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기억 : 서론
(Dynamic Memory : Introduction)
역동적 기억: Roger Schank 저서, 신현정 역, 시그마프레스, 2002 (원서 : Dynamic Memory Revisited, Cambridge Univ. Press, 1999), Page 1~21
역동적 기억 (dynamic memory) 란 무엇인가? 이것은 유연하고도 개방적인 시스템이다.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도서들에 대한 지식을 저장하는 방식과 도서관의 카드목록 시스템이 도서들을 분류하는 방식을 비교해 보라. 도서관에서는 우선 지식 영역을 기술하는 일련의 범주들이 선택된다. 이 범주들 내에서 책의 제목, 저자, 그리고 주제가 기록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역동적이지 않다. 결국에는 범주들이 변할 수밖에 없다 ; 유용성이 떨어진 범주들은 수정되어야 하며 ; 새로운 주제 그리고 주제의 분할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른 범주들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도서관은 역동적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도서관 시스템은 변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도서관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관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는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관심사가 변하거나 특정한 주제에 대한 지식이 변하게 되면, 쉽게 자신의 내적 분류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변화는 의식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한 생각을 다른 생각에 관련시킬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정 지식을 언제 알게 되는 것인지는 알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사용하는 범주화 도식을 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한 채 범주화할 수도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류하는 기억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한다. 전문가는 역동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석 : 범주형성에 대한 연구의 예를 보려면, Ross (1996a, 1996b) 를 참조하라.).
도서관은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며,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사용하기 위하여 어느 영역을 비워두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어디에 꽂아 놓을 것인지를 아는 것, 또는 그 책에 대한 정보는 도서관에 그 책을 위해 가용한 공간에 관한 사전 예측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만일 결코 출판되지도 않을 장서들을 기다리는 "빈 서가" 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결과가 될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경우로, 우리의 범주 도식으로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료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때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이해 (따라서 분류) 가 변할 때마다 변화할 수 있는 범주도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서관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에 손쉽게 대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억저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저장소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기억에서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처리된다. 또한 옛 정보를 찾을 수 있지만, 어디에서 그 정보를 찾았는지를 알지 못하며 탐색절차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기억은 경험으로부터 중요한 일반화를 추출해 내고 그 일반화의 예외들을 저장하는 방식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보다 많은 경험을 함에 따라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새로운 경험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보의 일반화와 범주화를 변화시킨다 (Wattenmaker, 1992 ; Ross, 1996b). 체제화가 끊임없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고려하지 않고도 계속해서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범주도식을 자각하지 못하면서도, 그 도식을 사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 경험을 부호화하거나 인출하는 방식을 자각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역동적 기억은 스스로 체제화하여서 기억의 확장과 새로운 이해를 반영할 수 있도록 세상에 대한 부호화를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동적 기억은 경험으로부터 학습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과거 경험에 근거하여 새로운 경험을 처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일반화를 반영하도록 스스로 재체제화 할 수 있는 일종의 자동적 범주화 도식이다. 요컨대, 인간의 기억은 경험을 반영하도록 역동적으로 조정된다. 역동적 기억은 새로운 경험이 요구하기만 하면 스스로 체제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억이다. 본질적으로 역동적 기억은 학습시스템인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을 집필하기 전에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 AI) 에서 나의 일차적 관심사는 컴퓨터로 하여금 글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문제에 있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언어 그 자체 그리고 언어의 사용이야말로 인간 이해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초판에서 제기하였던 문제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나는 동료들과 함께 지식획득, 학습, 기억 그리고 사례기반 추리 (case-based reasoning) 라고 부르게 된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컴퓨터로 하여금 글을 읽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내가 예일 대학교에 있을 때 작성한 프로그램의 내용을 보려면 DeJong, 1977 ; Cullingford, 1978 ; Wilensky, 1978 ; Dyer & Lehnert, 1980 를 참조하라), 컴퓨터 프로그램의 작성 자체는 우리가 글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재고해 보게 하였다. 읽은 것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 또는 읽은 것을 요약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과제였는데, 이러한 과제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이 진정으로 글을 읽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에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우리가 확신하지 못한 이유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진정한 의미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정기적으로 시범 보일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컴퓨터가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는 많은 신문기사들을 확보해 두었었다. 그런데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코 지겨워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 은근히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컴퓨터는 이란에서 발생한 지진에 대한 똑같은 기사를 수도 없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란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진이 일어났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똑같은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지겹다고 소리지르는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
방금 읽은 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우리는 언어를 이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억과 학습의 문제를 접어두었었다. 컴퓨터로 하여금 언어를 처리하게 만든 것도 어려운 과제인데, 기억과 학습까지 다룰 수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하였다. 언어와 기억을 분리하는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것이었다. 언어학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과제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하여 둘을 분리하고자 시도하여 왔다. 나도 그러한 전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람과 컴퓨터간의 차이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처음 읽었을 때 강력한 인상을 남겼거나 또는 다른 읽을 거리가 없는 경우가 아니면 어제 신문을 재차 읽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도록 요구하면 지루해 하고 짜증을 내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프로그램은 읽은 것으로부터 학습을 하지 못하였다. 단지 언어의 기계적인 문제에 대처한 것이었다. 즉, 의미들을 짜 맞추고자 시도할 뿐이지 그 의미의 의미를 자신에게 첨가시키지는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은 읽은 이야기 속에 포함된 정보를 알고자 하지 않았다.
언어는 기억기반 처리과정 (memory-based process) 이다. 언어는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 사람의 기억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한 가지 매체이다. 즉, 언어는 한 기억에서 다른 기억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는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감각은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감각 데이터에 대한 한 가지 유형의 부호화이다. 언어에 대한 어떤 이론도 기억이론을 참조할 수밖에 없으며, 기억에 대한 어떤 이론도 결국은 학습이론이다. 인간 기억은 전혀 정적이지 않다. 모든 새로운 입력과 경험에 따라서 스스로 재적응한다. 학습이란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기억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습은 기억에 존재하는 지식구조의 변화에 근거한다.
이 책의 초판, 즉 역동적 기억 (Dynamic Memory) 이 출판되기 전에 수행된 연구에서 우리는 지식구조가 사건 정보를 표상하는 방식에 관한 이론을 제안하고자 시도하였다. Schank 와 Abelson (1977) 은 스크립트 (script) 의 개념을 제안하였다. 우리는 스크립트가 추론과정을 주도하고 입력들 함께 묶어 준다는 점에서 덩이글 처리에 유용한 지식구조라고 규정하였다. 입력 문장들은 관련된 스크립트의 전체 구조를 참조함으로써 함께 연결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견해로는 스크립트가 언어이해 과정에서 배경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불러올 수 있는 일종의 상위 지식구조이었다. 우리가 작성한 컴퓨터 프로그램 속에 구현된 것처럼, 스크립트는 본질적으로 사건 진행에 대한 일련의 예언이었다. 스크립트는 틀에 박힌 일화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목록으로 구현되었다. 목록에 들어있는 하나 이상의 사건과 일치하는 사건이 입력되면, 프로그램은 그 목록의 다른 사건들도 발생한 것으로 추론하도록 만들어졌다.
1977 년에 Schank 와 Abelson 책이 출판된 이래, 심리학자들은 스크립트가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아동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Nelson, 1979 ; Nelson & Gruendel, 1979 ; McCartney & Nelson, 1981 ; Fivush, 1984 ; Slackman & Nelson, 1984 ; Adams & Worden, 1986 ; Hull Smith et al., 1989), 어른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Bower, 1978 ; Jebousek, 1978 ; Smith, Adams, & Schorr, 1978 ; Graesser, Gordon, & Sawyer, 1979 ; Graesser et al., 1980) 유용하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따라서 우리가 제안한 몇몇 표상은 심리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Abelson, 1980 ; Ratner, Smith, & Dion, 1986 ; Bauer & Mandler, 1990 ; Farrar & Goodman, 1992).
언어를 기억과정으로 간주함으로써 언어이해의 작동방식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바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언어이해를 통합 과정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들을 참조하지 않고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언어이해의 과제를 작은 구성성분들로 분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이해는 전적으로 듣거나 경험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관련시키는 과정이다. 우리가 제기하였던 초기 모형들은 이러한 생각과 반대로 본질적으로 단원적 (modular) 이었으며, 언어이해 과정을 분절적이며 계열적으로 수행되는 성분들로 분할하였다. 예컨대, 우리가 제기한 최초의 이야기 이해 프로그램인 SAM 은 단원적 체제화를 가지고 있었다 (Cullingford, 1978) (주석 : SAM (Script Applier Mechanism) 은 R. Cullingford (1978) 가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사용한 초기의 상징적 스크립트 처리모형 (symbolic script processing model) 으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문장들의 연속적 순서가 사건의 시간적 순서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두 사건간의 시간적 관계를 파악하려는 모형이다.). SAM 은 한 문장을 Schank (1972) 가 제안한 의미표상 도식인 개념 의존성 (Conceptual Dependency) 으로 번역한 후에 스크립트를 적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주어진 스크립트가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스크립트가 성공적으로 확인되면,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일련의 예측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단원적 접근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 문장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SAM 을 단원적 방식으로 구성한 이유는 스크립트 적용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용이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 구문분석 또는 통사분해 과정 (parsing process) 을 스크립트 적용 과정과 분리시키는 것이 문제를 단순화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스크립트는 기억의 근간이며, 사람들의 이해방식은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언어이해에 대한 완벽한 이론에 앞서서 기억구조에 대한 응집력 있는 이론이 당연히 선행되어야만 한다.
언어이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수반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위 수준 지식구조의 유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물음은, 스크립트 이외에 언어이해 시스템이 사용할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PAM (Wilensky, 1978) (주석 : PAM (Plan Applier Mechanism ; R. Wilensky, 1978) 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계획과 목표를 인식하도록 작성된 프로그램이다. PAM 은 앞서 언급한 SAM 의 한 성분이 되며, 사람들의 특정 목표와 계획을 연계시키는 일련의 계획 세우기 규칙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규칙들을 결합시켜서 목표와 계획에 대한 설명을 형성하게 된다.) 과 POLITICS (Carbonell, 1979) (주석 : POLITICS (Carbonell, 1979) 는 국제외교문제에 대한 미국 상원의원의 입장을 모형화한 프로그램이다. 즉, 상원의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할 때 사용할 것으로 보이는 추리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통합시스템이다. 즉, 신념, 추론, 계획, 목표, 스크립트, 기억 등 가용한 모든 심적 과정을 사용하여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프로그램이다. POLITICS 는 약자가 아니며 그냥 붙여진 이름이다.) 에서 언어이해를 제어하는 상위구조로써 계획 (plan) 과 목표 (goal) 를 사용하였다. 계획과 목표는 프로그램이 이야기의 부분들에 근거하여 예측하는 것을 도와주는 기능을 하였다. 어떤 기억이든지 이러한 구조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상이한 예측의 원천들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다양한 지식구조들을 찾아 낼 수 있는가?
이 책 초판의 초점은 언어를 이해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학습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기억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은 새로운 문장들을 처리함으로써 어떻게든 변하게 된다. 똑똑한 컴퓨터라면 학습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튼 우리는 근본적으로 컴퓨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우리가 정확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프로그램은 대부분의 심리학 이론들에서 심각하게 결여된 엄격함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궁극적인 관심 주제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언어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 알고자 원한다면, 학습을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도 명백해졌다. 따라서 마음이 어떻게 새로운 정보에 적응하며, 그 정보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유도해 내는 것인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응적인 기억구조에 대한 응집력 있는 이론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정보가 기억을 변화시키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학습이 역동적 기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역동적 기억은 지식을 구조화하고 재구조화하는 어떤 도식, 즉 과거에는 유용하였던 구조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니면 보다 중요하게 될 때 그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체제화 시스템은 무엇이며, 그 구조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발달하는 것인가?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상위 수준 구조가 생득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상위 수준 구조는 발달한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언어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처리해야 하며, 각 개인은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이 기억구조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역동적 기억을 구성하는 상위 수준의 기억구조들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동적 기억 이론은 Schank 와 Albeson (1977) 의 자연언어처리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이론으로부터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지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를 - 앞에서 기술한 스크립트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 알아내는 데 결정적이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그 당시 스크립트를 상정한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암묵적 지식의 체제화를 설명함으로써, 문장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 이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수가 초밥을 주문할 때, 우리는 그가 일본식당에 와 있으며, 주방장 앞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며, 포크 대신에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본 술을 마시고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가정하는 이유는 "일본식당" 스크립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스크립트를 알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정을 할 수가 없으며,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대상들을 지칭하는 문장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스크립트는 참조라는 측면에서 불완전한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사람들이 "철수는 초밥을 주문했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라는 문장을 듣는다면, 이 문장이 먹는 것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맛감각에 대한 철수의 반응을 참조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식당에 대해서 알고 있고 ("식당" 스크립트), "식당" 스크립트의 세부사항, 즉 초밥의 맛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수는 뉴욕까지 비행기 여행을 하였는데, 식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는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행기" 스크립트를 동원해야만 한다. 철 수가 두 팔로 날개짓을 하여 뉴욕으로 날아갔다거나, 날아다니는 식당에 있었다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좋지 않다" 고 말함으로서 그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행기" 스크립트의 세부사항을 알고 있고, 그 세부사항에는 음식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우리는 어떻게 컴퓨터가 그러한 경험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의 소산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언어이해 과정에서 사용해야만 하는 도구로서 스크립트 그리고 다른 지식구조들을 제안하게 되었다. 우리는 언어처리에서 사용될 수 있는 구조의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아 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구조가 발달하는 문제, 그 구조가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 그리고 그 구조에 의해서 설정된 정보의 인출과 저장의 문제는 무시하였다. 대신에 처리과정의 문제에만 집착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어떤 컴퓨터도 스크립트를 일방적으로 제공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사람들이 식당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부분적으로 식당에서 외식을 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며, 또한 현재의 경험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지식의 유용성에 비추어 자신의 기대를 끊임없이 재고찰하는 과정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습 자체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개체의 핵심이 된다. 왜냐하면 한 개체가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은 어떤 것이든지 경험의 결과로 찾아 낼 수 있고 변할 수 있을 만큼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스크립트의 개념을 재고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다. 스크립트는 상위 수준의 지식원천 (high-level knowledge source) 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가능한 지식원천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스크립트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제안되어 왔으며, 때때로 이러한 주장들간에 상호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예컨대, 우리 초기 연구에서는 계획과 스크립트를 구분하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구분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계획과 목표의 문제를 제안할 때, 왜 '술가게에서 도둑질하기' 는 스크립트가 아니라 목표인지, 아니면 왜 '자동차 타이어 설명책자 읽기' 는 스크립트가 아닌지와 같은 질문을 받기가 일쑤였다. 스크립트와 계획간의 연계는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술가게에서 도둑질하기' 가 계획이 아니라 스크립트가 되려면, 그러한 사건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났어야만 한다. 물론 그러한 사건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스크립트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계획의 한 예로 이 사건을 선택한 이유는 스크립트의 적용과정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계획의 적용과정을 예시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계획을 적용하려면 입력 행위와 목표의 달성간의 연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목표에 대한 추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스크립트 적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흔히 그러한 목표관련 추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일본식당" 스크립트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손님들이 일본식당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이유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스크립트와 계획 또는 다른 상위 수준 지식구조간의 차이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해야 할 처리의 양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적을수록, 아니면 특정한 유형의 상황에 덜 친숙할수록, 그 상황을 다루는 입력을 처리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추론작업을 거쳐야 한다. 스크립트의 사용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작업이 수반되며, 계획의 사용에는 보다 많은 작업이 수반된다. 스크립트는 애를 쓰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지적이지 못한 심적 구조이다.
스크립트에 대한 우리의 초기 정의는 "특정한 맥락에서 사건들의 적절한 순서를 기술하는 구조 또는 잘 알려진 상황을 정의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투적인 행위들의 연속" 이었다 (Schank & Abelson, 1975). 스크립트를 사용한 원형이 SAM (Schank, 1975 ; Cullingford, 1978) 이었으며, 식당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기본생각은 관련된 하나의 스크립트를 찾아 내서 특정한 추론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추론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식당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든 유형의 추론들이 - 테이블 정돈하기에서부터 음식값 계산하기에 이르기까지 - 훨씬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ㄷ.
식당 이야기는 풍부한 것도 아니고 흥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스크립트기반 처리의 강력함을 시범보인 후에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찾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사고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단순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SAM 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즉각적으로 스크립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자동차 사고" 스크립트가 있는가? 컴퓨터가 그러한 이야기를 처리하도록 도와 주는 스크립트를 사용할 수는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스크립트를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식당" 스크립트를 갖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보면, "자동차 사고" 에 한번도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 스크립트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스크립트의 획득방법은 엄청나게 다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스크립트의 순서화 되어 있는 단계 단계적인 본질, 즉 공통적인 문화적 관례에 따른 상투적인 특성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신문기사를 처리하기 위해서 자동차 사고 스크립트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서 강조되었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면, 적어도 "앰뷸런스" 스크립트, "병원 응급실" 스크립트, "경찰조서" 스크립트와 뒤따르는 "재판" 스크립트 등등이 작동할 것이라고 예상하여야 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말로 스크립트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획득과 사용 그리고 예측력에서 "식당" 스크립트와 그렇게 다른 것처럼 보이는가?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식당에서 메뉴를 읽고 주문하거나 아니면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 줄을 서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식당" 스크립트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진행절차 (track) 가 있기는 하지만, 각 진행절차는 본질적으로 보다 큰 스크립트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꼈다. 즉, 이것들은 중요한 점에서 서로 유사하며, 동일한 기억구조내에 서로 함께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고의 경우는 어떤가? 충돌, 사고에 의한 통증, 그리고 창문 밖으로 퉁겨나감 등이 서로 다른 진행절차인 범용 "사고" 스크립트가 있는가? 아니면 자동차, 트럭, 또는 오토바이가 일으킨 사고가 서로 다른 진행절차인 "교통사고" 스크립트가 있는가? 아니면 자동차 한 대가 장애물을 들이받는 것, 두 대의 차가 충돌하는 것, 그리고 여러 대가 연쇄충돌하는 것이 서로 다른 진행절차인 "자동차 사고" 스크립트가 있는 것인가?
SAM 을 구축하는 데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스크립트로 부호화하였으며, 사건의 연속에 대처하기 위하여 특정한 스크립트가 다른 스크립트를 촉발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컴퓨터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 인간기억에서 스크립트의 궁극적인 형태와 저장위치에 대한 문제와는 기본적으로 무관한 것이었다. "응급실" 스크립트가 SAM 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측면에서 "자동차 사고" 스크립트의 부분이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가? 범용 "사고" 스크립트라는 생각이 스크립트에 대한 경험기반적 정의와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지만, 아무튼 SAM 에서는 잘 작동하였다.
점차적으로 스크립트에 대한 현실적인 정의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정의는 스크립트가 매우 제한된 그리고 상동적인 영역에서 추리를 제어하고 덩이글을 함께 결합시키는 지식의 원천이라는 이론적 정의와는 단지 외현적으로만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정의는 스크립트가 예측의 유용한 원천이 되는 데이터구조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스크립트는 반복 경험에 근거한 발달과 관련된 문제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런데 스크립트의 사용이 우리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스크립트가 활성화되어 입력과의 패턴 대응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 스크립트는 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예측하거나 아니면 그 사건을 전체 패턴 내에 위치시키는 데 사용될 수가 있었다. SAM 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스크립트는 단편적인 방식으로 짜맞추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거대한 패턴인 것이다.
스크립트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문제는 FRUMP (DeJong, 1977) (주석 : FRUMP(Fast Reading, Understanding, and Memory Program ; Jerry De Jong, 1977) 는 SAM 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보완한 생성물지향 프로그램 (product-directed program) 이다. SAM 은 스크립트기반 이야기의 모든 측면에 대해서 추론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이야기를 처리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단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우선 구문 분석기 (parser) 를 거친 후에 추론기 (inferencer), 스크립트 적용기 (script applier) 를 순서대로 거치면서 문장을 처리하도록 구성되었다. 사람들은 문장을 분해하면서 동시에 추론을 하며,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FRUMP 에서는 모든 것들을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FRUMP 는 이야기 이해에 대한 현실적인 스크립트기반 접근을 시도하였던 프로그램이다. SAM 은 스크립트 내에서 가능한 모든 추론을 하며, 그렇게 추론 하는 과정이 엄청난 어휘와 세상지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느리고 매우 취약한 프로그램이었다. SAM 이 읽은 이야기는 신문기사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어휘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을 분만 아니라, 실제로도 자주 등장하였다. SAM 은 없는 어휘 또는 세상지식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이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재설계되었다 ; Granger, 1977.)
FRUMP 는 덩이글에서 실제로 언급된 것보다는 스크립트의 예언적 특성에 집중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나갔다. FRUMP 는 받아들이는 입력을 실제로 분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위 스케치 스크립트 (sketchy script) 들이 하는 방식에 의존하여, 무엇을 볼 것인지 예측을 하고, 그 예측을 사실화시켜 주는 단어, 구, 또는 의미를 찾아 나섰다. 스케치 스크립트의 예로는 지진, 외교관계의 단절, 전쟁, 방화 그리고 눈보라 등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서 거의 모든 것들이 스케치 스크립트라고 간주될 수 있었다 ('술가게에서 도둑질하기' 도 포함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게 된다). SAM 의 스크립트와 FRUMP 의 스케치 스크립트간의 이론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거의 없다. 단지 FRUMP 의 스크립트가 짧고 적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FRUMP 의 스크립트는 본질적으로 일련의 "요청" (request ; Riesback, 1975)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예측 그리고 그 예측이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았을 때 가정해야 하는 일련의 규칙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스크립트가 예측에 대한 체제화된 집합이라는 정의는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아니다. FRUMP 에 있어서는 왜 지진과 외교관계의 단절이 스크립트가 될 수 있는지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지진이 스크립트라면, 도대체 스크립트란 무엇인가? 실제로 지진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다. 외교관계를 단절해 본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같은 재앙이나 국가 간의 적대적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일련의 규칙으로 부호화할 수 있다. 그러한 일련의 규칙이 스크립트인가?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든 컴퓨터이든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지식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두툼한 방망이를 휘두르는 사람이 조그만 흰 물체를 세게 쳐서 멀리 보냄으로써 일을 잘 해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야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식구조는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지식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 구조를 획득하는 것인가?
지식구조의 획득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 구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학습은 지식에 의존하며, 지식은 학습에 의존한다. 우리는 국가 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서 어떤 유형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지식이 기억에 저장된 방식을 이해하려면, 우선 그 지식이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꽤 그럴 듯한 생각은 그러한 지식이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대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획득되며, 나중에 다시 국제관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추상화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사람들은 상대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그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보다 세련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영역에서 겪은 관련경험들에 대한 일반화를 가지고 자신의 지식을 윤색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자동차 사고와 특별하게 연합된 지식 (예컨대,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교통 사고 ; 경찰이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등) 을 넘어서게 되면, 자동차 사고에 대해서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관련 지식들이 모든 심각한 사고 또는 부정적인 물리적 사건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나중에 몇 차례의 사고를 경험하고 나게 되면, 알고 있는 것들을 윤색하게 된다.
스크립트와 다른 상위 수준 지식구조간의 구분은 추상화 (abstraction) 와 일반화 (generalization) 의 개념에 의해서 결정된다. 스크립트는 자주 반복되는 특정한 상황과 연합된 특정 정보의 집합이다. 스크립트는 동일한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정보의 원천이다. 스크립트는 아주 세부적인 상황에 대해서 순서화 되어 있는 사실들의 아주 특수한 집합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가간의 적대적 관계나 자연적인 물리적 재앙과 같이 보편적인 상황과 연합된 보편정보 (general information) 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보편정보는 특정한 스크립트 정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스크립트기반 정보를 획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직접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인 반면에,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들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보편정보를 획득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만일 기억 속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정보가 있다면 (직접 경험에 근거한 특정구조 그리고 보다 추상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보편구조), 두 구조를 기억에 저장하는 방법과 기억으로부터 인출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이해할 때는 상대국가가 언제 자신을 화나게 만들었는지 또는 상대의 어떤 행위에 항의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두 국가가 주장하는 것에 관한 정보뿐만 아니라, 두 국가 간의 역사적 관계, 세계 정치상황에서 두 국가의 위상, 또는 둘간의 경제적 관계라는 구조 속에 저장된 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이러한 모든 정보가 기억의 한 장소에 저장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즉 이 모든 정보가 오직 한 장소에 저장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스크립트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크립트기반 기억과 보편적 구조에 근거한 기억간에 차이가 있게 된다. 전자의 경우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과거에 거의 동일한 상황에서 경험하였던 것으로부터 얻어지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보다 보편적인 구조를 사용함으로써, 과거에 한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이용하여 전혀 다른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도와 줄 수 있도록 구성된다. 보편적 지식구조는 기억공간을 줄여주며 한 상황에서 경험한 정보를 다른 상황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스크립트기반 기억의 한 가지 단점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상황에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스크립트에 의존하게 되면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이 차단된다 (Slackman & Nelson, 1984 ; Hudson & Nelson, 1986).
그렇지만 스크립트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만 적용할 수 있는 특수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개별 경험들을 기억하며 유사한 경험을 처리할 때 그 정보를 사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세한 차이들을 제거해 버리는 일반화된 정보는 세부정보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 상실된 정보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Slackman & Nelson, 1984 ; Farrar & Goodman, 1990).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일반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습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기억은 학습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반화를 시도하며, 학습에 실패한다는 것은 일반화를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반화를 시도하며, 학습에 실패한다는 것은 일반화를 포기한 것이 된다 (주석 : 아동이 스크립트를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를 보려면, Adams & Worden (1986), Hudson & Nelson (1986), 그리고 Hudson, Fivush, & Kuebli (1992) 를 참조하라.). 우리의 과제는 어떠한 처리과정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지식기반 이해시스템 (knowledge-based understanding system) 이든지간에, 일련의 사실들은 스크립트기반 기억이거나 아니면 비스크립트기반 기억의 형태로 저장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일반화를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단기적으로는 효율성을 얻을 수 있다. 관여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식시스템은 그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어떤 지식시스템이든지 한 영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다른 영역에 적용하는 일반화의 능력을 상실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인간기억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기능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답함으로써, 기억 속에 있는 지식구조의 적절성과 위치를 보아 효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에서의 논제들을 순수한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기에 앞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이 있는 보다 관례적인 실험법을 사용하여 도출된 심리학적 증거를 보자. 이 연구는 Bower, Black, 그리고 Turner (1979) 에 의해 수행되었다. 스크립트와 같은 것을 고려하는 것이 이야기 이해에 적절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에 덧붙여, 우리의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이 연구의 가장 큰 가치 중의 하나는 이 연구가 제기한 물음이었으니, 이 물음 덕분에 기억에는 상이한 유형으로 체제화된 지식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Bower 와 그의 동료들은 예컨대 치과에 가는 것과 병원에 가는 것과 같이 유사한 스크립트를 동원한 이야기간에는 재인 혼동 (recognition confusion) 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직관적인 의미에서 이 결과는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혼동을 경험해 왔다. 병원 방문과 치과 방문을 혼동하는 것은 두 이야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동일한 구조가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당연해 보인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이 혼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건강전문가 방문" 스크립트를 상정한다면,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 Schank 와 Abelson (1977) 의 표현에서 본다면, 그러한 존재는 스크립트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스크립트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지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건강전문가 방문" 스크립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스크립트의 보편적인 부분들이 추상화되어 상위 수준에 저장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제안은 애초에 제기된 스크립트라는 생각을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여기서의 가정은 스크립트가 효율적인 처리를 위한 데이터 구조일 뿐만 아니라 기억구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이야기를 해석하기 위하여 기억구조로서의 "치과" 스크립트를 사용하였을 때, 왜 그 이야기의 기억이 "병원" 스크립트를 사용한 이야기의 기억과 혼동되는 것인지를 물음해야 한다. 이야기 처리에 사용된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조가 상호간에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두 구조의 상위구조, 예컨대 "건강전문가 방문" 스크립트를 가정한다면, 그러한 상위구조는 치과 방문 이야기와 회계사 사무실 방문 이야기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혼동을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사무실 방문" 과 같이 더욱 추상적인 구조가 사용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특정한 경험 또는 경험들의 적절한 집합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만일 정보가 그렇게 높은 추상화 수준으로 저장된다면, 이야기의 이해는 우리가 처음에 상상하였던 것보다 너무나 복잡해지고 만다. 매우 상투적이고 스크립트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간단하게 가장 적절한 스크립트를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무실 방문" 스크립트와 같은 많은 상위 수준의 개체들이 동시에 적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만일 치과방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회계사 사무실 방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혼동하게 된다면, Bower 등이 관찰한 현상은 너무나 복잡해져서 "건강전문가 방문" 과 같은 일반화된 스크립트를 가지고 다룰 수가 없게 된다. 아무튼 사람들이 치과에 대한 새로운 입력을 회계사 방문에 근거해서 저장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한 가지 가능성은 기억 속에는 우리가 과거에 제안하였던 형태의 "치과" 스크립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건강전문가 방문" 과 같은 일반화 스크립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유형의 기억구조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하여 제안하는 해결책들은 어떤 것이든 인간기억의 용어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치과가 배경맥락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치과" 스크립트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확장가능성 (extensibility) 에 있다.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없다면, 심리학이론으로서 그렇게 큰 가치를 지닐 가능성이 없다. 프로그램의 유일한 가치는 처리모형으로서의 기본가정의 합당성을 검증하는 것에 있다 (아니면 현실적인 가치를 갖는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는 스크립트라는 용어를 프로그램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스크립트와 다른 기억구조들을 경험을 통하여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스크립트 그리고 다른 많은 기억구조들이 역동적 기억의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기억을 위하여 제기된 구조는 어떤 것이든 자기 수정 (self-modification) 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심리적 타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치과" 스크립트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물음할 때, 내가 의도하는 것은 치과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직접 포함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가 인간기억에 존재하는지를 물음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 구조와 관련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예측되지는 못한 경험으로 인해서 그 구조가 수정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물음하게 될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기억에 저장될 필요가 있는 정보의 유형을 찾아보아야만 한다. 여기서 총체적 논제는 저장된 정보의 일반성 수준에 관한 것이다. 가장 경제적인 저장 도식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도식이 심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해 내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어떤 유형의 사건들을 사람들이 기억할 가능성이 높은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사람들은 짧은 시간 동안 특정한 경험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세부사항들은, 특별히 흥미를 끌거나 어떤 면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한에 있어서 망각되고 만다.
내가 여러 번 가보았고 살기도 하였던 팔로 알토 (주석 :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도시. 스탠포드 대학교가 이 도시에 있다.) 에 여행갔던 내 경험을 고려해 보자.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어느 호텔에 머무르고 있으며, 방 번호가 몇 번인지 그리고 호텔비가 얼마인지, 어떤 모텔 어떤 색깔의 자동차를 어느 렌트카 회사에서 빌렸는지 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예컨대 여행의 세부사항,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도 여행 중에 또는 여행 직후에는 기억할 수 있었다.
한두 주일이 지난 후에는 대부분의 세부사항들이 거의 망각되었다. 실제로 자동차 오디오에서 연주되었던 노래, 또는 나를 태워다 준 렌트카 회사의 봉고차 색깔과 같은 것들은 겨우 한두 시간만 지난 후에도 완전히 망각되었다. 왜 그런 것인가? 어째서 경험의 어떤 부분은 망각되는데 다른 부분은 망각되지 않는가?
심리학자들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구분하여 왔다. 단기기억은 초 단위로 지속되며, 몇 시간씩 유지되지 않는다. 잠정적인 기억구조를 사용하는 일종의 짧은 기간의 기억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단기기억에 들어있던 항목이 장기기억에 파지될 것인지의 여부는 이미 장기기억에 파지되어 있는 다른 항목들에 견주어 볼 때 그 항목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달려 있다. 즉, 사람들은 관련된 것들만을 기억한다. 한 일화에서 어떤 사건들의 기억은 영원히 지속되며, 다른 사건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망각된다. 장기기억에다 저장함으로써 특별히 처리하고자 어떤 기억내용들을 선정하는 일종의 선택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선택기제의 본질 그리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유형의 본질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핵심적 문제이다.
일 년여가 지난 후 나는 단지 그 여행에서 특별히 흥미를 끌었던 세부사항 몇 가지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그 해에 팔로알토에 여러 번 여행을 하였더라면, 그 세부사항들조차도 인출될 수 없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렇지만 몇몇 세부사항들은 재구성될 수 있었다. 예컨대, 나는 어느 렌트카 회사, 어느 호텔을 이용하였는지 기억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물음에 답을 해야할 때 다음과 같은 유형의 추리를 통하여 답할 수는 있다 :
a) 나는 항상 홀리데이 인 호텔에 머무르니까, 그 호텔에 머물렀을 것이다.
b) 내가 지금까지 사용한 렌트카 회사는 두 군데인데, 그 무렵에 헤르쯔 사의 할인 쿠폰을 받았으니까, 헤르쯔 사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c) 호텔 방 번호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방이 어디였는지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 방을 (아니면 그 방 언저리를) 찾아갈 수는 있겠다.
이러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재구성적 기억 (reconstructive memory) 이라고 부르는 것의 예이다. 기억의 재구성적 견해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1. 기억에 실제로 저장된 것은 무엇이며, 그 정보가 어떻게 저장되어 있기에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2. 어떤 종류의 재구성이 존재하는가?
내 여행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은 아주 다른 유형의 재구성적 능력을 요구한다. 각 물음에 대해서 회상에 영향을 미친 방법들은 아주 다르며 탐색한 기억 영역도 아주 다르다.
재구성할 때 탐색되는 기억구조의 유형에는 특정 사건범주 속에서 사건들이 발생하는 방식에 대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정보를 부호화하는 기억구조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범주에 속한 특정한 사례들이 보편규칙을 따른다고 가정할 수 있다. 기억에는 재구성 과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 일반에 대한 사실들이 - 예컨대, 호텔은 무엇이며, 자동차는 어떻게 렌트하는 것이며, 치과에 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등 - 들어 있으며, 이 사실들이 기억능력 (실제로는 재구성하는 능력) 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건 자체를 회상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원형 (prototype) 을 회상한 후에 가용한 세부사항들로 그 보편적 기억을 채색함으로써 어떤 사건을 회상해 낼 수 있다. 그러한 원형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건들을 자주 경험하여 일반화하였기 때문이다. 특정한 일화가 선택되었다고 하더라도, 소소한 세부사항들은 일반적으로 가용하지가 않다. 따라서 어떤 회상방식을 채택하든지 간에, 보편적 기억구조가 재구성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Slackman & Nelson, 1984 ; Myles-Worsely, Cromer, & Dodd, 1986 ; Farrar & Goodman, 1990).
처리과정에서 그러한 보편적 기억구조의 역할은 입력사건들이 보편구조에 존재하는 지정 표상 (default representation) 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그 사건들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완벽한 일치가 확인되면 그 일화는 망각된다. "자동차에서 라디오 듣기" 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사건, 즉 "자동차 운전" 이라는 보편적 구조와 맞아떨어지며 중요한 사건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망각된다.
기억의 이러한 보편구조를 사용하는 것은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구조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만일 한 항목이 보편구조와 일치하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경험한 사건이 보편구조와 차이가 나면, 그 차이가 기록된다. 그 차이를 기록하고 회상함으로써 학습이 이루어진다. 일치하지 않는 내용에 근거하여 이전의 기억구조를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동적 기억이 하는 일이다. 상위 수준 기억구조에 부호화되어 있는 예측에 의해서 발생한 기대실패 (expectation failure) 를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학습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기억에 부호화하기 위해서 보편구조를 사용함으로써 - 특히 그 경험이 보편구조와 차이를 보일 때 - 학습이 일어난다고 제안한다. 따라서 장기기억에 실제로 저장된 것은 규준 (norm) 과는 차이가 있는 일화들이다. 또한 나는 규준과의 차이가 충분히 크게 되면, 그에 따라서 기억구조를 조정함으로써 그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새로운 보편구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고 제안한다. 즉, 하나의 일화가 한 시점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마냥 새로운 것으로 남아 있지는 못한다. 결국 한때 새로웠던 것을 미래에는 옛 것으로 재인하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보편구조를 수정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내가 의미하는 역동적 기억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구조가 변하는 것인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우선 어떻게 관련된 기억구조를 찾아 내는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읽거나 특정한 경험을 할 때, 어떻게 주어진 기억구조를 사용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인가?
이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렌트한 것이 언제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애쓰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자동차를 렌트했어야 할 이유를 자문해 보지 않고는 이 물음에 답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아마도 자동차를 렌트한 것이 여행할 때였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최근 여행을 탐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행은 관련된 보편기억구조를 탐색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반면에, 자동차 렌트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왜 여행은 기억의 원천이 되는데, 자동차 렌트는 그렇지 못한가?
한 가지 가능성은 기억이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실체, 즉 구조 (그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규준과의 차이에 따라서 표지가 붙어있는 특정 기억내용을 저장하는 구조) 그리고 구조의 체제자 (organizer) 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조의 한 유형이 장면 (scene) 이다. 장면은 재구성의 근거로 작동하는 물리적 상황을 제공한다. 어떤 체제자들은 가장 적절한 장면을 찾아 내는 데 도움을 준다. 예컨대, 과거에 렌트하였던 자동차에 대한 물음 (예컨대, 색깔, 모델, 또는 렌트한 장소 등) 에 답하는 과정에서, 렌트카 사무실 장면 자체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렌트한 차의 특정한 측면과 관련된 기억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렌트카 사무실 장면에 접근함으로써 계약서의 색깔과 회상해 낼 수는 있겠다. 기억인출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 중의 하나는 탐색하고 있는 정보와 관련성이 큰 장면을 찾아 내는 일이다.
어떤 유형의 정보들이 장면의 체제자로 기능하는가? 어떤 유형의 맥락들이 존재하는가? 장면은 상이한 맥락들을 통해서 순서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 속의 여행 구조는 여행에서 어떤 장면들이 정상적인 순서로 나타나는지를 알려 준다. 여행은 또한 호텔 방이나 공항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다. 많은 다른 체제화 구조들도 이러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호텔 방이 장면이기는 하지만, 다른 많은 구조의 부분일 것이라고 기대되기도 한다. 호텔방은 호텔 구조의 부분일 수도 있으며, 여행 구조, 방문 구조, 아니면 한 장소를 수반한 구조 (예컨대, 하와이에서의 호텔 방) 일 수도 있다. 또한 호텔 방이 구성성분으로 들어 있으면서도 물리적이지 않은 구조들도 있다 (예컨대, 논쟁, 사업의 거래, 승리, 좌절 등). 다시 말해서 호텔 방이라는 장면은 그 속에 포함된 특정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많은 상위 수준 구조에 의해서도 접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체제화 구조를 찾고 있는 것이 된다. 이 구조는 어느 장면들을 들여다 볼 것인지에 대한 일련의 단서들을 제공하며,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어떻게 장면들을 배열할 것인지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주석 : 본문에는 계속해서 스크립트, 스크립틀릿, 장면, MOP, TOP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이것들은 모두 특정한 위계 수준의 기억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며, 각 수준에는 다양한 구조들이 존재한다. 지금부터는 각 수준에서 특정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기억구조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스크립트와 스크립틀릿의 이름 앞에는 $ (예컨대, $-식당가기), 장면의 이름 앞에는 S (예컨대, S-들어가기), MOP 의 이름 앞에는 M (예컨대, M-식당가기), TOP 의 이름 앞에는 T (예컨대, T-식당가기) 를 붙여 표현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구조, 말하자면 스크립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예컨대, $-치과는 무엇이며 기억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나는 기억 속에 $-치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적어도 과거에 상정하였던 것과 같은 유형의 사건목록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다 합리적인 기억 체제화는 스크립트와 같은 구조들이 표준화된 다양한 보편적 장면에 포함되어 있게 해준다. 예컨대, S-대기실은 사건들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부호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S-대기실에 부착되어 있는 $-대학병원 대기실 또는 표준화된 $-치과 대기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한 스크립트가 작동하게 되면, 상위 수준 장면으로부터 유도된 보편적인 기대를 압도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기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는 제 6 장에서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치과 자체가 실제로 기억 속에 확정된 청크로 존재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치과를 방문한 경험과 연계되어 있는 다양한 장면들로부터 필요할 때에 사용될 수 있도록 구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치과 방문과 관련된 두 가지 유형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어느 장면 또는 보편구조가 치과 방문을 구성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면이 변호사 사무실이 아니라 치과의 대기실 (또는 특정한 치과의 대기실) 이기 때문에 각 장면에 가해질 수 있는 특정한 각색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기억은 그것이 스크립트로 표준화되었든 아니든지 간에, 그 기억이 관련되어 있는 보편기억에 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의 경제성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장면들은 한 상황의 세부사항들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반성을 갖는다. 세부사항들은 다른 구조에 의해서 첨가된다. 과거에 $-치과라고 불렸던 것의 구성이 실제로는 처리과정중의 요구에 의해서 달성된다. 즉, 어느 장면이 처리과정에 관련된 것인지를 알려 주는 보편적 체제화 구조 속에서 정보를 탐색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논제는 어떤 상위구조들이 기억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큰지를 확인한 것 ; 이러한 구조 속에 포함된 정보가 어떻게 새로운 입력을 처리하고 옛 정보를 회상하는 데 사용되는지를 설명하는 것 ; 처리된 경험이 어떻게 기억을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하는 것 ; 어떻게 학습이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 ; 그리고 이러한 처리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으며 어떤 것이 우리의 의식적 처리능력에 기저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