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의 고양

 

역동적 기억: Roger Schank 저서, 신현정 역, 시그마프레스, 2002 (원서 : Dynamic Memory Revisited, Cambridge Univ. Press, 1999), Page 283~301

 

내용 편파

마음의 기능적 제약

지능이란 무엇인가?

Darwin 식 인공지능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

 

 

정말로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것인가? 지능이 불변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바보같은 물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음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물음이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학교시스템이 어려움을 겪는 한 가지 이유는 "그저 학생들을 사실들로 채워라" 라고 하는 기저 가정이 지능은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데 있다. 이 견해에서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변화시킬 수가 없다.

물론 역동적 기억 견해는 지능이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지능이 MOP와 TOP 그리고 다른 유형의 일반화의 생성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학생들이 설명과 일반화를 생성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것을 도와 주게 되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며 보다 지능적으로 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퀴즈 게임적인 의미에서 보다 많은 사실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의미에서 보다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심층적 의미에서는 보다 많이 안다는 것이 바로 지능의 변화이다. 지능이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하는 능력이다.

현대 교육은 이론 심리학의 사조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아왔다. 예컨대, 행동주의는 이론이 제안하는 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교육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대규모 사업을 촉진시켰다. 물론 그러한 사조가 대중에게 전파되는 데는 필연적으로 시간지연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 사업이 히트를 치고 있을 당시 이미 행동주의는 심리학의 이론적 틀걸이에서 밀려나 있었다. 불행한 것은 그 시점에서 치명적인 손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반복 훈련과 연습, 프로그램화된 수련장, 암기 등, 이 모든 것들이 행동주의가 학교에 남기고 간 유물들이다.

오늘날은 지식의 본질 그리고 사용과 획득에 대해서 특정한 주장을 해대는 입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구조화한 교육정책에 직면해 있으며, 그러한 주장과 입장을 교육에 적용함으로서 초래된 결과에 직면해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지식과 학습에 대해 행동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을 해왔으며, 교육을 통한 지능의 고양 가능성에 대해 보다 낙관적일 수 있는 근거를 제안하는 주장을 해왔다. 지식은 문화적 학력도 아니며 알고 있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지능은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능력이다. 해내는 것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위원회에서 알 가치가 있다고 결정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과는 다르다. 이러한 주장이 교육을 개혁하자는 나의 제안의 시금석이다.

인간 지능과 고등동물의 지능간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Darwin 은 이 사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적하였다. 예컨대, 고양이는 기대실패를 가질 수 있으며, 사건들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게 해주는 일반화에 도달할 수가 있다. 고양이는 사례를 회상할 수 있으며, 적어도 유사한 사례에 직면하였을 때 과거의 사례들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능은 고양될 수 있다. 인공지능 연구자 즉, 기계 지능을 고양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야말로 무엇이 지능을 고양시키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핵심집단의 하나이다. 반면에 마음과 지능에 대해서 Noam Chomsky (1980) 와 John Searle (1983, 1984, 1992) 과 같은 저명한 사람들이 집착하는 견해는 본질적으로 반교육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 개체 속에 존재하는 지능은 철저하게 그리고 내재적으로 변화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핵심 논조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인간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그러한 관점에 만족해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능력 - 성과 (competence - performance) 의 구분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이 용어는 1965 년에 Chomsky 가 사용하였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지식이지 언어의 생성과 이해와 연합된 실제 의사소통이나 기억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언어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많은 연구자들은 과학자들이 "수학적으로 엄격한" 방식으로 진술된 "언어능력" (competence) 에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려왔다. 이러한 방략 그리고 많은 언어학자, 심리학자, 철학자들이 이 방략을 받아들인 것이 각 분야에서의 연구에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인 것은 학생 교육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느냐에 대한 생각이 초래한 결과이었다.

이러한 부정적 결과의 한 가지 예를 보기 위해서 문장의 도식화라는 생각을 살펴보자. 문법 (특히 문장의 도식화) 은 아동 교육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이 기술의 연습은 Chomsky 의 언어학 이론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것이기는 하지만, 문장 도식화와 문법 공부 일반은 그의 연구가 널리 알려진 후에 엄청나게 재유행 하게 되었다. 게다가 학생은 문장을 도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초래한 교육철학은 Chomsky 의 연구를 도출한 과학철학과 동일한 것이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의 형식적이고 통사적 특성이지 의미 전달자로서 언어의 사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 주장이 내용보다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번역된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나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 주장은 수행기술을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고 지식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만 할 것으로 설정하는 문제로 번역된다.

내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서 지능적 행동의 다섯 가지 측면을 살펴보자: 언어이해, 기억인출, 이야기 말하기, 추론,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기대.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수학" 에 대한 형식규칙을 작성하고 학생들에게 이러한 규칙들을 학습하도록 권장하는 등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궁리하는 동안, 언어 사용이라는 일상의 문제는 학문적으로나 학교교육에서나 모두 거의 무시된 채로 남아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억과 무관하게 말하거나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Chomsky 는 기억이 언어연구와 무관하다고 배제시키고는, 기억의 일차적 과제를 문장구조 계획을 파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구조를 "계획" 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많은 언어학자들이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언어를 다른 능력과 연계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기억해 내거나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쓸 수 있는가? 기억을 찾아 내서 의사소통하려는 욕구에 맞도록 그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의사소통에서 언어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기억을 의사소통 과정에서 언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개가 의식을 가지고 있든 없든 아니면 침팬지가 언어를 가지고 있든 없든지간에, 이 동물들은 모두 기억인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기억인출 능력은 학교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 과정에 대한 시험도 없고, 규칙에 대한 도식화도 없으며, 논제에 대한 토의도 없다. 그 이유가 기억인출에 관해서 그렇게 많은 사실들이 찾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이유일 수는 없다. 진짜 이유는 깊숙하게 숨어 있다.

내용 편파

인공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오히려 간단한 것이다: 사람을 지능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능적 컴퓨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컴퓨터에게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찾아 내려고 하였던 발견이 아니다. 많은 AI 창시자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하면서도 지극히 보편적인 원리를 탐색하는 데 일차적인 강조점을 두는 과학분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이 분야들이 작동하는 방법인지는 전적으로 별개 문제이다; 예컨대, Lakatos, 1978 을 보라.) 이들이 발견하고자 열망하였던 것은 마음에 대한 보편적인 중력법칙과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건대, AI의 창시자들이 오히려 생물학에서 훈련받았더라면 AI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더 좋았을 것이다.

보편적 원리의 탐색이 문제를 일으킨다. 교육자들이 보편원리를 짝사랑하는 것처럼, 과학자들도 그렇다. 과학자들이 보편원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 원리가 세상에 대한 진리이며 순수과학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더 첨가한다면, 보편원리는 시험보기가 아주 쉽다. 문제는 이 원리들이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는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데 있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이러한 원리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예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그 정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정하지만, 그 이유를 정말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지도 않는다.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은 그러한 원리를 찾아 내는 방법이다. 수학적 일반화를 해내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이,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직각을 보고 공식을 적용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교육을 개혁하려면, 진리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말하여 주려는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은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진리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AI 연구자들로 하여금 보편원리의 추구를 포기하도록 이끌어가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적용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냐에 관계없이 지능형 프로그램을 작성하려는 모든 프로젝트들은 동일한 병목현상에 직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컴퓨터로 하여금 흥미 진진한 일을 하도록 만들려면, 그 컴퓨터는 시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아야 만 한다. AI 연구자들은 점차적으로 만일 이것이 지능형 기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기능적 병목이라면, 지식이 지능의 중심성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Newell 과 Simon (1972) 의 GPS (General Problem Solver) 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보편지식을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영역지식 (domain knowledge) 이다. 자동차 수리하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비행기를 수리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지는 못한다. 공통되는 보편원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전문가에게 달려갈 수밖에 없다. 실세계에서 기능할 때는 특수한 영역지식이 중요한 것이다. 보편지식이 과학자의 평가기준은 되지만 실무자의 기준은 되지 못한다.

돌이켜보건대 특수한 실세계 지식이 중요하다는 발견이 명백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지과학 (실제로는 대부분의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여전히 그 합의를 기피할 작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러한 발견이 인공지능에 내리는 처방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과학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적어내려간 것처럼 보인다.이것을 가지고 과학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논제의 하나는 "상식" 또는 "일상적" 추리 대 "형식론적 추리" 이다. AI 연구자들은 형식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LISP 프로그램밍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서양장기를 두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기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성과를 지능의 지표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하노이탑 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것보다 5 세 아동만큼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문제는 내용 (content) 이다. 지능형 기계를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일상적이고 실세계의 상식적인 유형의 정보를 찾아 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과학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동이 정말로 필요한 일상의 정보를 찾아 내는 것을 가르치기나 도와주기는 형식적 교육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의 교육을 풍미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갈등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예컨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지향성 (intentionality) 에 대한 상식적 이론이 심리학 영역에 있어서는 안되며 문학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Chomsky 같은 사람들이 있다.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Chomsky 는 마음에 대한 계산론적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마음의 내용을 계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요령부득이며 비과학적이라고 거부한다. 다른 한편에서도 비록 Searle 은 심성 내용이 지능의 요체라는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지능에 대한 명확한 모형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그도 심성 내용을 계산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요령부득이라는 Chomsky 의 견해는 공유하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다르다: 심성 내용이 "비과학적" 이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시도를 가지고는 그 요체를 철저하게 놓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마음의 내용과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모형을 만들려는 시도는 의미론적 접근을 시도한다는 이유와 그나마 제대로 해내지도 못한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행동에 대한 모형을 구축함으로써 기억이 작동하는 방법 그리고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학습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비과학적" 이라고 비난받기가 십상이다.

마음의 기능적 제약

앞 절의 논의에 기저하고 있는 핵심논제는 기능성 (functionality) 이다. 즉, 나의 논의에 숨어있는 생각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가 추구하는 목표를 고려하지 않고는 지적 능력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Chomsky 가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썰이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Chomsky 는 단지 기억이 작동하는 방법에 관심이 없다. 그는 언어가 기억이라는 논제와는 무관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사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단지 언어의 보편원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향성을 채택한 학교는 언어를 더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언어의 형식적 특성에 대한 규칙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노우하우" (know - how) 대 노우왓 (know - what) 의 문제이다.

예컨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생각해 보자. 이 능력이 생성 언어학의 시금석을 이룬다. 그런데 만일 언어의 생성적 본질이 정신 생활에서 고립된 현상이라면 지극히 놀랄 만한 일이다. 만일 새로운 것을 결코 말할 수가 없다면, 단어들의 모든 가능한 조합에 대한 간단한 목록으로 사고와 언어간의 대응을 표현하는 데 충분하게 된다. 따라서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언어의 생성적 본질은 사고 자체의 생성적 본질로 인해서 필요한 것이며 실제로는 그 본질을 반영하는 것뿐이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를 생성하는 능력이다.

흔히 인공지능의 특별한 공헌은 심적 능력에 대한 과정모형을 만들어 내는 데 강조점을 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AI 에서는 실제로 말하고 이해하며 이야기를 해내는 기계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컴퓨터가 어떻게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물음하면, 역동적 기억이라는 생각과 같은 인간 인지에 대한 이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전체의 조그만 부분에 불과하다. 실제로 AI 를 인지과학에서 독특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기능성에 대한 강조이다. 즉, 마음의 일차적 계약 그리고 마음 모형의 일차적 제약은 기능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인 인지과제들을 수행할 필요성에서 제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AI모형들을 심리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제기한 모형들과 차별화 시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야의 연구자들은 심적 현상에 대한 과정모형을 만들기가 십상이며, 때로는 이러한 모형들을 컴퓨터에 구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것들은 AI모형이 아닌 것인가?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즉, 그 모형은 심적 현상에 대한 모형이지 심적 능력에 대한 모형은 아니다. 언어학자와 심리학자의 손에서 계산론적 모형은 소위 수리적 모형화 (mathematical modeling) 라고 부르는 것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또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적합도 검증이다. 이러한 모형이 지향하는 것은 단지 관심 현상을 생성하려는 것이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든 지능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티끌만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형에다가 "이 프로그램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물음을 적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과학의 입장에서 조망할 때는 바로 이 물음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항상 우선적으로 답해야만 하는 첫 번째 물음이 된다.

계산론적 모형이 무엇이냐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이렇게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문제를 연구하는 컴퓨터 과학자들은 다른 인지과학자들이 제안한 컴퓨터 모형들을 볼 때 마치 루브 골드버그 기계 (Rube Goldberg machine) 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다 : 계산은 빠르고 거침없이 날아가지만 도대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AI가 기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초래된 한 가지 결과는 다른 학문분야의 인지과학자들의 초점과는 철저하게 다른 방향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 것이다. 언어학자나 심리학자가 인지과학의 주제를 들여다볼 때 흔히 던지는 물음은 "이것은 다른 인지현상과 무엇이 다른가?" 이다. 그 현상의 요체는 그것만의 독특성에 있으며 독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분류학적 견지에서 볼 때는 물론 이해할 만한 생각이다. 그러나 기능적 견지에서 볼 때는 그렇게 합당한 것이 못된다. 기능적 조망에서 만일 어떤 지능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면, 논제는 "이 과제가 다른 모든 과제들과 어떻게 다른가?" 가 아니라 "여기서 병목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가 된다. 그렇게 되면 과제들이 피상적으로는 매우 달라보이는 경우에도 기저에 깔려있는 기능적 문제는 동일 하다는 사실을 찾아내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과제가 학습이든 언어이해이든지간에, 핵심문제는 예전의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생각을 표상하느냐는 점이다.

지능이란 무엇인가?

지능은 평가하기가 꽤나 어렵다. 많은 학자들이 지능을 측정하려는 다양한 유형의 검사를 개발함으로써 그 일을 해내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그 검사들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예외적 사례들을 궁리하도록 만든다.지능검사에서는 형편없지만 "음악천재" 또는 "백치 현자" (idiot servant) 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반대로 지능검사에서는 유능성을 보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백치와 같아 보이거나 심지어는 전혀 새로운 과제가 부여될 때 지적으로도 백치같은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광범위하게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적 편향의문제, 선다형 문제에의 의존성 그리고 다른 지적 비정상의 문제들과는 무관하게, 지능평가에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즉, 지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능을 대화를 통해서 평가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그들은 지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별로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능의 기제는 포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예리한 통찰을 탐지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통찰을 얻게 되는 공식을 내놓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였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웅변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한 영역의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비추리에 감탄하지만, 컴퓨터에게 그렇게 유추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가 없다.

지능의 본질은 그 본질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아주 조금만 이해되고 있다. 지능이라는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어느 개체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개체가 가지고 있지 못하며, 어느 개체는 결코 가질 수가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주장을 펴는 일이다. 아니면 지적 행동의 과정에서 소소하게 고립된 세부사항들을 정교화하는 데 관여한다. 그 과정의 기능성과 의도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Darwin 식 인공지능

지능과 지적 행동이라는 문제는 Darwin 에게 핵심적인 과학적 관심사였다. 그는 인간이 다른 종의 후손이라는 주장의 부분으로서 동물의 지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천면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동물이 지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지능적 인간이 자연스럽게 동물들로부터 진화하였다고 믿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따라서 Darwin 은 "심적 능력에서 인간과 다른 고등 포유류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Chomsky 는 다른 많은 인지 과학자들과 함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명백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과 동물간의 근본적인 차이로 언어능력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Darwin 의 주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흥미를 끈다.

Darwin 에 따르면, 지능은 인간에게만 독특한 능력이 아니다. 따라서 Darwin 은 기계 지능의 개념 (이 개념으로부터 인간 지능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도출되었다) 과 같은 다양한 비인간적 지능이라는 생각에 흡족해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지능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물음을 생성하고 그 물음에 답하려는 욕구이다. 스스로 알려는 욕구를 생성하지 않고는 어떤 개체도 학습할 수가 없다. 지능의 요체는 보다 많은 것들을 알아내려는 욕구에서 찾아질 수 있다.

Darwin 이 "모든 동물은 경이로움을 느끼며 많은 동물이 호기심을 보인다" 고 적을 때, 이것을 동물의 "지적 능력" 에 대한 열쇠로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진보에서 주의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없다" 고 언급할 때는 학습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를 볼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동물들도 바로 이렇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Darwin 은 이 논제를 예시하기 위해서 새끼 고양이를 입양한 비비원숭이가 그 고양이에게 할큄을 당한 후에 발톱을 찾아내서 물어뜯어 버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Darwin 은 동물이 본능에만 귀속시킬 수 없는 많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사용한 것이다. 어떤 유형의 본능이 비비원숭이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비비원숭이는 지극히 새롭게 보이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해 보인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인간 지능의 시금석은 "이해 주기" (understanding cycle), 즉 기대실패에 호기심이 뒤따르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정된 일반화가 뒤따르는 주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한 주기 다음에 또 다른 주지가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비비원숭이의 행동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Darwin 도 동의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Darwin 은 또한 동물원의 코끼리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 (대상) 너머의 바닥을 긴 코로 불어서는 벽에 반사된 바람이 그 대상을 코가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 코끼리의 이러한 행위는 … 본능이나 유전된 습관으로 귀인시킬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는 … 그러한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Darwin 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는 것이 바로 지능의 전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코끼리와 비비원숭이가 스스로 생각해 낸다는 점에서 지능적이라면, 그러한 능력을 이미 물려받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지능적 개체 (지능적 기계와 지능적 아동과 같은) 의 생성을 위한 진정한 물음이 그 개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학습할 수 있는가? 독창적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음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 AI 분야는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Chomsky 와 Searle 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대신에 이들은 유기체의 머리에 이미 들어있는 지식의 측면들을 기술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들이 특정한 종의 측면에서 특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Darwin 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생각해 내는 행위가 한 종을 지능적이라고 평가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이며, 확신컨대, Darwin 은 만일 해삼이 이러한 자질을 사람과 상당한 정도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요점은 지능이 변할 수 있으며 내용의 획득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내용은 기능성과 성과에 관한 것이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심적 과정에 영향을 주려면, 그 과정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심적 과정이 분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신비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특정한 보편적 수학원리를 따를 때만이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등의 사치스러운 가정을 할 여유가 없다. 지능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학습되며 필요에 따라서 스스로 수정될 수 있는 특수목적의 행동들의 묶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찾아내려는 준비를 해야 한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이유로 중요성을 갖는다. 과학적 견지에서는 흔히 학습가능성 (learnability) 의 물음이 심리학 이론의 기저 가정의 징표가 된다. 생성언어학자 (예컨대, Chomsky) 들은 1970 년대 후반에 자기들이 제안한 문법은 학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득적인 것이라는 주목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물론 이들도 자신의 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고려하였을 터인데, 그 가능성을 찾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이 실패하였다는 사실이 교육에서 상당히 강력한 (진술되지는 않지만) 입장으로 나타났다. 즉, 많은 지능적 행동이 생득적이며, 핵심능력에 영향을 마치려고 의도하는 교육은 어느 것이든 낭비라는 것이다. 이들은 중요한 내용들이 학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가정은 오늘날의 교육기관에서 여전히 우세한 입장으로 견지되고 있으며, 반드시 Chomsky 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의 생각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Chomsky 의 견해는 흔히 행동주의자들의 견해와 대립되는 것으로 진술된다. 행동주의자들은 세계를 학습된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의 집합으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견해, 즉 복잡한 규칙들의 생득성 대 단순한 규칙들의 획득간의 대립은 교육자들이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핵심 생각을 간과하게 만든다: 즉, 교육은 복잡한 규칙의 획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문제는 학생들을 복잡한 행동의 학습을 촉진시킬 수 있는 복잡한 활동에 집어넣는 것이라는 생각.

예컨대, 미국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기존의 개념화로부터 초래된 불행한 부산물 중의 하나는 Educational Testing Service (ETS) 와 다른 표준화된 검사기간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ETS 는 모든 현실적인 목적에서 모든 예비대학생들의 삶을 결정해 버리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시험을 관장한다. 하나는 학업적성검사 (Scholastic Aptitude Test; SAT) 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성취검사 (Achievement Test) 들이다. SAT 의 대전제는 그 검사를 위해서만 공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검사는 기본 적성을 측정한다고 가정한다. ETS 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SAT 를 잘 칠 수 있도록 개별 교육을 시키는 엄청난 사업이 성장해 왔다는 사실이 ETS 의 지명도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한편 성취검사는 학습한 것 즉, 학습할 수 있는 것을 측정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ETS 는 생득적인 능력과 획득될 수 있는 능력간의 차이를 정의해 왔다. 당신은 이 스펙트럼 상에서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것이 어디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정리로부터 도출되는 공식에 대한 지식을 수반하는 문제가 거의 모든 SAT 검사에 출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약간은 놀라게 된다. 이 정리가 생득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그런데도 ETS 는 SAT 가 측정하는 기본 적성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을 다소 혼란스럽게 만든다.

지능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그리고 현대 언어학 이론은 이러한 전통과 철저하게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는 지식이 능동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방앗간의 곡식" 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신중한 노력은 방앗간을 지향하여야지 곡식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능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요체를 포착하고 있는 것이 방앗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앗간은 연구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는 명백한 기계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곡식은 단지 방앗간에 집어넣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별적인 형태만을 가정할 뿐이다. 요컨대, 지식은 단지 부수적이고 원자화되어 있으며 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심각한 심리학 이론에서든 그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가 없다.

물론 지식에 대해서 전혀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다. 개별적인 사실들을 개별적으로만 고찰한다면 반드시 원자화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부수적이다. 그렇지만 사건이 이 세상에서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마음 속에서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올바른 방식으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사실들은 응집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들은 세상에 대한 체계적 이론의 요체를 이루며 동시에 그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가 있다. 보다 큰 지식체에다가 체계적인 방식으로 관련시킬 수 없는 고립된 사실은 이해할 수도, 기억할 수도, 활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지능 연구에서 핵심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커다란 지식체" 이다. 할머니가 냄비에 볶은 고기 (pot roast) 를 만드는 방법을 의식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요리에 대한 명시화되지 않은 이론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요리법을 이해하고, 언제 어떻게 요리재료를 바꾸어도 되는지를 알며, 요리법에 무엇인가 잘못된 이유를 이해하는데 그 이론을 사용한다. 요컨대, 할머니는 학습하고 적응하는 데 그 이론을 사용한다.

음식만들기는 인지과학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하찮은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음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하기, 계획세우기, 의사결정하기, 또는 설계하기 등과 같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능력을 들여다보게 되면, 이것들이 일상적인 지능적 행동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이러한 능력들이 음식만들기와 동일한 근거를 갖는 지식인가?" 가 된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형식적 추리가 정말로 지능에서의 논제인가 아니면 보다 일상적인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궁극적으로는 지식을 실세계에서 사용하는 것이 지능에서 진정한 논제이지 않겠는가?

보통 지능적 행동이라고 불리는 몇몇 측면들은 내재적으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인 반면, 다른 측면들은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다. 어떤 특정한 사례가 거기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다소 파악하기 힘들 뿐이다. 부분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능적 행동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동의되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어느 기계도 그러한 측면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는 지능을 나타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지능행동에 결정적이면서 동시에 학습된 지능의 몇몇 측면을 개관하고자 한다. 그런 후에 이러한 능력 중에서 인간에게만 특수한 것일 가능성이 큰 능력은 어느 것이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능력을 가르칠 가능성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인간행동에서 MOP 와 스크립틀릿의 중요성을 전제로 할 때, 이것들과 관련된 핵심 물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기계가 지능적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것들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것들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동물은 이것들을 학습하는가? 인간이나 동물들이 이것들을 학습하는가? 그리고 인간이든 아니면 기계이든 이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가?

AI 의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 기계는 백짓장과 같은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에 생득적 기억구조가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구조를 기계 속에 프로그램으로 집어넣어서,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도록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표준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덩이글을 읽고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만들 수가 있다. 인간의 행동에는 MOP 에 기반하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MOP 에 기반한 것들이 훨씬 많다. 기계에 MOP 를 부여함으로써 그 행동을 흉내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이 특정한 기억구조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러한 구조를 획득할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어린 아동은 매 순간 스크립틀릿을 만들어서, 사건 연속의 순서가 실제로 얼마나 무선적인 것이냐에 관계없이, 다음 번에 그 특정한 순서에 뒤따르는 사건들을 예상한다.

동물들도 동일한 행동을 보여 준다. 동물들도 어린 시기에 순서를 형성하며 그러한 순서가 반복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비록 동물은 언어 이해와 같이 특별나게 인간적인 대상에 대한 스크립틀릿을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크립틀릿을 획득하며 다른 유형의 이해를 위하여 그 스크립틀릿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그러한 행동은 "단순 연합주의" 라는 낙인이 찍혀왔지만, 이러한 연합의 기록 그리고 미래의 처리에서 그 연합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지능의 징표인 것이다. 핵심적 논제는 한 개체가 새로운 MOP 와 스크립틀릿을 획득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결국 기대실패를 그 실패에 대한 설명과 연합시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심적 행위이다.

생득성과 학습가능성의 물음이 제기된다. 놀랄 것도 없이, Chomsky 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주제 모두를 커다란 논제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의 조망에서는 하등동물이 사용하는 스크립틀릿은 어느 것이든 생득적일 가능성이 크며, 지능의 징표로 간주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스크립틀릿이 생득적이 아니라 학습된다면, 그리고 이 학습이 지능에서 결정적이라면, 지능은 실제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뒤따르게 된다.

생득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한 한 가지 기억구조가 M-비행기이다. 여러 차례 비행기 여행을 해본 후에, 안전벨트, X 선 투시가, 비행기 좌석표, 좌석 뒤에 붙어있는 음식 테이블, 짐칸 등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비행기에서 배가 고플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심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며, "자리가 비좁아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와 같은 불평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만일 개가 비행기에서의 행동에 대해 무엇인가를 학습하였다면, 그 개가 M-비행기의 몇몇 측면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개는 M-비행기에 들어 있는 몇몇 스크립틀릿을 학습하여, 항상 가야할 특정한 장소를 찾게 되고, 처음에는 신기하였지만 이제는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을 찾아내게 된다. 어떤 MOP 와 스크립틀릿들은 생득적 동물행동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몇몇은 확실히 학습된 것이다. M-비행기는 작고 공유할 수 있으며 개인 특수적인 기억단위의 집합인데, 이 기억단위들은 특정한 물리적 맥락에만 특수화되어 있다. 이 단위들은 기억 속에 M-비행기라고 부르는 인간 문화의 인공물 밑에 함께 체제화되어 왔으며, M-비행기는 학습할 수 있는 구조이다. 생득적이지도 않으며 자극 - 반응 연합도 아니다. 진정한 학습 따라서 진정한 교육이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스크립틀릿도 MOP 와 마찬가지로 학습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가르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동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행동을 학습할 수 있으며, 그 지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발현되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글읽기에 들어 있다. 만일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하였다면, 비행기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쉽게 따라할 수가 없다. 특히 기존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쓰여진 글을 읽으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실제로 어느 것이든 읽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이 필요하며, 그러한 지식은 읽기를 하기 전에 획득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정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능이란 지식의 함수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능의 획득을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지식이 없다면 어느 것도 지능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식의 획득은 지능의 심장부를 이룬다. AI에서도 지능 획득은 일차적 논제이다. 스스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자 노력하지만, 그 지식을 손으로 부호화하여 기계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 의존적이지 않은 지능적 행동은 없다. 따라서 교육은 학생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된다. 문제는 어떤 유형의 지식이냐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의 유형에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인간이 수학, 철학, 또는 심리학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은 인간이 그러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지식이 획득해야만 하는 지식의 요체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교육시스템을 망쳐온 것이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

학생이 지능적이기 위해서 획득해야만 하는 종류의 지식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계를 지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기계에게 철학이나 수학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기계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는 것을 학습하지 못하며 그러한 일들을 해내는 과정에서 학습할 수 없는 한, 결코 지능적일 수가 없다. 기계에게 사실들을 떠먹여준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아동에게도 마찬가지다.

기계에서 MOP, 일반화하는 방법, MOP 를 포기하는 방법, 동일한 것과 차이나는 것을 이해하는 방법, 경험을 특징짓는 방법, 예외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기계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아동을 가르칠 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무 차이도 없다. 한 개체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해주며 행위를 통해서 학습할 수 있게 주는 실세계 지식이 두 경우 모두에서의 논제가 된다. 이 지식이야말로 지능에 정말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시스템의 교과과정에서는 항상 베제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시스템은 그저 기능적 지식을 무시한다. 왜 그런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마음에 떠오른다. 첫째, 교육자들은 인간 심리학 그리고 AI 에서 얻은 교훈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교과과정에 그 내용을 포함시킬 수가 없다. 둘째, 세상에 대한 Chomsky 와 Searle 계통이 철학은 암묵적으로 기능적 지식을 결정적인 주제로 생각하기는커녕 가치 있는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고 있다.

AI 로부터 얻은 중대한 교훈은 지능이 의존하고 있는 지식의 유형에 관한 논제를 수반한다. 아동을 보다 지능적으로 만들려면, 즉 아동에게 보다 많은 지능적 행동을 부여하려면 (나는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한다) AI의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동시에 내가 여기서 논의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공헌도 인정해야만 한다.

결론

지능적 인간이 안다는 것 그리고 아동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전력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기 아동이 획득해야 할 유형의 지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제시한다.

• 스크립틀릿, MOP, 그리고 TOP

아동에게는 기억구조가 필요하다. 이들은 세상에서 살고 기능하면서 그 구조들을 획득한다. 경험을 통해서 학습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교육자에게 두 가지 물음을 던진다. 첫째, 아동이 학습하기를 희망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이 겪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는 겪지 못하는 유형의 경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둘째, 아동이 자연스럽게 겪으면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효율적으로 돌이켜볼 수 없는 경험으로서, 가르칠 수만 있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경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학교 교육은 바로 이러한 물음을 중심으로 설계되어야만 하다.

• 사건들간의 연계

아동이 한 사건을 경험할 때, 그 사건은 자신이 과거에 겪었거나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다른 경험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다. 훌륭한 교육은 학생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연계시키며, 현재 처리하고 있는 사건과 과거에 처리하였던 사건들을 연계시키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 헌 사건을 다른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

세상을 이해하려면 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효율적인 예측을 하려면 상이한 시점에 상이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떻게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학습하여야만 한다. 식당 상황에 있을 때라면 동일성의 확인은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제국주의" 를 보고 있을 때라면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어렵게 된다. 훌륭한 교육은 학생이 범맥락적 유사성을 파악하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이다.

• 결과 예측

핵심 논제는 예측이다. 예측을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학생이 훌륭한 의사결정자가 되도록 학습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 경험이 없이는 예측을 학습할 수가 없다; 선생의 임무는 그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 경험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대리적 경험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아동은 무엇인가를 해볼 필요가 있으며, 자신이 행한 것이 무엇이며 왜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아동이 이것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복잡한 환경에서 계획한 경험을 겪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수반되는 복잡성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여기에는 선생의 입장에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선생은 아동이 달성하려고 시도하는 목표가 정말로 달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 추상화

이러한 지식유형의 기저에는 추상화 과정이 들어있다. 상이한 사건들 속에서 공통 요소들을 추출해내지 않고는 일반화할 수가 없다. 상황들을 일반화하지 않고는 계획의 적용가능성을 인식할 수가 없다. 추상화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고이지만, 이것을 직접 가르칠 수는 없다. 오히려 학생은 공통성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고, 자신이 이끌어 내거나 가정하는 추상화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추상화도 실세계 경험에 의존적이며 그러한 경험을 주도하는 실세계 목표에 의존적이다.

• 자각

사람들이 고찰할 수 있는 핵심적인 실세계 경험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의 사고과정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을 학습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것을 잘해내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것을 왜 하는지 알지 못하기가 십상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이러한 자각은 다른 모든 처리과정에서 중요하며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 다루어야만 한다.

• 스크립틀릿과 MOP 의 위반을 이해하는 방법

스크립틀릿과 MOP 가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할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흔하게는 다른 누군가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며 잘못된 것을 그냥 무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동은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구조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기억구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자신의 개념화를 수정할 수가 있다.

• 예외 처리

예외를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호기심과 자기만족을 구분하게 해준다. 예외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예외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차이점을 인식하고 그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지적 성장이 추구하는 한 부분이다.

• 실패로부터 회복

실패가 사람들의 기를 꺾게 해서는 안 된다. 이해의 결여는 창의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멋진 일일 수도 있다. 학생은 자신의 실패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학습할 필요가 있다. 일이 기대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은 창의적 사고를 시작한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학교는 학생에게 기대실패를 야기시키고 그 실패를 잘 이겨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 사례 흡수

지식은 사례 (그리고 상호연관된 기억구조) 에 들어 있는 것이지 사실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사례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 일반화하고 예측하며 추상화하고 설명하고자 할 때 뒤져서 살펴볼 수 있는 경험의 목록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도 사례를 학습할 필요가 있다. 사례를 가르치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며, 선생들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학습할 필요가 있다. 선생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필요가 있으며 학생들이 우수한 이야기 분석가가 되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례를 가지고 있는 학생은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다손 치더라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은 것이다.

• 일반화

나는 일반화가 이해의 핵심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Oliver Wendell Holmes 는 "어떤 일반화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 여기에는 바로 내 말도 포함된다" 고  말한다. 이 인용문은 내가 항상 즐겨 쓰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제로는 일반화를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반화를 피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화를 하거나 피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 설명

내가 논의하여 온 모든 과정은 설명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설명하며, 그 설명을 포함한 기억구조를 생성한다. 아동에게 타인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용기를 내서 자신의 설명을 만들어 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모든 것이다. 새로운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중지할 때, 과거에 배운 낡은 설명이나 어렸을 때 스스로 만들어 낸 설명에 자족하여 그것에만 의지할 때, 학습은 중지된다. 훌륭한 가르침과 효율적인 학교 교육은 학생들을 설명이 욕구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든 다음에 스스로 설명을 내놓도록 요구하는 것에 달려있다. 학습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사고과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틀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는 올바른 것만을 강조하고 있다. 학교는 탄탄한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질 것을 강조해야 한다.

사람이 지능적일수록 모든 기술에서 유능성을 보이게 되며,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간 지능의 근본 성분들 즉, 지식을 획득하고 흡수하여 통합시킬 수 있게 해주는 성분들을 가르치지 않는 다는 사실은 그 성분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에 학교 교과과정이 설계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왜 가르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지능과 지식획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만 열거하기가 쉽지 않은 행동과 기술들이 있다. 여기에는 장난끼, 흥미, 주의, 지각, 규칙 안 지키기, 개인성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행동과 기술들은 개인특수적인 것들이다. 이것들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에서 결정적이며, 이 영역에서의 개인차가 인간 지능과 학습능력에서의 많은 차이점들을 설명해 준다. 이것들은 한 학생의 개인적 특성과 그 학생만이 독특한 학습 스타일을 반영한다. 물론 이러한 능력들을 어느 정도는 고양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중요성을 인식해야만 하겠다.

요컨대,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흡수하고 분석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들의 관찰, 일반화, 그리고 창의적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정답이 있다는 생각의 비중을 낮추고,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다보는 자신만의 조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기억은 경이롭고도 가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선생의 임무는 그러한 기억이 진화하여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