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개인의 영혼 : 어리석은 환원론에 맞서서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 Gerald M. Edelman 지음, 황희숙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98 (원서 : Bright Air, Brilliant Fire : On the Matter of the Mind, BasicBooks, 1992), Page 256 ~ 263.
우리에게는 우리 머리보다 더 현명한 어떤 것이 있다. ... —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 어떻게 사고, 의지, 판단, 감정, 정서, 꿈 등의 문제에 그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식과 의미의 필연적인 토대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기술하려고 한 나의 애초 의도와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 나는 그런 기술이 일단 구체화되면 더 깊고 충분한 심리학적 해명을 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그렇게 했다. 마음의 작용에 대한 이런 고차원의 산물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한 연구를 하려면 별개의 책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에 대한 우리의 입론들이 어떻게 심리적 활동과 연관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여기서 내 의견을 말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의식을 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조합한 동일화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사고에는 획득된 요소들이 더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심상들, 의도, 추측, 논리적 추론 등이 그것들이다. 사고는 여러 단계의 정신적 활동의 혼합물이다. 사고는 가장 높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기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하나의 기예 skill 다. 미술적인 사고에서 보이는 공간적인 능력들과 음악적인 사고에서 보이는 음조와 리듬 능력들은 예외로 하고, 고차원적 사고는 언어와 논리 모두에 강하게 의존한다. 또 사고자가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다른 '대화자' 와 사고자 사이의 내적인 대화에 강하게 의존한다. 이것은 아렌트 Hannah Arendt 가 《마음의 삶 The Life of the Mind》에서 말한 '하나 속의 둘' 이다. 그녀는 독일어 이성 Vernunft, 곧 순수 사고 또는 이성과, 곧 지각, 감정 등과 같은 인지과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오성 Verstand, 즉 지성이 구분됨을 지적한다.
이 구분이 과학적 용어에서 유용한지 확신할 순 없지만, 사고가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냐를 강조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순수 사고의 양식에 있는 사고자는 사고 계획과 관련되어 있는 특정한 주의 상태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추상화되어' 있다 ㅡ 시간, 공간, 자기, 지각적 경험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수준의 의미와 추상작용을 추구하므로 "사고는 어디에도 없다" 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 마음이 하는 다른 비슷한 활동들을 모르고 있는 정도를 표현하는 은유에 불과하다.
사고에서 어떤 기예를 사용하든지 ㅡ 논리학, 수학, 언어, 공간적 기호나 음악적 기호 어떤 것이든 ㅡ 우리는 그 기예가 제임스가 말한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고, 솟구치고 가라앉는 과정을 겪으며, 주의 注意 에서 생기는 커다란 변화에 민감하며, 일반적으로 은유적인 과정과 환유적인 과정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순수하다는 인상을 우리가 받을 때는 지각, 개념 형성, 기억, 주의 상태들의 그 많은 평행적이고 동요하며 일시적인 과정들이 기호적인 대상 ㅡ 일련의 논리적인 명제들, 책, 미술 작품, 음악 작품 ㅡ 들에 '저장되어' 있을 때뿐이다. 사고는 다른 사고, 심상, 상상된 목표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의 영역 ㅡ (열중하는 주의 상태에 있는) 사고자가 정의 가능한 어느 시간에도, 그 어디에도 없는 그런 장소 ㅡ 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인상으로부터, 생물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플라톤주의와 본질주의로 빠지기가 매우 쉬운 것이다.
사고는 의식적인 배경이 없이는 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론은 사고에 대해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사고는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지각적 삶과 개념적 삶의 평행적인 수준과 경로로부터 엮어진 하나의 기예다. 그것은 결국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의 제약을 받는 기예다. 이 기예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에 대한 경험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사회적인, 감정적인, 언어적인 상호 작용을 필요로 한다. 사고, 개념, 믿음은 외부 세계의 사건들을 언급해야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 특히 언어적 경험을 지닌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상호 작용을 언급해야만 개별화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경과학의 자료만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사고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말과 관련해 신비스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경과학적 설명은 궁극적인 설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완전한 발생학적 설명이 내가 어떻게 사람처럼 생기고 행동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것일 수는 있으나 낵 왜 사람인가는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는 말과 비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사건들과 자연선택을 포함하는 진화론적 설명을 추가해야만이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관점에서, 심리학을 신경과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의 기예로서 사고를 추구함이 은유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상호 작용, 규약, 논리에도 의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순수한 생물학적 방법은 현재 존재하는 대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가장 상위 단계의 사고가 회귀적이고 기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의미론적 해석의 특이한 근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상호 주관적인 의사소통이 사고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진짜 대화자나 가상의 대화자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우리는 이런 능력들을 그 자체로 이용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필연성은 의식에 대한, 그리고 의미를 체현하는 과정에 대한 건전하고 생물학에 근거한 설명이 없이는 인지심리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우리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브루너 Jerome Bruner 는 《의미의 행위들 Acts of Meaning》에서 인간 심리학에서 의미의 구성이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그는 화자의 영향 아래 한 문화에서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자기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를 강조했다. 그는 사회심리학의 엄격한 해석적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학적 도구며, 측정 장치에 의해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 작업은 그런 노력에 밑바탕이 되는 의미 구성의 생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목표가 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우리는, 진화된 가치계에 기반하고 언어에 의해 촉발된 의식이 어떻게 문화 속에서 그런 의미 체계를 확장하고 수정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이 사고의 원인이 되는가를 연구하고 싶다면, 또한 개인의 사고에 무엇이 동반되는지를 연구하고 싶다면 그 개인의 생물학적 상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사고가 다른 사고를 촉발하므로 사고의 수준에서 개인의 기억을 조사해야 한다. 이런 접근은 그 본성상 제한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재적인 의미에 대한 연구와, 수학과 같이 변하지 않는 정신적 구성물에 대한 연구에 의지해야 한다. 또 논리학에서 볼 수 있는 사전적 대치와 관련된 불변성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실험적으로 도출된 규칙들의 집합에 일반적으로 관련된 불변성에 대한 연구에도 의지해야 한다. 마음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이해하는 유일한 수단이 사고의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그러나 유서 깊은 특권의식을 철학자들에게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철학자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둬야만 한다.
상이한 과학들이 서로 양립 가능하긴 하지만 서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는 것처럼 ㅡ 한 과학은 다른 과학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못된다 ㅡ 마음의 문제를 기술하는 것은 관계적인 문제와 기호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데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런 기술을 하면서, 의식 상태의 복합적이고 평행적이고 변하기 쉬운 본성에 강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인지과학의 임무는 추론의 기호적인 양식과 관련된 상태들을 해석하는 방법과, 주체가 자신이 시간과 갖는 관계를 더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판단과 의지의 상태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에 대한 분석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납, 유비, 형식논리학과 같은 회귀적 방식의 추론이 잠재적으로 무한히 사용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런 분석은 역사적인 문제들을 완전히 다 설명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생물학적인 규칙성은 이런 모든 활동에 깔려 있다. 이런 규칙성은 연구될 수 있고 또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의식 있는 인공물을 먼 훗날 만들 때까지는, 생물학적 방법은 너무 조잡하기 때문에, 추론을 하는 동안 '순수한 사고자' 가 갖는 사고들의 의미에 신경적 상관관계를 맺는 데 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행위들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인 신경과정을 연구할 수 있고, 속성이원론자가 되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말해서, 과학적 순수성의 이름으로 생물학적 방법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마음의 생물학적 근거에 대해 고찰하려는 우리의 관심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몇 가지 관련된 문젯거리에 대해서, 특히 감정 및 정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감정은 의식적인 상태의 일부분이고, 자기와 관련이 될 때 우리가 감각질 개념에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감정은 정서가 아니다. 정서는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방식으로 감정을 의지 및 판단과 혼합시키는 강한 인지적 요소들을 갖기 때문이다. 정서는 다른 모든 과정들과 혼합되는 (보통 정서에 의존해서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한, 가장 복잡한 정신상태나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정서가 역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 단순해지지는 않는다.
의식적인 인간에 대해서 가장 이상한 것은 그들의 예술이다. 즉시, 그림, 교향곡 같은 외부 대상 속에 기호적이고 형식적이고 감정과 정서를 전달하는 능력이다. 예술작품에서 실현되는 역사, 문화, 특수 훈련, 기예에 의해 제약되는 의식적인 상태에 대한 요약은 과학적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는다. 이런 부정에는 어떤 신비화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대상을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사회적이고 기호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외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어진 전통과 문화 내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반응과 상호 주관적인 교환을 대신할 수는 없다. 랑어 Suzanne Langer 가 그녀의 주저인 《마음 : 인간의 감정에 대한 논문 Mind : An Essay on Human Feeling》에서 이런 심리적인 과정을 아름답게 분석했다.
인간의 지식을 규정하기 위해 쓰인 독일 낱말들의 집합으로는 이성과 오성 말고도 딜타이 Wilhelm Dilthey 가 처음으로 시도한 구분이 있다. 자연과학 Natruwissenschaft 은 보통 물리학, 생물학 같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고, 정신과학 Geistwissenschaft 은 사회과학, 문화, 추상적인 추론, 그리고 기호와 감정에 기반을 둔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지식 영역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하면서 정신 Geist 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던 헤겔 Georg Hegel 의 관념론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또 심리학이 진화론적 생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별개의 정신과 별개의 자연 Natur 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것들은 불필요한 골칫거리를 끝없이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장의 주제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연구했던 제임스는 그런 문제에 관한 철학적인 주장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와 칸트 이후의 성찰이 주는 전체 교훈은 단순성인 것 같다. 칸트에게서 사고와 진술의 복잡함은 쾨니히스베르크의 케케묵은 형식주의가 악화시킨 타고난 질환이다. 헤겔에게서 그것은 격분하는 흥분 상태다. 그러므로 끔찍하게도 이 철학의 아버지들이 먹어 버린 신 포도들은 우리를 진저리나게 한다.
여기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나는, 철학적 심리학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여 그 독자적인 행로를 계속 가리라고 기대한다.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심리학은 더 이상 생물학으로부터 자신이 자율적임을 선언할 수는 없고 언제나 생물학의 발견을 따라야만 한다.
나는 대학 편람에 왜 그렇게 많은 학과들이 있는가 궁금해하곤 했다. 왜 지식은 그렇게 이질적인가? 여기 제시된 견해는 그에 대한 가능한 이유를 제공한다. 의식의 밑바탕이 되는 평행적이고 구성적인 뇌과정이 있다고 한다면, 또 언어의 회귀적인 기호적 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또 사회와 문화 속에 특수한 기호적 실현과 예술적 실현을 위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토대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지식을 완전히 환원할 수 있는 기술체계는 없다. 그러나 지식의 다른 영역들과 다른 문제 영역들은 서로 양립 가능하고, 그것들이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에서 갖는 근거는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적어도 이런 서로 다른 영역들을 탐구할 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신경장애 neural disorder 를 앓을 때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다음 장에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처럼, 이런 병들 역시 신경계가 감당하는 거대한 반응 영역과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복잡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