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는가?
(How should the mind be studied?)
컴퓨터와 마음 : Philip N. Johnson-Laird 지음, 이정모. 조혜자 옮김, 민음사, 1991, Page 17~35 (원서 : The Computer and the Mind: An Introduction to Cognitive Science, Harvard Univ. Press, 1988)
계산과 마음 (Computation and the Mind)
튜링의 뇌에 대한 모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튜링모델은 양자역학에 대한 모든 논의들을 포함하여 물리학과 화학을 근본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였다. 튜링의 관점에서, 물리학과 화학은 그것들이 추상적인 <상태> 나 <읽기>, <쓰기>를 구현하는 매체를 유지하는 만큼만 관련된다. 단지 이러한 <상태들>의 논리적인 형태만이 실제로 문제가 될 수 있다. 튜링의 주장은 뇌가 행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논리적인 체계로서의 구조 때문에 행해진 것이지, 뇌가 인간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도 아니고, 특정한 종류의 생리적인 세포구성을 이루는 스폰지 조직이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뇌의 논리적인 구조도 어떤 다른 물리적 기제로 구현되는 다른 매개체로도 잘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대한 유물론적인 관점이지만, 사람들이 종종 행했던 것처럼 논리적 행태와 관계를 물리적인 물질이나 사물들과 혼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 호지스 (Alan Hodges)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의식적 느낌과 판단이 자신의 행위(actions) 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사고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로, 내 친구 하나가 새 차를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고려해 보자. 그 친구는 차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관한 잡지들을 읽어본 뒤, 일본제 차가 가격이나 신뢰도 면에서 가장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도 구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새 차를 사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했다. 새 차를 사면 보통 1년 동안은 보증을 해주기 때문에 자동차 고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비교적 새 것인 상태의 중고차를 사라고 충고했다. 새로 출고된 차보다 가격이 많이 저렴하기 때문에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충고들은 상충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 친구는 자동차 상이 전시용품으로 사용하던 차를 사게 되었다. 그는 그 차가 충고받았던 모든 특징들을 복합적으로 가진 차라고 말했다. 그 차가 일본제였으며, 새로 출고된 모델의 차보다 가격이 아주 쌌고, 아직은 보증기간이 유효한 새 차였다.
나는 내 친구가 사려 깊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의 자동차 선택의 이유는 아주 논리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친구가 자신이 언급한 이유 때문에 그 차를 샀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이유는 사후에 붙인 합리화는 아닐까? 그 친구는 자신의 결정을 흔들리게 했던 주요 측면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해 그렇게 말했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매력을 끈 것은 차의 인상이었을지 모른다. 즉 자동차가 약간 남성적이거나 강인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비슷한 차를 가진 이웃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하나의 일반적인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는가? 믿음과 소망이 행위를 지배한다는 관점은 옳을 수도 있지만, 실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신화나 신비주의적인 소박한 <상식 심리학 (folk psychology) >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떤 특정행위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방법은 없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들의 딜레마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심리학자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실험적으로 통제된 동일한 상황에서 많은 개인들의 행위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심리학도들은 마음을 연구하는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며, 마음이 적절한 연구대상인지에 대해서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인 적이 없다. 이러한 문제는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 - 1650) 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신체를 구별한 첫 번째 근대 철학자였다. 그의 주장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마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참고하라) .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인 회의주의를 충분히 활용하여 우리가 신체를 가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있다. 따라서 신체와 마음은 아주 구별된 두 종류의 실체라는 것이다. 동물들은 기계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체를 기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반사나 다른 신체 행동들은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마음은 비물질적인데도, 비물질적인 것에서부터 물질적인 것에로의 신비로운 연결방식을 통해 자발적인 행동을 지배한다. 따라서 마음은 기계로 볼 수 없고, 마음의 과학 또는 정서 과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예는 아주 그럴 듯해서,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파고들어, 오늘날의 사람들은 대부분 겉으로 표방하건 표방하지 않건 간에 데카르트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전에 한 번도 그러한 논의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이 신체와는 구별된다는 것과, 자신의 마음의 내용보다 더 알기 쉬운 것은 없다는 것, 마음의 내용이 자신의 행동과 생활의 원초적 동인 (prime - mover) 이라는 것,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은 아주 유력해서 심리학의 역사는 넓게 말하자면 이원론에 대한 일련의 반응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처음 시도했던 19세기에, 심리학자들은 마음의 내용이 내성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일치된 의견을 가졌었다. 그들은 여러 과제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를 제시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첫 단어를 보고하고, 그 반응이 나오게 된 정신과정을 반추해 보곤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내성을 할 만큼 투명하다는 이들의 견해는 두 가지 도전을 받게 된다. 첫째, 독일의 헬름홀츠 (Hermann von Helmholtz) 는 깊이지각의 예를 들어 시지각이 무의식적 추론에 의존함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프로이트는 성욕과 공격욕이라는 무의식적인 체계가 있어, 이것들이 억압이 되면 신경증적인 증세의 왜곡된 형태로 의식에 떠오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적대감을 억압한 것이 결국에는 히스테리성 수족마비로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억압 (repression) 자체는 무의식적 과정으로서 불쾌한 기억을 의식적으로 억제 (supress) 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무의식에 대한 이러한 두 견해는 모두 내성법의 한계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두 입장은 아주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행위에 대한 의식적인 이유를 대신할 대안적 이유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타산성 있는 거래이기 때문에 차를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무의식적인 소원을 만족하기 위해서 차를 산다고 할 수 있다. 헬름홀츠의 무의식은 그러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 (mechanism) 를 제공한다. 따라서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마음과 의식의 동일성에 대해 보다 과격한 도전을 제공한다. <이드가 있는 곳에 에고가 있게 하라 !>는 프로이트의 명령에 복종하여 여러분은 어떤 정신분석자의 간이침대에 누워서 자유연상을 함으로써 자신의 무의식적인 동기의 내용들을 회상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헬름홀츠의 무의식과정들은 의식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무의식적 과정들이 지각의 첫 위치에서 그 내용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내성을 통해서 마음의 이러한 내면적인 과정을 집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내성법의 또 다른 문제는 금세기 초 뷔르츠부르크에서 함께 모였던 일단의 심리학자들이 내성법을 체계적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내성하면서 일종의 의식을 식별했었지만, 그것은 심상이나 어떤 의지적인 행위에 대한 자각 (awareness) 도 포함하지 않는 분석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마음의 눈 (mind's eye) 으로 개의 시각적 심상을 형성하지 않고도 개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개는 동물이라고 결정할 수 있었다. 200여 년 전에 칸트가 상정했던 것처럼, 의식수준 이하에서 작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무심상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착상은 사고 (thinking) 가 관념들 (ideas) 의 의식적인 연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상론을 믿었던 심리학자들을 자극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성을 검토해 본 결과, 흄 (David Hume) 의 견해처럼 사고는 항상 심상을 수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심상 사고>의 논쟁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내성법은 하나의 주관적인 경험이 어떻게 또 다른 주관적인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확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하는 방식이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가 그들의 주인공의 마음에 불어넣었던 내적인 독백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저자인 나는 (봉급을 인상해 달라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속으로 되뇌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결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중 누가 잘못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결정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내성법 자체만으로는 <무심상 사고> 논쟁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정신이란 없다>라는 마음의 거부, 즉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도전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셈이다. 이러한 유물관은 행동주의로 알려진 운동으로부터 일어났고, 그 흔적은 처칠랜드 부부 (Paul and Patricia Churchland) 와 같은 최근의 유물론자들의 믿음체계 (믿음에 대응하는 물질적인 것이 무엇이건 간에) 에 남아 있다. 1913년 발간된 왓슨의 행동주의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심리학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자연과학이다. 심리학의 이론적인 목표는 행동의 예측과 통제이다. 내성법은 심리학 방법론의 본질적인 부분도 아니고, 심리학 자료의 과학적인 가치는 그 내용들이 의식의 언어로써 쉽사리 해석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심리학은 객관적이어야 했고, 자연과학이어야 했으며, 행동을 통제하고 예측하여야 했고, 과학적 탐구의 주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주제인 의식이나 마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어 버려야 했다.
이와 같은 대담한 외침은 특히 미국에서는 많은 분야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심적 과정에 대한 연구는 포기되었고, 내성법은 실험실의 통제된 반응 관찰로 대치되었다. 심리학자들은 동물들이 어떻게 미로를 달리는 것을 학습하는지, 음식을 얻기 위해 지렛대 누르기를 어떻게 학습하는지, 그리고 쉽게 관찰 가능한 다른 반응들을 어떻게 학습하는지를 연구했다 (동물들이 야생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발견하는 문제는 동물행동학자들에게 남겨졌다). 언어학자들은 심성주의 (mentalism) 를 포기했고 의미에 대한 행동주의적 관점을 채택했다. 즉 배고픈 동물에게 음식을 주기 전에 항상 종을 쳐주곤 했다면 나중에는 종소리가 침을 흐르게 유도해 내는 것과 같은 과정에 의해 (이것은 행동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 (Ivan Pavlov) 에게서 빌려온 <고전적 조건화>의 기법이다), 단어들이 대상을 상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착상을 더 완숙된 의미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연구하는 대신 사회 내에서의 행동을 연구했다. 마음은 이원론적 구조 내에서 차지했던 원래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마음은 행동결정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유령 같은 불가사의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에 대한 금기는 여러 행동주의자들, 특히 스키너 (B. F. Skinner) 에 의해 만들어진 유혹적인 논지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론가의 딜레마>로 알려진 그 논의는 다음과 같다 : 외부세계의 자극과 후속해서 일어나는 반응과의 사이에 중재하는 마음상태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두 가능성이 생긴다. 즉, 마음상태는 법칙적인 방식으로 개입되거나 그렇지 않거나이다. 만약 마음상태가 법칙적이라면, 이론가는 그것을 무시하고 행동과 자극과의 관계되는 법칙을 직접 형식화할 수 있다. 만약 마음상태가 법칙적이 아니라면, 이론가는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둘 중 어떤 경우에는 심리학 법칙을 형성하는 데 있어 마음상태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마음상태는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언급할 수 없거나 한 것이다.
이 논의는 매력적이다. 그것의 매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사실상, 그것은 두 가지 그릇된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 하나는 과학의 목적이 전적으로 절약적인 (parsimonious) 법칙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웟슨이나 스키너 (주석 : 스키너는 설명이 아니라 객관적 기술이 그 목적이라 하였고, 자료만 있으면 되지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가 행동의 예측과 통제를 강조했다고 할지라도, 과학이란 단순히 법칙으로써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설명은 이론의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만일 마음상태가 존재한다면, 비록 마음이 행동의 법칙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할지라도 완전한 심리학적 설명이 되려면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심리학이 외부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외부세계 내의 자극들과만 관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행동들은 환경적인 자극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많은 인간의 기술들은, 자발적인 언어구사에서부터 지적인 문제해결에 이르기까지 환경 내의 사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심적 과정에 근거한다. 마찬가지로 지각 (이에 대한 연구는 행동주의자들이 피했다) 은 어떠한 외현적인 행동을 반드시 일으키지는 않는다. 만약에 지각이나 사고, 의사소통이 설명되어야 한다면 심적 과정이 언급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 행동주의자가 성관계를 가진 뒤 상대방에게 말하는 한 이야기를 예로 보자 : <너에게는 좋았지만, 나에게는 어땠지?> (주석 : <당신의 반응을 보니 당신은 만족스러운 것 같은데, 내 반응은 스스로 볼 수 없으니 나는 어땠지?>) 이 농담은 행동주의자가 보이는 내성법에 대한 반감을 잘 보여준다. 이 반감은 <무심상 사고>의 논쟁으로부터의 놀랄 만한 해방이었다. 왜냐하면 내성법이 그 논쟁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내성법을 전적으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성법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경험들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입체경 (sterepscope) 을 들여다보라고 한다면 (내가 적절한 시각 자극을 제시했다면), 여러분은 입체감이 있는 그림을 보았다고 보고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성보고는 지각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헬름홀츠가 논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각의 밑바탕의 모든 과정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또한 프로이트가 믿었듯이 우리는 우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적인 판단을 행한다는 것이 우리 행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상식과는 반대된다.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상식과는 반대된다.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대응되는 것이 서로 대화를 진행해 나갈 수 있음을 보장해 준다. 더 나아가 심리학자들이 어떤 언급된 주장과 행위의 실제 원인 간의 괴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내성보고를 연구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지각했는지, 어떻게 한 문제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어떤 특정한 방식의 행위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내성을 무시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행동주의자들이 동물학습 현상에만 몰두하였을 때, 그들은 객관적으로 동물반응을 규정하는 데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전은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행동을 설명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심리학이 심적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웟슨의 슬로건을 어떻게 따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어떤 행동주의자들은 객관성을 포기하듯 보이지 않으면서 내적 과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들을 고안했다. 주리프 (Gerald Zuriff) (그 운동의 최근 추종자) 가 인정한 것처럼, 이러한 기법은 행동주의 틀 안에서 심성주의 이론들조차도 수용되는 것을 허용했다. 객관적 과학으로서 시작된 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행동주의는 2차 대전까지 번성했으나, 행동주의가 지배적인 동안에도 특히 유럽에서는 마음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뷔르츠부르크 학파가 사라지고 난 뒤 <형태주의 (Gestalt)> 심리학이 꽃피었다. 이것 역시 심적 활동이 전적으로 관념들간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철학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베르트하이머 (Wertheimer) 와 쾰러 (Köhler) , 코프카 (Koffka)와 같은 형태주의 주요 구성원들은 지각에서의 (단순한 연합보다 더 풍부한) 구조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어떤 문제에 대한 통찰은 그 문제의 기저구조를 이해하는 데 의존한다고 논의했다. 그들의 논의는 옳았지만 자신들의 사상을 분명히 해줄 언어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은 심적 과정의 설명보다는 오히려 구조적인 법칙을 추구했다.
행동주의와 형태주의 심리학의 대비는 러셀 (Bertrand Russell) 로 하여금 동물들은 실험자들의 국적에 따른 특성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게끔 하였다. (주석 : 행동주의자들은 미로를 뛰어가는 쥐의 행동을 주로 연구했고, 형태주의자들은 천장에 매달린 바나나를 따야 하는 상황을 침팬지가 어떻게 해결하는가 등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미국인들이 연구하는 동물들은 미친 듯이 서두르고 굉장한 원기와 기력으로 헤매다가 드디어는 우연히 원하는 해결을 성취해 낸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관찰하는 동물들은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고, 그리고 드디어는 내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해결에로 나아간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두 전통의 연구자들이 각기 다른 동물 종들에게 각기 다른 문제를 설정하여 연구했던 것이다.
심성주의의 또 다른 지지자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로서 구조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다. 사후에 출판된 그의 강의들 (1907 - 1911) 에서 그는 19세기 어원학 (philology) 의 전통과는 반대로 언어는 그 역사적 근원과는 독립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원리를 확립했다. 그는 어떤 상징 (symbol) 의 의미는 그 상징이 지칭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적인 실체 (mental entity) 라고 주장한다. 소쉬르에게 있어 하나의 기호 (sign) 나 상징은 단어와 같은 하나의 형태 (상징자 또는 기표, signifier)로 구성되어 있고, 이 상징자는 한 개념 (피상징자 또는 기의, signified) 과 심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언어에서 실제의 어떤 소리형이 어떤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가는 임의적인 것이다. 즉 단어와 개념 사이에는 몇몇 의성어의 경우를 제외하면 자연스런 연결은 없다. 한 개념이 지니는 독특한 가치는 어떤 다른 개념들이 존재하는가에 의존한다. 사실상 소쉬르는 한 개념은 그것 자체로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불어의 <mouton>이란 단어와 영어의 <sheep>이란 단어는 둘 다 모두 양을 지칭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mutton>이란 단어가 양고기를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반면, 불어에서는 그와 상응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mouton>과 <sheep>의 개념들은 다른 값을 갖는다. 기호가 나타내는 개념은 언어마다 다르고, 또한 같은 언어 안에서도 시대마다 개념은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소쉬르는 언어가 특정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관념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영역이 있다는 플라톤식의 관점을 수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언어가 사회적 산물임을 인식했다. 즉 단어와 개념 간의 관계는 사회적 용인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마음이 구조화된 심성 어휘집 (mental lexicon) 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는 견해에서 출발하였다.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 - Strauss) 는 한 문화의 신화나 관습, 공예품들은 심적 구조가 표현된 결과라고 가정했다. 그 구조는 내성법으로는 접근되지 않지만 분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의 방법에는 위험이 있다. 후기 인지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바와 같이 분석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하나의 문제는 숫자 애호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어떤 통계적 자료가 그들에게 유의한 패턴인가를 찾아내는 것과 같이 이론가들이 그의 분류방식을 자료에 적응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론은 그 기술적인 가능성이 너무 풍부해서 어떤 데이터에도 맞도록 만들어질 수가 있다. 더욱이 어떤 문화적 풍습이 한 이론적 구조에 의해 정확히 기술될 수 있다고 해서, 이 구조가 그 이론가의 마음과는 별개인 모든 사람의 심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료건 그에 대한 유일한 하나의 특정한 기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한 문화의 일반 구성원들은 이론가와는 전혀 다른 표상을 사용할 수도 있다. 사실상 신화와 같은 문화적 산물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도 표상되지 않는, 마치 번역 오류와 같은 요인들의 산물일 수 있다.
구조주의는 단순히 분류원칙들, 즉 식용/비식용, 자연적/문화적과 같은 이항대립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류체계들은 사고의 다양한 형태들을 설명하기에는 미약하다. 구조주의는 문학비평, 프랑스 정신분석학, 미학이론 분야에서 존중되었다.
구조주의의 문제점은, 작고한 스위스의 심성주의자인 피아제 (Jean Piaget) 의 문제점과 유사했다. 피아제는 인식론에 관심을 갖고, 지식의 기본원리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동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아동의 세상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관련하여 많은 비형식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사고는 <자신의 행위들의 내재화>를 통해 발달하며, 질적으로 구분되는 아동기의 제단계들을 거쳐 발달한다고 믿었다. 피아제에 따르면 이들 단계들은 수학의 주류의 전조들로 간주되는 새로운 심적 구조들의 출현과 대응한다. 즉 처음에는 위상학 (공간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 관한 연구) 이 나타나고, 다음은 관계들을 다루는 대수가, 마지막은 형식논리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언급건대, 문제점은 피아제가 아동의 사고에 이러한 구조들을 부과했던 점과 이 구조들이 아동의 머리 속에서 실제 발견되는 것과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더욱이 그는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모형화할 만큼 분명한 심적 구조의 발달에 대한 설명을 결코 제공하지 않는다. 그 이론은 작용기제가 없는 시계에 불과하다.
형태주의 심리학, 구조주의, 피아제의 인식론, 그리고 바틀넷 경 (Sir Frederic Bartlett) 등의 영국 심리학자들의 절충주의적 연구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를 1, 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에도 지속하도록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심리학자들은 소음 속에서 말소리를 재인할 수 있는 능력에서부터 비행기를 운항하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인간 기술들을 연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들은 심적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쟁 후 이러한 경향성은 다른 학문 영역들로부터 여러 이론이나 생각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확장되었다. 사이버네틱스 학자 (인공두뇌학자, Cybernetician) 들은 목표 달성에 미치는 피드백(feedback) 의 역할을 연구하고 있었다. 온도조절기가 특정온도를 유지시켜 줄 때 한 목표에 의해 지배되듯이 인간행동에 목적론적인 원리를 귀인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들은 지적했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신경세포 회로의 논리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캐나다 심리학자인 헵 (Donald Hebb) 은 세포군집의 기능에 대한 가설에 기초한 인지이론을 세웠다. 정보이론가들은 전화선과 같은 통신 경로를 거쳐 전달되는 정보의 양을 통계적으로 측정하였다. 개략적으로, 한 메시지가 통계적으로 존재할 확률이 낮을수록 그것이 전달하는 정보의 양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 측정은 미국 심리학자인 밀러 (George Miller) 로 하여금 인간의 정보처리 용량을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또한 영국 심리학자인 브로드벤트 (Donald Broadbent) 로 하여금 통신 경로로서의 마음을 분석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정보처리> 심리학은 컴퓨터의 발명, 즉 그 자체의 프로그램을 내장할 수 있는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에 힘입어 일어났다. 그것은 1950년대 초에 수학자인 노이만 (John von Neumann) 의 감독 아래 프린스턴에서 만들어졌다. 선구적 이론가인 튜링 (Alan Turing) 처럼 그도 컴퓨터를 뇌와 비교하게 되었다. 이제 컴퓨터가 지능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프로그램하는 것이 새로운 도전이 되었고, 1950년대 중반에는 사이먼 (Herbert Simon) 과 뉴월 (Allen Newell) 이 인간이 실제 행하는 바와 유사한 방식으로 논리적인 정리들을 입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뉴월과 사이먼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내성 보고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들을 토대로 그것들을 동일한 문제를 푸는 컴퓨터의 실행 프로토콜 (protocol) 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브루너 (Jerome Bruner) 와 그의 동료들과 같은 심리학자들은 새 개념을 학습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책략들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켰는데, 이들 책략들은 놀랍게도 컴퓨터 프로그램과 유사하였다.
필연적으로 행동주의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고, 행동주의는 세가지 결정적인 강타를 맞았다. 첫째는 행동주의의 옛 동조자였던 래슐리 (Karl Lashley) 가 피아노치기나 즉흥적으로 말하기와 같은 기술적인 행동들을 행동주의적으로 분석하는 데 대해 의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이런 기술들은 개인적인 의도 (intentions) 에서 비롯되며, 점진적으로 더 섬세한 부분행동 계열의 구조를 다루는, 통제의 위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기는 먼저 하나의 생각이 요구되고 난 다음에 통사의 선택이 요구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단어들의 선택이 요구된다. 그것은 자극과 반응의 단순한 연합적 연쇄의 결과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언어학자인 촘스키 (Noam Chomsky) 는 행동주의에서 암묵적으로 언어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영어 문장의 통사를 명시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마지막으로 조지 밀러와 그의 동료들은 위계적인 계획이라는 개념이 심적 활동에 핵심적이며 컴퓨터 프로그램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된다는 것을 밝혔다. 1960년, 밀러와 브루너가 하버드대학 내에 인지연구소 (Harvard Center for Cognitive Studies) 를 설립했을 때 미국 심리학 내에서 마음의 지위 회복이 완결되었다.
과학 성장이 빠른 시기에는 종종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가 없으며, 아마도 그 과정의 본질을 그 시기에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리학의 주류는 분명히 마음의 연구로 되돌아왔고, 컴퓨터는 흥미있는 새로운 비유를 제공했다. 과거에는 마음이 밀납판이나, 수압체계, 전화교환기에 비유되었었다. 이제 이원론에 대한 새로운 반응이 생겼다. 즉 뇌와 마음은 컴퓨터와 프로그램처럼 함께 묶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막강한 의의는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 막강한 의의란 <생각하는 기계>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사실상 컴퓨터가, 아니면 컴퓨터 배후에 놓여진 이론이 제공했던 것은 심리학적 설명의 새로운 개념체계였다. 이러한 개념체계는 초기의 기계론적인 유추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끝까지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장에서 살면서 때때로 복통을 일으키게 하는 에셰리키아 콜리 (Escherichia - coli) 라는 박테리아는 음식물을 향해 이동하면서 유해물질을 피하기 때문에 지능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것이 환경에 대한 내적 표상에 근거해서 내린 합리적인 결정의 결과로서 그 경로를 설정한다고 가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코슐랜드 (D. E. Koshland) 나 그 외의 생리학자들은 콜리 (E. Coli) 가 표상이나 기억, 선택 등 어떤 심적 활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화는 내적인 지도가 제공되지 않았어도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했었던 것이다. 박테리아의 편모는 회전하는데 - 자연에서는 이러한 회전은 이따금 볼 수 있다 - 편모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 때에는 박테리아가 앞으로 전진하는 반면, 편모가 시계방향으로 돌 때에는 편모가 분리되어 날며 박테리아를 계속 굴러떨어지게 한다. 콜리는 분자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물질들 (영양분이나 유해물질) 과 결합될 수 있는 특수한 단백질 수용기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상 이 수용기들의 수용상태가 편모의 회전방향을 조절하는 장치를 변화시킨다. 만약 음식물이 탐지된다면, 편모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하고, 따라서 그 유기체는 직성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더 이상 음식물의 입자가 탐지되지 않으면 회전방향은 이리저리 변하기 시작한다. 그 유기체는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그러다가 다시 영양분 자극의 통로를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음식물 입자들이 방출되는 표적에 적중할 수 있고 그것은 마치 비행기가 다소 불규칙하게 레이더 전파에 따라 하강하는 것과 같다.
박테리아의 행동은 행동주의자의 꿈이다. 그것은 심적 활동을 갖기 않으므로 인지심리를 필요로 하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의 행위들은 기계의 행위처럼 설명될 수 있다. 데카르트 이래로 이론가들은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가정해 왔다. 사실상 빅토리아 시대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켈빈 경 (Lord Kelvin) 은 이 논의를 전환시켜 그의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내가 한 사물의 기계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기까지는 나 자신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네. 만약 내가 기계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 내가 철저하게 기계적인 모델을 만들 수 없다면 나는 이해에 이를 수 없을거야 ······
이것은 분명히 충분한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다. 우리는 박테리아와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로보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박테리아 행동의 주원인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유기체들, 적어도 인간은 심적 활동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설명이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 명료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개념들이 설명에 사용될 만큼 충분히 잘 이해되고 있는지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만약 어떤 정신분석학자가 내 친구의 자동차 선택을 해결되지 않는 오이디프스 갈등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설명한다면,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분석가는 어린 소년들은 자기 어머니에 대해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그래서 아버지를 질투하게 되며, 이러한 불쾌한 감정은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잠복해 있다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무의식이란 개념은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이해되는 기초개념이 무언인지를 끈질기게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심리학적 설명에서 안전하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사전에 명시함으로써 지름길로 갈 방도는 없을까? 이 물음은 인지과학의 근본적인 물음이다. 최근까지도 그 물음에 대하여 받아들일 만한 답변은 없었다. 심리학 교과서들은 <마음 갖춤새 (set)>, <형태 (gestalt)>, < 충만성 (prägnanz)>, <평형 (equilibration)>, <순수자극 행위 (pure stimulus act)> 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정신분석학 교과서들에는 <일차과정 (primary process)>, <치환 (displacement)>, <역전이 (counter - transference)>, <거세불안 (castration anxiety)>, <남근중심주의 (phallo - centricism)>, <리비도 (libido)>와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전문어들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지? 왜 그렇게 많지?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피할 수 있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용어의 양산은 이론들을 종종 이해하기 힘들 게 만들며, 따라서 직관을 사용해서만 예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론이 무엇을 예언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직관을 필요로 한다면 그 이론은 설명적 가치가 거의 없다. 그 이론은 길잡이가 아니라 이론가가 길을 지적하는 다른 팔을 사용하기 위해 기대는 버팀목 같은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은 컴퓨터가 직접적으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배후에 놓인 수학적 선배인 계산가능성 (computability) 이론에서 나온다. 1930년대에 논리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이 이론은 데카르트나 켈빈이 꿈꾸었던 것보다 더 강력한 기계론적 입장을 제공했다. 그것은 어떻게 일련의 기초 구성단위가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상징적 과정들을 구성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들은 날씨, 주식거래, 기본적인 입자들의 상호작용과 같은 영역을 모형화하는데 이용되어 왔다. 그것들은 어떤 영역에도 적용 가능함이 입정되어 왔고, 특히 상징을 조작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치들, 즉 인간의 뇌를 모형화하는데 적절하다. 그러나 계산가능성의 기초 구성단위는 아주 단순하여 그것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심적 활동이 계산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은 1940년대 초, 디지털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에 크레익 (Kenneth Craik) 에 의해 예견되었다. 그는 사고를 켈빈의 한 기계의 작동에 비유했다. 그것은 조수 예측기로서, 기어와 크랭크, 도르래 장치를 사용하여 조수의 높이와 시기에 영향을 주는 중력의 힘을 모델화한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분야였으므로 크레익은 분명히 계산이론을 알지 못했지만, 계산이론 창시자의 한 사람인 튜링은, 자신의 생각을 훗일까지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심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 크레익과 거의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튜링은 계산이론이 설명체계를 위한 훌륭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이론이 어떤 수학적 계산은 직관에 의지하지 않고도 수행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의 목표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학문의 막강한 힘의 일부는 계산이론에 달려 있다. 설명이 계산적이라면, 그것은 그냥 보아도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도 않는다. 그 이론이 옳은 이론인가의 여부는 그 이론이 사실과 맞는가에 달려 있지만, 적어도 그 이론은 애매함이나 혼동, 공허한 언어공식의 신비로운 주술문을 피하는데는 성공했다. 신경체계의 어떤 과정들은 계산적일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종류의 계산이겠지만). 빛에 대한 망막의 반응과 같은 신체적 과정들도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모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모델화할 수 없고, 계산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도록 요구하는 심적 활동의 측면들이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마음의 측면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심적 활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계산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마음의 주요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이러한 과정들 각각을 계산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각 부분들을 분리시켜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계산의 중심개념을 개관할 것이다.
읽을거리
밀러 (1966) 는 마음의 과학의 역사에 관한 아주 간단한 책을 썼다. 뉴월과 사이먼 (1972) 은 2차 대전 후 인지심리학이 일어나게 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보덴 (Boden, 1977) 은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심적 과정에 대한 계산모델을 훌륭하게 소개한다. 가드너 (Gardner, 1985) 는 인지과학의 발달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