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어떻게 학문이고 체육이냐고?  

2002-10-08 동아일보  서정보 동아일보 바둑담당 기자

올해 초 바둑계에서 바둑을 스포츠로 전환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발제하자 바둑 8급인 데스크가 당장 면박을 줬다. "바둑이 무슨 체육이냐.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바둑이 체육이라는 걸 누가 납득하겠느냐. 그럼 고스톱도 체육이게."

육체적 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체육, 스포츠의 범주에 하루종일 앉아서 하는 바둑 이 절대 들어갈 리가 없다는 것이고 그런 식이라면 바둑보다 역동적인(?) 고스톱도 운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당장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바둑의 스포츠 전환은 바둑과 같은 정신적 활동을 마인드 스포츠를 인정해주는 최근의 경향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일종의 편의적 발상도 함께 포함돼 있다. 즉 바둑이 스포츠로 갈 때 병역 문제부터 정부의 지 원금까지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둑계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지만 '바둑= 체육'이라는 근본적 질문에는 엄밀하게 답하기가 쉽지 않다.

'바둑이 체육'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바둑도 학문 연구의 대 상'이라고 한다면 아마 똑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바둑은 오락이나 취미'라는 것이 보통의 인식이고 바둑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정 도 돼야 '예도(藝道)'로 인정해주는 사회 분위기에서 '바둑이 학문'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일 없는 사람이거나 이단아 취급을 받을 가능성 이 높다.

바둑학의 무한한 가능성

기자도 바둑의 학문적 가능성에 대해선 '학자들의 외도(外道)' 정도가 아닐까하고 생각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박우석 철학담당 교수가 쓴 '바둑철 학'은 기자의 상식(?)을 철저히 뒤집었다.
바둑의 학문적 가능성에 대해 기존의 연구를 총망라하고 '통합 인지과학의 철학', 즉 요즘 철학계에서 유행하는 과학철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려는 박교수의 시도는 참신함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여는 듯하다.

바둑의 학문적 가능성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분야는 인지과학 과 인공지능 연구. 인지과학에서 있어 바둑은 과연 사람이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인지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실험도구이자 연구대상이다. 이미 서구에선 체스를 가지고 이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체이스와 사이먼이 1973년 발표한 소위 '청크'이론은 인지과학 분야에서 획기적 성과에 속한다. 이들의 이론을 쉽게 풀자면 전문가들이 왜 복기를 잘할까. 소위 손으로도 복기할 수 있을 정도로 체스 전문가들이 갖는 탁월한 기억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에 대한 해답이다.

그것은 수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수와 수의 연관성을 함께 기억하기 때 문이라는 것. 기억 범위가 한수가 아니라 '청크'라는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복잡한 수순도 쉽게 기억한다. 이것은 훈련과 반복을 통해 한 번에 연관되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청크도 늘어나 게 된다.

체스보다 훨씬 복잡한 바둑은 이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바둑학의 가능성이 심리학과 인지과학 분야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연계한 것이 컴퓨터 바둑의 인공지능 분야. 컴퓨터 바둑은 세계대회가 열릴 정도 로 보편화돼 있고 특히 외국의 컴퓨터 공학계에서는 이미 매년 박사논문이 2, 3편씩 나올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분야라고 한다.

바둑은 여러 학문의 좋은 연구대상

문제는 컴퓨터 바둑의 실력을 인공지능을 통해 어떻게 늘릴 것인가. 이미 체스는 컴 퓨터(IBM이 만든 딥블루)가 인간 챔피언을 누를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바둑의 경우는 다르다. 바둑 프로그램의 실력은 사실 하수 중 하수에 속한다. 물론 10급 정도의 기력을 가진 사람에겐 충분한 상대가 되겠지만 그 이상의 기력에게는 인간 10급보다 못하다. 그만큼 응용력 과 상황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 바둑 수를 무작위로 검색하려면 10의 몇십승은 돼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도저히 한수 한수 검 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통해 스스로 바둑 수를 찾아내고 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컴퓨 터 바둑 연구의 핵심이다.

국내에서도 바둑의 학문적 연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찬찬히' 진행되고 있다. 명지 대 바둑학과가 세워진 것이 그 일단이고 지난해에는 국내에 국내외 학자들을 불러 모아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서울대와 경북대 컴퓨터 공학과에선 앞서 말한 인공지능 문제가 연구되고 있다.

박우석 교수는 "심리학 인지학 컴퓨터공학 수학 철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바둑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고 '바둑학'의 독자적인 성립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바둑학과에 유능한 학생들의 지원이 쇄도하고 바둑학 석박사들이 배출되고 '바 둑이 왜 학문이냐'는 딴지 대신 '바둑학으로 유명해진다'는 생각이 자리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