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海 韓龍雲 論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 : 한용운 : 지식산업사, 1982, Page 197~224, 염무웅 의 글
만해 한용운은 위대한 승려이자 행동적인 민족주의자요 또한 탁월한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이 세 가지 면모 중의 어느 하나만으로도 그는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만해의 인간과 사상에 관한 연구는 매우 뒤늦은 편이어서, 박노준·인권환 양씨의 《한용운연구》(통문관, 1960)가 나온 뒤에야 차츰 한둘의 세부적인 업적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사명감에 대한 자각이 고조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만해에 관한 연구는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나라사랑》지(1971)와 《문학사상》지(1973)의 만해 특집 및 《한용운전집》 전6권의 간행(1973, 신정문화사)은 이러한 활기를 보다 알찬 수확으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만해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깊이까지 진전되고 있는 데 비하면 그 문학의 사상적 토대, 즉 그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만해의 모든 활동과 업적이 불교의 형태로 전개되었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만해사상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필자 역시 만해사상의 핵심을 거론하기에는 적격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불교를 불교사상의 문맥 속에서 분석평가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글은 만해사상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그 자신의 글에 의해서 개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시가 거둔 문학사적 업적을 검토하는 데 그치려 한다.
만해는 1879년 충청남도 홍주(지금의 홍성군)에서 한응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대는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수백년에 걸친 내부적 모순의 누적 및 강대한 외세의 침투로 말미암아 뿌리째 뒤흔들리던 시대였다. 만해가 출생하기 3년 전에 맺어진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봉건적 후진 왕국의 굴복의 첫걸음이자 동시에 이 나라의 식민지화의 첫걸음이기도 하였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려는 역사적 전환기에, 그리고 민족의 독립적 생존이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위기의 시대에 만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경우에 그러하듯이 인간의 사상이란 결국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격동기에 태어난 만해는 고향의 서당에 다니면서 당시의 정규적인 한문교육을 받았다. 《소학》《통감》에서 시작하여 18세가지 사서삼경을 모두 배웠고, 틈틈이 《사상기》《삼국지》등의 희곡·소설 기타 잡서들도 읽었다고 한다. 이 방면에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8세 되던 1896년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수년 동안 불교서적을 중심으로 독서에 정진했다.
이 무렵의 만해와 관련하여 그의 가문 및 입산 동기를 지금까지의 자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첫째, 그의 가문은 누대에 걸친 사족으로서 증조부인 光厚는 지중추부사, 조부인 영우는 훈련원검정, 부친 응준은 충근부도사를 지냈다. 둘째, 그의 부친과 형 윤경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지금의 청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감포와 홍주를 점령했으나 마침내 패배하여 죽음을 당했다. 세째, 만해는 18세 때에 학업을 팽개치고 동학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실패, 몸을 피하기 위해 설악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료에 따라 일부 연대가 틀리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상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만해의 경력을 따지자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의 사상형성의 배경을 바르게 알자는 입장에서 위의 몇 가지 사실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의 가문이 정말 누대사족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안병직의 적절한 추측이 제시되어 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그의 가문은 관료귀족이나 선비의 집안이 아니라, 얼마간의 경제적 실력과 상당한 정도의 교양을 갖춘 중인이었던 것 같다. 후일 부친에 대해서 만해가, 「고향에 있을 때 나는 선친에게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으니, 선친은 서책을 보시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 세우시고, 역사상의 의인·걸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또한 세상 형편과 국가 사회의 모든 일을 알아듣도록 타일러주시었다」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만해의 부친은 민감한 사회의식과 애국심을 가진 농촌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그의 인간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부친과 형이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구한말의 의병운동은 1895년의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및 1907년의 고종 양위와 군대해산 등을 각각 계기로 하는 세 차례의 거센 파도가 있었던 바, 민종식의 기병은 이중 두 번째로서, 1906년 3월 초순부터 5월말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만해의 부형은 그 자신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1905년 이전에 작고한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이 민종식 부대에 참가했다는 통설은 분명히 잘못일 것이다. 1895년경에 전국 각지를 휩쓸었던 저항적 무장활동이 관변측 보고서에도 「동학인지 의병인지」 판별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만해의 부형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이 무렵의 반정부적 저항운동 속에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만해의 가문이 누대사족이 아니라는 사실, 즉 봉건체제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계층이 아니라는 사실과 관계를 가지는 일로서, 만해가 전통의 압력을 덜 받고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배경 밑에서 이해될 수 있다.
셋째로 만해의 입산동기와 직접 관련하여 그가 18세 때(1896) 동학란에 가담, 홍주 호방을 습격하여 천 냥이란 거액의 군자금을 탈취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필자는 이 기록에서 사실에 해당하는 부분과 사실이 와전된 부분이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겨울부터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특히 홍주가 의병의 활동이 매우 성했던 곳의 하나임은 사료가 알려주는 바이다. 당시 우리나라 각지에서 일어났던 저항 투쟁의 성격이 매우 복잡한 것이었음은 이미 지적된 대로이나, 어떻든 이 시대의 저항적 무장활동을 단일한 역사적 운동단위로서의 동학 농민전쟁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만해가 참여했다고 하는 1896년의 홍주 기병은 봉건적 억압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농민운동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 봉건유교적 이상의 훼손에 반대하는 명분론적 성격의 것이었던 만큼, 만해가 바로 이 무렵에 동학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18세 때에 그가 가담했다고 하는 전투는 김복한 등이 주동한 의병활동일 가능성이 짙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가 설악산으로 피시한 것은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에 의해 의병 주모자 김복한·안병찬 등이 체포된 1896년 4월 초순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어쩌면 만해의 부형이 죽은 것도 바로 이 투쟁에서일지 모른다.
5, 6년간 설악산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만해는 불경에 대하여 공부하는 한편 여러 가지 근대적인 교양서적과 접촉하게 되었다.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 사정에 눈을 떴다고 하며, 중국의 선각자인 영계초의 《음영실문집》을 통해 칸트와 베이컨 등의 서양 근대사상을 알 게 되었다. 특히 양계초의 저작들은 만해의 사상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만해사상의 기본적 윤곽은 양계초에게 힘입은 것으로서, 그는 이 중국 계몽사상가의 저작들을 통해서 문명의 진보와 합리주의를 믿는 계몽주의자로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설악산을 내려와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곧 귀국하여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잠시 고향에 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황의 과정을 겪은 끝에 그는 드디어 불교 승려로서의 자기를 정착시키게 되었다. 그가 백담사에게 김연곡 스님으로부터 봉원이란 계명을 받고 승려가 된 것은 1905년 1월 26일의 일이다. 후에 건봉사의 만화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법명을 용운, 법호를 만해라 하였다.
승려가 된 다음 그는 불경공부와 참선에 정진하는 한편, 1908년 5월부터 약 반년 동안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과 경도를 비롯한 각지의 사찰과 새로운 문물들을 구경하였고, 동경의 조동종대학에서 석달 가까이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였다. 1911년 가을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건너갔으나, 이때에도 한국인 청년들에게 의심을 사서 불의의 총격을 받고 죽을 뻔만 고초를 겪은 끝에 되돌아왔다. 어쨌든 봉건체제의 모순과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왕조의 몰락이 결정적인 것으로 되어가던 시기에 정의감이 강한 농촌 지식인의 아들로 태어나 십수년의 한학교육을 받고 짤막한 현실참여의 격동을 거쳐 불교승려로서의 자기를 정착시킨 만해는 계몽적 근대사상과의 접촉 및 넓은 견문을 통해서 변화하는 세계을 알았고 인간이 문명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모든 체험과 인식을 토대로 하여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한 일대 논설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던 것이다.
1910년에 탈고되어 1913년에 출판된 이 《조선불교유신론》은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의 진리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고,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론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바로 그러한 실천적 의도로 인하여 조선불교의 현실을 올바르게 보았을뿐더러 불교 자체의 진리와 그 현대적 의의를 옳게 제시한 불후의 노작이 되었다. 이 저서에는 지금까지의 만해의 모든 교육과 사색과 견문이 조선불교의 현상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전면적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전개될 거의 모든 행동과 사상과 문학의 윤곽이 총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점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은 만해사상의 집대성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모두 17장으로 되어 있는 이 논저에서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직접 부딪치고 있고 또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고,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그러한 구체적 해결방안들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먼저 우리는 이 앞 부분에 의해서 만해의 불교사상이 대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필자로서 그가 불교의 진리 및 당시 조선불교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판가름할 수는 없으나, 불교론의 형태로 표현된 그의 현실인식과 세계관이 탁월한 것임을 단언할 수는 있다. 이 논설에 제시된 그의 사상을 우리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만해는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이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장차의 진보된 인류문명에 적합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로써 출발점을 삼는다. 만약에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불교인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마침내는 불교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만해는 판단한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종교가 불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를 행복과 문명으로 이끄는 데 기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불교가 그 자체로서 어떤 절대적 가치, 불변의 고정관념일 수 없었다. 그런데 만해가 보기에 불교야말로 문명의 이상에 합치되는 종교이다.
여기서 그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구태여 착하고 진실하게 살 필요도 없을 것이고, 굳이 노력하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게으르고 편한 것을 좇아서 순간적 만족만을 추구할 것이고, 따라서 세상은 필시 지옥 같은 생활과 야만적인 행위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려한 나머지 「예수교의 천당, 유태교가 받드는 신, 마호멧교의 영생 따위」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속임수요 미신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들로서, 이런 미신으로써 어찌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 수 있겠는가 하고 만해는 묻는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불교는 이처럼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미신과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종교이다. 천당이니 영생이니 하는 초월적인 실재에 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불교는 중생에게 희망을 갖도록 하는가. 불교에서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각 개인의 마음속에 진리에 이르는 최종적 근거가 있다고 가르친다.
중생이 이런 더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불생불멸의 경지를 참된 자에게 구하도록 가르쳤고, 미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신을 버림으로써 올바른 희망을 갖고 살도록 이끈다고 만해는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에서 신비주의적 껍질을 벗기고자 하는 계몽주의자·합리주의자 만해의 면모를 여실히 보게 되는 듯하다.
둘째, 만해는 불교의 가르침이 철저히 평등주의에 입각하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평등이란 곧 불평등의 반대인 바, 우리가 이 불평등의 견지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에는 무엇 하나 불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평드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이런 현상적 불평등을 뛰어넘는 진리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이 필연의 법칙에 지배받음에 반하여 진리는 시공의 구속을 벗어난 참된 존재의 세계이다. 만해사상의 창조적인 점은 이러한 불교적 평등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근대의 자유주의 및 세계주의 속에서 불교적 평등의 역사적 실현과정을 본다. 그는 이 세계가 평등의 완전한 실현에 이르기까지 발전하고야 말 것임을 확신하였다. (뒷날 그는 이러한 생각을 불교사회주의라는 말로 개념하였다.) 이 평등의 역사적 실현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 바, 각자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되어 조금의 차이도 없게 되고 보면, 이것이 곧 평등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인 것이다. 만해는 부처님의 평등정신이 다만 개인과 개인,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모든 사물에까지 미치는 철저한 성격이라고 말한다.
셋째로, 만해는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였다. 흔히 불교는 참선과 고행에 의해 자기 한몸만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이기주의적 종교로 알려지고 있으나,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중생제도의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만해는 역설한다. 한 사람이라도 해탈에 이르지 못한 병든 중생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곧 자기의 병으로 여기고 자신의 해탈을 거부하는 정신, 이러한 대중적 정신이 곧 보살정신이요 불교정신의 핵심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그는 구세주의라고 불렀거니와, 만해가 절을 산속에서 세간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고 현실개혁과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지향한 것은 이런 사상에 입각해서이다. 그가 불경들 중에서도 특히 유마경이나 반약경 같은 대승경전에 심취했던 사실은 그의 사상 이해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
어떻든 만해는 불교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진보적인 계몽주의자가 되었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를 불교적 평등의 개념 속에 흡수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에 결부되기 쉬운 이기적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불교의 보살정신을 사회개혁의 사상적 거점으로 확인하였다. 전통사상의 낡은 형태를 끝내 고집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하고 외래사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버림으로써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근대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시키고자 했던 만해의 경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값있는 교훈으로 제시된다고 하겠다.
만해 불교사상의 위대한 점은 그것이 순수한 종교학적 이론의 정립을 위해서 나타났다기보다 19세기말 20세기초의 우리나라 불교가 빠져 있는 침체와 몽매를 깨뜨리고자 하는 강렬한 실천적 필요의 산물로서 나타났다는 데서 찾아진다. 물론 그것은 만해에게만 특유했던 현상은 아니다. 넓게 보면 이 시대의 모든 사상이 민족적 위기에 대처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계만 하여도, 이조 500년에 걸쳐 위축과 침체의 일로를 걷고 있던 불교현실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광범하게 일어나,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이 발표되고, 이보다 10여 년 뒤에 박중림의 〈조선불교혁신론〉이 씌어졌으며, 그밖에 백용성·백학명·박한영·안경허 등 여러 승려들이 조선불교의 개혁운동을 각자의 안목에서 제창하고 전개했던 것이다. 만해사상은 이런 여러 불교개혁론들 중에서도 철저히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등 진보적 근대사상에 입각하고자 했던 점에 특징이 있으며, 따라서 그의 불교는 불교와 근대사상의 가장 심각한 접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가장 흥미있는 한 국면을 체현하고 있다. 이제 〈조선불교유신론〉의 실천론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는 당대의 조선불교가 미증유의 침체에 빠져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침체의 원인을 하늘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로 설명하는 데 반대하고, 우리 인간 자신이 바로 일을 꾀하는 자일뿐더러 일을 성공시키는 자임을 강조하고, 따라서 우리 불교가 올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구습들을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해는 그의 진보주의적 평등주의적 구세주의적 불교관에 입각하여 염불당을 폐지하라, 산중에 틀어박힌 절간을 대폭 없애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절을 세워라, 승려들의 결혼금지를 해제하라, 주지선거를 민주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승려의 결혼 문제와 관련하여 만해의 논설이 항간의 물의를 빚은 바 있거니와, 그러나 가령 참선에 관해 개탄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면 그는 결코 무분별한 과격파가 아니고, 미신과 형식주의에 목이 졸려 있는 불교의 참정신을 희생시키고자 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요즘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이 안될 수 없다. 불교는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 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염불을 하는 것만으로(말하자면 부처님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정사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죄인이 법관에게 잘 보여서 벌을 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법의 남용이요 법의 파괴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만해는 참염불이란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배우고 그 행을 배워 실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재공양과 제사 따위에 대해서도 그것이 한갓 「도깨비연극」에 불과한 것이라 배도하고, 부처님은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라고 갈파하였다. 또한 만해는 승려라고 해서 절간에 앉아 참선과 독경만으로 지낼 수는 없고, 마땅히 자기 먹을 것을 자기의 노동으로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약 앉아 놀고 먹기만 한다면 그것은 곧 농사짓고 길쌈질하는 이의 노력을 빼앗아 먹는 것이므로 경제의 발전에 저해가 되고 분쟁의 요인이 될 것이라고 하여, 사회평등의 경제적 기초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한편 그는 양계초의 「방관자를 꾸짖는 글」이 현재 조선 승려의 현상을 사진처럼 정확히 드러낸 글이라 소개하면서, 현실에 대해 방관만을 일삼는 승려들을 양계초의 관점에 따라, (1) 자기가 방관자임을 알지 못하는 무식자(군침파), (2) 알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이기주의자(위역파), (3) 늘 걱정하고 한숨을 짓되 아무런 실제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자(명호파), (4) 자기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남을 비방하고 헐뜯어 일을 그리치게 만드는 자(소탄파), (5) 자기는 힘이 없다고 하면서 남이 일해 줄 것만 기대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자(폭기파), (6)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하면서도 자신을 방관자로 여기지 않는 기회주의자(대시파)의 6종류로 분류하고, 이들이야말로 인류를 해치는 도둑이요 세상의 원수라고 규탄하였다.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당시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만해의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때라고 일할 만한 때 아님이 없을 것이며, 일 안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때라고 일할 만하지 못한 때 아님이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사람은 오직 시대의 대세를 만들 뿐이며, 세상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상가로서의 만해의 모든 윤곽이 이 〈조선불교유신론〉속에 거의 완전하게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불교사상가 만해로부터 전투적 민족독립지사 만해 및 대중불교운동의 지도자 만해까지에 이르는 발전은 단순한 직선적 확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유신론〉이 주로 기성불교의 현상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데보다 역점이 주어졌다면, 1920년대 및 30년대에 발표된 논설들은 당시의 식민지적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불교의 타락을 극복하고 그 이상을 실천할 것인가를 모색한 구체적 방법론들을 전개한 것으로서, 만해의 불교사상과 사회의식의 보다 심화된 모습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먼저 그의 불교사상이 강렬한 현실의식과 결합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19세기말 20세기초의 민족적 위기는 우리나라 불교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민족적 주체성을 망실한 움직임이 승려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그것이 곧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로서, 이 이회광은 1910년 8월 원종의 대종정이란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해 10월 6일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7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은 한마디로 우리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는 내용으로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지배를 종교의 분야에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이 이회광 일파의 책동에 분개하여 일어난 것이 유명한 임제종운동으로서, 만해는 박한영·진운응·김종래·장금봉 등과 함께 송광사·범어사 등지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열어 한일불교동맹의 조약체결을 분쇄하는 동시에,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그 관장에 취임하였다. 이것은 일제 식민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일어선 민족불교운동의 첫 결실일 것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의식이 심화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불교계에서도 보다 젋은 층을 중심으로 불교청년회(1920)·불교유신회(1922)·불교청년회(1927부흥)·불교청년회맹(1931 개칭)·만당(1931) 등의 조직이 결성되어, 민족불교·대중불교·청년불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만해는 언제나 이 운동들의 배후에서 운동의 노선을 제시하고 활동의 지침을 마련하는 데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31년에 인수하여 1940년경까지 발행한 《불교》지(1924년 창간)에 발표된 그의 많은 논설들은 불교현대화 및 민중불교운동이라는 견지에서 거의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시효를 잃지 않은 지침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 논설들에서 만해는 재래의 조선불교가 타락 위축하게 된 역사적 차원에서 깊이 파헤쳐 불교혁신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조선불교의 현상에 대한 만해의 보다 심화된 진단과 그 대책을 예각적으로 보여준다.
재래의 불교는 권력자와 합하여 망하였으며, 富豪와 합하여 망하였다. 원래 불교는 계급에 반항하여 평등의 진리를 선양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권력과 합하여 그 생명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원래 불교는 소유욕을 부인하고 우주적 생명을 취함으로써 骨子를 삼지 아니하였는가. 부호와 합하여 안일에, 탐욕에 그 생명의 태반을 잃었도다. 이제 불교가 진실로 진흥하고자 할진대 권력계급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민중의 신앙에 세워야 할지며, 진실로 그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고자 할진대 재산을 탐하지 말고 이 재산으로써 민중을 위하여 법을 넓히고 道를 전하는 실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해가 보기에 재래의 조선불교는 대외적으로는 권력과 금력에 굴복 야합하여 종교적 자주성을 잃어 버렸으며, 대내적으로는 「사찰의 불교」 「승려의 불교」로 되어 폐쇄와 고립을 자초하였다. 그러므로 불교가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권력과 금력에 대한 일체의 예속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교리의 민중화, 경전의 민중화, 제도의 민중화, 재산의 민중화를 통해서 민중 속에 튼튼히 자리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만해는 「山間에서 街頭」「승려로서 대중에」가 현금 조선불교의 슬로우건이 되어야 하리라고 거듭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괴로운 현실로부터 벗어난 정지된 상태에서 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중에서 菩提를 얻고 생사중에서 열반을 얻는」것이 진정한 불교이므로, 그것을 옳게 인식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의 불교사상 및 불교실천론은 요컨대 이러한 민중불교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민중불교의 확립을 위한 구체적 개혁방안들이었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민중불교적 이상을 저 버리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만해의 불교사상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앞으로 매우 심각하게 검토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가 혹은 문학자로서의 만해 역시 우리 근대사에서 혁혁한 광망을 발한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그 방면에서의 업적이 독창적이라기보다 그의 불교사상의 현실적 혹은 문학적 확산이라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독립사상과 문학작품의 독특한 위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지닌 문학적 위치가 특출한 것임은 모든 논자들의 일치된 견해이거니와, 민족사상사의 측면에서도 그의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위치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검토하자면 <조선독립 이유서> 혹은 <조선독립의 서>로 알려진 글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 이 글은 3·1운동 후 감방에 있을 때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것인 바, 이것이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와 세상에 알려졌으며, 1919년 11월 4일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의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조선독립 이유서>에서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와 똑같은 사상의 틀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류역사가 몽매와 쟁탈을 버리고 문명과 평화를 향해 나아간다고 하는 진보사관이며, 소수의 지배자가 역사를 움직이던 시대에서 다수 민중의 힘이 역사를 만드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민중사관이다. 이런 관점에서 만해는 세계사의 현단계를 분석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을 갈파하는 본질을 갈파하는 동시에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다음, 이러한 세계사의 필연적 진행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은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군국주의, 즉 침략주의의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이라 규정하고, 이러한 침략주의자들이 실로 얼마나 뻔뻔스런 거짓말을 뇌까리는가에 대해 이렇게 폭로하였다.
이른 바 강대국, 즉 침략국은 군함과 총포만 많으면 스스로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도외를 무시하고 정의를 짓밟는 쟁탈을 자행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때는 어떤 지역의 평화를 위한다거나 쟁탈의 목적물, 즉 침략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한다거나 하는 기만적인 헛소리로써 정의의 천사국을 자처한다. 예를 들면 일본이 폭력으로 조선을 합병하고 2천만 민중을 노예로 취급하면서도, 겉으로는 조선을 병합함이 동양평화를 위함이요, 조선민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야만적 군국주의가 인류역사에서 마침내 사라지고야 말리라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에 비추어 명백하다고 만해는 말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사실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그가 분석하기에 이 전쟁의 결과는 독일 카이저의 패배가 아니라 군국주의의 패배요,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독일인민의 승리인 것이다.
한편, 만해는 나라의 독립과 관련하여 이른 바 준비론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는 동시에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어 독립을 얻어보려는 외교론의 기만성을 규탄하였다. 만해에게 있어 독립은 모든 물질문명이 갖추어진 뒤에야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독립하겠다는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 「일본인은 말끝마다 조선에는 물질문명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조선인을 어리석게 하고 야비케 하려는 학정과 열등교육을 폐지하지 않으면 문명의 실현을 보기 어려울」것이기 때문에 독립할 만한 물질적 준비가 갖추어진 다음에 독립하겠다는 것은 아예 독립을 포기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만해는 독립이란 누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국가라 선언함으로써 족하다고 주장한다. 아마 여기서 우리는 만해의 종교인다운 이상주의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제 식민주의에 대한 일체의 타협주의적 발상을 단호히 배격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완강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기에 근본적 모순은 총독정치가 가혹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체제 자체에 있기 때문에 총독정치가 아무리 개선되더라도 달까울 리가 없다. 「언제라도 합방을 깨뜨리고 독립자존을 꾀하려는 것이 2천만 민족의 머리에 박힌 불멸의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총독정치가 아무리 극약해도 여기에 보복을 가할 이유가 없고, 아무리 완전한 정치를 한다 해도 감사의 뜻을 나타낼 까닭이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와 민족독립의 이러한 근본적 모순을 제대로 인식 못한 까닭에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선의에 기대어 내정독립이니 자치 따위를 얻어보려 했고, 3·1독립선언에 참가했던 소위 민족대표들 중에도 「독립선언」 대신에 「독립청원」으로 하자는 미지근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만해는 이런 일체의 타협주의와 투항주의에 반대하여 식민지체제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철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고, 민중의 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조선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둥근 돌과 같이 목적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낙관론을 가질 수 있었다.
1922년 3월 감옥에서 나온 만해는 종교·사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그의 재능의 나머지 한 부분을 우리 시문학을 위해 집중하였다. 1926년 강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하나의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만해는 30년대 후반에 서너 편의 소설도 썼고 상당수의 시조와 한시도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중요성은 거의 이 시집 한 권으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 의해 그는 승려나 독립지사로서의 측면 못지 않게 시인으로서 우리 민족사와 민족문화에 공헌하였다. 이 시집은 그가 우리의 옛 전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시인이자 동시에 최초의 근대적인 민족시인이라는 영예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 시집의 경이적인 점은 그것이 완전히 문단의 권외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문단적 수준을 멀리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문단의 유행에 따라 서양문학의 방법을 배워다가 시를 쓰지 않고 불승으로서의 비전과 일상생활적 어법만 가지고 시를 썼으나, 그것이 그대로 주권을 빼앗긴 민족적 현실의 고통과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가장 순화된 시적 표현으로 나타났다. 만해문학의 탁월성을 이해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사항들 중의 하나는 그가 이른 바 문단이라고 하는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단사회가 참된 문학활동을 위해서 튼튼한 울타리 노릇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때로는 창조적 활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오기도 한 사실을 시인한다면, 만해의 비문단성은 그의 반식민지성과 결부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님의 침묵》은 그러한 문단의 바깥에 서서 민족의 현실과 꿈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집으로서 우리 문학사상 비길 데 없이 순화된 정서적 통일을 이룩하고 있으며, 시집에 실린 88편의 어느 한 편도 우리를 무심히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만해가 시에만 전념했던 시인이 아니었음을 새삼 상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순전히 시적인 입장과 안목에서 보더라도 그의 작품이 놀라운 경지에 이르고 있음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바이지만, 만해가 이론가와 실천가, 이른 바 승려와 독립지사와 시인을 겸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그의 문학적 성취를 이해하는 데에도 극히 중요한 사항이다. 근대 서구문학의 이론을 가지고서만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면 만해는 그저 비유가 풍부한 시인, 종교적인 명상시인, 혹은 독특한 관념체계를 거느린 형이상학적 시인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가 인간활동의 한 전문분야로 되어 버린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인이 아니라 정치와 학문, 도덕과 문학을 하나의 인격적 통일 속에서 추구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태어난 시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님의 침묵》은 다른 여러 문학적 문학사적인 측면들과 함께 <조선불교유신론> 및 <조선독립이유서>에 연결되는 측면에서도 고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작품들은 언뜻 보기에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생각난 대로 술술 써나간 듯하여, 시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작품은 과연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해의 시를 우선 아무런 철학적 문예이론적 준비 없이 소박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처럼 소박하게 읽더라도 그의 시는 우리의 삶이 잃어 버려서 안될 어떤 본격적인 것을 잃어 버리고 괴로워하며 아울러 그 잃어 버린 것을 되찾고자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심정을 전달해 준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그의 시를 좀더 복잡한 관련성 속에서 읽더라도 그것은 날카ㄹ운 예술적 감동과 깊은 종교적 체험 및 민족현실에의 심오한 인식이 수준높게 결합된 어떤 탁월한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젊은이에게는 사랑의 노래로서, 종교인에게는 구원의 언어로서,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해방의 염원을 주고받는 암호로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동시적으로 포용한 고도의 시적 상징은 바로 시집의 표제이자 이 시집의 중심적 개념인 「님」이다. 그러면 이 「님」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이님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는 님과의 「이별」이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츰의 바탕없는 황금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이별은 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계기요 「나」는 님과의 이별을 통해서 비로소님을 발견한다.님은 이별을 자기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기도 하다(<최초의 님> 참조). 물론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설이야말로 만해의 문학을 성립시키는 근본적 구조이고 또한 그 활력의 원천이 된다.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보다 큰 긍정에의 길을 준비하는 불교적 변증법은 단 하나의 주제를 맴도는 그의 시에 단조로움이 아닌 무한한 역동감을 넣어주는 것이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여요 --<반비례>
이렇게 만해는 자기 시대를님이 사라진 시대로, 자기 현실을님이 침묵하는 현실로 인식했다. 그는 이 사실을 시집 도처에서 강조하여 노래함으로써 식민지체제에 매몰된 순응주의를 단호히 비판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님」의 침묵은 앞의 <반비례>에서 보이듯이 그 자체가 님의 「소리」이며 님의 부재는 님의 현실에 대한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증거로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요 목전에 벌어지는 현상이 곧 역사인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님의 침묵이 바로 님의 부재를 뜻하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현상에 순응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다. 그러나 만해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란 거짓이요 헛것임을 정확하게 꿰뚫어 알았다.
나는 너의 침묵을 잘 안다.
너는 철모르는 아해들에게 종작없는 찬미를 받으면서 시쁜 웃음을 참고 고요히 있는 줄을 나는 잘 안다. --<김강산>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유자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님이 있더냐. 있다면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서문 <군말>)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문단과 문학에 대한 만해의 더없이 신랄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민족의 자유를 잃은 식민지에 있어서 참으로 자유로운 개인은 있을 수 없으며 나라가 남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어느것 하나 한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예찬이니 연애의 자유니 예술지상주의니 하고 떠드는 것은 그러므로 「철모르는 아해들」의 「종작없는」짓이요, 「이름좋은 자유」에 기만되는 것이며 자기 「그림자」에 도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에 순응하는 길일뿐더러 현상의 유지에 조력하는 길이기도 하다. 참된 문학은 언제나 지금 있음의 허구성을 깨뜨리고 장차 있어야 할 참된 존재에로 우리를 부단히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만해의 시는 님의 부재와 님의 침묵에 대한 모든 냉엄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님이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벅찬 희망과 튼튼한 낙관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그러므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오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에 웃음을 주고 떠날 때에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의 웃음보다 떠날 때의 눈물이 좋고 떠날 때의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늬 때에 있습니까 --<최초의 님>
그러므로 이별은 만해에게 있어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더 크고 더 확실한 사랑의 시초를 뜻하게 된다. 그래서 님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님에 대한 사랑은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많아진다(<사랑의 측량> 참조). 나는 님에 비하여 티끌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님도 그러한 내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있는 존재이다. 님은 절대의 존재이나 그러면서도 나를 통해서 존재한다. 나는 님에게 포함되며 님은 나를 통해서 존재한다. 나는 님에게 포함되며님은 나를 통해서 구체화된다.님은 내가 잊고자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잊으려 할수록 더욱 잊혀지지 않는 절대적 그리움의 대상이며, 또 내가 님을 기다리는 것은 억지로 기다리고자 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기다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님은 내 존재의 유일한 뜻이요 내 존재의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원천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님을 잊고저 하야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혀 잊힐까 하고 생각하야 보았습니다. --<나는 잊고저>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보다도 사랑입니다.
--<자유정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독립이유서>
그러므로님은 자기에의 목마른 기다림을 속성으로 가진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은 내 존재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징검다리와 같다.님을 잊는 것은 곧 나를 잊는 것이요 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님의 그림자요 님의 일부분이며 님은 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님에게 속박되는 것은 거짓된 현상적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며 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이름좋은 자유」의 희생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자기의 회복이요 보다 진정한 자유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해에게 있어서 이별은 님으로부터의 타율적인 격리가 아니라 참된 님을 찾으려는 투쟁의 시초를 뜻하며, 따라서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과정은 님을 전취하고 님을 실현시키려는 싸움의 형태로 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큰 슬픔은 큰 기쁨으로 전화되며 거대한 절망은 거대한 희망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님은 이별을 통해서 자기를 찾게 하고 부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침묵을 통해서 자기의 소리를 들려주고 거짓과 헛것의 모습(색)이 곧 진실 즉 물적 증거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죽음은 님이 사라지고 없는 시대의 님의 도래를 예비하는 최후의 확실한 담보가 되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는 것으로서 자유가 없는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으며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아까와할 것이 없으니 곧 생명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조선독립이유서>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야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야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람과 포대가 띠끌이 됩니다.
그러면 좇어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얐습니다. 어서 오서요.
--<오서요>
여기서 우리는 마침내 만해의 기다림이 죽음과 똑같은 무게로써 애끓는 호소가 되고 숨막히는 절규가 되고 있음을 보고 전율한다. 이 시의 경지에 이르러 마침내 문학과 종교가 하나로 되고, 사상과 행동이 하나로 되고, 헤어짐과 만남이 하나로 되고, 기다림과 다가옴이 하나로 되고, 보살과 중생이 하나로 되고, 꿈과 현실이 하나로 됨을 우리는 보는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고,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되고, 허무와 만응이 하나로 되며,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자리가 뒤바뀌고, 쫓아오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가 해소되며, 군함과 총포가 한낱 티끌로 화하는 예언적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표현과 종교적 신앙 가운데에서 만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및 그 수단으로서의 군국주의가 하나의 역사적 유물임을 깊이 통찰하고 누구보다 열렬하고 전투적인 평화의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암담한 식민지적 현실에 있어서 그 현실이 허용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그 현실의 질곡을 갈파하고 앞으로 도래할 참된 현실의 질서를 노래하는 최초의 시인이 되었다.
50대 이후의 만해는 성북동 심우장에 은거하면서, 신간회의 발기(1927)에 참가하여 그 경성지회장이 되기도 하고 광주학생의거(1929) 때에도 민중대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및 卍黨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고 월간 《불교》지를 인수(1931)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대중화운동을 영도하는 등 꾸준히 활동하였다. 이 무렵 만해의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말해 주는 여러 가지 일화들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제 이 시기에 이르러 역사의 핵심적인 추진력은 3·1운동 세대인 만해의 손에서 떠나 3·1운동에 의해 계발된 새로운 세대에게로 넘어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1920년대 이후 광범하고 급격하게 발전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및 이 운동 속에서 성장한 지도자들이 이제는 식민지체제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추적인 역량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점 《님의 침묵》은 역시 <조선불교유신론>이나 <조선독립이유서>의 구체적 현실대결이 비전이나 예언의 형태로서밖에 자기를 드러낼 수 없는 시대의 특징적인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전이나 예언을 사회적 실천과 통일시키기에는 그의 나이가 이미 너무도 늙었던 것일까. 어쨌든 일제 군국주의가 만해의 예언대로 만주를 집어삼키고 중국으로 기어들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그러는 가운데 3·1독립선언의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하고 육당과 춘원이 변절하고 그밖에 많은 이름있는 인사들이 하나둘씩 변절해 가던 그 시기에 그는 참으로 잘 참고 잘 견디어냈다. 천년도 더 계속될 것처럼 억세고 악독하던 그 첩첩한 어두움이 걷히기 1년 남짓 앞두고 마침내 그는 지병인 중풍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가 떠난 날은 1944년 5월 9일이다. 뒷날 그를 두고 위당 정인보가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는 바, 누가 있어 감히 님의 침묵을 오늘 이 순간엔들 향기 없다 하며 빛 잃었다 하랴.
풍란화 매운 햐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외 없으니
혼하 돌아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