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없는 마음: 비판적 후기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 Gerald M. Edelman 지음, 황희숙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98 (원서 : Bright Air, Brilliant Fire : On the Matter of the Mind, BasicBooks, 1992), Page 311~368
창조적인 일거리가 있는데 비판적인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놓은 종류의 생물학이론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깨부수는 작업을 약간 해야만 한다. 즉 표준적이라고 여겨지는 생각들과 굳어진 관점들 등 여러 가지를 비판해야 한다. 내가 이 책의 본론에서 말한 것처럼 의식과 마음에 대한 많은 유력한 견해들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몰라도 간단히 지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 견해들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두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는 그 견해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애해 잘 모르는 독자들은 머지 않아 그 견해들 중 하나에 빠져들 것이다. 둘째, 그 견해들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분석해 가면, 마음이 어떻게 체현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하는 우리의 과제에 접근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도 있다. 이상한 물리학이 열쇠를 쥐고 있다거나, 뇌는 컴퓨터라거나, 우리 머릿속에 언어기계 같은 게 붙박이로 들어 있다거나 하는 견해들은 비록 결함이 있긴 하지만 재미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재미를 제대로 알려 주기 위해서는 상당히 지루한 세부적 이야기와 추상적인 논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뇌의 생물학을 기술하는 내 작업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후기에서 이 견해들에 대한 본견적인 비판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목표는 생물학이 없이도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내놓은 것들은 덧붙이는 낙수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많은 이들을 위해 이 책의 본문에서 이미 강조한 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들이다.
독자들은 이 논의가 꽤 많은 학문 분야들을 훑으면서 한 주장에서 다른 주장으로 뛰어넘는다고 놀라서는 안 된다. 파악하기가 가장 어려운 분야는 아마도 인지과학과 언어학이다. 둘 다 추상적이고 학제간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분야다. 그러나 일단 장애물을 깨끗이 치워 버린다면 그 분야들도 매력적이고 아주 흥미진진하다. 그 분야들에 손대기 전에 먼저 물리학을 살펴보자.
유령은 사람을 홀리거나 겁주는 혼령을 말한다. 가장 이성적인 과학인 물리학을 내가 대리 유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물리학을 마음에 직접 적용할 때 하는 말이다. 내가 그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설명하겠다.
마음의 체현이 만들어 내는 딜레마와 의식의 신비스러운 외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물질의 직접적인 성질을 마음과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가면 범심론이라는 철학적인 주장이 된다. 범심론은, 모든 물질은 가장 미세한 입자들까지도 어느 정도 의식적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모든 우주가 의식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음과 물질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매우 빈약한 의식을 가진 입자라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많이만 모은다면 그 결과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사람보다 훨씬 덜 의식적인 입자 하나가 어떻게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애초에 관념론 철학에 뿌리를 박고 있는 다른 견해를 '과학화한다'. 그 견해에서는 세계를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지각한다. 그래서 버클리 주교는 물질이란 없고 마음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존 슨 박사는 이 말을 듣고 돌을 발로 차면서 "나는 그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고 말했다. 좀더 나은 반박은 진화론에서 나온다. 만약 자연선택이 지각력 있는 동물이 있게 되는 원인이라면, 자연선택을 겪으면서 자손을 낳는 지각력 있는 한 동물에게서 어떻게 선택하기는 환경과 뇌가 모두 정신적인 사건일 수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마음은 그런 복잡한 현상이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자연선택이론은 플라톤의 본질주의, 즉 완전한 본질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어서 실제 세계에 있는 사례들은 불완전한 사례일 뿐이라는 생각에 적지 않은 손상을 주었다. 종은 본질이나 유형이 아니다. 변화를 통해 선택된 결과일 뿐이다.
꽤 지성적인 사람 중 몇몇은 범심론, 관념론, 본질주의에 매력을 느껴 왔다. 그 중 한 명이 아일랜드의 시인인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인데 그는 신비스런 소책자인 ≪환상 A Vision≫ 과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이상한 시들을 몇 편 썼다. 뇌와 지성적인 재능이 귀신이나 신비스런 현상에 대해 갖는 매력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특히 불명성과 같은 생각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임종하실 때 "나는 서둘지 않아" 라고 말씀하셨다. "왜냐 하면 죽은 사람 중에 신나게 달려와서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지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대부분의 유능한 물리학자들은 범심론이나 체현되지 않은 영혼 같은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우 유능한 물리학자들 몇몇은 생물학이 말해 주는 사실의 경지를 넘어서서, 이를테면 의식의 수수께끼는 양자중력이론과 같은 새로운 물리학이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생각이 났는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대리 유령을 건네 주고 있다고 왜 내가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차이점에 대해서 약간 더 언급해야겠다.
물리학은 모든 과학의 어머니다. 가장 오래됐고, 그 범위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근본이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일반성에서 볼 때 생물학과 차이가 난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지향적인 대상과 비지향적인 대상에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생물학은 우리가 알기로는 제한적이다. 생물학은 매우 좁은 영역의 온도 (또는 에너지), 압력, 화학작용의 범위에서 생기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 더 제한적이게 만드는 것은 생물학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진화는 다양한 생물체 개체군에서 생기는 자연선택의 특정 역사적인 연속에 근거하고 있다.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의 일반법칙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번 세기에는 놀라운 지적 혁명들이 많이 있었다. 유한하고 분절적인 다발, 시간과 공간 개념을 시공 space time 개념으로 바꾸고 중력과 물질 개념을 4 차원 시공의 뒤틀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발전시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그 보기로 들 수 있다. 이런 혁명적인 생각들을 갈고 닦은 결과, 측정의 개념에 변화가 왔고 (그림 P-1), 사건의 동시성과 인과에 대해 늘 해 오던 생각들이 크게 도전을 받았다. 이상하거나, 적어도 친숙하지 않은 생각들이 늘 해 오던 생각들을 바꾸어 버렸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더 갈고 닦은 결과는 그 때까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던 몇몇 이상한 문제들에 실마리를 주기도 했다.

그림 P-1 물리학이 확립한 자연의 척도. 10-33 센티미터 아래로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미치지 않는다. 분자의 수준과 그 아래에서는 양자론이 본질적이다 (물론 10-33 센티미터 이상의 모든 척도에서 적용된다). 매우 높은 속도와 가속도에서는 상대성이론을 적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대상의 수준에서 (인간과 뇌를 포함해) 고전 물리학의 기술을 가지고 근사하게 접근할 수 있다. 커다란 척도에서 양자론과 고전이론의 수렴은 상응원리라고 알려져 있다. 뇌의 크기 범위와 생물의 온도 범위가 모두 아주 협소함에 주목하라. 눈금은 10 의 제곱으로 되어 있다. 즉 대다수다. 그 '이상함'은 몇몇 과학자가 의식의 문제를 그들의 관점에서 다루어 보게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물리학 법칙들 뒤에 숨어 있는 생각들은 정말로 이상할 수도 있다 ('친숙하지 않은' 은 '상식적이 아닌' 의 뜻으로 읽어라). 생물학에서 하는 생각과 달리 그 법칙들은 아주 일반적이며, 가끔은 대단한 힘과 아름다움을 갖춘 수학이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가 제 20 장에서 논의했던 대칭성이 그 보기가 되겠다.
그렇게 물리학의 개념들이 일반적이고 예측적이고 예측력을 지녔다는 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이 적용된 것을 이해할 때 심각한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기본적인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려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양자측정이론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시도에서 생기는 역설을 풀려고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과 같은 뛰어난 수학자들과 위그너 Eugene Wigner 와 같은 역시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의식 자체가 양자측정의 과정에 끼여 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과 관련된 문젯거리들은 아주 많다. 그것들을 여기서 모두 논의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제와 너무 멀어지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왜 의식을 물리학에 끌어들이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양자측정 문제의 한 측면만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설명을 하더라도 물리학은 시공에 있는 사물들의 가장 일반적인 성질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형식적인 상호 관계를 탐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부탁한다. 물리학이론들은 감각 그 자체를 다룬다든가, 이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거시적 대상들을 범주화한다든가, 지향성을 다룬다든가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찰자의 판단이 자신이 하는 측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기 때문에, 양자역학에 깊이 파고들면 이런 제한을 잊기가 쉽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이론의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양자이론은 모든 이론들 중에서 가장 적용 범위가 넓은 이론이다. 이 이론을 거대한 에너지가 매우 작은 입자들에 적용해 보면 일상적인 기대에 전혀 어긋나는 형태가 나타난다. 보기를 한 가지 들자면, 어떤 한 입자와 다른 입자와 다르다고 확인할 수가 없다. 입자들은 행태의 이중성을 보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입자들은 어떤 상황들에 서는 파동이라고 기술하면 가장 좋고, 다른 상황들에서는 입자라고 기술하면 가장 좋다. 실제로 보른 Max Born 이 맨 처음 제안했듯이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에서 파동함수 Ψ 는, 절대값으로 봤을 때, 공간의 어떤 주어진 위치에서 — 어느 곳에서나 — 입자를 발견할 확률의 양이다.
만일 우리가 실험 장치를 해 놓고 그 위치를 결정하려고 한다면 동일한 정확도로 운동량을 결정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기본적인 것이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질량에 속도를 곱한 값) 은 짝을 이루는 관계가 있고, 이 관계 때문에 이 변수들의 곱의 정확도가 플랑크 상수보다 작은 값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파동 길이가 더 작은, 따라서 더 높은 에너지를 갖는 입자 또는 파동을 사용해야 하고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입자의 운동량을 '차 올려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이 이론의 기본적인 성질이다. 이 관계를 조작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양자이론의 이상한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 (물리학자인 관찰자) 가 입자의 위치를 어느 정도 정확히 측정하려고 한다면, 측정 장치를 세우고 측정을 하는 행위는 비슷한 정도의 정확성을 갖는 운동량의 측정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르면 측정 전에 어떤 선입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동함수 Ψ 는 측정의 모든 가능한 결과값들을 기술하는 함수들을 선형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그리고 측정이 이루어질 때 파동함수는 '붕괴하여' 가능한 결과값들 가운데 하나로 '투사해 간다'.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의 파동함수가 거시적인 측정 장치도 기술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적으로는 그런 대상들을 물리적으로 기술하기 위해서 양자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입자의 파동함수로부터, Ψ 의 값을 정하려고 하는 관찰자의 행위에 이르는 길 어디에서도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을 형식적으로 보여 주었다. '파동함수의 붕괴' 는 정확한 측정을 하기 위해 장치와 입자가 상호 작용할 때 초래된다. 위그너는 이런 붕괴를 관찰자의 의식의 끼여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관찰자가 장치를 세우는 것을 결정하고, 그가 위치나 운동량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고, 실제로 측정을 한다. 폰 노이만의 견해에서 이런 장치의 상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필요로 하고, 그 다른 장치는 또 다른 장치를 필요로 하고······ 하는 식으로 무한히 후퇴한다. 위그너의 틀에서 현상은 관찰자가 그 현상을 의식할 때만 현실화된다 (즉 그 후퇴가 끝난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다른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양자측정 문제를 관찰자의 의식을 개입시키지 않고 해석했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보어는 궁극적인 실재 또는 심층의 실재는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상보성의 원리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하이젠베르크 원리가 아마도 가장 우아한 표현일 것이다) 를 적용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측정, 입자, 장치, 관찰자라는 전체 상황이 규정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은 양자이론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그 해석은 어떤 장치를 통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을 기술하는 공식을 주는데, 이 때의 장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측정하고 있는 양자 입자들과 같은 종류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붕괴' 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그 대신에 '많은 세계들' 이 있으며 각 세계에서 파동함수는 우리가 여기서 지금 보는 관찰자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값을 대신하는 다른 가능한 값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물리학자들은 빛보다 – 더 – 빠른 신호전달을 포함하는 '양자 가능태' 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모순되는 것이다!
나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내 친구 라비 Isidor Rabi 와, 그가 죽기 다섯 달쯤 전에 점심을 먹으면서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양자역학은 알고 리듬일 뿐이야. 그것을 써 봐. 잘 돌아간다니까, 걱정할 것 없어." 나는 불평했다. "네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아인슈타인처럼 돼가고 있다고 말하지 마."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봐, 지금 내가 신과도 불화하고 있는 형편인데, 왜 양자역학과는 불화하면 안 된다는 거지?"
이상은 문젯거리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더 가깝게 만든다. 즉 그렇게 이상하다면 왜 특별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물리적 영역이나 차원들이 의식의 참된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이것은 미묘하지만 다소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물리학이 대리 유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좋은 보기로서 수학자이며 우주론자인 펜로즈 Roger Penrose 가 의식의 본성을 주제로 한 그의 광범위한 책 ≪황제의 새로운 마음 The Emperor's New Mind≫ 에서 취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그 책은 물리학의 역설들을 잘 보여 주는 보기들과, 수학의 공리적인 한계에 대한 기술로 가득 차 있다. 펜로즈는 수학자로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그런 공리적인 한계들을 잘 안다는 직관적인 근거에서 뇌가 컴퓨터라는 생각을 부정한다. 그는 양자역학이 한계를 지적하고 그 이론이 적용될 수 없는, 차원이 아주 작은 (이른바 플랑크 길이인 10-33 센티미터보다 아래) 영역에서의 상대성을 지적한다. 그러고 그는 이 이론들을 확장한 양자중력이론을 요구한다. 그러고 나서 눈에 띌 만큼 비약해서 의식의 신비는 양자중력이론이 만족스럽게 된다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 추론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관찰자와 실험자의 결정이 양자역학적 측정과 상대론적 측정에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다. 관찰자의 마음이 수학이론을 만들며 적용된다. 이 수학이론의 명제들은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는 형식적인 공리주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컴퓨터는 그 명제들의 진리와 의미를 검토할 수 없지만 관찰자는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처럼 관찰자의 뇌는 궁극적으로 양자 법칙들을 따르는 — 특히 대부분의 행동이 일어나는 시냅스에서 —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정식화된 물리법칙들은 의식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 법칙들은 양자중력을 설명할 수도 없다. 아마도 양자중력의 설명은 모든 이론들의 주의를 맴도는 것 같은 의식에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진정으로 이것이 대리 유령으로서의 물리학이다. 그 유령은 종교적인 영역이나 신비스런 설명에서의 유령보다 더 이성적인 것이지만, 결국 보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펜로즈의 책은 물리학을 꽤 많이 훌륭하게 기술했지만, 의식의 문제를 지향성으로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심리학적 지식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거의 없다. 펜로즈의 설명은 시험에서 황산의 공식을 적을 수 없어서 대신 자신의 개를 아름답게 설명해 놓은 학생과 비슷하다.
펜로즈와 다른 사람의 설명은 앎과 관련된 근사적인 구조와 기능을 과학적으로 냉정하게 기술하는 것을 빼먹고 있다. 실제 심리학, 실제 뇌, 그 기초가 되는 생물학에 대한 설명을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분명히 생물학에 필요한 근거들을 제공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그 자체가 생물학적 구조와 과정과 원리들에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다. 이것들은 꽤 특수한 것이고 대칭과 양자측정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들보다는 명백히 마음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대칭과 양자측정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들도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하나의 설명으로서 색다른 물리학을 요구하는 것보다, 생물학적 과정에 근거한 마음의 이론을 구성하고 시험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해부학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결국 많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색다른 물리학 자체가 관찰자의 의식을 기술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범주오류라고 해서 떨쳐 버리는 것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작동 근거를, 물리학이론같이 우리 마음이 훌륭하게 지성적으로 구성해 낸 이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말 쇼 show 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적절한 기술이 범주오류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드러낼 줄 수 있다. 말 쇼는, 마력 horses 을 보여 주고 있는 한 떼의 말들의 엉덩이 asses 들에게 제 엉덩이를 보여 주는 한 떼의 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펜로즈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 적어도 일상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범주오류, 곧 뇌가 컴퓨터와 같다고 전제하는 생각으로 우리 관심을 다시 새롭게 돌려 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거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거기서 기본적인 문젯거리에 대해 물리학 자체보다도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 대리 유령 노릇을 하지 못했다면, 별난 물리적 대상 또는 인공물인 디지털 컴퓨터는 어떤가? 한 마디로 말해서 20 세기의 모든 발명품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인 컴퓨터는 언뜻 보기에 마음과 비슷한 기능을 놀랄 만큼 많이 수행하는 것 같다.
생각하는 기계의 능력에 대해서 엄청나게 어리석은 주장들이 제시되었다. 그 어리석음은 대부분 생각과 논리 사이의 유비에서 생긴다. 컴퓨터가 논리적인 작동을 한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제가 되는 사실은 컴퓨터에서 수행되는 논리만으로는 생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 위에서 숫자를 더하는 물리적인 사건이 수학자가 산수를 하는 동안에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닮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혼동이 왜 생겼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디지털 컴퓨터 배후에 있는 이론을 약간 파헤쳐 보아야겠다. 그 이론은 상당 부분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을 한 영국 수학자 튜링Alan Turing 의 업적이다. 그는 동성 연애자임이 알려져서 영국 법정에서 감옥에 가든지 호르몬을 여성화시키는 에스트로겐을 복용하든지 하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여성화시키는 쪽을 선택했는데, 그게 자신의 뇌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뇌는 엄청난 수학적인 생각이 샘솟듯 했고 그 생각 중의 하나가 튜링 기계라고 알려져 있다.
튜링은 추상적인 자동기계의 집합을 정의했고, 그 자동기계로 어떤 함수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몇몇 특수한 목적의 컴퓨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컴퓨터는 튜링 기계다). 튜링 기계 (그림 P-2) 는 무한한 테이프를 가진 유한한 상태의 기계다. 그 기계는 테이프의 사각형 중 한 군데에 0 또는 1 을 쓴다. 그리고 사각형 하나만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 기계는 조건과 행동을 포함한 명령을 내리는데,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행동을 수행한다. 테이프 위에 있는 기호와 기계의 상태가 그 조건을 결정하고 행동은 위에 써 놓은 게 가지, 곧 0 을 쓰거나, 1 을 쓰거나, 왼쪽으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가거나 중 하나고 그 행동이 끝난 다음에 프로그램이 규정한 다음 상태로 움직인다. '보편 튜링 기계' 는 어떤 특정 튜링 기계도 흉내 낼 수 있다 (특정 튜링 기계는 튜링이 기술한 것만 따른다면 서로 다른 메커니즘과 부분들을 가질 수 있다).
이제 범주오류를 저지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그 유혹은 다음과 같은 논변들을 설득력 있게 한다. 만약 내가 효율적인 수학적 절차 (전문 용어로는 알고리듬이라고 부른다. 그림 P-4 를 보라) 를 기술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가 그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일반 튜링 기계도 어떠한 알고리듬이나 효율적인 절차를 다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보편 튜링 기계가 존재함은 어느 튜링 기계가 됐든지간에 그 튜링 기계의 작동 메커니즘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이 참임을 실제 세계에서 보여 줄 수 있는데, 구조와 하드웨어 디자인이 완전히 다른 디지털 컴퓨터 두 대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돌렸는데 결과가 똑같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P-3 을 보라).

그림 P-2 튜링 기계. 이 추상 작용은 실천적으로 모든 컴퓨터의 기능적 작용을 대표하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튜링 기계가 (실제 세계의 컴퓨터와 달리) 단순한 정보처리과정이나 알고리듬을 수행하는 데 편리하기에는 더 많은 단계들을 넘겨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튜링의 분석은 실제 세계 컴퓨터에 적용된다. 그 아이디어는 명석한 추론의 승리다.

그림 P-3 실제 세계의 두 가지 컴퓨터. 위: 첫 번째 실용적인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 아래: 대규모 병렬처리에 기반한 상업적 슈퍼컴퓨터 엔-커브 N-CLBE. 에니악은 커다란 방을 차지했고, 초당 약 5000 가지 명령을 수행한 반면, 엔-커브는 표준적인 사무책상 정도의 크기였고, 초당 거의 80 억 개의 수행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덜 들 수 있다. 그러나 (튜링의) 원리는 어떤 경우든 동일하다.
이런 특징들에 근거해서 볼 때 뇌의 동작은 '기능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다시 말해서 알고리듬으로 쓰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견해는 기능주의 (더 강력하게 표현하자면 튜링 기능주의) 라고 한다. 기능주의는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하드웨어의 동작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적인 조직' 을 가지고 심리학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능주의는 다양한 체계들이 수행하는 기능들에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들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 특히 요소들이 다른 관계들을 불러일으킴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기능주의이론은 체계가 기계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 에는 관심이 없기에 그 관계들을 추상적인 용어로 다룬다.
기능주의 관점에서는 심리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리듬이지 그 알고리듬이 실현되는 하드웨어는 아니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뇌가 수행하는 것은 알고리듬으로 적절히 기술할 수 있다. 더욱이 뇌 조직의 구조나 요소 알고리듬이 '작동되거나' 성공적인 멈춤에 이르게 되는 한 (그림P-4)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특정 종류의 뇌 조직이 없어도 된다는 이런 '자유분방한' 태도는 오늘날의 인지심리학을 상당 부분 충족시킨다).
우리가 만약 이런 태도를 받아들인다면 처치 입론 Church's thesis 이 라고 알려진 형식논리학의 한 분석은 다음과 같은 것을 귀띔해 줄 것이다. 곧 어떤 문제를 푸는 일관적인 계산 방법이 존재한다면 튜링 기계에서 수행되면서 똑 같은 결과를 낳는 방법이 존재할 것이라고, 튜링 기계는 딱 정해진 유한한 시간 안에 일관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뇌를 포함해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기계만큼이나 강력하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뇌가 컴퓨터이거나, 아니면 뇌가 수행하는 흥미로운 일들에 대해 컴퓨터는 적절한 모형 또는 유비일 것이다.

그림 P-4 계란 삶기의 알고리듬. 두 수를 더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명백한 명령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분석은 대부분의 인공 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연구에 근거가 되는, 물리적인 기호체계 가설 physical symbol hypothesis 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것의 기초가 된다. 이 가설은 규칙에 따른 기호 조작이 인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물리적인 기호체계에서 기호들은 프로그램에서 물리적인 대상의 상태로서 실현된다.
일련의 기호들은 감각적인 입력, 범주, 행동, 기억, 논리적인 명제, 그리고 체계가 다루는 정보를 모두 다 표상하는 데 쓰인다. 일련의 입력 기호들을 일련의 출력 기호들로 바꾸는 데 필요한 동작이 계산인데, 물리적인 기호체계 가설에 따르면 적절히 프로그램된 임의의 튜링 기계가 계산들을 수행할 수 있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동작들은 그 본성상 순전히 형식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관련된 기호들의 의미에 신경 쓰지 않고서도 그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 장과 제 12 장에서 본 것처럼 그런 규칙들의 집합은 구문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구문론적 규칙에 반응하는 계산 장치를 특별히 디자인하는 일은 적당한 시간 안에 업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빠르기와 기억 용량에 대한 요구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만 문제가 된다.
이 주장은 왜 적절치 않을까? 그 이유야 많겠지만 그 이유를 대기 전에 물리적인 기호체계가 기능주의를 옹호하는 논변 (여기에는 많은 변형들이 있는데 모두 다 형식적인 인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 갖는 연관을 기억하라. 만약 기능주의 중 하나의 형태라도 마음에 대해 옳은 이론이라면, 뇌는 실로 튜링 기계와 유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뇌와 튜링 기계 모두에 적절한 차원은 기호적인 표상과 알고리듬의 차원이지, 생물학의 차원이 아니다.
기능주의의 모든 형태가 다 마음과 과정과 튜링 기계의 과정을 그렇게까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퍼트남 Hilary Putnam 이 정식화하고 튜링 기계 기능주의라고 알려진 가장 강한 입장은 그 둘을 전적으로 같다고 본다. 이 견해는 더 이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퍼트남 자신이 그 견해를 거부했다. 더 약한 형태의 기능주의는 뇌의 상태와 튜링 기계의 상태 사이에 엄격한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기능주의든지 모두, 똑 같은 기능적인 상태를 갖고 있는 두 체계는 그 물리적인 구조가 어찌 됐든지 간에 똑 같은 인지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결과는 튜링이 보면 계산에 대해 내린 결론의 사촌쯤 된다. 그 결론이란 똑 같은 추상적인 상태 전이 테이블을 갖고 또 테이프에 똑 같은 기호들 (그 정의와 보기에 대해서는 그림 P-2 를 보라) 을 갖는 두 컴퓨터는, 프로세서와 테이프가 어떤 물리적인 꼴을 갖든지 간에 상관없이 똑 같은 계산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제 결정적인 한 대 (사실은 여러 대) 를 맞게 되었으니! 뇌의 진화, 성장, 구조를 분석해 본 결과 튜링 기계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가 제3 장에서 본 것처럼 뇌는 수많은 조직의 단계에서 구조적인 변화를 하는 엄청나게 많은 뉴런을 갖는다. 뇌가 성장하는 수단을 살펴보면 각 뇌는 변화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간단한 계산을 해 봐도 사람의 게놈 genome (개인의 유전자 집합)은 성장하는 뇌의 시냅스적인 구조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함이 드러난다. 더구나 각 생물체의 행동은, 그 생물체가 주관적인 경험을 사람이 하듯이 기록하든 못하든, 생물학적으로 볼 때 개별적이고 상당히 다양하다.
더 손상을 입히는 사실은 동물과 사람의 생태학적이고 환경적인 변화와 범주화 절차를 분석해 본 결과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가 튜링 기계의 테이프처럼 기능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퍼트남은 비슷한 논조로, 그가 애초에 내놓은 기능주의와 그 아류를 포기했다. 명제적 태도 propositional attitudes ('p 라고 믿음', 'p 라고 바람' 등) 는 계산 모형으로는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이 주장의 핵심이다. 우리는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개념과 상호 작용의 상태들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환경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한 그런 상태들은 미결정적이며 고정적이지 못하다. 아무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간단히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주의가 명제적 태도는 뇌의 계산상태와 동일하다는 생각으로 이해되는 한, 기능주의는 더 이상 유지되기가 힘들다.
또 다른 철학자, 설 John Searle 은 진작부터 기능주의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그의 반대는 계산을 아무리 순수하게 규정해도 생각과 지향 상태에 대해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인 우리가 갖는 고차원적 의식에 적용되는) 그의 논변은 어떤 것이냐면, 컴퓨터 프로그램은 형식적, 구문론적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정의되며, 구문론은 의미론에 충분하지 모하며, 반대로 의미론적 내용을 가짐이 인간의 마음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의미론적 내용들은 의미를 포함하는데, 구문론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다루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기능주의를 거부함은 명백하다. 더욱이 설은 주관적 경험이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마련인 지향성이 한 유형과 사람의 의식을 동일시하는 한, 정의상 어떤 생물체도 주관적 경험이 없다면 지향적 상태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컴퓨터는 그런 경험이 없다. 어떤 (아마도 절대 다수의) 기능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주관적이고 현상적인 성질들을 제외하는 명제들에 국한시킨다. 설은 위와 같이 주장하면서 기능주의의 주장은 의식과 사고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 주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고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라는 개념이다. 퍼트남이 주장하듯이 의미는 "상호 작용적이다. 화자는 낱말 또는 공동체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결정하는 데 환경이 한 가지 구실을 한다". 그런 환경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효율적인 절차로 선험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책에서 보았듯이, 의미를 결정하는 데 화자의 실제 육체가 마찬가지로 커다란 구실을 한다. 인간으로서 갖는 우리의 현상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언어로 보고하는 능력을 기준적인 준거로 삼는 의식 (그리고 사고) 이론에는 의미론과 의미에 관련된 논변들이 중요하다.
컴퓨터로 돌아가서 그 차이점을 알아보자. 일상적인 컴퓨터를 놓고 봤을 때 테이프에 있는 기호들과 프로세서의 상태들의 의미는 사람인 프로그래머가 그 기호와 상태에 부여한 의미가 전부 다이기 때문에 기능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다. 기호들은 구문론의 규칙에 따라 디지털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기호인 물리적 상태를 해석하는 데는 알쏭달쏭함이 전혀 없다. 시스템은 정의된 상태들 사이를 재빨리 뛰어넘을 수 있고 그 상태들 사이에 있는 전이 지역 transition regions 을 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각 요소는 전기적을 언제나 '0' 아니면 '1' 의 상태가 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이를 테면 소음 수준에서) 물리적 매개변수의 조그마한 편차는 약속과 설계에 의해 무시된다. 이런 모든 약속들에 공통되는 한 가지 목표는 두 시스템에서 기호들이 물리적으로 표상하는 서로 다른 방식 때문에 생기는 어던 차이점도 실제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드웨어가 작동하는 동안에는 서로 다른 하드웨어는 문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하드웨어의 구현을 문제삼지 않는 기능주의 시스템의 이런 특징은 기능적 과정이 정보의 기호적인 표상 차원에서 작동해야 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대가를 치러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왜 디지털 컴퓨터가 뇌에 대한 잘못된 유비인가를 알 수 있다. 디지털 컴퓨터와의 경솔한 유비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무너진다. 튜링 기계가 읽는 테이프는 유한한 집합에서 골라낸 기호를 가지고 혼동되지 않게 분명하게 표시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신경계에서 볼 수 있는 감각신호 sensory signal 는 참된 유비를 자연에서나 찾을 수 있기에 분명하지도, 또 수가 유한하지도 않다. 튜링 기계는 정의상 내부 상태들을 유한한 수만큼 갖지만, 사람의 신경계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를 테면, 뉴런 연결의 수많은 시냅스 강도의 아날로그 모듈화로 알아 낸) 상태들의 수에는 한계가 없다. 상태들을 넘나드는 튜링 기계의 전이는 전적으로 결정적이지만, 반면에 사람의 상태 전이는 미결정적인 특징을 전 영역에서 보인다. 사람의 경험은 튜링 기계처럼 간단한 추상작용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의미' 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성장해야 하고 의사소통해야 한다.
튜링 기계의 추상적인 아름다움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추상작용이 우리 생각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할 때는 과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추상작용은 어떤 맥락에서는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재정적으로 실패한 경마장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경마장 경영자는 회계사, 기술자, 물리학자 등 세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회계사는 대차대조표를 다시 짜기를 권했다. 기술자는 느린 트랙을 약간 경사지게 하고 배수 시설을 개선 하라고 제안했다. 물리학자는 자기 차례가 오자 칠판으로 뛰어가더니 원을 그리고 "말을 구로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라고 말했다.
신경계의 반응 패턴들은 컴퓨터와 달리 각 시스템의 개별 역사에 의존한다. 왜냐 하면 적절한 반응 패턴을 고르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와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변화를 서로 다른 신경계 사이에서 생기며, 한 시스템 안에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긴다. 인지계에서 보이는 대규모의 변화 (제 3 장을 보라) 때문에, 표상은 물리적인 실현과 독립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기능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는 부정된다. 따라서 기능주의 체계의 자랑스런 특징인 물리적인 실현의 독립성은 인지 수행의 중요한 단계가 이루어지려면 포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능주의의 자유분방한 입장 대신에 극단적인 쇼비니즘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극단적 쇼비니스트들은 탄소화학, 젖은 조직 등등이 인지가 생기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만약 사정이 그렇다면 제 19 장에서 말했던 인공물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기능주의 체계가 어떤 유형의 내부 표상을 쓰든지 간에 개별적인 단위 (기호 또는 기호를 일반화한 것) 의 의미와 그 표상에서 단위를 결합시킨 것의 의미를 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프로그래머가 없을 때 구문론적 표상에 의미를 부여하고도 그 표상의 임의적인 성질을 계속 보존하는 메커니즘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 성질은 사실 기능주의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그 점은 우리의 준열한 주장이다. 우리에게는 프로그래머도 없고 또 머릿속에 소형인간도 없다.
최근에 지각 또는 인지 과정에 대한 '연결주의 connectionist' 또는 '신경망' 모형에 대한 업적들이 상당히 많이 쌓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절을 끝마칠 수 없다. 이 모형들은 신경망 요소들 사이의 연결들이 시냅스와 대체로 유사한 방식으로 변경된 형식적인 모형들이다. 나는 이점이 은유적인 '신경' 을 정당화한다고 생각 하지만, 다른 점에서 볼 때는 그 은유에도 무리가 따른다.
이런 구성은 수많은 응용에서 쓸모가 있었다. 많은 모형들은 인공지능의 작업자들이 한 것과 비슷하게 지능 체계의 본성에 대한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고전적인 작업들과 달리 이 모형들은 신경망의 분산된 과정과, 엄격히 프로그램하지 않고서도 부분적으로 생기는 연결에서의 변화를 이용한다. 그렇지만 연결주의 체계는 입력과 출력을 규정하는데 프로그래머가 또는 오퍼레이터를 필요로 하고 그 규정을 달성하기 위해서 알고리듬을 이용한다. 시스템은 '경험' 의 결과, 변화들을 허용하지만 이런 '학습' 의 메커니즘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지령적이다. 가치에 대한 범주화를 수행하는 선택적인 시스템과 달리 연결주의 체계의 반응 (가치가 아니다) 은 미리 규정되며 적절한 조건 아래에 있는 사람인 오퍼레이터에 의해, 그리고 훈련을 위한 적절한 오차 피드백이 있는 체계에 부여된다.
신경망의 구조에는 생물학적 실재성이 없다. 그리고 신경망은 신경계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신경망' 은 가역적이고 조밀한 행렬 같은 연결을 이용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경 구조와 내가 이 책에서 기술했던 해부 모형을 닮지 않았다. 뇌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표준적인 모형으로 신경망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신경망이 뇌를 튜링 기계로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말해야만 하다. 신경망은 그 관심과 유용함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뇌의 구조에 대해 제대로 된 모형이나 유비가 아니다 (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독자들을 위해 이 책 뒤의 <참고 문헌 추천> 에 이 주제에 대한 논문들을 모아 놓았다)
디지털 컴퓨터가 기본이 되든지 연결주의 모형이 기본이 되든지 간에 우리는 똑같이 낭패를 보게 되었다. 뇌를 튜링 기계로 생각하면 상태와 상태전이표 (그림 P-3 을 보라) 가 뇌에서는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입력 테이프에 쓰여진 기호들이란 게 알쏭달쏭한 것이고, 미리 부여된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또 전이 규칙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여러 문젯거리에 부닥쳐야 한다. 더구나 입력과 출력을 실제 세계의 동물에서는 선생이나 프로그래머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와 뇌 사이에 이런 식으로 잘못된 유비를 한다면 그 어떤 소득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역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뇌가 물리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려는 수고 없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추정함으로써 생겨난 혼동 결과들이 인지심리학에 상당수 남아 있다. 이제 인지심리학의 중심 개념 중 하나인 정신적 표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지심리학에서 생긴 난점들 몇 가지로 시선을 돌려 보자.
인지과학이라 알려진 심리학, 컴퓨터 과학, 언어학, 철학의 혼합 학문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제도화된 것이든 아니든 활기찬 노력을 통해 과학자와 비과학자 모두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는 부분이 상당히 성장했다. 단편적인 행태주의의 여정에는 적지 않은 긍정적인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고, 추론, 의미의 본성, 그리고 그것들과 지각간의 관계에 대한 이상한 오해가 전체 기획을 위협할 만큼 발전했다.
이런 오해의 성격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약간 있다. 그 오해에는 역사적이며 지적인 동시에 실제적인 복잡한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역이 몇몇 복잡한 문제로 빠져들 수 있음을 독자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제를 전적으로 간단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세세한 점을 다루지 전에 오해의 특성을 짧게 묘사해 보겠다. 그 오해는 세계의 대상들이 고정된 범주에서 생기고, 사물들은 본질적인 기술을 가지며, 개념과 언어는 고정된 세계 범주에 형식적으로 부여된 의미를 획득하는 규칙에 의존하고, 마음은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 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 작동한다는 생각에서 생긴다. 어떤 이들은 사고언어, 또는 철학자 포더 Jerry Fodor 가 '멘털리스 mentalese' 라고 부른 것을 통해 이 표상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의미는 그런 언어에 있는 기호들에 부여되는 것인데 그 기호는 개별적으로는 필요조건을 이루며, 공동으로는 충분한 기준이 정의하는 세계의 존재자 또는 범주 (고전적 범주) 와 정확하게 상응한다. 따라서 표상들을 조작하는 규칙들 (구문론을 포함해서) 의 규정은 만약 완전하다면 계산적인 장치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이런 견해에는 뇌는 컴퓨터의 일종이다 (이런 주장들이 앞 절의 주장들과 갖는 유사점에 주목하라).
이런 견해 또는 그 변형된 견해는 심리학, 언어학, 컴퓨터 과학, 인공지능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과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오해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인간생물학과 뇌 과학에서 알려진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경질' 과학 hard science (역주: 물리학, 화학은 하드 사이언스 hard science 로, 생물학은 소프트 사이언스 soft science 로 불린다) 에서 자연으로부터 마음을 제거해서 생긴 성공의 결과로서,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 (논리학, 수학과 같은) 사람과 정신적인 구성물의 특성을 우리의 추론, 그리고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에 부여했다는 데에 잘못이 있다. 우리의 인지적 경관 속에 이성적으로 디자인된 악순환이 이런 식으로 새겨져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심리학 실험실에서 두 마리 쥐 사이에 벌어진 대화가 떠오른다. 쥐 한 마리가 미로에서 성공적으로 빠져 나온 다음 다른 쥐에게 말했다. "내가 우리 심리학자를 훈련시켰다고 생각해. 내가 미로 속을 성공적으로 달릴 때마다 심리학자가 나한테 치즈 한쪽을 주거든."
'사고언어'. 규칙과 표상, 계산이라는 생각들이 왜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지를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나는 인지심리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능주의의 엄격한 가정들을 약간 살펴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객관주의라고 하는 세계관 (특히 과학적 세계에 대한) 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주요 문제, 즉 우리가 실제에서 지각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개념적으로 어떻게 범주화 하는 지와 관련된 증거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을 마친 다음에는 인지적 시도를 위협하는 추론의 잘못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는 논변들과 자료들은 완전히 충분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참고 문헌 추천> 의 연구물들을 참조해야만 한다. 여기서는 최소한으로, 그러나 예리한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그려 볼 것이다. 그 문제들은 마음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려는 든 노력의 핵심이 된다.
인지심리학의 대부분의 업적은 내가 여기서 공격하는 견해들을 고수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반대 견해를 주장하는 소수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즉 인지심리학, 언어학, 철학, 신경과학 등, 설, 퍼트남, 밀리컨 Ruth Garret Milikan, 라코프, 랭거커, 골드 Alan Gauld, 섀넌 Benny Shanon, 호프스텐 Clase von Hofsten, 브루너가 여기에 해당되고 그 외의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실재주의자 클럽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클럽은 비록 흩어져 있지만 그 생각은 한 가지로 수렴하고 있다. 거기서 바라는 바는 딴 게 아니라 언젠가는 소란한 인지심리학자, 그리고 가끔은 잘난 체하는 경험주의자인 신경생리학자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지적인 사기에 걸려 들었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소수의 견해는 내가 말해야 하는 것에 반영될 것이지만 분명히 사람들마다 서로 다르다. 그들의 생각과 해석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더 깊게 알고 싶은 독자들은 그들의 글을 직접 들여다보아야만 할 것이다.
현대 인지심리학에 깔려 있는 중심적인 생각은 심적 표상에 대한 것이다. 이 표상은 추상적이고 기호적이고 (즉 어떤 것, 또는 어떤 관계를 지시한다) 잘 정의된 방식으로 형성되며, 구문론을 이루는 규칙들을 따른다. 표상은 고정되고 결정적인 관계에 의해, 그리고 고전적인 범주 대상들에 기호들을 의미론적으로 할당함으로써, 세계와 의미론적으로 관련이 된다고 생각된다. 표상은 '세계의 내적 모형' 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적 모형이라는 생각은 크레이크 K. Craik 의 제안에서 생긴 것인데 그 견해에서 내적인 표상은 세계의 외적인 구조를 유사하게 따른다. 표상은 개념, 그리고 개념들 간의 관계를 포함하는 명제적인 것이고 또 심상이다. 그 심상의 근원은 지각인데 이 견해에서 지각은, 지금은 고인이 된 마아 David Marr 의 영향력 있는 의미론적인 생각에 따르면, 계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정신적 구조에서 생기는 계산은 규칙 (또는 구문론) 의 체계 그리고 표상 그 자체의 지배를 받는다. 표상의 전 체계는 정신언어를 구성한다.
이 관점이 지향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아마도 의미는 규칙 지배적인 구문론적 규칙으로부터 정의되고, 고정된 세계 대상들 또는 관계들로 가는 대응 mapping 으로부터 생긴다고 선언함으로써 다룰 것이다. 그런 의미론은 철저하고 결정적인 것이며, 자신의 기초가 되는 구문론과 함께 마음을 모형화하는 데 필요한 골격을 제공 한다.
마음에 대해서 아주 형식적이고 체현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런 기능주의, 계산주의 견해는 어떻게 생기게 됐는가? 사람들은 인간 지식, 이성, 정신 활동에 대해 그렇게 추상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음에 대한 이 견해를 비판하기 전에 그 토대가 되는 세계관을 알아보자.
'객관주의' 라는 용어는 과학적이며 동시에 상식적으로도 예외가 없어 보이는 세계관을 규정하는 데 쓰이고 있다 (나는 라코프의 분석을 따르려고 한다. <참고 문헌 추천> 을 보라). 객관주의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는 과학적 실재론 scientific realism 의 가정을 넘어 선다. 과학적 실재론은 ① (사람은 포함하지만 사람에 의존하지는 않는) 실재 세계, ② 개념과 세계 사이의 연계, ③ 그 연계를 통해 얻어지는 변함없는 지식을 전제한다. 객관주의는 이와 같은 과학적 실재론보다 세계는 존재자들, 속성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련들로 이루어진 확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를 더 가지고 있다 (그림 P-5). 이것들은 각 범주를 정의하기에 개별적으로는 필요하고 공동으로는 충분한 범주의 고전적인 기준에 따라 정의가 가능하다.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집합론적 모형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완전히 모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를 정렬할 수 있다. 수리논리학에서 보이는 이런 종류의 모형은 단독으로 또는 집합으로 지어 나타나는 기호적인 존재자들, 그리고 이 존재자의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형에서 기호는 세계의 존재자와 범주에 상응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유일한 방식으로 의미 있게 된다 (또는 의미론적 의미를 부여 받는다).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범주적인 속성들 중 몇몇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고, 다른 몇몇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집합론적인 기호들과 사물들 사이의 상응을 고전적인 범주로써 중복되지 않게 잘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견해에서는 세계의 사물들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기호 체계는 실재를 표상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심적 표상은 그것이 실재를 올바르게 아니면 올바르지 않게 반영하느냐에 따라 틀림없이 참 아니면 거짓이다. 객관주의에 따르면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이런 상응이 언어적인 표현에 의미를 준다. 의미는 이런 '올바르지 않은' 진리 정의에 근거해 있고, 사고 그 자체는 기호의 조작이다.
이 견해는 과학 밖에서는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사실 객관주의의 주장은 상식적인 주장과 상당히 많이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 안에서 주장된다면, 그것은 제2장에서의 논의했던 갈릴레이의 주장과 가까워진다. 그럴 경우 인간의 개념, 주장, 언어는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의 일부에 제한했을 때만 타당하다.

그림 P-5 객관주의와 기능주의의 몇 가지 측면.
우리는 이 견해가 언뜻 보기에는 아무리 그럴 듯하다 하더라도 심각하게 정합적이지 못하고 사실과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견해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엄격한 과학에서 이 견해를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고전적인 화학과 물리학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마음을 제거한 것이 현명한 처사다. 그리고 물리학의 주요한 발전들 중 많은 것이 수학과 논리학의 엄격한 형식적 추론에 의존해서 가능했다.
19 세기 후반과 20 세기 초반에 걸쳐 프레게 Gottlob Frege, 페아노 Giuseppe Peano, 화이트 헤드, 러셀 Bertrand Russell,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서 클리니 Stephen Kleene, 포스트 Emil Post, 처치 Alonzo Church, 튜링, 괴델이 내놓은 심오한 수리논리학과 연구들은 사람이 논리학을 이용해 추론의 '역학' 을 분석해 낸 개가였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이것들의 우아함을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논리적 상형문자라 할 만한 짙은 푸른색의 대작,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를 붙잡고 며칠 밤을 샜다. 그 책은 아주 건조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 당시 지은이들의 인간적인 면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나는 그 후 온순한 성격의 화이트헤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버티, 세계는 순진한 사람들과 얼빠진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네. 당신이 그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게나". 수학자 로타 G. C. Rota 는 최근 몇몇 철학자가 논변을 펼칠 때 기호적인 방식을 채택하여 수학의 명료성을 흉내내어 형식주의와 공리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참고 문헌 추천〉, 제 14 장을 참고하라).
부분적으로는 이런 연구들에 기반을 두고 나온 그 이후의 컴퓨터의 발전은 이미 물리과학을 상당 부분 규정했던 효율성과 엄격함과 연역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북돋았다. 컴퓨터의 '깔끔한' 연역적, 형식적 배경, 수학적인 물리학과 갖는 연계, 엄격한 과학의 성공은 끝없이 확장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과학적인 탐구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은 사람 육체의 표면 (피부와 감각기관) 에서 멈추곤 하는 자연적인 경향이 있었다. 행동은 분석할 수 있었지만 현상적인 경험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과학은 콰인 W. V. Quine 이 말한 것처럼 '외연적' 인 것으로 남을 수 있었고 우리는 콰인을 따라 "존재하는 것을 변항의 값이다" 고 선언할 수 있었다.
계산주의 또는 표상주의는 자연에 대한 신과 같은 전지적인 관점 God – eye view 이다. 이 견해는 눈에 띌 만한 것이고, 마음에 세계 사이에 멋져 보이는 지도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지도는 우리가 몸뚱이를 지닌 사람에게서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 가 하는 문제를 도외시할 때에만 멋지다. 본래의 장소에 있는 마음이 문제된다면 이 견해는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다.
마음에 대한 계산주의 또는 심적 표상주의가 갖는 문제점은 여러 가지인데 보통 여덟 가지 유형으로 묶을 수 있다 (표 P-1). 이렇게 묶는 것은 단지 편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 견해를 공격하기 위한 전투 계획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 P-1 에 언급된 저자들의 글들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고 문헌 추천> 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나는 독자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표에 제시된 문젯거리들을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다루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는 기능주의와 객관주의에 반대하는 주요 비판적 논변들을 훑어보려는 것이지, 그것들을 모두 다 망라하려는 것이 아니다.
표 P-1 의 심적 표상이라는 관념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들
| 1. 지각과 이성은 고전적 범주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다. 생물학 (특히 다윈의 작업) 은 본질주의가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준다 (로쉬 Eleanor Rosch, 비트겐슈타인, 라코프, 메이어). 유사성은 범주화와 같지 않다. 2. 사고는 초월적이 아니며 몸과 뇌에 의존한다. 사고는 체현되어 있다. 의미는 몸의 요구와 기능에 대한 관계들로부터 생겨난다. 마음은 자연을 거울처럼 비추지 않는다 (퍼트남, 밀리컨, 랭거커, 라코프, 존 슨, 설, 에델만). 3. 기억은 내부의 암호나 구문론적 체계에 의해 기술될 수 없다. 더욱이 기억의 완전한 언어적 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고차원적 의식이 필요하다 (설, 섀넌, 골드, 에델만). 4. 언어는 배우는 사건 속에서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함으로써 얻어진다. 그 사실은 의미론과 음운론 사이의 연관을 만들게 한다. 언어는 이미 적소에 개념 체계와 가치들을 가짐에 의존한다 (핑커, 존 슨, 에델만). 5. 마음은 사회적이고 언어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실재에 대한 독자적인 상을 창조하며, 실재는 생물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에 의존한다 (설, 퍼트남). 6. 계산은 체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계산은 기호와 세계 내의 대상들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할 수도 없다 (설). 7. 인지는 진화론적 역사에 의존하는 한 시스템 내에서 고유 기능을 확인함으로써 그 내용을 얻는다. 고유 기능의 각 부분은 '정상적' 설명을 갖는데, 그런 설명은 어떻게 그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를 말해 준다. '의미 합리론' 은 상부로부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없다 (밀리컨). 8.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다양성은 그 진화 및 발생과 마찬가지로 기능주의적 견해와는 양립할 수 없다 (에델만). |
| * 괄호 속 이름들은 이 책 끝에 실린 <참고 문헌 추천> 에 실린 저서를 쓴 저자들의 이름이다. 보다 확장된 논의를 위해서 그 문헌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심적 표상에 관한 기능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범주화하느냐에 대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업적에서 나온다. 이 업적들의 대부분은 사람의 개념적인 범주화에 관심이 있지만 그 중 몇몇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 해당하는 지각적인 범주화에도 관심이 있다. 다양한 분석과 연구에서 내린 결론 중 가장 두드러진 것 한 가지를 들자면 사람은 사물들 또는 사건들을 고전적 범주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범주란 개별적으로는 필요하고 공동으로는 충분한 조건으로, 한 범주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를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 P-5).
비트겐슈타인은 진작부터 이 주제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 에 대해 깊이 생각했는데 그건 범주의 원소들이 범주를 고전적으로 정의하는 공통적인 성질들을 전혀 갖지 않고서도 서로서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림 P-6 의 오른쪽. N 이 m 보다 크다고 할 때 n 개의 성질들이 집합의 원소들에 분산되어 있고 그 집합의 원소인지 아닌지를 알기에 충분한 성질들이 m 개 있다고 상상해 보자. N 개의 성질들 중 m 개가 그 집합의 원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면 두 원소는 똑 같은 성질을 공통으로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다형적인 집합 polymorphous set 이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정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흥미를 자아내는 생각들을 몇 가지 했는데, 어떤 범주들은 그 원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정도가 있을 수 있으나 확연한 경계가 있지는 않다는 것과 또 어떤 범주들은 원소들 가운데 다른 원소보다 더 중심적이거나 원형적인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시대 이후로 심리학자들은 이런 생각들을 지지하는 증거를 확립하기 위한 연구들을 수없이 했다. 그것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이 벌린 Brent Berlin 과 케이 Paul Kay 의 연구인데 그들은 사람의 색깔 범주들이 그 원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그리고 다른 원소보다 중심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정도의 차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브라운 Roger Brown 도 있는데 그는 아이들이 사물에 처음으로 이름 붙이는 것을 보면 가장 일반적이지도 않고 가장 명확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그런다는 것을 보였다. 또 로쉬와 그녀의 공동 연구자들이 한 연구는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것일 텐데 넓은 영역의 연구 도구로서 범주를 분석했다.

그림 P-6 범주화와 다형적인 집합. 왼쪽: 의자들은 개별적으로는 필요하며 공동으로는 충분한 조건 (고전적 범주) 에 의해 반드시 특징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른쪽: 고전적 범주화가 적용되지 않을 때의 집합 구성원에 대한 다형적 규칙. 전형적 집합의 성원들 ("예" 라는 Y 표가 있는 집단) 은 둥금, 짙은 색 또는 좌우 대칭이라는 속성 중 두 가지를 갖는다. 비성원들 ("아니오" 라는 N 표가 있는 집단) 은 그 속성들 중 한 가지만을 갖는다. 이 그림은 데니스 Ian Dennis 와 동료 들의 실험에 쓰인 것이다.
로쉬의 연구는 가족 유사성, 중심성, 원형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빨강' 이라는 범주 같은 것들은 그 경계가 흐릿하지만 그 중 어떤 원소는 범주에의 소속 정도가 0에서 1까지의 척도상에서 1에 필적할 만한 그런 것이다. 이것들은 등급지워진 범주들이다. '새' 와 같은 범주들은 그 경계가 분명하지만 그 범주 안에서도 어떤 새들은 다른 새들보다 더 나은 보기라고 — 더 '원형적' 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범주 원소들에 관한 지식은 때때로 기본적인 수준에서 결정되는데 로쉬가 실험한 대상들에서 그 수준이랑 범주에 속하느냐의 여부, 행위, 쓰임을 상상하고 기억하기가 쉬운 수준을 말한다. '말' 은 기본적인 수준의 범주이지만 '네 발 동물' 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가족 유사성을 받아들인다면, 상위 범주와 하위 범주 사이에 층위적인 관계를 명확하게 긋기란 가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과 정합적인 사실은 범주들이 그 근원에서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과 정합적인 사실은 범주들이 그 근원에서 볼 때 이질적인 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범주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를 결정하는 데 사람들이 쓰는 실제 속성들은 서로 관련을 가지며 서로 다른 생물학적, 문화적, 환경적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경험적인 연구는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비록 때때로 일부 측면이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확증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 범주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 하는 성질의 정도를 유사성도 전형성도 설명해 내지 못하며, 그 성질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추론은 종종 비환원적이라는 것을 립스 Lance Rips 가 보여 주었다. 바살로 Lawrence Barsalou 는 거기에 덧붙여, 불변하는 개념들로 특정 범주를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범주를 표상하는 개념들의 변화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서로 다른 개인들은 같은 범주를 똑 같은 방식으로 표상하지 않으며, 같은 개인이라 하더라도 범주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를 결정할 때 서로 다른 맥락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바꾼다. 이런 생각들과 호응하는 획기적인 연구가 카네만 Daniel Kahne – man 과 트버스키 Amos Tversky 에 의해 이뤄졌다. 그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의사 결정과 범주 판단은 연어 규칙과 같은 개연성 규칙을 종종 어긴다는 것이다. 연언 규칙이란 연언은 결코 연언지 각각보다 더 개인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규칙이다 (역주: 연언문장은 그 구성 요소인 연언지가 모두 참일 경우에만, 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맥락에서는 연언이 더 개연적이라고 실제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여기에 개념적인 범주들에 관심을 쏟았다. 지각적인 범주들은 이 책 본문에서 논의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한 것만으로도 이 연구가 옳다면 마음 – 세계 관계에 대한 객관주의 모형이 곤경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색깔과 같이 중심성과 원형성을 갖는 범주들이 고전적인 범주들과 더불어 존재한다면 객관주의 견해는 적절하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객관주의 모형은 어떤 기호들이 세계에 있는 범주들과 대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룰 수 없다. 이를테면 심리학적인 연구는 마음에 대한 컴퓨터 견해가 마음과 언어 (아무 시나 보면 알 것이다) 의 범주를 다룰 수 없어서 세계에 있는 범주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개인들은 사건들과 범주들을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은 서로 모순적이다. 존슨 Mark Johnson 이 지적했듯이 은유와 환유는 사고를 할 때 주로 쓰는 방식이다. 온유란 한 사물의 성질을 다른 영역에 있는 다른 사물의 성질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환유는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분 또는 한 측면을 이용하는 것이다. 둘 다 객관적인 견해와는 양립 가능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심적 표상에 문제를 일으킨다. 사고 언어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세계와 모호하지 않는 정확한 연계를 요구한다. 의미는 때때로 그런 식으로는 정할 수 없고 그런 연계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에 있는 대상들은 차원이나 부호로 분류되지 않으며, 대상들이 나누어지는 방식은 사람마다 또 시간마다 다르다. 심적 표상의 고정된 의미론은 세계에 새롭게 나타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또 내가 언어를 논의할 때 분명해지겠지만 잘 정의된 부호code 들은 언어적인 표현들의 의미를 다 나타낼 수 없다. 의미는 특정한 부호 체계 내의 고정된 용어 집합으로 제한되는 것을 명백히 거부한다. 표상들은 틀림없이 고정된 채로 있지만 새로운 맥락에서 변화한다 (이는 객관주의 주장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상이 타당하다면 마음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다. 생각이란 세계에 있는 대상들을 확정적으로 지시한다는 전제에 의해 정당화되는 의미론에 기반하고 있는 추상적인 기호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인 범주들은 개념적인 범주화의 대부분의 경우에 들어맞지 않고 사람들이 범주를 실제로 할당하는 방식을 만족스럽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세계와 우리의 범주화 사이에 명백한 대응방식은 없다. 객관주의는 실패한다.
마음에 대한 계산주의 또는 기능주의 견해를 당혹케 하는 또 다른 근원은 기억. 그리고 기억이 자기 및 언어와 갖는 관련과 관계가 있다. 나는 다음 절에서 언어의 어떤 특별한 측면을 생각해 볼 텐데 지금은 자연 언어의 낱말들이 컴퓨터 언어의 용어들과 같지 않다는데 주목하겠다. 나는 다음 절에서 모든 계산이 본성상 구문론적이고, 그러기에 언어 공동체에서 쓰이는 낱말들과 달리 프로그래머 없이는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지적하겠다. 더구나 기능주의자들은 때때로 믿음, 욕구, 소망 등과 같은 명제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퍼트남이 지적한 것처럼 믿음과 욕구는 미리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유동적인 환경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개별화할 수 없다.
문제가 그것말고 또 있다. 사람의 기억은 컴퓨터의 기억과 같지 않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내부 부호와 구문론적인 체계는 사람의 기억을 충분히 기술할 수 없다. 기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그리고 가끔은 혼동스럽게 기술되어 왔다. 곧 (삶의 과거 사건과 관련해서는) 삽화적이라고, (언어와 관련해서는) 의미론적이라고, (동작 행위와 관련해서는) 절차적이고, (진술과 관련해서는) 단정적이라고 등등, 기억은 시스템 속성이다. 기억은 자신을 표현하는 시스템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생물 시스템에서 기억은 시냅스 변화와 같이 기억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메커니즘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생물학적인 기억은 대상을 표상하기 위해 부호화된 복제품이나 자국이 아니다.
사람의 기억은 어떤 꼴을 갖추고 있든지 간에 주체와 풍부한 조직을 지닌 선행 지식의 망이 개방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허용한다. 그래서 '저장', '검색', '입력', '출력' 과 같은 컴퓨터 과학의 메마른 언어로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가 기억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행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하며, 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문젯거리가 되는 것들과 범주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이 서 있는 처지에 관련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가져야 하고 또 의식적인 자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검색을 수행하는 소형인간을 가정해야만 한다 (컴퓨터에서 소형인간은 바로 우리, 즉 프로그래머다). 알고리듬적인 마음에 대한 기능주의 모형은 한 소형인간 안에 다른 소형인간 하는 식으로 무한히 후퇴하지 않고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소형인간과 관련해서 우리는 마음의 문제에 대해 커다란 문제들 중의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지향성 자체를 설명하는 문제다. 우리는 이미 형식적인 의미론이 실재하는 사태를 애매하지 않게 지식할 수 없음을 보였다. 설이 강조한 것처럼 의미론적 내용은 지향성, 즉 다른 사태 또는 대상을 지시할 줄 아는 능력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형식적인 표상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 지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경우에 이 조건은 의식과 자기 — 생물학적으로 근거 지워진 개인적 자각, 즉 일인칭 인간 first person 을 필요로 한다. 제값을 하는 마음에 관한 이론이라면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언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생물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탐구 대상을 계속해서 좇아서, 결국 마음에 대한 기능주의의 설명과는 어울릴 수 없는 생물학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위대한 사고의 혁명은 종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다윈의 노력에서 버릇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연선택이론으로 개체군 사고의 첫 번째 보기를 세상에 제공했다. 메이어가 말한 것처럼 개체군 사고는 변화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즉 오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 5-2 를 보라). 자연선택은 집단 속의 개인들 간에 생기는 변화에 작용한다. 메이어는 종이란 때때로 변종들의 번식과 관련하여 성적인 장벽이나 지리적인 장벽이 생긴 결과이거나 심지어 우연히 생긴 것임을 보여 주었다.
개체군 사고의 이런 부분에서 비롯된 종 개념은 범주화에 대한 모든 생각들에 중심이 되는 것이다. 종은 '자연종 natural kinds' 이 아니다. 종의 정의는 상대적이며, 동질적이지 않으며, 정의를 할 때 필요한 조건을 미리 갖추지 못하며, 분명한 경계선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체군 사고는 유형학적인 사고에, 또는 종의 '본질' 이 특정 유기체나 사례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본질 주의에 치명타를 가한다. 플라톤이 가장 분명하게 정식화했고 그 이후 대부분의 관념론 철학에 반영됐던 본질주의는 고전적 범주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비록 생물에게 분류법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본질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생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전에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본질주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할 때 역시 틀린 것 같다.
설, 라코프, 존슨,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여러 학자들은 사고란 초월적인 것이 아니고 육체와 뇌에 의존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런 주장은 소프트웨어의 실현이 하드웨어에 독립적이라는 기능주의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기능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에 따르면 마음은 체현되어 있다. 육체가 얼마만큼은 마음이 지시하는 바를 틀림없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슈탈트 지각이 그런 지시다. 게슈탈트의 범주들 (보기로는 그림 4-2 를 보라) 의 정당성은 세계에 있는 유일한 패턴이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고, 그 범주들은 종종 수정 불가능 하다. 게슈탈트, 심상, 육체의 움직임, 지식의 조직은 모두 어느 정도 진화와 발생상의 강제 산물임에 틀림없다.
자연언어의 구문론과 의미론이 구조는 갖지만 의미는 갖지 않는 형식적인 구문론과 의미론의 특별한 경우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기호는 생물학적 견해에서 볼 때 형식적인 수단으로 의미를 부여 받지 않는다. 그 대신 기호적인 구조는 애초부터 의미 있다고 가정된다. 육체의 구조와, 진화와 행동의 산물인 적응적인 쓰임이 범주들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지 기호들은 실제 뇌가 포함하는 개념적 장치에 대응됨에 틀림없다. 진리와 지식은 이런 장치에서 그 근거를 찾고, 진화론적으로 도출된 가치계에서 최초의 토대를 찾는다. 라코프, 존슨, 모델, 그리고 나를 포함해 이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에 따르면 기호들이 세계와 직접적으로 짝을 이루지 못할 때, 사람은 관련을 맺게 하기 위해 상상과 육체의 지각 말고도 은유와 환유를 이용한다. 마음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실재의 측면들을 창조한다. 생물학 자체처럼 이런 상호 작용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존한다. 나는 이런 문제를 다음 절에서 언어와 언어의 습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직접적으로 다루겠다.
체현 말고, 관건이 되는 문젯거리가 또 있으니 기능에 관한 것이다. 밀리컨은 마음, 언어, 그리고 그녀가 '다른 생물학적 대상' 이라는 생물학적 대상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하여 기능에 대해 깊게 통찰했다. 진화를 알고 있는 생물학적 대상은, 이를테면 분자와는 다른 기능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화학적인 대상인 분자에 대해 '이상 abnormal' 기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대상에는 진화의 역사에 따라 형성되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 심장에는 피를 순환시킨다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 또한 종에서 그런 항목이 출현하는 것에 대해 밀리컨이 '정상적 normal' 설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그것이 이 기관과 저 종의 '정상적인' 심장과의 유사성을 설명해 준다. 심장이 잘 작동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 잘못 기능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반면에 유기 화학물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은 그 생물체가 '작동한 것' 의 일부다.
진화 도중에 살아남은 개체가 번성함을 설명하는 기능들은 고유한 기능들이고 그것과 관련해서 살아남은 개체가 어떻게 해서 그 기능을 역사적으로 수행해 내게 됐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정상적인' 설명이다. 재미있는 것은 상태와 활동들이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서도 고유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정상적인' 설명과 일치 하는 더 나아간 다른 고유 기능들에 기여하지 않고서도 고유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계에서 역사적인 현상이 실패나 기대하지 못했던 성공으로 이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밀리컨은 심리학을 생물학의 한 분과로 생각하는데 나도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인지가 고유 기능을 분별해서 내용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요한 주장이다. 기능의 각 집합은 시스템이 그 기능을 이렇게 수행해 내게 됐는가와 관련되어 '정상적인' 설명을 한다. 밀리컨의 인지에 대한 견해에서는 그것이 생리학의 맥락에 놓이게 되고 (이를 테면 내가 이 책에서 논의했던 가치계의 맥락에서), 믿음과 욕구이론에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능주의의 명제적 태도와 달리 지향성에 대한 이런 이론은 일상적인 민간심리학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정신적인 기능을 규정하는 방식) 의 쓰임이나 언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주: 민간심리학은 사람의 믿음, 의도 등에 의존에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상식심리학 commonsense psychology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밀리컨은 뇌가 기호를 조작하는 것 또는 의미론적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믿음들과 욕구들 각각에 나타난 의미 있는, (즉 육체에 나타나 의미 있는) 차이점과 그것들의 정상적인 기능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에 기반하여 그 믿음들을 '정상적으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의미와 진리는 이런 통로를 통해서 평가되지, 그녀가 '의미 합리론자' 라고 이름 붙인 반대편이 주장하듯 상응 개념에 입각하고 있는 의미론을 통해서 평가되지 않는다.
내가 기술한 논변의 결과는 생물학의 사실들 때문에 마음은 초월적이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신과 같은 전지적 관점이란 없다. 본질주의는 계속 유지될 수 없고, 기능주의, 객관주의, 그리고 마음을 기계라고 생각하는 '계산주의 실재론' 의 형태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내가 이 책의 앞쪽 장들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기술했듯이 문제점의 또 다른 근원이 존재한다.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이 겪는 변화 그리고 뇌가 세계의 사건들과 관련되느냐에 따라 해부학적인 연관을 발전시키는 방식 모두 기능주의의 주장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
이상의 분석이 보여 주는 증거가 인지적 전망 위에 새겨진 악순환을 깨트린다. 그러나 의미와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음이 체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문제는 어떻게다. 또 어떻게를 설명한 다음에, 이 설명이 자기와 의식의 발달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의 본문에서 시도한 일이다. 나는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고차원적 의식과 관련해서 언어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이 <후기> 에서 내놓은 논변의 맥락에서 볼 때 언어와 관련해서 특별히 제기되어야 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몇 가지 더 있다.
우선 언어에 대한 형식적인 견해가 내가 범주에 대해 말했던 것과 어떻게 모순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인지 모형에 대한 몇 가지 제안과, 범주화에 관해서 알려진 사실과 더 잘 일치하는 문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건드려 보고자 한다. 나는 형식적인 견해와 인지적인 견해, 이 두 견해를 견주어서 독자들에게 그 견해들의 전제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훑어보게 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언어 연구는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고 언어학의 영역은 극도로 복잡하다. 그것들을 전부 섭렵한다는 것은 내 전공을 벗어나므로, 여기서 이 연구들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겠다. 우리 목표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길잡이가 되는 사실들만 알면 된다. 나는 그것들을 간단히 기술하고 나서 주요 쟁점으로 넘어갈 것이다. 주요 쟁점이란 문법에 대한 형식적인 접근이 심리학에 대한 객관주의적 접근, 그리고 엄격한 기능주의적 접근과 같은 운명에 처하느냐는 것이다.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소리와 몸짓을 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소리나 몸짓을 낼 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에서 형식과 의미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이다. 언어의 두드러진 특징은 창조성이다. 언어에 능숙한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구절과 문장을 만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문법적인 표현에서 올바른 표현과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분간할 수 잇다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언어학자들은 화자의 문법에 관한 이론을 세우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법적이라는 것은 쓰임에서 도출한 기술적인 규칙에 상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가장 넓은 의미에서 문법은 음운론 (소리 체계), 형태론 (이 맥락에서는 낱말의 형성), 의미론 (의미의 체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모든 법칙들은 촘스키 Noam Chomsky 가 채택한 표현인 '보편 문법 universal grammer' 을 구성한다고 한다. 촘스키의 획기적인 제안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이 보편 문법을 이루는 공통된 문법적 특성의 집합을 갖는다.
촘스키는 또한 언어가 사람에게 유일하다면 그리고 어린이의 실제 언어적 수행이 어린이가 갖는 시험 가능한 능력에 의해서 미결정적이라면, 사람에게 본유적인 '언어획득 장치' 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이란 언어 공동체에 속하여 발전해 가는 획득된 기술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이 범주화해야 한다. 우리는 개념 또는 의도를 개발해야 하고, 문법과 음운론에 따라 표현을 해야 하고, 말을 다른 이와 주고받을 때 똑똑히 발음하고, 이해하고, 조정해야만 한다.
대화자로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그라이스 H. Grice 가 말한 것처럼 협동적인 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요구되는 단계의 정보만 알 필요가 있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간략해야 하고 질서 있어야 하고 애매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순서를 잘 지켜야 한다. 그 밖에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와 '그 때 거기서 there and then' 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지시사 deixis 가 대화자와 대상을 공간상에 위치시킨다. 또한 의사소통할 때의 의도는 적절한 의사 행위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전술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재치 있는 행위다.
언어 공동체에서 언어 습득은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 다르다. 더구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반드시 똑같지 않다. 언어적인 지식에 대한 연구, 곧 심리언어학과, 언어의 생물학적이고 신경학적인 근거에 대한 연구, 곧 신경언어학을 여기서 모두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제 12 장에서 언어 습득과 사용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그것을 여기에서 되새겨 보면 습득과 숙달하는 연습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고와 언어가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문제를 도입함으로써 가능하다. 개념 체계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풍부하고 체현된 개념 체계가 있다는 데에 달려 있는가? 또는 언어 습득 장치에 의해 발전하는 자율적인 것인가?
이런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충실하고 영향력 있는 접근 중의 하나는 촘스키가 주도했다. 그의 형식 체계 접근에서는 구문론의 규칙들이 의미론과 독립적이라는 것을 주요 전제로 삼고 있다. 이 견해에서 언어는 그 밖의 나머지 인지와 독립적이다. 나는 이 개념을 문젯거리고 삼지 않을 수 없다.
문법이 형식적인 체계라는 생각 아래 만들어진 규칙들의 집합은 본질적으로 알고리듬적이다. 그런 체계에서는 의미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 촘스키의 이른바 생성문법 generative grammer (그림 P7) 은 구문론이 의미론과 독립적이고, 언어 능력은 외적인 인지 능력과 독립적이라고 가정한다. 문법을 이렇게 정의하면 인지 일반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여 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에도 끄떡없다. 생성 규칙이 만들어 낸, 일련의 해석되지 않은 기호들의 집합으로 정의된 언어는 컴퓨터 언어와 흡사하다. 기호에 의미론적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기호가 실제 세계 또는 사고 언어와 짝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림 P7 생성문법의 표본적인 가지. 이것은 구문론을 전개하고 분석하는 데 이용된다. 촘스키에 따르면 보편문법의 규칙은 그러한 구문론 또는 그 현대적 표본에서 작동하는 타고난 언어획득 장치를 인간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의미론과의 관계는 객관주의 가설에 의해 확인된다 (그림 P5). 이 문법적 분석은 촘스키 자신의 더 최근 이론인 지배속박이론으로 대체되었으나, 그 기본 가정은 불변적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이 견해의 밑바탕에는 객관주의의 주장이 깔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곧 범주들은 고전적이고, 세계에 있는 존재자에 모호하지 않게 부여함으로써 의미론이 형성된다. 이렇게 정의되는 언어는 객관주의 주장에 닥치는 모든 난점들과 맞닥뜨린다. 이 견해가 범주화에 대한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는 언어와 독립적으로 이미 생각하는 개인의 사고와 느낌을 전달하는 구실을 언어가 한다는 사실도 무시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많은 단순한 사물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어린이가 어떻게 복잡한 언어를 습득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언어 습득 장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수많은 관찰들이 촘스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 관찰들이란 이를 테면 도날드슨 Margaret Donaldson 의 ≪어린이의 마음 Childern's Minds≫ 이란 책에 기술된 것과 같이 어린이의 생각과 언어획득에 관한 것이다. 도날드슨은 촘스키가 언어학의 연구 영역을 어린이가 어떻게 문법 지식을 얻는가에 관한 연구에 집중시켰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언어학자들은 어린이의 말을, 그러한 발화를 만들 수 있는 규칙들의 집합에 기반한 관점에서 수집하고 해석했다. 이런 시도에서 많은 부분들이 무시되었는데 거기에는 어린이가 실제로 의미했던 바와 이해했던 바도 포함된다.
도날드슨이 차근차근 말한 것처럼 맥나머러 John Macnamara 는 어린이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상호 작용이 개입된 상황을 어린이가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린이는 우선 사물을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는 행위를 이해한다. 도날드슨의 요약 덕택에 어린이가 사물들을 자신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린이들은 네 살쯤이면 우리가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능숙하게 연역적인 사고를 하고 추론을 한다. 또한 어린이는 우선 상황과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말해진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언어가 그 밖의 나머지 인지와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 습득을 발생적으로,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으로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제12 장에서 길게 논의했는데 거기서 나는 개념적이면서 동시에 언어적인 체계가 어떻게 체현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언어를 바라보는 대안적인 방법을 논하기 전에 소설가 퍼시의 선견지명이 있는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퍼시는 언어에 대한 수필들을 묶어서 ≪병 속의 이야기 The Message in the Bottle≫ 라는 책을 출판했다. 언어와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의 삶과 작품의 핵심이라는 것이 내 느낌이다. 퍼시는 생성문법 또는 변형문법 transformational grammar 이 언어를 설명할 수 없고, 그 문법은 언어 능력에 대한 형식적인 기술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알고리듬을 그렇게 모아 놓은 것과 사람의 머릿속에 든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련도 없는 것이다. 그는 또한 개별적인 앎이란 지향적일 뿐만 아니라 기호적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내가 고차원적 의식이라 부른 것 (제 12 장을 보라) 은 '함께 앎' (곧 con-sciousness) 이다. 퍼시는 언어적 행위의 상호 주관적인 성격에 관심을 두지 않는 행태주의와 기호학의 언어 해석을 모두 비판했다. 그는 또 "다른 사람을 고려치 안았다" 고 해서 현상학도 비판했다. 그는 의미를 포함하는 모든 기호적인 교환은 기호와 대상 그리고 적어도 두 사람을 고려하는 삼중관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퍼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의식의 행위는 기호의 후원 아래서 대상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그는 켈러 Helen Keller 가 물이 '물' 이라는 것을 배웠을 때의 환희와, 그것을 안 다음에 다른 사물들이 무엇 '이었는지' 를 알고자 했던 그녀의 끈질긴 욕망에 대해 묘사한다. 퍼시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환경만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는 지향성과, 주관의 투사들과, 감정과, 선입관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태인 여행자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텔아비브에서 피곤하긴 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낸 다음에 그들은 나이트클럽에 가기로 결심했다. 코미디언 한 명이 무대에서 히브리 말로 짤막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코미디언이 우스갯소리를 몇 마디하고 나자 여행자 중 한 명이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포복절도를 했다. 그러자 그의 동료가 내려다보면서, "무엇 때문에 웃어? 너는 히브리 말을 이해 못하잖아" 하고 말했다. 바닥에 넘어진 그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들을 믿어."
형식적인 의미론은 그런 풍부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 가지 접근 방법은 '인지문법' 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인 분석보다 인지에 관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랭거커가 초기의 개척자인데, 그의 책 ≪인지문법의 토대 Foundations Cognitive Grammer≫ 가 이 분야에서 도움이 될 만한 연구 역사와 원리들을 소개해 줄 것이다. 인접 분야의 주제들이 항용 그러하듯 여기서 용어들은 서로 다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 고안된' 용어인 랭거커의 용어보다는, 랭거커의 것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뇌이론에 대한 나 자신의 연구와 더 가까운 라코프의 논의와 제안을 따르겠다. 범주화에 대한 유용한 사실에 적합한 인지 모형을 세우고 또 의미가 체현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의미론을 세우는 이 언어학자의 시도를 한 가지 예로서 살펴보기로 하자.
라코프는 생성문법의 방식보다 훨씬 더 생물학적, 심리학적인 사실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문법과 의미론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범주화에 대한 실제적인 자료에서 출발해서, 의미가 육체와 뇌의 고유한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각 개인들이 육체뇌와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과 관련된 개념들을 반영하는 인지 모형을 만든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로쉬가 말한 기본 수준의 범주를 형성하게끔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개념적인 체현이다.
인지 모형은 사람이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 모형은 이상화된다. 다시 말해서 추상 작용이다. 그러나 인지 모형은 감각경험의 결과 생긴 심상에 의존하며 운동 경험 — 곧 육체가 공간과 갖는 관계에도 의존한다. 라코프는 이런 기능들을 이용하면 여러 가지 심상과 운동의 도식이 생기게 된다고 말한다. 도식은 나중에 은유와 환유를 사용할 때 드러나는 특성들을 갖는다. 은유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한 가지 사물로 다른 사물을 지시하거나 대응시키는 것이며, 환유란 한 사물 자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사물의 어떤 부분이나 측면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한 것을 되새겨 보라. 라코프가 은유로 든 보기는 "화는 위험한 동물이다" 는 것이다. 환유로 든 보기는 "햄 샌드위치는 값을 지불하지도 않고 떠났다" 이다.
꼭 이해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상화된 인지 모형들이 개념적인 체현을 담고 있고, 개념적인 체현은 언어에 앞서 육체적인 활동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개념적인 체현은 범주화에서 쓰이며, 실제 사람의 범주화가 이질화되고 복잡하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 마음의 범주들은 인지 모형에 있는 원소들과 상응한다. 이 모형에서 어떤 것들은 원소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정도의 차를 인정한다. 다른 모형들은 고전적인 범주를 허용하고, 개별적으로는 필요조건이면서 공동으로는 충분조건인 것들에 따라 만들어진다 (모든 범주들이 다 고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모순이 전혀 없음에 주목하라!). 어떤 모형들은 환유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잡한 인지 모형들은 라코프가 근본적인 범주라고 부른 것과 상응한다. 이것들은 중심부 둘레에 연결된 많은 모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부에 있지 않은 모형들 (그리고 범주들) 은 중심 범주에 대한 지식으로 예측할 수 없기는 하지만 중심부와 관련을 맺을 수는 있다. 라코프는 그것을 중심부에 의해 '동기 지워진다' 고 말한다.
그런 특징들은 원소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속성에, 중심부에 있는 모형들과 관계를 갖느냐 하는 속성에, 가족 유사성에, 기본적인 범주와 비계층적인 관계를 갖느냐 하는 속성에, 원형적인 효과에 정도 차를 허용한다. 원형적인 효과는 기본적인 것이 아니고 많은 근원에서 생긴다. 곧 '수량적인', '고전적인', '환유적인', '근본적인' 근원에서.
라코프는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인지의미론의 구조를 세우려고 한다 (그림 P8). 우선 의미는 환유의 밑받침이 되는 심상의 도식, 운동 도식, 환유, 범주적인 관계에 의해 체현된 것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진 않다. 언어는 기호적인 모형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통 생각한다. 기호적인 모형이란 언어적인 정보를, 그 자체가 미리 존재하는 개념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인지 모형과 짝을 이루게 하는 모형이다. 미리 존재하는 개념적인 모형이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경험과 맺는 관련을 통해서 이미 체현되었다면 이 관련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에 정신적인 표상을 통해서 생성문법과 맺는 관련은 임의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문법학자들이 하늘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다.
이런 인지의미론의 견해에서 언어적인 범주들은 자연스럽게 인지 모형과 강한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언어는 명제적인 모형, 심상도식 모형, 은유적인 모형, 환유적인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 일반 적인 인지적 메커니즘을 이용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은유적인 모형에서 한 영역의 구조는 다른 영역에서 그에 상응하는 구조와 대응되어 있다, 이런 대응은 명제적인 도식이나 심상의 도식이나 심상의 도식을 끌어들인다. 은유적인 모형은 이런 도식들을 사용하고 또 모형의 한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 가는 함수 (이를 테면 – 전체함수) 를 대응시키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

그림 P-8 인지문법의 진행가정에 대한 라코프는 사례. 생성문법과 대조적으로 (그림 P-7), 규칙은 언어적 경험을 통해 획득되며, 의미는 개념이 체현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종류의 문법이, 브레스넌 Bresnan 의 어휘기능 문법과 같은 주류 생성론이 지니는 분석력을 갖는 것인지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주화와 문장 구조에 (체현을 통한) 의미관계에 대한 도식을 부여한다. '단계들' 은 시간상 반드시 연속적이지 않으며 중복된다. 초기의 언어획득 중에 그것들은 거의 중복되지 않음에 틀림없다. ICM = 이상화된 인지 모형.
라코프는 ≪여자, 불, 그리고 위험한 것들: 범주가 마음에 대해 드러낸 것 Woman, Fire, Dangerous Things≫ 에서 그의 동료 존슨의 연구 (≪마음속의 육체: 의미, 상상력, 이성의 육체적인 근거The Body in the Mind≫) 를 이용하여, 언어적 의미의 근거를 제공하는 체현된 개념들에 토대를 둔 일련의 도식들을 구성한다. 이것들은 (경계 또는 '안과 밖' 을 정의하는) 그릇 도식, 전체-부분 도식, 연과 도식 (줄 같은 것으로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 중심부-주변부 도식 (육체의 중심부와 팔, 다리에서와 같이), 근원-과정-목표 도식 (출발점, 방향이 있는 과정, 중간 지점), 그리고 위-아래 도식과 앞-뒤 도식을 포함한다. 그는 그 다음에 계속해서 은유는 도식에서 결과하는 경험을 구조화하는 데서 그 동기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테면 근원-과정-목표 도식은 우리 육체의 기능에서 생겨서, 우리 경험에 두루 퍼지고 잘 구조화돼서, 잘 이해된다. 그 도식에 근거하는 어느 은유에 대해서든, 목표가 되는 영역뿐만 아니라 근원이 되는 영역들은 이 도식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상호 관련을 가질 것이다. 선행하는 기본 수준의 개념들과 심상 도식적 개념들은 직접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그 도식이 근거가 된다. 또 그것들은 단순한 개념으로 더 복잡한 개념을 만드는 의미론적 구성 규칙의 출발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은 라코프의 '형태 가설의 공간화' 라는 데에 집약되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범주들은 그릇 도식으로써 이해되고, 등급적인 구조는 부분-전체 도식과 위-아래 도식으로써 이해되고, 관계적인 구조는 연관 도식으로써 이해되고, 범주의 근본적인 구조는 중심부-주변부 도식으로써 이해되고, 전경-배경 구조는 앞-뒤 도식으로써 이해되고, 선형적인 양의 눈금은 위-아래 도식과 선형적인 순서 도식으로써 이해된다. 이 모든 것은 물리적인 (또는 공간적인) 구조와 개념적인 구조 사이의 은유적인 대응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정확히 어디에서 들어오는가? 이상화된 인지 모형들에서 볼 때 그 모형들 중 몇몇은 기호들로 이루어진 구조다. 이 모형들은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심상 도식적인 유형, 은유적인 유형, 환유적인 유형, 명제적인 유형, 기호적인 유형이 그것들이다. 이것들 중에서 언어적인 기능으로 나가는 것들은 명제적인 이상화된 인지 모형과 기호적인 이상화된 인지 모형이다.
명제 적인 이상화된 인지 모형은 은유, 환유, 정신적인 상상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기본적인 개념들인 존재자, 행위, 상태, 속성을 이용한다. 단순한 명제들은 부분-전체 도식을 따른다. 명제는 전체이며 거기서 술어가 한 부분이고 입력값 (행위자, 피동자, 경험자, 도구, 위치 등) 은 다른 한 부분이다. 의미론적 관계들은 연관 도식에서 생기고, 복잡한 명제들은 단순한 명제들을 수정, 양화, 연어, 부정 등을 해서 생긴다. 더구나 초기 상태, 사건들은 연속, 마지막 상태를 근원-과정-목표 도식으로써 구성하여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다.
언어적인 요소들이 개념적인 이상화된 인지 모형과 관계를 맺으면 이 모형은 기호적인 이상화된 인지 모형이 된다. 그렇다면 그 모형은 특정 언어의 형태소들과 낱말들로부터 규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명사는 근본적인 범주다 (중심부 범주들은 사람, 장소, 사물이고, 비 중심부 범주들은 '힘' 과 같은 추상명사다). 동사도 근본적인 범주다 (중심부 범주는 뛰거나 치거나 주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수준의 물리적인 행위다). 이 범주들의 나머지 원소들은 이런 중심적인 원소들과 갖는 관계를 통해서 유발된다. 의미론과 갖는 관계는 분명하다.
구문론 그 자체는 무엇인가? 라코프는 그가 논의한 원리들 때문에 우리가 구문론적 범주들에 의미론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등급적인 구문론적 구조 (보기를 보려면 그림 P-7 을 보라) 는 그 자체를 부분-전체 도식이 규정하고, 주요어와 구식어구 구조는 중심부-주변부 도식이 규정하고, 문법적인 관계는 연관 도식이 규정하고, 구문론적 범주는 그릇 범주가 규정한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해 보라. 문법적인 구성 그 자체가 이상화된 인지 모형이다. 따라서 구문론과 의미론적으로 짝을 짓는 것은 구문론에 대한 이상화된 인지 모형에, 의미론 또는 의미에 대한 선행하는 이상화된 인지 모형을 직접 짝짓는 것이다. 문법 구조와 어휘 목록에서 보이는 규칙성은 근본적인 범주를 통해서 기술할 수 있고 이 용어들을 가지고 다중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이 견해에서 그리고 랭거커의 견해에서 언어는 인지, 다시 말해서 육체적인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지 모형에 근거하고 있다. 이 인지적 토대는 물리학적 실재의 제약을 받으며 또 상상력과 사회적 개념들이 이런 뜻에서 의미 있을 때 생기고, 진리는 한 명제의 이해가 자기 자신의 목표에 견주어 관련된 상황을 이해한 것과 맞아떨어지면 생긴다고 한다 (실용주의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 또는 신과 같은 전지적인 관점이란 없다. 존재하는 것 (형이상학) 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인식론) 와 독립적이지 않다. 라코프가 말한 것처럼 "진리란 개념에 앞서며 뚜렷이 구조화된 경험과의 직접적 연관 또 그 경험과 일치하는 개념들과의 직접적 연관에 기반하는 자력작용이다." 이것은 제15장에서 말한 한정실재론과 관련해서 내가 제안한 것과 들어맞는다.
지식도 진리처럼 근본적인 개념이다. 지식은 우리의 이해, 기본적인 수준의 개념, 또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이해에 의존한다. 지식은 사람의 이해가 확실할 수 있는 만큼 확실하지만 언제나 수정의 가능성이 있다. 객관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능한 한 많은 관점들의 상황에서 본 것에 의존하며, 기본적인 수준의 개념들과 심상도식 개념들을 단지 간접적으로만 의미 있는 개념들과 구분함으로써 얻어진다.
분명히 라코프의 인지문법 (그림 P-8) 이 내놓은 보기는 널리 받아 들여지는 생성문법 (그림 P-7 을 보라) 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그 철학에서, 양식에서, 방법론에서 다르다. 인지문법은 뇌와 육체적인 기능의 생물학적인 토대와 범주화에 대한 심리학적인 자료와 더 잘 맞아떨어진다. 또 '사고 언어' 제안이 저지른 범주오류와, 생성문법에 내재하는 객관주의의 실수를 피한다. 인지문법은 상상력이 풍부하며 중요한 제안이다. 그러나 의미의 근원으로서 체현을 제안하면, 인지문법은 어떻게 이것이 일어나는 지를 보여 주지 못한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뇌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생물학이론과 의식에 대한 이론이 필요한데, 이런 이론들은 모두 진화와 성장에 대한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점이 내가 나의 3 부작을 통해서 세우려고 시도한 것이고, 이 책에서 재검토한 바다.
라코프의 인지문법과 내가 제 12 장에서 기술했던 언어획득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유용할 듯하다. 인지문법은 체현 개념에 그 근거가 있으나 그 체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언어의 길잡이가 되는 구조라 할 만한 근본적인 범주들, 은유, 환유의 기호들을 캐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구문론적인 관계가 등장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범주화를 사용한다. 이 모든 점들에서 인지문법은 제 12 장에서 보여 준 후성설과 양립 가능하다. 이 이론은 진화 및 언어 습득과 관련된 문젯거리들을, 체현의 메커니즘이 빠져 있는 라코프의 이론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명한다. 실제로 후성설은 (어휘 목록을 강조하는) 브레스넌의 이론과 같이 대규모의 구조적인 생성문법이론을 취하고, 라코프의 이론과 같이 그 문제들을 범주적인 토대를 갖는 이론과 연결시키는 데 대한 추가적인 근거를 제공해 준다. 브레스넌식 접근의 생성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랭거커의 방식은 어휘목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브러스넌식의 접근을 닮았다. 문법이 형성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 형성, 가치-범주 형성, 표현형과의 관련, 의식의 메커니즘과의 관련에 관한 뇌의 메커니즘을 분석 해야 한다. 또 랭거커, 브레스넌 등이 기술한 용어를 가지고 특정 언어의 문법을 파헤쳐야 한다. 내가 제시한 것과 같은 체현이론이, 언어이론에 대해서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접근 방식들을 어떻게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함으로써 방대한 연구 영역이 열릴 것이다.
라코프의 ≪여자, 불, 그리고 위험한 것들≫ 은 전체적인 뇌이론의 토대를 제공하는 시도를 했던 나의 책, ≪신경 다위주의≫ 과 거의 같은 때에 나왔다. 나의 그의 책을 몰랐었고 그도 내 책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신경 다위주의≫ 이 다룬 중심 문제는 지각적인 범주화였다. 나는 그 다음 책인 ≪기억된 현재: 생물학적 의식이론≫ 에서 지각적 경험, 개념 형성, 언어 문제를 더 깊게 다루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이 두 책은 문법과 인지의 체현이 중요함에 대한 랭거커와 라코프와 존슨의 제안 중 많은 부분에 꼭 필요한 생물학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를 훌륭히 보충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도 또 내 연구도 구문론적 구조를 이해하려는 다른 언어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과 인지심리학자의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생물학이 없이는 그것도 충분하지 못하고 이따금 잘못된다. 이것이 내가 이 <후기> 에서 보여 주려고 했던 바다.
나는 본문과 후기를 모두 읽은 이들에게 도적이 꽤 분명하게 행해 졌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식과 언어에 대한 이론에 생물학을 끼워 넣어야 한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내가 이 책에서 생물학적으로 기초한 인식론이라 부른 것 — 우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지를 진화와 발생생물학에 비추어서 설명하는 것 — 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목표를 완전히 실현하면 우리의 과학적 지평이 넓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유일하게 사람이게끔 만드는 사실과 그것이 연결되면, 생물학에 기초한 인식론은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