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기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 Gerald M. Edelman 지음, 황희숙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98 (원서 : Bright Air, Brilliant Fire : On the Matter of the Mind, BasicBooks, 1992), Page 27~35

 

갈릴레이에 대한 박해가 기억되는 방식은, 인류가 겪었던 가장 중요한 조망 방식의 변화가 그 때 조용히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 화이트 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근대과학의 시초로 거슬러올라가서, 17세기의 두 거물인 갈릴레이 (그림 1) 와 데카르트를 살펴보자.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에서 화이트헤드는 갈릴레이가 수리물리학을 만들면서 마음을 자연으로부터 제거시켰다고 보았다. 화이트헤드의 말은, 관찰자는 객관적이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인과의 문제에 대해 벌이는 짜증스런 논쟁 같은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갈릴레이가 주장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대신 과학자는 인간적인 투영이나 의도가 배제된 모델에 따라서 측정을 해야만 하며,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반증할 상관적 동일성이나 법칙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절차는 물리학과 연관 과학들에서 강력히 실현되었다. 뉴턴은 과학적 절차를 성공적으로 처음 만개시킨 인물이다. 아인슈타인의 혁명적 이론과 양자역학이 대두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갈릴레이식의 절차는 일소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관찰자의 위치와 속도가 어떻게 공간과 시간에 대한 측정을 변화시키는 지를 보여 주었고, 가속도의 개념과 연관시켜, 어떻게 물질이라는 개념의 의미까지도 바꾸는지를 보여 주었다. 양자역학은 극미의 세계를 측정하는 작업이, 플랑크 상수 Plank's constant 에 의해 지정되는 불확실성 내에서 정확도를 선택해야 하는 행위를 불가피하게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정확도에 의해 관찰자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의 운동량이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 라 부르는 것이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에서 관찰자는 자기의 측정에 개재된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의 목표는 여전히 갈릴레이적인 것, 즉 불변적인 법칙을 기술한다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아인슈타인과 아이젠베르크적인 관찰자들은 그들 독자적인 측정에 개재되는 반면, 여전히 심리학적으로는 투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과 동기가 양자역학적 측정에 대해 갖는 중요성이 물리철학자들에 의해 가끔 지적되긴 했지만, 물리학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참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자연으로부터 잘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19 세기 후반 생리학과 생리심리학이 부상함에 따라 마음은 자연으로 되돌려 놓아졌다. 우리는 그 이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난처해졌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서 그러했듯이, 생리학적 발전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도 특별한 점이 있다. 관찰자 자신은 그가 속한 세계의 다른 대상과 같이 '사물' 인가? 그렇다면 사물들은 지시할 수 없는데 관찰자들이 세계의 사물을 지시하고, 세계를 사물의 범주로 분할하는 기묘한 능력 (물론 강제적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을 가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관찰자를 관찰할 때 이러한 지향성의 속성은 피할 수 없다.

물리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 말하는 의식, 사고, 믿음, 욕구 같은 모든 심리학적 특성에 대해 금지령을 내려야만 하는가? 행태주의 behaviorism 라는 정교하고 깔끔한 체제를 채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랑을 나눈 파트너가 상대방에게, "너에게는 좋았는데 나에게도 좋았어?" 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 마지막 방식의 우스광스러움은 우리가 거기서 함축되는 부정문들을 고려해 보면 명백해진다. 우리가 '과학자가 되기' 이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자각) 을 부정하든지, 아니면 과학 (즉 '물리 과학') 은 그런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선언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17 세기 과학혁명의 위대한 두 번째 인물인 데카르트가 등장한다. 사고의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그는 '실체이원론 substance dualism' 을 표명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견해에 의하면, 세계는 연장실체 res extensa 와 사유실체 res cogitans 로 구성되어 있다. 갈릴레이식의 조작은 연장실체, 즉 부피를 갖는 것들의 집합에 작용한다. 그러나 사유실체, 즉 생각하는 것들의 집합은 시공간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치를 갖지 않으며 연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상호 작용론 interactionism 의 문제가 있다: 마음과 육체는 교통해야만 한다. 그답지 않게 불명료한 어조로, 데카르트는 송과선 (그림 2) 이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말했다.

이원론은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지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외견상 일원론적이지만 형태주의는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마음을 부정하는 방식의 이원론일 뿐이며, 따라서 한쪽 끝이 보류되어진 채 있는 셈이다. 행태주의자들은 행동을 조사하고 지향성을 무시함으로써 딜레마를 해결했다. 그들은 마음을 자연에 되돌려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이 정당하게 과학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할 뿐이다. 그들 자신들이 유물론자이지 실체이원론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비행태주의적 심리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성 이원론자 property dualist 다. 마음과 뇌가 하나의 물질로부터 생겨났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심리학적 특성들이 그것들만의 고유한 술어로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술어들은 심리학적 특성을 일으킨 물리적 대상에 사용되는 술어들과는 필연적으로 다르다. 속성이원론자의 좋은 예가 말년의 프로이트 Sigmund Freud 다.

상당한 업적을 쌓은 생물학자들조차도 마음을 연구하는 과업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대중 심포지엄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유명한 면역학자인 메다워 Peter Medawar 경과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은근하게 경멸적 태도를 취했다: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라고 그는 물었다. 나는 우리가 뇌를 좀더 잘 알게 된다면 적어도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오해들을 없애 버릴 수는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메다워는 위선적인 말투를 쓰는 상대였으며, 내 응수는 그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패러데이 Michael Faraday 가 전기를 발명한 사실을 발표한 후 재무장관 글래드스톤 William Gladstone 에게 했다고 알려진 말을 해 주었으면 좋았으리라. 그 신사가 거만하게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패러데이는 "장관님, 언젠가는 그것에 세금을 매기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갓난아이는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마음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면서, 실체이원론이나 속성이원론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에 의해 더 심각한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두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조건부다.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으나, 일부 인지연구가들처럼 뇌의 구조와 생리가 우리의 문제에 우연적일 뿐, 중심적이지는 않다고 가정함으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풍부한 함축을 갖는 것이니 이에 대해 더 천착해 보기로 하자.

지난 몇 십 년 동안 인지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은 행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진지하고도 광범위한 시도를 해 왔다. 인지과학은 심리학, 컴퓨터 과학, 인공지능, 신경생물학과 언어학, 철학을 이용하는 종합 과학이다. 외견상 흥미가 집중되는 데 고무되어, 위 분야의 일부 과학자들은 행태주의자들처럼 정신적인 기능을 즉시 거부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은 정신적인 표상 개념에, 또 통칭해서 기능주의적 입장이라 불리는 가설 체계에 의존해 왔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기호적인 정신적 표상으로 만들어진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 인지 cognition 는 이들 기호의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심리학적 현상은 기능적인 과정의 술어로 기술된다. 그 과정의 효험은 일련의 명료한 규칙에 따라, 추상적이고 잘 정의된 방식으로, 항목들을 기호로 해석해 내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 그런 일련의 규칙이 구문론 syntax 이라 알려진 것을 이룬다.

이런 구문론적 규칙이 작동되는 방식이 곧 계산 computation 이다 (여기서 계산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덮어 두기로 하자. 지금으로서는, 확정된 절차에 따른 기호 조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두자. 이에 대해서는 <후기> 에서 상세히 논의한다). 계산은 크게 신경계의 구조와 발달 양식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가정된다. 마치 어떤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다른 구조를 갖는 다른 컴퓨터에서도 작동되고 따라서 그로부터 '독립된' 것이듯이. 여기 관련된 생각은, 뇌 (더 정확히는 마음) 가 컴퓨터와 같은 것이며 세계는 컴퓨터 테이프 조각가 같다는 믿음, 또 수신된 신호가 논리적 사고에 의해 '해독' 될 수 있게끔 세계가 그렇게 구조지워져 있다는 믿음이다.

이와 같이 잘 정의된 기능적 과정은 의미론적 표상 semantic representations 을 구성한다고 말해지는데, 그것은 곧 표상의 기호들이 세계 내의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명백히 규정된다는 뜻이다. 이 견해 중 가장 강한 형태에서는, 모든 정신 활동의 기저가 실상 사고언어 language of thought — '멘탈리스 mentalese' 라고 불려 온 언어 (<후기> 참조) – 라고 말한다.

인지주의 cognitivism 라 불리는 이 관점은 크게 유행했고, 그에 의해 아주 흥미롭고 가치 있는 심리학적 작업들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일련의 주목할 만한 견해들이 인지주의에 부수되어 있다. 그 하나는, 구문론을 위한 규칙을 포함하고 또 보편 문법을 구성하는 언어습득 장치를 인간이 갖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에 대한 명료한 서술이 과학 (가장 이상적으로는 물리학) 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 즉 객관주의 objectivism 다. 이것들은 구문론적 과정과 규칙, 그리고 사물, 사건들 사이의 관계들, 즉 의미론적 표상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정당화하도록 해 준다. 또 다른 하나는, 뇌가 전통적인 범주, 즉 개별적으로는 필요조건이며 공동으로는 충분 조건인 것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되는 범부에 따라서, '실재적인' 세계에 잇는 대상들을 질서지운다는 생각이다.

이 주장들과 그 변양 들이 현대과학에 파급된 정도는 참으로 대단했다. 그것들은 범세계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지주의자의 과업이 검토되지 않은 가정들에 의존한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기묘한 결함 중의 하나는, 인지주의가 설명하고자 하는 메커니즘의 기초를 이루는 생물학적 기반에 대해 그것이 단지 지엽적인 언급만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인지주의가 대체하려 한 행태주의 만큼이나 커다란 과학적 일탈이 일어난다. 그 일탈에 가로놓인 위험한 과오는 대부분의 인지과학자들에 의해 파악되지 못하고 잇는데, 그것은 마치 상대성이 아인슈타인 이전에 그리고 태양중심설이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파악되지 못했던 것과 같다.

그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은 왜 위험한 것인가? 그들은 마음에 대한 기술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 – 즉 뇌에 대한 상세한 생물학적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뇌가 일종의 컴퓨터라는 견해를 손상시키는 거대한 증거들을 경시하고 있다. 그들은 동물과 인간에게 있어서 대상과 사건이 분류되는 방식이 놀리나 계산을 전혀 닮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무시한다. 또한 그들은 인간 관찰자에 의해서 창조된 물리학이 갖는 형식적 능력을, 물리학의 원리들이 역사 속에서 진화되어 온 생물계를 다룰 수 있다는 추정 근거로서 혼동하고 있다.

나는 인지주의자들의 과업이 기초하고 있는 전체 구조가 비정합 적이며, 사실에 의해 입증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강한 주장을 이 책 본문을 통해 뒷받침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하려면 내주요 논제에 도달하기 전에, 공유되지 못한 많은 가정을 지닌 여러 학문 분과에 걸쳐 논의를 확장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자리한 <후기> 에서, 순수한 인지주의에 맞선 내 논증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이라면 한가할 때 그 논문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 있는 독자들도 이 책 본문을 읽은 후 <후기> 를 보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그 <후기> 는 일련의 범주 오류 category error 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적은 것이다. 첫째는, 의식문제는 물리학에서의 몇 가지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서 해결될 것이라는 제안이다. 둘째는 계산과 인공지능이 해답을 줄 것이라는 제안이다. 셋째는 가장 터무니없는 것인데, 먼저 기초가 되는 생물학을 이해함이 없이 기능주의의 가정 아래 행위, 정신적인 수행과 능력,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전체 과업이 진행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후기> 에서 비판적인 논증을 제시하겠다. 다음 장에서 나는 생물학과 신경과학적인 사실 및 견해를 몇 가지 고찰하겠다. 마음의 기초가 되는 실제 물질, 특히 그 조직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이해가 있어야만 마음을 연구하려고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지적했던 곤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자연 속에서 마음이 처음 나타났던 방식과 상충하지 않는, 마음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는 길이 있어야만 한다. 그 방식들은 우리가 진화론에서 배운 바에 의해 조율되어야 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육체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체현 / embodiment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뇌와 신경계를, 그리고 그들이 일으키는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문제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