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철학 : 서론
심리철학 : 김재권 지음, 하종호. 김선희 옮김, 철학과현실사 (579-5908), 1997 (원서 : Philosophy of Mind, Westview Press, 1996), Page 11~50
우리는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에 수많은 사물들과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묶어서 처리하기 쉬운 구조로 배열한다. 예를 들면, 그 사물들을 "바위들", "나무들", "곤충들", "새들", "암소들", "전신주들", "산들" 및 이외에 무수한 종류로 나누어 묶고서, 그것들의 속성과 특징에 따라 "크다" 거나 아니면 "작다" 라고 묘사하든지, 또는 "길다" 거나 "짧다", 또는 "붉다" 거나 "노랗다", 또는 "느리다" 거나 "빠르다" 등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물들에 관해서 거의 본능적으로 그리고 대개는 무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구분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물이 생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다. (우리와 마주친 것이 죽은 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죽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물의 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지 "죽는다" 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바위나 양은 그릇과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는 법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물이 생물인지 아닌지를 모르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또 다른 예로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 때에는 거의 언제나 그가 남자인지, 아니면 여자인지를 알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마음" 이나 "심성 (mentality)" 을 가진 것들과 마음을 가지지 아니한 것들을 구분할 때에도 위에서 말한 바가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분은 세상에 있는 만물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쓰는 가장 기본적인 구분법 중 하나다. 생물의 서열 중에서 아무리 낮은 데에 있는 미물일지라도 그것이 의식을 가지고 있고 고통이나 즐거움과 같은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물건이나 무감각한 초목처럼 그러한 능력을 결여한 사물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대하게 된다. 이 점은 살아 있는 동물에 대해서 가하는 의학 실험과 채식주의에 관한 논쟁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추상적인 사고력이나 자의식, 예술적 감성, 창조력, 복잡한 감정처럼 고도로 발달된 정신력과 기능을 타고난 생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는 비길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동ㆍ식물의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서 감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물체가 마음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거니와 느릅나무와 자작나무의 생활환을 이해하고 아메바의 번식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적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물이 심성을 타고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물들 중에서 심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플라나리아와 각다귀가 진지하게 심리학적으로 탐구될 만한 정신 생활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나 개, 침팬지와 같은 고등 동물의 경우에는 꽤 풍부한 정신 생활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동물들은 고통, 가려움, 즐거움과 같은 감각을 경험하고 우리가 하는 방식과 다소간 유사한 방식으로 주위환경을 지각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 고등동물들은 사물을 기억한다. 즉 주위 환경에 관한 정보를 저장하고 사용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학습하며, 공포와 좌절, 불안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쓰는 표현을 사용해서 고등 동물들의 심리 형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푀브가 우리 안에 갇혀 있어서 갑갑한 느낌이 드는가봐. 그리고 자동차 소리 때문에 그 녀석이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아. 그 가엾은 것이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어."
그러나 과연 동물들이, 심지어 동물들 중에서도 한층 지능이 높다고 하는 말이나 돌고래조차도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은 복잡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동물들이 무엇을 의도하거나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또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을까? 굴이나 게, 지렁이처럼 저급한 단계의 생물의 정신 생활은 애완용 고양이의 정신 생활에 비해서 훨씬 볼품이 없지만 감각 기능은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런 동물들도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지해 내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행동을 적응시키고 변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물들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또 그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심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물음들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것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든지 "심성을 가지고 있다" 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계에 있는 사물들간의 차이에 대해서 성찰하였던 고대인들은 "영혼" 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로 그 차이를 설명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고 이 영혼은 단순하고 신성하며 불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인간의 몸은 복합적이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은 순수하고 육체가 없는 상태로 존재하였으며, 우리가 "학습" 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순수한 영혼의 상태로 존재할 때 이미 알았던 것을 상기해 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주장하였다. 이 지상의 세계는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여행을 하는 과정중에서 잠시 머무르는 정거장이고 우리의 몸은 여기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한 한갓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우리 각자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적이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종족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동일하기 때문에, 즉 우리 각자는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자 그대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영혼은 바로 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갖는다" 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약 2 천년 후에 데카르트는 이와 유사한 생각을 주장하였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확립하였다고 자처한 데카르트는 자기가 확신하는 "이 '나' 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봉착하였다.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는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즉 나는 마음이거나 지성, 또는 이성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음, 또는 영혼은 몸과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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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는 사유하지만 비연장성의 존재인 한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연장성을 가지지만 사유하지 못하는 존재인 한에서 몸에 대한 판명한 관념을 갖는다. 따라서 내가 나의 몸과 실제로 구별되고 몸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
이와 같은 관점을 "실체 이원론" 이라고 부른다. 우리 각자는 적어도 지상에서 존재하는 동안에는 비물질적인 마음과 물질적인 몸이라는 두 개의 구별되는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입장이다.
마음을 특수한 종류의 개체나 대상으로서의 영혼이나 정신으로 보는 이러한 생각은 마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서 발판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심성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에서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의 신체 안에 존재하는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으로서, "단순" 하고, "불가분할적" 이고, "불멸" 한다고 전통적으로 묘사되어 온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분명히 없다. 이러한 영혼 개념대로 하자면 물리적인 것은 영혼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물리적인 것으로서 "단순" 하고 "불가분할적" 인 것을 든다면 전자나 광자와 같은 입자들이 (또는 쿼크만이 유일하게) 해당될 텐데, 이러한 입자들이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심성과 합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빗물질적이고 순전히 정신적인 대상들이 있을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심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라는 두 종류의 실체가 있고 우리는 몸이라는 물질적 실체와 마음이라는 심적 실체로 이루어진 "결합체" 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실체" 란 무엇인가? 실체의 핵심적인 사항은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있고 속성들을 가지며 다른 실체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바위, 탁자, 의자와 같은 일상적인 물체들은 대체로 실체라고 간주되며, 나무나 동물과 같은 생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이 "독립적인 존재성" 을 가질 수 있는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탁자와 나무를 표면이나 그림자, 미소와 같은 것들과 비교해 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즉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이 탁자밖에 없는 "가능 세계" 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두께를 가지지 아니한 이차원적인 면으로서의 표면은 그것을 표면으로 갖는 고형의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표면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 가능 세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공연히 히죽거리며 웃는 것을 두고 체셔 고양이의 웃음 (Cheshire cat's grin)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양이가 떠난 후에도 나무에 미소가 남아 있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만들어진 우스갯소리다. 고양이가 남기고 간 나뭇가지와는 달리 웃음은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질 수 없기에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질적 실체의 본질은 공간적인 연장성을 가진다 - 즉, 공간상으로 일정한 용적을 차지한다 - 는 데에 있는 반면에 정신적 실체의 본질은 사유하는 (또는 의식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가 "사유" 라는 말을 사용해서 의미하는 바는, 좁은 의미에서의 생각뿐만 아니라 감각, 느낌, 지각, 판단, 의심과 같은 모든 심적 상태와 작용을 포함한다. 더욱이 마음은 필연적으로 공간적인 차원을 결여하고 있고 - 어쩌면 마음은 아예 물리적인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 물질은 필연적으로 의식을 결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과 물질이 인과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데카르트는 본다. 지각의 경우에 우리의 감각 표피가 물리적으로 자극됨으로써 우리는 주변의 대상과 사건을 지각하게 되고, 자발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우리의 욕구와 믿음이 팔다리를 적절하게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빗물질적인 심적 실체를 가짐으로써 심성이 있게 된다는 생각은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로, 이 세상에 전적으로 빗물질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는지 확실치 않다. 둘째, 설령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애초에 의도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물질적인 성격을 전혀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밖에 있는 빗물질적인 실체가 엄격하게 물리 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물체의 운동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영향을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리적인 공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운동중인 물질적인 미립자의 궤도를 조금이라도 변경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심성이 어떻게 세계에 대해서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냐는 "심적 인과 (mental causation)" 의 가능성 문제를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실패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뒤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데카르트의 심적 실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심적 인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심적 인과의 문제는 심리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들 중의 하나로 남아 왔다.
심적 실체로서의 마음의 개념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면서 수많은 난제들을 낳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아 왔다. 더욱이 빗물질적이고 불멸하는 정신이라는 관념은 대개 여러 가지의 상충하는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관념들과 연상되게 마련인데 이러한 연상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영혼 개념은 인간과 여타의 동물들간에 극명하고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함축한다. 하지만 우리의 심성을 영혼의 소유 여부에 의해서 설명하더라도 다른 동물의 심성은 무엇이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심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 내지는 심적 실체 관념을 버릴 경우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심성에 관한 실명사적인 관점을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을 가지고 있음" 을, 우리가 문자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마음" 이라는 대상이나 실체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뿐이다.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갈색 눈동자를 갖는다든지 아픈 팔꿈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왈츠를 춤" 이나 "산책을 함" 이라는 표현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샐리는 왈츠를 췄다" 라든지 "샐리는 강변을 따라 유유히 산책을 하였다" 라고 말할 때, 이 세상에 "왈츠" 나 "산책" 이라는 것들이 있고 이것들 중 하나를 샐리가 골라서 그것을 추거나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추지 않거나 하지 않을 때 이 춤과 산책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갖는다거나 춤을 추는 것은 자동차를 가지거나 타이어를 발로 차는 것과 다르다. 왈츠를 추는 것은 춤추는 한 방식일 뿐이고, 산책을 하는 것은 주위 환경과 관련해서 우리의 팔다리를 움직이는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왈츠나 산책과 같은 개체들의 존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의 존재론 안에 들여올 필요가 있는 것은 왈츠를 추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을 가짐", "마음을 잃음 (즉, 실성함)", "마음에서 멀어짐" 과 같은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이 세계에 우리가 가지는, 또는 잃는, 또는 멀어지는 "마음" 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가짐은 인간이나 기타 고등 동물들이 가지는 속성, 역량, 또는 특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연필이나 바위와 같은 사물과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떤 것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특정한 종류의 행동과 기능 (감각, 지각, 기억, 학습, 추리, 의식, 행위 등) 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짐" 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는 "심성" 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전자의 표면 문법은 마음을 실명사로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특수한 종류의 대상인 것처럼 보게 하는 오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심성은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속성이다. 우리가 방금 본 바와 같이 감각, 생각, 추리, 결정, 감정 체험처럼 한 사람의 심성이 드러나는 좀더 좁은 속성과 기능이 있다. 또한 이 범주들 안에 들어오는 좀더 세부적인 속성들이 있는데, 오른쪽 팔꿈치에서 통증을 경험한다거나, 눈은 희다고 믿거나, 티벳을 방문하고 싶어한다거나, 자기 방 친구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 예다. 당신이 문을 닫다가 엄지손가락을 찧을 때 당신은 '고통스러움' 이라는 속성을 예화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눈이 희다라고 믿음' 이라는 속성을 가지거나 예화한다. 또 우리 중 일부는 '티벳을 방문하고 싶어함' 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성가신 표현 방식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나의 고통스러움이나 티벳을 보고 싶어함이 특정한 속성, 즉 고통스러움이라는 속성이나 티벳을 보고 싶어함이라는 속성을 내가 가지거나 예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이 책에서 전제되는 존재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 존재론과 관련된 주요 용어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우리의 존재론은 일체의 사물이나 대상들을 모두 포함한다. (예를 들면, 사람, 기타 생물체와 그것들의 기관, 컴퓨터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양한 속성 (property) 들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속성과 관계들을 합쳐서 특성 [attribute] 이라고 부른다.) 이것들 중의 일부는 물리적인 것이어서 질량이나 온도를 갖는다든지, 1 미터의 길이를 갖기도 하고 다른 것보다 무겁기도 하다. 사람이나 일부 생물체들은 심적 속성들을 갖는데 고통스러움, 아보카도 맛을 좋아함과 같은 것이 심적 속성의 사례들이다. 또한 우리는 심적이거나 물리적인 사건, 상태, 과정, 사실들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하나의 과정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일련의 사건과 상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과 상태의 유일한 차이점은, 사건이 변화를 암시하는 반면에 상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 "현상" 과 "발생한 것들 (occurrences)" 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사건과 상태를 함께 가리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자주 이 용어들 중 어느 하나를 사용하되 다른 것들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건"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상태와 현상 및 다른 것들이 모두 배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건과 상태가 대상 및 속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형이상학에서 논쟁거리 중의 하나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즉 어떤 사람이 심적 속성, 이를테면 고통스러움을 예화한다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사건 (또는 상태) 이 있고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있다라고 생각하겠다. 고통, 믿음, 분노와 같은 사건들은 심적 사건들로서 사람을 비롯한 일부 생물체들이 예화하는 속성들이다. 반면에 지진, 딸꾹질과 재채기, 당신이 도서관에 갈 때 당신의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 등은 물리적인 사건들로서 물리적인 속성들이 예화된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편의를 위하여 생물학적인 것과 화학적인 것도 물리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래서 "물리적" 이라는 말은 대략 "심적이지 않은" 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건들도 속성을 가지며, 다른 사건들과 관계를 맺는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발을 밟았을 때와 같은) 고통이 발생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 고통스러움 (즉 고통이라는 유적 사건에 들어감) 은 사건의 한 속성이 된다. 또 이 사건은 당신의 발이 밟힘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곧 이어 발생함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당신이 "억!" 하고 소리지름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 의 원인이 됨 이라는 관계를 맺게 된다. 명확하고 엄밀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있지만, 가능한 한 여기서는 마음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들은 피하고자 한다.
심리 철학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군의 문제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같이 이 분야를 이루는 문제들은 심성과 심적 속성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 문제들은 어떤 것들일까? 심리 철학의 문제들은, 심리학자나 인지 과학자, 또는 신경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심성과 심적 속성들에 관한 과학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다를까?
첫째로, "마음을 가진 생물 (구조)", 또는 "심성을 가진 생물 (구조)" 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어떤 대상이 심성이나 마음을 가졌다고 우리가 간주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어떠한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컴퓨터나 로봇과 같은 전자 기계 장치가 진정한 의미의 심성을 표출할 수 있는냐는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심성이라는 개념 자체의 성격을 이치에 맞고 분명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답하기가 어려우며,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물음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간단히 논의되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논의할 여러 구체적인 문제들도 심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둘째로, 특정한 심적 속성이나 심적 상태와 사건의 종류 및 그것들간의 상호 관계에 관한 문제들도 있다. 고통은 오직 감각 사건인가? 고통은 동기적인 요소 (예를 들어, 혐오) 도 가지는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분노나 질투와 같은 정서는 느껴진 성질들 (felt qualities) 을 반드시 포함하는가? 정서는 믿음과 같은 인지적 요소를 포함하는가?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그것의 내용 (이를테면, 창 밖에 비가 오고 있다) 을 가지게 되는가?
세번째 부류의 문제는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이것은 "심신 문제" 라고 통칭되는데 데카르트가 3 백여 년 전에 이 문제를 공식화한 이래 심리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되어 왔으며, 이 책에서도 역시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심성과 물리적 특질간의 관계,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젯거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간단히 대답하자면 이렇다. 그 이유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은 현격하게 다르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 - 즉, 나륵풀의 향기나 후회의 비통함, 화상을 입은 손가락의 통증 - 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물리적인 미립자들, 즉 원자와 분자나 세포와 생체 조직들의 구성이나 운동 - 비록 이것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 과 훨씬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의식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체계가 생각, 소망, 죄책감, 당황스러움과 같은 심적 상태를 가지게 될 수 있는가? 물리적인 속성과 심적 속성 사이에는 근본적이고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이로 인해서 이것들간의 밀접한 관계는 신비로우면서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가?
우선 심적 사건들의 물리적이거나 신경상의 과정들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신이 뾰족하게 드러나 있는 압정을 맨발로 밟는다면 발에서 예리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 그 고통을 일으킨 사건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건은 당신의 두뇌에서 일어나게 된다. 시상하부나 대뇌피질에 깊숙이 자리잡은 한 덩어리의 뉴런이 방전하고 그 결과로 당신이 어떤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광자들이 당신의 망막에 부딪침으로써 시각적인 감각이 발생하게 되고 그 결과 당신 앞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그러면 서로 밀고 부딪치는 미립자들이라든지 앞으로 돌진하는 전류와 같은 일련의 물리적 사건들이 어떻게 하나의 감각 경험 (이를 테면 심하게 화상을 입은 손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든지, 검푸른 바다 위로 장엄하게 펼쳐진 심홍색의 일몰 광경을 본다든지, 갓 베어 낸 잔디가 풍기는 싱그러운 냄새를 맡는 등) 으로 발전되는가? 특정한 신경 세포들 (통각 수용 뉴런들) 이 자극되면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가 가려움을 경험하게 될 때에 특별히 자극받는 신경 세포가 따로 있다는 소리를 흔히 듣는데 고통과 가려움이 서로 뒤바꿔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즉 왜 이 신경 세포가 자극되면 가려움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게 되고, 왜 저 신경 세포가 자극되면 고통이 아니라 가려움을 느끼게 되는가? 왜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가? 이 신경 세포가 자극되면 임의의 경험이 발생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욱이 우리는 일상적으로 심적 사건들이 물리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신체가 욕구와 믿음에 따라서 적절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 개념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된다. 당신이 길 건너편에 있는 맥도널드 간판을 보고서 햄버거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을 경우, 그 지각과 욕구는 분명히 당신의 팔다리를 움직이게 해서 맥도널드 가게 앞에 당신의 몸이 서 있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일상 생활속에서 너무나 흔해서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당신의 믿음과 욕구가 어떻게 해서 150 파운드 이상 나가는 몸으로 하여금 거리를 가로질러 가게 할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답변이 제시될지 모르겠다. "아! 그것은 쉬워요. 믿음과 욕구는 먼저 당신의 두뇌 안에 있는 특정한 신경 세포를 자극하고, 이 신경 자극은 신경 섬유 조직 체계를 따라서 말초 신경을 조정하는 체계로 전달되고, 이 체계가 적절한 근육을 수축시키겠지요." 이 설명을 다하자면 상당히 복잡해지겠지만, 이러한 식의 설명은 신경 생리학의 몫이지 철학의 몫은 아니다. 그렇지만 믿음과 욕구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미세한 신경 세포들을 자극하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남게 된다. 믿음과 욕구 자체가 두뇌 안의 물리적인 사건이 아닌 한,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러한 심적 상태들이 두뇌 안의 물리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리에 맞는 생각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신경 생리학적인 실험을 더 많이 하고 이론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물음들은 아닌 것 같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주로 심신 관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물리 세계 내에서 마음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는 문제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리적인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 입자들은 모두 엄격하게 물리 법칙에 따라서 활동하는 만큼,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라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설득력있는 (어떤 사람들은 '강력한' 이라고 말할)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마음과 심성을 그러한 세계 안에 수용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물음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것이다.
그런데 심신 관계에 관한 특정한 이론들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앞으로의 논의에서 사용될 기본적인 개념과 전제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과학 공상 드라마 「스타 트렉 (Star Trek)」에 나오는 "트랜스포터" 라는 장치를 생각해 보자. 당신이 이 안에 있는 밀실에 들어가고 트랜스로터가 작동하게 되면, 당신의 몸은 일순간에 분해된다. 그리고 당신의 해부학상의 구조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멀리 떨어진 다른 장소로 즉시 전송되어 거기서 당신의 몸과 똑같은 몸이 (아마 그 장소에서 이용 가능한 재료로) 재조합된다. 그리고 당신과 똑같이 닮은 어떤 사람이 수신 밀실에서 걸어 나와서 당신이 거기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수신 밀실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 실제로 당신이냐 아니면 당신을 대체한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말자. 실제로 우리는 상황 설정을 다음과 같이 함으로써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당신의 신체 구조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주사 장치에 의해서 획득되는데 이 장치는 주사되는 대상에 대해서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으며 바로 이 정보에 근거해서 당신의 몸과 분자끼리도 똑같은 물리적인 복제물이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가정에 의해서 당신과 당신의 복제 인간은 엄밀하게 동일한 물리적인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현재의 물리적인 특징에 의해서는 전혀 구별되지 못한다. (여기서 "현재의" 라는 말을 쓴 이유는, 과거에까지 이르는 인과 연쇄를 추적함으로써 당신과 당신의 복제 인간이 차이가 날 수 있는 분명한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당신의 복제 인간이 당신의 물리적 복제 인간이라면 그 복제 인간은 당신의 심리적 복제 인간일 수도 있을까? 즉 그 복제 인간은 정신적인 면에서도 당신과 동일할까? 그 복제 인간은 당신처럼 영리하고 재치있을까? 또 당신처럼 공상에 잠기기를 잘 하고, 음식과 음악에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꼭 같을까? 화가 날 때 당신이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그도 할까?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 햇볕을 받고 있는 노란 밀밭을 그린 반 고흐의 풍경화를 당신과 그 복제 인간이 보고 있을 때 그도 당신과 똑같이 노란 색보다는 푸른 색을 좋아하고 당신의 시각 경험과 똑같은 시각 경험을 가질까? 그가 통증이나 가려움을 느끼는 방식이 당신이 그러한 느낌을 갖는 방식과 동일할까? 「스타 트렉」이나 이와 유사한 공상 과학물들은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전제한다. 당신도 이러한 전제에 동의하는 점에서 「스타 트렉」의 많은 팬들과 같다면, 다음과 같은 "수반 원리" 를 암암리에 전제한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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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똑같은 두 사물 (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 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즉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 (entail) 한다. |
또는 이것을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원리가 심적인 면에서 같은 것들이 물리적인 면에서도 같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생화학상으로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우리와 동일한 심리를 공유하면서 지성을 갖춘 외계인을 상상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이럴 경우 위의 수반 논제의 역은 거짓이 된다. 즉 물리적으로 다른 생물들이 심리적으로는 똑같을 수 있는 것이다. 심물 수반이 말하는 바는, 생물이 물리적으로 동이랗면서 심리적으로 다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반 논제에 따르면, 기껏해야 하나의 데카르트적 영혼이 있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모든 물리적 속성들을 결여한 심적 실체로서의 데카르트적 영혼이 둘이 있다고 한다면, 그 두 실체는 물리적인 면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게 되어 물리적으로 식별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반 원리는 그 두 영혼들이 동일한 심적 속성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 - 즉, 심리적인 면에서 양자가 전혀 차이가 날 수 없다는 것 - 을 함축하게 된다. 순전히 심적인 것이 어떻게 순전히 심적인 다른 것과 심리적인 특징 외에 차이가 날 수 있을지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의 영혼만이 있을 뿐 두 영혼이 있을 수 없다. 이 논변의 마지막 단계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것만은 입증할 수 있다. 즉 만일 둘 이상의 데카르트적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의 심적 생활상은 전적으로 동일해야만 한다. 비물질적인 심적 실체를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이 오직 하나의 영혼이 있을 수 있다거나 하여튼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거나 하여튼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 수반 원리는 비물질적 영혼이나 실체로서의 마음을 주장하는 이론과는 양립 불가능하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심적 속성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물리적 속성을 가진 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수반 원리가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직 심적 속성들만 갖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수반 원리가 엄밀히 함축하지는 않지만, 그 생각은 수반 원리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물리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수반 논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게 되는 입장이다. 이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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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데카르트 원리] 순전히 심적인 존재 (예컨대 데카르트가 말한 영혼) 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
많은 철학자들이 수반 원리를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의존 관계나 결정 관계를 긍정하는 이론으로 간주한다. 즉 임의의 대상이 어떠한 심적 속성들을 갖느냐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심리적 성격은 우리의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성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수반 원리는 흔히 이러한 종류의 의존 논제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일단 어떤 것의 물리적 본성이 완전히 고정되기만 하면 그 물리적 본성이 그것의 모든 심성을 고정시킨다고 수반 원리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위에서 서술된 수반 원리는 심적 속성이 어떻게 물리적 속성과 공변하는지에 관해서 말할 뿐,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의존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의존성 논제도 역시 중요한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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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 의존] 임의의 대상이 어떠한 심적 속성들을 갖는지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속성들을 갖느냐에 의존하고 그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한 대상의 심적 성격은 그것의 물리적 성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
우리는 이 심물 의존 원리가 앞에서 서술된 수반 원리를 필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신 의존 논제가 수반 논제를 넘어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의존 논제는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내지는 우선성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의존 논제에 따르면,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은 기본적인 것이고 그 대상이 어떠한 심적 특징을 가지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대상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어떤 주어진 대상이 왜 지금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심적 특성을 갖는지, 또는 왜 그 대상이 심적으로 변하였는지를 설명하되 그 대상의 물리적인 성질에 관한 사실들을 지적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또한 두 생물체의 심적인 특징의 차이를 그것들의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차이를 끌어들임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조직적인 심리학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러한 설명 방식을 흔히 사용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존 논제는 그러한 관례적인 설명 방식의 철학적인 기반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더욱이 우리는 심물이 의존한다는 사실을 심신 수반 자체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왜 대상의 심적 속성들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과 함께 앞에서 언급된 방식으로 공변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신 의존 논제는 과학적인 전제들이나 실제로 수행되는 연구과정과도 잘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심신 관계에 대해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과도 잘 맞아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물리적 사건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심적인 사건이나 과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정신적인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심적 작용이 우리의 신체, 특히 신경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성을 갖춘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리적이면서 생물학적인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적절히 복잡한 물리 체계 (예컨대 사람과 물리적으로 똑같은 복제물) 를 구성할 수 있다면, 정신 작용은 그 체계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물리적인 구조를 설계하거나 구성하지 않고서 심적인 것을 직접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원리들 -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적 원리, 심물 의존 - 이 최소 물리주의 (minimal physicalism) 를 규정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즉 당신이 그 원리들을 받아들이면 물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거부하면 물리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신이 그 원리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거나 아니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면서 물리적이지 아니한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원리들 중 하나나 그 이상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시ㆍ공간의 세계 안에 물리적이지 아니한 대상, 이를테면 데카르트가 말한 영혼과 같은 것이 있다고 인정하거나, 적어도 이 세계에 있는 일부 대상들은 그것들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하지 않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대상의 물리적 성질을 고정시킨다고 해서 그 대상의 심적인 성질이 고정되지는 않게 되고, 심적인 성질은 물리적 성질과 무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세 원리들은 물리주의자의 기본적인 입장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보다 더 강한 물리주의가 있다. 다양한 형태의 환원주의적 물리주의가 그 한 예다. 그러나 이 세 원리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약한 것은 물리주의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현대 심리철학의 논의들은 일반적으로 물리주의의 틀 안에서 진행되어 왔다. 앞의 세 원리들이나 이와 유사한 원리들이 흔히 전제되거나 당연시된다. 심리 철학에서 이론을 구성하는 주된 목적은 심적 속성의 본성에 관한 이론을 만드는 데에 있다. 그러한 이론들은 심성과 물리적인 것간의 관계에 관한 사실들 및 심성 자체에 관한 사실들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위의 원리들이 성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각 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절차를 따라서 심적인 것에 관한 주요 물리주의 이론들 중 일부를 논의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우선 하나의 속성을 심적 속성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즉 심성 개념에 대해서 잠시 고찰해 보자.
여기서 심적 사건과 상태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상들의 종류에 관해서 대략적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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