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과 불완정성 원리 

기초과학계/ 고은경

 1.괴델의 삶

  쿠르트 프리드리히 괴델은 1906년 4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지방의 브륜에서 태어났다. 괴델은 어린 시절에 과학과 수학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얼마나 호기심이 많았는지 가족들은 그를' der herr warum(왜요 도령!)'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부친은 빈 출신, 모친은 라인 지방 출신의 독일어계 주민이었던 괴델가는 브륜에서 소수파에 속해있었다. 가족은 양친과 형제 두 사람, 형 루돌프는 네살 위였다.

 1911년 5세 때에는 가벼운 불안 신경증이 나타난다. 또한 1914년 8세 때에는 류머티즘을 앓아 심한 통증을 경험한다. 그때 백과사전에서 '류머티즘에 걸리면 심장병의 후유증의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 심장에는 결함이 있다고 굳게 믿게 된다. 훗날 괴델을 괴롭히는 신경증이나 건강 노이로제는 근원을 캐면 이 유년기의 체험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형 루돌프의 견해)

괴델이 수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4세때로서 해석학의 입문서에 자극을 받아서였다라고 훗날 본인이 말하고 있다. 16세부터 칸트를 읽기 시작한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일생 계속되고 193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쳐서는 라이프니츠를 상당히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고 1959년 이후는 후설의 현상학에도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1924년 18세의 괴델은 빈 대학에 입학하였다. 입학시에는 물리학 전공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수론을 강의하던 프르트벵글러 교수(힐베르트의 제자)의 권유에 따라 1926년 수학과로 옮긴다.  푸르트벵글러 교수의 강의는 매우 열성적이기도 했지만 그 방식도 아주 특이했다. 그는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었기 때문에 훨체어에 앉은 채 강의 노트도 없이 설명을 해나갔으며 조교 한명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강의 내용을 칠판에 적어주었던 것이다.  젊은 괴델의 눈에 그는 스티븐 호킹적인 영웅으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괴델은 20대 초반부터 수학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빠져 나와 학교건물 지하로 사라지곤 했다. 그곳에는 ' 빈 동아리'의 집회실이 있었는데 논리학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이 모임에 괴델은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가 수학의 기초를 송두리째 흔들 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였다. 그러나 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인연을 끊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29년 가을에 '완전성 정리'의 학위 논문을 제출하였다. 다음해 2월 6일 괴델은 이것으로 빈대학에서 수학의 PhD를 받았다.

 1930년 9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과학자 물리학자 협회의 회의가 개최되고 괴델도 출석하고 있다. 이 회의의 개회식에서 쾨니히스베르 시는 같은 시 출신의 힐베르트에게 명예시민의 칭호를 수여하고 이 수여식 후 힐베르트에 의한 역사적인 강연 '자연 인식과 논리학'이 행해지고 있다. 이 강연의 마지막에 70세가 되려 하는 힐베르트가 유명한 말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강한 어조로 이야기 한 뒤 힐베르트는 소리내어 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24세의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이미 이 회의의 직전에 얻고 있었다. 8월 26일에는 그 건에 대해서 논리학자인 카르납과 논하고 있다. 더욱이 회의중 한창 토론하는 도중에 이 아이디어를 구두로 발표하였다.

 힐베르트가 이 발언을 듣고 있었는지, 또 듣고 있었다해도 즉각 사안의 중대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힐베르트 학파의 준재 폰 노이만은 즉석에서 괴델의 발언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였다. 그리고 첫대면이면서도 회의 후에 괴델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때에는 괴델 자신조차 아직 애매하게밖에는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 '제2불완전성 정리'의 발견을 예견하였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리하여 괴델이 불완전성정리의 논문을 완성하여 '알수 없는 것'의 존재를 명시하는 것은 그로부터 불과 2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 회의에서의 폰 노이만과의 만남도 괴델에 있어서는 일생을 좌우할만큼의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학문적인 교류도 그럴 만하지만 3년 뒤에 폰 노이만이 프리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취임해서부터는 번번한 연구소 방문과 머지않아 동연구소에 정착하게 된것이 다름아닌 이 교우관계 바로 그것이었다.

 1933년 3월 괴델은 빈대학의 개인강사로 되지만 여름학기에 [산술의 기초]를 강의하고는 가을에는 폰 노이만의 초청에 따라 개설한지 얼마 안되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를 방문하여 연구와 강의를 위해 8개월 가까이 체재하고 있다. 훗날 깊은 교분을 맺게 되는 아인슈타인과 처음 만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 최초의 체재시에는 동연구소에는 아직 정식건물조차 없고 괴델처럼 임시로 방문하고 있는 연구자를 부르는 명칭도 결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해의 연구소원 리스트에는 괴델은 'worker'의 신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4년 5월 유럽으로 되돌아온 괴델은 완전히 신경쇠약으로 빠져들어 최초의 요양소 출입을 하였다. 다음해 35년도 역시 여름에 빈대학에서 강의를 한 뒤 가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가기는 했으나 1개월 뒤에 우울증과 과로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진다. 급거 귀국해서 요양소에서 요양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선택 공리의 무모순성의 증명'과 같은 획기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정신적 이상상태 후에 머리가 잘 돌아가고 수학상의 업적을 올렸다'고 일컬어지는 칸토어와 비견된다.

 시대는 차츰 전쟁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태인이었던 빈학단의 슈릭이 강의 중에 ( 대학의 계단에서라는 설도 있다) 나치스에 (제자라는 설도 있다) 사살된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1936년 6월 22일의 일이다. 그러나 이 해에 괴델은 정신면에서의 건강상태가 아주 나빠서 1년의 태반을 요양소에서 보냈다.

 1938년 3월 나치스 독일이 드디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다. 나치스의 '신질서'에 따라서 개인강사의 직종이 폐지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동적으로 새로운 제도의 강사로 등록되었다. 이는 분명히 유태인 대책이다. 그리고 괴델은 공교롭게도 이 제도 변경 때에 유태인으로 오인되어 채용이 안 되어 버린다.

이러한 말썽이 있었으나 봄부터 여름에 걸친 정력적인 연구의 결과 괴델은 1938년 그의 3대 업적의 마지막 하나 인 '일반 연속체 가설의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을 얻고 있었다.

 이 해에 괴델이 부인과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폭한이 괴델을 유태인으로 착각하여 폭한이 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부인이 핸드백을 휘둘러서 폭한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실제 괴델은 '일본인과 비교해도 몸집이 작고 채식주의자(다케우치 가이시 교수)'였다고 한다.

 

 괴델이 유태인이라고 하는 오해는 그 뒤에도 꼬리를 끌어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호 러셀조차 [자서전]에서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다. 이것을 알게 된 괴델의 반론도 기록에 남아 있다. 괴델의 반론만을 인용한다. (괴델,불완정성 정리-"이성의 한계" 발견, 요시나가 요시마사 지음, 임승원 역, 전파과학사 에서 재인용)

    러셀의 자서전의 문장 중에서 나에 관한 한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유태인은 아니다. (이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두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은 내가 러셀과 여러모로 토론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나는 단 한번만 토론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세번째로 나의 "순수"한 플라톤주의에 대해서 말하면 1921년에 러셀은 [수리철학 입문]에서 "논리학은 동물학과 전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셰게를 취급하고 있다. 다만 보다 일반적 추상적인 성질에 대한 것인기는 하다"라고 말했으나 나의 플라톤주의는 그렇게 말했을 때의 러셀의 플라톤주의보다도 "순수"하지는 않다. 그때 분명히 러셀은 이미 현세에서 "부정"과 만나고 있었으나 뒤에가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간과하기로 한 것이다.

 

 1939년경의 나치스 독일의 점령지역에서 유태인으로 오인받는 다는 것은 불리하기도 하고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1940년 1월 18일 괴델 부처는 빈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향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3월 4일, 미국에서의 정착지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였다. 여기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괴델보다도 27세 연상이었으나 두사람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두사람은 집도 가깝고 가족 전체의 교제로 두 사람이 동행해서 산보하고 있는 모습은 사진에서도 낯익다. 훗날 괴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여 오늘날 '괴델의 우주'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우주론까지 구축하고 있다. (1949년) 이 우주에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도 가능하여 이것에는 아인슈타인도 납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괴델의 어머니 마리 안네는 아들이 아인슈타인과 교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 엉겁결에 감동한 나머지' 즉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공부하려고 생각한다'라고 편지를 쓴다.

 그에 대한 괴델의 답장. "추상적인 개념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모두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읽어나가기 바랍니다. "

1940년에 도미한  괴델이 미합중국의 시민권을 취득한 것은  8년뒤엔 1948년이 되서의 일인데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남아있다. 시민권을 취즉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구두시험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괴델은 합중국의 헌법 공부부터 시작하였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은 모순투성이의 조문이고 헌법에 충실한한 논리적으로는 합중국이 언제라도 합법적으로 독재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괴델은 이내 이 발견을 친한 벗인 오스카 모르겐슈타인에게 이야기한다.

 모르겐슈타인이 놀란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이 "발견"에 놀란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는 구두시험도 위태롭다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1948년 4월 2일 괴델은 증인인 아인슈타인과 모르겐슈타인을 따라 구두시험장으로 향하였다. 괴델이 무사히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증인들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괴델이 고등연구소에서 종신연구원으로 된 것은 1947년이다. 41세 때였다.

 생의 최후에서 유아기부터의 불안신경증이 건강상태에 대한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가장 만년의 2년간은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계속 고생하고, 자기가 독살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제대로 식사도 못하였다고 한다. 1977년 12월 29일 마지막까지 거부해오던 입원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그러나 입원은 겨울날 괴델이 병실의 의자에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면서 단기간으로 끝났다. 사인은 '인격 장해에 의한 쇠약' '영양 실조및 기아위축' 이었다. 1978년 1월 14일의 일이다.

2.괴델의 철학

괴델의 철학에 대해서는 '플라톤 주의'라든가 '실재론'이라고 하는 평가가 흔히 이야기된다. 즉 괴델은 수학적 대상처럼 추상적인 개념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예컨데 집합론과 연속체 가설에 대해서도 집합의 개념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면 연속에 가설 문제에 참된 해결을 가져오는 새로운 집합론의 공리를 당연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그 공리 자체는 인간이 현재 파악하고 있든지 아니든지에 관계 없이 개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이 '괴델의 꿈'이라든가 '괴델의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사상인데 이러한 '실재론'의 철학은 괴델의 세계관이나 종교관에도 바닥까지 통하고 있었다. 1961년 10월 6일자의 어머니 마리안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괴델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신학적 세계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의미와 이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의미를 갖고 있다, 라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 사고는 곧바로 다음의 결론으로 유도한다.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의 존재는 그것 자신 매우 의문이 있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내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 사상은 모든 것이 그 원인을 갖고 있다는 원리와 정확히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원리는 모든 과학의 기초로 되어있는 것이다.                                       

 

3. 불완정성 원리의 시대적 배경

 현대수학이란 칸토르(Cantor)가 집합론을 완성, 발표한 해인 1895년 이후의 수학을 말한다. 집합론의 출현은 수학에 있어서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고 그 이후 모든 분야의 수학을 집합으로 통합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집합 그 자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것을 집합론, 집합과 집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해석학, 집합의 원소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을 대수학이라 하였고, 집합의 원소 사이에 거리 개념을 도입한 것을 기하학이라 하여 수학 전반에 관한 집합론적 안목으로써의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집합개념 출현에 곧 이어 집합의 정의 자체에 관한 결함이 발견되어 수학은 일대 위기를 맞게된다. 1897년 부랠리와 포르티(Burali-Forti)가 발표한 역설(paradox)의 출현에 기인하며 약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만족할 만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파라독스는 칸토르의 일반 집합론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수학의 많은 부분이 집합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이 파라독스는 총체적 수학구조의 진실성에 회의를 던져준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부랠리-포르티의 파라독스는 아주 기술적인 용어로 설명되어 있어서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마땅치 않으나 2년 후 칸토르에 의하여 발견된 파라독스와 근본적인 골자는 같다. 칸토르는 그의 집합론에서 임의의 자연수보다 더 큰 자연수가 있듯이 임의의 초한수(transfinite number)보다 더 큰 초한수가 있고 따라서 최대 초한수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이제 모든 집합의 집합을 U라 하면 U보다 더 많은 원소를 갖는 집합은 없다. 그렇다면 집합 U의 농도보다 더 큰 초한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수학의 바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제기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보는 관점에 따라 크게 세 가지의 수학철학의 사조가 발생한다. 럿셀(Russel)과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제창한 논리주의(Logicism), 브라우어(Brouwer)를 중심으로하는 직관주의(intuitionism), 힐버트(Hilbert)가 이끄는 형식주의(formalism)가 그것이다. 현재에는 형식주의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형식주의는 집합론의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또 직관적 비평에 의하여 야기된 고전 수학의 개념 재정립을 위하여 발달하였으며, 그 견해는 수학이란, 수학을 공리에 바탕을 둔 형식적인 연역체계라고 본다. 수학이란 형식적인 기호체계를 논하는 것으로서 추상적인 전개의 모임이다. 수학에서는 용어가 곧 기호이고 명제는 기호를 포함한 공식 내지는 형식이며, 수학의 궁극적 바탕은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논리 이전의 기호와, 기호 사이의 연산의 모임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수학이란 구체적인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상적인 형식 요소만 문제 삼으므로 수학의 각 분야에서 무모순성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 되었다. 무모순성의 증명 없이는 이같은 사상은 전혀 무의미하다. 

 형식주의 학파는 힐버트가 기하학의 공리적 연구를 끝낸 직후 형성되었는데, 이 연구에서 힐버트는 유클리드의 내용적 공리를 현재의 형식적 공리로 바꾸었다. 이 주의의 성패는 무모순성의 증명에 달려있다. 말하자면 인정된 수학시스템 속의 한 형식 F에 대하여 “F 그리고 not F”꼴의 형식이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이론을 증명이론(proof theory)이라 한다. 힐버트와 베르나이스(Bernays)는 그들의 “수학기초론”이란 책에서 증명이론을 완성하려 하였다. 이 책은 두권이 나왔지만(제1권 1934년, 제2권 1939년) 예기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혀 그들은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힐버트의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고 만 것이 이 이론은 그 책이 나오기도 전인 1931년 괴델(G del)에 의하여 부서지고 말았다. 괴델은 어떤 충분히 큰 형식적인 연역체계(이를테면 힐버트의 시스템)가 그 체계 안에 있는 방법으로 그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 기막힌 사실은 실제로 더욱 근본적인 결론의 결과이다.

괴델은 힐버트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증명해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 불능문제의 존재성을 증명했고 힐버트시스템의 무모순성이 그런 문제 중 하나임을 보였다. 여기에 형식주의의 한계가 있다.

 

 4.증명의 아이디어 

 형식적 체계의 논리식은 외부에서 보면 원시기호 [변수, 논리기호, 그리고 괄호나 구독점]의 유한열이고 원시기호의 열이 의미 있는 논리식인지 아닌지를 완전히 엄밀하게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마찬가지로 증명도 형식적인 견해로 보면 (어떤 특별한 성질을 가진) 논리식의 유한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초수학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상이 원시기호로서 선정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원시기호에 대해서 자연수를 사용한다. [즉 원시기호와 자연수를 1대 1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논리식은 자연수의 유한열로 되고 [즉 최초에 대응시킨 자연수로부터 결정되는 산술적 함수이다], 증명도는 자연수의 유한열의 유한열로 된다. 이렇게 해서 초수학적인 개념(명제)은 자연수 또는 그 열에 대한 개념(명제)으로 된다. 

[바꿔말하면 위의 절차는 산술 속에 형식적 체계 PM의 동형상(同形像)을 만드는 것으로서 모든 초수학적 논의는 이 동형상 속에서 잘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증명을 개설할 때에 사용하는 "논리식", "명제","변수"등의 말에 의해서 동형상이 대응하는 대상을 항상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

 따라서 그것들은 체계 자체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기호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다. 특히 '논리식' '증명도', 그리고 '증명가능한 논리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체계 속에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즉, 복잡한 논리상의 관계를 직접 분석하기 보다 이를 괴 델수에 의해 산술에 관한 문제로 바꾸게 되면 그것의 분석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괴델의 증명은 크게 다음의 다섯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논리식 G는 증명 불가능하다"는 메타 수학적 명제를 나타내는 논리식 G를 형식체계에서 구성한다. 그러면 G는 자기 자신에 관한 명제이므로, 그 내용은 "자기 자신은 증명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논리식 G의 괴델수를 n이라 하면, 이 n 이 "괴델수 n에 대응되는 논리식은 증명 불가능하다"라는 명제에 대응하도록 구성 한다. 


둘째, G는 (형식적으로 G의 부정을 나타내는) ∼G가 증명 가능할 때 그리고 그때에 한해 증명 가능함을 증명한다. 즉, G가 증명 가능한 것과 ∼G가 증명 가능한 것이 논리적으로 동치임을 증명한다. 만일 어떤 논리식과 그것의 부정이 모두 증명 가능하면, 그 체계는 무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산술체계가 무모순하면, G와 ∼G 모두가 증명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G가 증명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참인 논리식임을 제시한다. 


넷째, G가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므로, 산술체계는 불완전하다(제1불완전성정리). 

 넷째 증명의 논의가 수업시간에 배운 것과 비슷하므로 약간 부연한다. 

 다음과 같이 자연수의 집합 K 를 정의한다. 

   n ∈ K                 ⇔       not B[R(n);n]

(여기서 B(x)는 [x는 증명 가능한 논리식이다]를 의미한다. )

 논리식 [S;n]을 PM의 술어의 의미에 따라서 해석하면

 '자연수 n은 K에 속해 있다'는 것과 같은 단항 술어기호 S가 존재한다. S는 단항 술어기호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R(q)와 같은 것으로 된다. 즉 자연수 q에 대해서 

  S = R(q)

로 할 수 있다. 

 먼저 명제 [R(q);q]가 증명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이 명제는 참일 것이다. 그러나 정의에 따르면 그 경우에는 q는 K 에 속해 있고 정의로부터 not B[R(q);q]가 성립하게 되나 이것은 가정에 모순이다. 

 또 한면 [R(q);q]의 부정이 증명 가능이었다고 하면 not (q∈ K), 즉 B[R(q);q]가 성립한다. 그러나 [R(q);q}가 증명하다는 것은 가정에 의해서 그 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한 불가능하다. 

 괴델은 이 증명과 패러독스와의 관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논의는 리샤르의 패러독스로부터 유추하면 알기 쉽다고 생각한다. 또한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중략)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증명 가능하지 않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원주: 겉보기와는 달리 이 명제는 악순환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 명제는 우선은 어김없이 정의된 논리식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말하자면 우연히) 이 논리식은 바로 그 명제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뿐이다. ]

다섯째, 먼저 "산술체계가 무모순하다"는 메타수학적 명제를 나타내는 논리식 J 를 구성한다. 그리고 논리식 "J이면 G이다"가 증명 가능함을 보인다. 끝으로, 논리식 J가 증명 가능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로부터 괴델의 제2불완전성정리인 "산술 체계의 무모순성은 형식체계 내에서 증명할 수 없다"를 얻는다.

 

 Reference

괴델의 삶

1.요시나가 요시마사,임승원 역, 괴델, 불완정성 정리 p.188-207, 전파과학사,1993

(이하에서 [괴델,불완전성 정리]로 표기)

2.http://www.yonbuk.ms.kr/교내홈페이지/김태준/a4.htm

3.http://youngsaing.or.kr/dkhome/math/talk17.html

 

괴델의 철학

1. [괴델, 불완정성 정리], p.205-207

 

불완정성 원리의 시대적 배경

1.http://math2.yonsei.ac.kr/math/story-12.html

 

증명의 아이디어

1.[괴델,불완정성 정리],p.178-181

2.http://www.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koreabank&mode=read&num=58&page=1&ftype=6&fval=&backdepth=1

 

직접 이용되지 않은 자료들..

1.D. R. Hofstadter, Goedel, Escher, Bach: An Eternal Golden Braid, Basic Books Inc., 1979 [번역:괴델, 에셔, 바흐, 박영성 역, 까치, 1999]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정회성 역:골든바흐의 추측,생각의 나무] 에도 만년 괴델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다. )

2.인공지능과 컴퓨터의 한계

3.http://pnarae.com/phil/category/sci/p26-1.htm

4.논쟁으로 본 현대철학(괴델과 비트겐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