수정할 수 없으면서 마음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단지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신체적 행동을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을 쉽게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고와 행위 사이에서 자기 편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고가 요구하는 행위를 안 할 수는 있다. 행동에서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사고 - 행위 연계를 변화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행위를 통하여 학습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과 같은) 의식적 문제 해결도 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의 기본 유형이다. 사람들은 추리규칙을 알고 있으며, 전제를 제시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컴퓨터가 이미 할 수 있는 추리유형이 바로 그것이라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그러한 추리를 모사하는 프로그램은 자연스러운 인간 사고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관심거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 서왔다. 사람들에게도 기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추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랑, 열정, 또는 인생관 등에 대해서 추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가르치려는 시도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다).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으며, 생각하는 방법이나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지능의 특성들이며, AI 연구자들은 이 특성들을 기계에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기계와 사람에게 규칙을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의식적 행동이다. 그러나 기계나 사람에게 쉽게 가르칠 수 없는 비의식적 추리가 지능적 행동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왜 생각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서 즐거운 한 시절을 보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혼동이 많은 상담과 치료의 근거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행위를 한다.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의식에 대한 Freud 의 생각은 의식이 무의식에서부터 보내져와서 전의식 (preconsciousness) 에 의해 편집된 내용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자라는 것이다. 전의식이 내용을 편집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의식되지 않도록 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의식과 무의식의 역할에 대한 Freud 의 생각이 신경증적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사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 그리고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합리적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느낌은 바로 Freud 때문이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상호 모순되는 신념들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으며, 말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저렇게 할 수가 있다. 치료자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행한 결정을 하도록 만든 무의식적 기제가 의식에 떠오르도록 도와 주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무의식적 의사결정 그리고 의식에 의한 합리화의 흐름이 오직 비정상적이거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고에만 적용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일상의 정상적인 의사결정도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 선생은 학생들의 순진하고 직관적인 개념화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냄으로써 학생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의 기대가 실패하도록 만들고는 학생들 스스로 보다 적절한 개념화를 만들도록 도와 줄 수가 있다 (Minstrell, 1992; Smith, diSessa & Roschelle, 1993).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생각하는 것에 대한 명시적 지식이 있다. 일반적으로 의식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현재 교육시스템 그리고 학습에 대한 개념화의 근거이다. 사람들이 지극히 의식적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비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훨씬 더 광범위하며 중요하다. 그렇지만 "알기" 라는 생각이 의식이라는 개념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비의식적 사고와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없기가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