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 : 재통합된 자기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 Gerald M. Edelman 지음, 황희숙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98 (원서 : Bright Air, Brilliant Fire : On the Matter of the Mind, BasicBooks, 1992), Page 264 ~ 278.

 

정상적인 정신과정에 대한 분명한 전제들을 잘 알 수 없다면 신경정신병적 장애를 충분히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 프로이트가 플리스 Wilhelm Fliess 에게

 

정신질환은 언제나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것은 개인의 '영혼' 에 영향을 끼치며, 지금까지 목격된 그 사람의 개인사와 행동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 ㅡ 그 자신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ㅡ 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정신질환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종종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뇌기능이 변질돼서 생긴결과라는 것을 확신할 때에도, 정신질환은 변질된 뇌기능으로 인해 생긴 많은 신경학적 장애 neurological disorders 가 갖는 증후학적인 '직접성' 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정신질환과 신경학적 질환의 차이는 무엇이고, 그 구분선은 어디에 그을 수 있는가? 그 차이는 미묘한 것이지만 거의 언제나 지향성, 의식, 가치 또는 기호적 기능에서 생기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내놓은 것과 같은 마음이론은 모든 정신질환이 물리적인 변화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매혹적이고 어려운 주제를 길게 다룰 뜻은 없다. 그러나 그 많은 면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마음에 대한 우리의 모형을 검토하라고 자연이 준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몇몇 전통적인 의학적 주제들을 이 책에서 취한 관점을 다루겠다. 뇌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다층적인 통제를 드러내 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나는 우선 정신질환이 무엇의 질환인지를 ㅡ 물리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정신질환이 신경학적 질환과 다르게 보이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몇몇 의식의 질환들 ㅡ 신경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신병적인 ㅡ 을 취급하려고 하는데, 왜냐 하면 그것들이 우리 모형에 시사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질환을 무력해진 상황에서 자기가 적응하고, 재통합하려는 과정으로 보려고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지금의 방식과는 약간 다르게 《기억된 현재 The Remembered Present》에서 다뤘다. 독자들께서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프로이트는 우리 관심거리의 중심에 있는 문제에 깊이 몰두했다. 그는 신경증 neuroses 을 연구하면서 지향성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얽히게 된다. 프로이트는 현실을 테스트할 능력은  잃지 않았지만 기능과 기능의 충족이 손상될 정도로, 행동과 정서가 변질된 것이 신경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장애들이 뇌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리적인 요인들,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인 기호 사용에서 유래하는 기능적인 장애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그런 장애는 심리적인 발달 장애다. 그는 자신의 심리학이론이 치료 방법, 심리분석 psychoanalysis 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방법은 환자와 훈련된 분석가 사이의 기호적인 상호 작용을 포함하는데, 그 분석가는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인간의 자아 ego 가 어떻게 발전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론을 갖춘 사람이다. 환자는 분석가와 함께 자유연상 free association, 꿈의 분석 dream analysis 등의 기술을 사용해서 방어와 억압의 메커니즘을 탐구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처음에 엄격한 제거적 유물론 eliminative materialism (내가 앞 장에서 개탄했던 환원주의와 같은 종류) 을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일종의 속성이원론으로 돌아섰다. 그는 엄격한 결정주의자이며 유물론자이면서도, 신경증을 심리적인 용어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자의 현실 테스트가 정말로 손상을 입고 있고 그에 대한 기질적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정신병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는 더욱 애매하다. 어떤 정신병들은 '기능적인' 것이고 또 그렇게 여겨진다. 예를 들어서 정신분열증 schizophrenia, 조울증 manic depressive psychosis 의 어떤 형태들, 편집증 paranoia 은 기질성 정신병 또는 결국 정신병이 될 수 있는 퇴행성 뇌 질환과는 꽤 다른 인과적이고 병인학적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 결과들은 어떤 뇌이론에도 난점으로 등장한다.

TGNS 에 따르면 이런 난점들은 뇌기능을 통제하는 수준들을 분류할 때 생기는 복잡함 때문에 일어난다. 시냅스 반응의 개체군 성격으로부터 ㅡ 그것의 다양성과 개체성으로부터 복잡함이 더욱 크게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수준들을 잘못 부여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병적인 장애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어려움에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것조차도, 물리적인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인 상태와 무의식적인 상태를 통제하는 뇌의 다층적인 재입력 시스템을 감안하면, 질병의 상이한 원인들이 반응 패턴에서 중복되거나 유사한 정신착란을 낳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만간에 모든 정신이상이 시냅스 수준에서 고찰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복잡한 신호들과 환경적 상호 작용은 논의되는 모든 수준에 걸쳐 있는 유형을 취하는 기억과 행동에 연결된다. 정신질환을 '현실 테스트' 의 장애로 생각하기보다는 범주화, 기억, 재입력, 통합의 장애로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더 유용하다.

이러한 사실을 시각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제 11 장과 제 12 장에 있는 의식에 대한 그림을 현재의 목표에 맞게 고치는 것이다 (그림 18 - 1). 만약 가령 기저핵 부분에 있는 뉴런들을 파괴하거나 영향을 준 요인들이 파킨스씨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 운동 피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인들이 운동 마비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병이 신경학적이라고 ㅡ 즉 '정신적이 아니라' 고 진단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질환이 뇌에서 고도로 평행적인 재입력 회로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관련되거나, 가치 시스템과 행동을 일으키는 시스템 사이의 관련을 변화시킨다면 (그림 12 - 4 를 보라), 우리는 그 질환을 정신적인 기능의 변질로 진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장애를 설명하는 데 물리적인 원인들만으로 충분하다.

 

정신질환의 문제는 재입력의 통로와 범주화에서의 변질에 의해 유용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정신착란과 의식의 질환은 재입력 지도와 항상성 영역에서의 변질과 지각적인 자각과 기호적인 개념적 기능과 정서반응을 담당하는 피질 부속 기관에서의 변질에 대한 적응과 재조정을 나타낸다.

어느 경우든지 그런 병을 겪고 있는 개인의 사적 역사는 어떤 두 환자도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사실상 확인해 준다. 고차원적 의식은 개념적인, 의미론적인, 사회적인 통합을 포함하는데, 이 모든 통합은 사회적인 자기를 구성하는 데 연루된다. 이런 통합 중 많은 부분이 특정한 시냅스 개체군에 의해 중재되거나 조절된다. 따라서 시냅스의 기능을 변화시키는 약물이 정신질환을 다루는 데 굉장히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환자의 개체성은 그 사람에게 특유한 시냅스 효력이 갖는 매우 복잡한 패턴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인 수단과 정서적인 수단으로 환자와 의사소통을 하는 일은 오직 약품만을 사용한 치료에 의해서 배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약물과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에 여전히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용어들에 의해 범주화, 기억, 개념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뇌이론은 순수하게 심리치료적인 처방에서 유용할 수도 있다. 심리분석 치료에 대한 이론을 만든 정신병 의사가 TNGS 를 평가한 것이 여러 해 전에 출판되었다. 모델 Arnold Modell 은 《다른 시대, 다른 현실 Other Times, Other Realities》에서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교류의 성격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기억이 재범주화라는 생각을 이용했다. 그는 부기 Nachtraeglichkeit 라는 용어를 부활시켰다. 그 용어는 프로이트가 기억은 후속 경험의 결과로서 다시 베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적용한 것이었다. 모델은 자아가 시간을 처리하고 재조직하는 데 이용되는 구조라는 점을 지적하고, 여기에 기억이 재범주화라는 생각을 연결했다 (제 10 장과 제 16 장을 보라).

모델은 심리분석 장치에서 전이관계 transference relation 와 관련된 개념들을 비판했다 (역주 : 사람은 과거에 경험했던 감정, 갈등, 욕망을 현재 상황에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강한 갈등과 좌절을 수반하고 무의식화된 경우, 이를 '전이현상' 이라 한다. 정신분석과정에서 환자와 치료자가 맺는 관계가 바로 그런 전이현상이 두드러지는 '전이관계' 다. 즉 환자가 아버지나 형제와 맺었던 관계가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재현된다). 그는 뇌기능에 대한 선택설은 프로이트가 기술한 반복강제 repetition compulsion 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준다고 주장한다. 모델은 또 범주적 기억의 재창조가 기본적인 생물학의 원리라고,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를 압도할 수 있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반복하게 하는 강제는 현재와 과거의 대상들 사이의 지각적인 동일성을 추구하게 하는 강제를 나타낸다" 고 주장한다. 환자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제 16 장에서 다룬 주제인, 자기가 시간과 갖는 관계가 변하는 정보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델은 또 심리분석 치료에서 은유로서 사고하는 일은 마음에서 통용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TNGS 에 제시된 기억에 대한 견해가 고정된 기억 자국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대체하며, 그 견해는 치료 장치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치료 장치는 "현실ㅇ릐 다층적 수준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고안되었고, 이것이 이번에는 "예전의 지각과 그리고 새 지각의 다시 베끼기 모두에 대한 잠재력을 확대해 준다" 는 것이다.

또 다른 정신병 의사인 훈데르트 Edaward Hundert 도 정신병학, 철학, 신경과학을 연결하는 시금석으로서 TNGS 를 사용했다. 그는 각 개인을 충분히 넓은 방식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 세 학문이 그 이론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그의 주장을 내가 이 책을 통해서, 특히 앞 장에서 주장했던 견해들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나는 심리분석이론의 문제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말할 자격이 없긴 하지만, 심리분석이론을 범주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물리적인 뇌이론과 관련시키려는 시도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약리적인 효과를 뇌이론과 관련시키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다. 우리가 생물학에 굳건하게 토대를 둔 정신병학을 갖고자 한다면 두 가지 종류의 노력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언급을 했으므로, 특정한 일련의 신경학적 질환들과 한 가지 정신질환 문제로 논의를 바꾸려 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두 종류의 질환이 모두, 내가 주장한 의식으로의 재진입 회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논의할 신경생리학적 장애는 암시적 기억이라 불려 온 것과 관련된 증후군들의 집합이다. 내가 논의할 정신질환은 정신병 중에서 가장 현란하고, 다양하고, 신비스러운 정신분열증이다.

첫째는 신경심리학적 증후군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전문적인 임상용어를 몇 개 쓰는 것에 대해 양해 바란다. 가능한 한 번역할 것이다). 샥터 Daniel Schacter 와 그의 동료들은 지식에 대한 명시적, 의식적인 접근과, 일을 수행하는 묵시적인 능력 사이의 분열에 대해 연구해 왔다. 이런 종류의 분열 ㅡ 심각하게 손상된 명시적 지식과 거의 정상적인 암시적 지식 ㅡ 은 여러 가지 질환을 갖는 환자들에게서 관찰되었다. 그 목록을 나열하고 각 경우를 기술하기 전에, 구체적인 보기로 시맹을 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앞을 못 보는 환자들은 시각적인 자극이 주어지는 시야를 보지 못하지만 공간 속에서 그런 시각적인 자극은 구분한다. 이런 환자들은 지각적인 구별을 해내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지각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분열은 다음과 같은 환자들에게서도 관찰된다. 기억상실증 amnesia, 난독증 dyslexia (어떤 책을 읽지 못함), 실어증 aphasia (지적인 말을 하거나 표현하지 못함), 상모실인증 prosopagnosia (얼굴을 알아보지 못함), 반경시증 hemineglect (손상된 대뇌반구에 반대되는 공간의 자기 중심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 질병불각증 anosognosia (심한 신경학적 손상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주어질 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부정함).

이것들은 특별한 목록이다.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특정 지식을 안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그 지식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을 하는 동안 자극을 주는 단서에 학습 반응을 보여 준다. 상모실인증 환자들은 그들이 병이 생기기 전에 봐서 알고 있던 얼굴에 대한 암시적인 지식은 보여 주고 있지만, 현재는 그것에 대해서 의식적인 앎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난독증 환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자신들이 그런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교재를 읽는다. 그리고 반경시증 환자들의 경우, 무시되는 반쪽에 주어진 정보는 환자가 의식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환자가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신경학적 질환의 배후에 놓인 장애는 모두 다르다. 이 중 어느 경우에도 전체적인 의식 변화는 없다. 실제로 환자들은 그런 결함을 보이는 영역 밖에서는 아주 정상적으로 행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각 경우에 결함은 영역 한정적이다. 언어 손상이 환자의 분열적 반응에 책임이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증후군을 갖는 환자들이 신경증이나 정신병을 앓는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런 질환들은 의식의 질환들이다. 병에 걸린 것은 가치 - 범주 기억을 지각적인 범주화를 수행하는 분류쌍에 연결시키는 특별한 재입력 고리라고 가정하면 그 질환들이 설명된다 (그림 18 - 1, 그림 12 - 4 를 보라). 이런 방해는 일반적으로 가치 - 범주 기억을 연결하고 특정 업무의 수행을 중재하는 다른 통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특정 영역을 의식적인 '장면' 으로부터 삭제하는 것이지, 업무를 수행하는 개인 능력의 목록으로부터 삭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재입력 통로가 모든 양식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면 초보적인 앎이 도대체 남아나는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그런 일은 광범위한 손상의 결과일 때 말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외상을 덜 입히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실험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윤리적인 근거에서 볼 때 그런 실험은 할 수가 없다.

내가 이상과 같은 신경학적 장애들을 기술했던 까닭은 그런 장애들이 특유한 정신질환처럼 정신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지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였다. 나는 이런 장애들을 더욱 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분열의 사례인 질병불각증을 기술하면서 이 장을 마칠까 한다. 그러나 정신병 중에서 가장 악명 높고, 그 형태가 여러 가지이며, 신비스러운 병인 정신분열증을 먼저 다뤄 보자. 정신분열증은 이상한 증상들이 혼합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그 증상들이란 제 3 자의 청각 환각, 외계의 힘에 의한 조종망상 操從妄想, 영향에 대한 생각, 지시에 대한 생각, 사고 반향, 사고 전파 傳播, 사고 장애, 사고 철수 撤收 등이다. 이런 증후군의 급성적 단계에서, 꿈과 같은 상태가 동반하고 혼란뿐만 아니라 의식이 약간 흐려지는 증상도 나타난다. 환자들은 토막토막으로만 그리고 의식의 섬을 가로질러서만 의미가 있는 기묘한 신호들을 경ㅎ. 어떤 환자들은 무감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떤 환자들은 쉽게 산만해지고, 지각적인 신호를 잘못 판단하고, 시각적인 착각을 체험하고, 또는 게슈탈트 그림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 다른 환자들은 판단을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반응이 느리거나 또는 이상한 반복 행동을 한다. 극단적인 형태의 질환을 보이는 환자는 때때로 간장병 환자 catatonic 다. 그 환자들은 오랜 시간동안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 동정이 없다. 어떤 환자들은 급성 상태에서 회복하면서 긴장 상태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나 그들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급성적 경험에 대해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다.

정신분열증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의식질환으로, 지각과 사고 그리고 감각질에 영향을 준다. 이런 병에 걸려서, 자기의 특유한 증상들을 드러내는 환자를 본다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그리고 슬픈 경험이다. 이 병이 보이는 증상의 다양성, 개별적인 특성, 기묘한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분열증이 일반화된 재입력의 질환일 가능성을 나는 암시했다 (그림 18 - 1 아래를 보라). 여러 가지 신경 전달자를 만들고 그에 반응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가 재입력 지도들 사이의 소통을 전반적으로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지도들 사이에 비동시성 asynchrony 이 있거나 적당한 지도화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상상이 지각적 입력을 지배해 버릴 수 있고, 혹은 상이한 양상들이 더 이상 조정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것이 환각 hallucination 에 이르게 하고, 현실세계의 신호를 조정하는 데 실패하게 한다. 다른 환자의 경우는 동일한 장애가 다른 감각 시스템과 연속기관 사이의 재입력 작용에서의 장애를 유발하기도 한다. 또 다른 환자의 경우는, 어휘와 개념 중추에 포함된 영역과 심상성을 매개하는 영역들 사이의 재입력 연결에 장애가 있기도 하다.

레퍼토리 변이를 포함하는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요인들이 여러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각양각색의 반응을 설명해 준다. 각 환자들은 독특한 패턴을 지니며, 재입력 장애의 위치에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정신분열증에서 모든 뉴런은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된 심리학적 결함이 재입력 지도화에서의 결함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신경장애나 손상을 포함해, 개별 지도나 지도들의 연결을 변경하는 어떤 요인들에 의해서건 야기될 수 있다.

고차원적 의식을 여전히 지니고 잇는 한 환자가 이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면, 하나의 자기로서 자기가 지각한 것에 어떻게 적응하려고 노력할까를 관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행동은 규범적이고 생리학적 기준에 의해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환자의 전반적인 반응은 아직도 적응하려는, 그리고 재통합하려는 시도임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것이 최선의 적응이 아니라거나, 자기가 지각한 것에 어떻게 적응하려고 노력할까를 관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행동은 규범적이고 생리학적 기준에 의해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환자의 전반적인 반응은 아직도 적응하려는, 그리고 재통합하려는 시도임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것이 최선의 적응이 아니라거나, 자기와 타인에게 파괴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안된다. 확대된 TNGS 에서 볼 때, 정신분열증 환자의 마음은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그 환자의 개인사를 아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슬프게도, 그 '의미' 라는 것은 어떤 주어진 사회에 특수한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술어에 의해서 부여되지 않고, 이론이 예측을 함에 따라 부여된다.

정상인이 하는 외견상의 기행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는 정신병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남자가 게슈타포가 그에게 접근해 오는 것을 알고, 그들이 자기를 찾기 가장 어려운 곳이 미친 사람을 수용하는 병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미친 것처럼 행동하는 방법을 연마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환각적인' 사건들을 일으킨 후, 병원에 수감되었다. 한동안 아무 공포 없이 살아갈 수 있었고, 때때로 그는 의사와 동료 환자들 앞에서 자유자재로 기괴한 행동을 연출했다. 하루는 검정색 긴 가죽 코트를 걸친, 인상이 나쁜 두 사람이 병원장을 대동하고 방문 앞에 나타났다. 게슈타포가 도착한 것을 알고, 그 사람은 침대 위로 뛰어 올라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눈알을 굴리고, 이상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 때, 대부분의 시간을 혼수상태로 누워 보내던 바로 옆 침대의 환자가 눈을 뜨고서 "입닥쳐, 이 흉내쟁이야" 라고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정신병 흉내' (실제 속임수가 아닌) 에 관한 한, 나의 절친한 친구인 고 언세이거 Lars Onsager 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특이한 물리화학자였고, 내가 알기로 가장 비상한 재능을 가진 과학자였다. 불가해한 강의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5 분 내에 그의 머리는 잠자는 자세로 한쪽으로 축 늘어진다. 그러나 강연자가 인용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언세이거는 일어나서 칠판으로 다가가 잘못된 부분을 지워서 고치고,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곤 다시 잠에 떨어지는 것이다. 한 번은 내가 물었다. "언세이거, 사람들이 심오한 질문을 하면 자네는 왜 싱글거리거나 킥킥대고, 또 머리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지?" 그는 진지해지고 거의 엄숙해져서 말했다.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 "게으르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그가 대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질문이 아니고, 나의 질문에 답하고 싶단 말이야."

이제까지 나는 '신경학 진영' 과 '정신병학 진영' 으로부터 두 가지 극단적인 예인 암시적 - 명시적 implicit - explicit 분열과 정신분열증을 골라 논의해 왔다. 양자는 모두 의식 질환의 예들이다. 이 두 가지 질환을 각각 지닌 환자를 분석함에 있어 우리는 데카르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그 점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탈리아 신경학자인 비시아크 Eduardo Bisiach 가 보고한 사례를 기술코자 한다. 이 사례는 뇌이론에 의미심장한 도전이 될 터인데,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초기에 안나 오 Anna O. 라는 환자를 만났을 때 프로이트가 직면했던 도전과 마찬가지 사례다.

비시아크의 환자는 질병불각증을 갖고 있다. 즉 자신이 신경학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심지어 그 결함의 존재가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 경우 증후군은 좌반신불수 hemiplegia (왼쪽편의 마비) 와 좌반맹증 hemianopsia (왼쪽 시야를 보지 못함) 을 동반한다. 원인은 그의 오른쪽 뇌 영역 중 측두부, 정수리, 그리고 후두부에 미친 급작스런 혈관손상 사고였다 (개략적으로 말해, 이 피질 영역들은 운동 능력뿐 아니라 시각적인 업무도 중재한다).

이 환자는 지적이었고 감응하기 쉬운 성격이었고, 결코 정서적으로 혼란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언어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시각과 운동에 대한 자기의 결함에 관해 질병불각증을 보였다. 그 사람이 실제로 수행할 수 없었던 왼쪽편의 업무에 대해 질문하자, 환자는 자신이 그것을 수행했노라고 주장했다 (왼쪽편의 마비 때문에 그는 분명히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환자의 마비된 왼손은 그 때 조사자의 손에 얹혀져 있었고, 환자도 볼 수 있도록 환자의 오른쪽 시야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환자에게 그것이 누구의 손이냐는 질문을 했다. 그는 그것이 조사자의 손이라고 주장했다. 조사자가 세 개의 손을 갖는다는 것이 모순이라고 지적하자, 환자의 반응은 흠없는 논리를 드러냈다. "손은 팔의 끄트머리다. 너는 세 개의 팔을 가졌기 때문에, 네가 세 개의 손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환자가 신경증과 정신병을 앓고, 또는 언어장애가 있다는 주장을 애초에 배제시킨다면, 우리는 특별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언어에 기반한 의식이 개인에게서 비언어적 신호의 원천인 뇌 부위를 제거함으로써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이 환자가 정서적 장애 없이 실재에 대한 자기의 전체 의미론적 해석을 재통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근본적인 개념적 재조정과 재통합을 겪었다. 만약 그의 신체 심상이나 범주적 능력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면, 저장된 기억과 현재의 지각적이고 운동적인 상태와의 대조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실제 곤경에 대한 일관된 '사실적' 보고를 하게 하거나, 커다란 갈등과 정서적 장애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이론이 옳다면, 환자에게 그런 고정된 기억이란 없다. 그는 개인적 공간을 돌볼 수 없다. 그는 그런 무능력을 반영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무능력을 둘러싼 적응력 있는 그림을 그리는, 개념적이고 의미론적인 재통합을 겪는다.

이 경우는 지향성의 변화가 어떻게 신경학적 질환에 수반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 마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뿌리째 흔든다. 자기는 어떻게 재통합되는가? 이 맥락에서 나는 좌우 뇌가 분리된 사람이 보이는 현저한 반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좌반구 뇌는 고차원적 의식을 지닌 다소간 정상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들에서 우반구 뇌는 휘갈겨 쓴 글자를 판독하는 좌측 손 반응으로 시각적 단어들에 반응한다. 종종 그 반응은 좌반구 뇌의 반응에 일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최소한 우반구 뇌가 1 차적 의식을 매개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완벽한 분석은 뇌반구의 기존 연계나 과거의 학습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흐려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든, 고차원적 의식을 갖고서 보고하는 개인은 좌반구에 자리잡고 있고 모든 사건을 적응력 있게 해석한다.

이러한 관찰은 프로이트에 의해 연구된 것과 밀접히 관련되는 문제들을 제시한다. 무엇이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 성향을 통제해서 개인적 특질로 통합되게 하는가? 고차원적 의식이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는 무엇인가? 개인이 병에 걸렸을 때 통합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수준에서의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는, 한 사회에서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명백히 중요하다. 그 문화적 의미를 감안하면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는 명백히 실천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어쨌든 그런 연구는 대단히 복잡하며, 뇌의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작동이 정신의학 하나에 의해서만 해명될 것 같지는 않다. 많은 분과학문들이 필요하다. 정신의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심리적 기능을 갖고 지향성을 나타내는 물체와 인공물을 합성하려는 시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우리 인간이 자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향적 인간에 대한 연구로부터 지향적 사물을 창조할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화제를 돌리겠다. 그것은 흥분되는 장래의 가능성이며, 그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실천적, 이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