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식적 지식

(Nonconscious Knowledge)

 

역동적 기억: Roger Schank 저서, 신현정 역, 시그마프레스, 2002 (원서 : Dynamic Memory Revisited, Cambridge Univ. Press, 1999), Page 203~220

 

통계 착각

 

(참고 : unconsciousness 는 무의식)

학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지식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게 된다. 학생에게 부여하려는 지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교육을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지식이 지고의 선이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대중문화에서 "Trivial Pursuit" 과 같은 게임이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텔레비젼은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 지를 검사하는 "Jeopardy" 와 같은 지식게임에 초점을 맞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학교까지도 동일한 유형의 사소한 지식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가 빈칸 채우기와 선다형 문제에 초점을 맞춘 시험에 의해서 주도됨으로써, 학교에서의 성공이 사실의 암기에 의존하게 만든다. 학교 밖에서도 회사는 직원들에게 직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면서 직원들이 학습한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Brinkerhoff & Gill, 1994) . 평가욕구가 모든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는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 따라서 사실 (fact) 들이"교육받은 사람의 잣대" 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쉽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학습기관이 시험결과에 초점을 맞춘다면 시험 볼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욕물과 함께 아기도 함께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는 물음은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측정으로 인해서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교과과정의 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문제의 두 번째 측면이 더욱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란 무엇이며 그들을 동기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을 요구가 있을 때 암송해낼 수 있는 의식적 지식의 집합체로 이해하는 한, 사람들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리고 심적 처리과정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과 분리되기 시작한다. 만일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사건들에 대한 의식적 이해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에, 하의식적 마음 (subconscious mind) 은 독자적으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의사결정하는 것인지를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무엇인가를 수행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어주는 정말로 중요한 지식의 대부분은 의식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들은 식당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S-지불하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수행할 수 있는 현실적 지식이지 암송할 수 있는 (또는 암송하기를 원하는)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 교육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 즉 의식적 지식을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으로 전달하는 것 (Strauss & Shilony, 1994) 은 대체로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은 실제로 비의식적 (nonconscious) 이며, 그렇게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봄으로써 식당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인지, 식당에 대해서 교육받아서 그 방법을 학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상적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수행한다 (Langer, 1990). 이빨을 닦을 때, 자동차를 운전할 때, 공을 던지거나 받을 때, 음식을 씹고 삼킬 때, 문장을 만들어 낼 때, 아니면 텔레비전을 볼 때, 사람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밝힐 수가 없다. 가지고 있는 스크립틀릿들에 따라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면, 가장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이러한 주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손동작이나 사후약방문과 같은 것으로 보일 답만을 내놓게 된다. 예컨대, 개는 공을 입으로 받고, 명령을 이해하고, 잃어 버린 물건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개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물리학이나 심리학 이론을 의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만일 의식적 지식, 즉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지식이 지능의 요체하고 믿고 있다면, 인공지능 연구의 산물이하고 주장하지만 오직 프로그램 되어 있은 것만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보면서 당황하게 될 것이다. 기계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 기계는 지능적이지 않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능력의 결여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사람들이 동료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가 그들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기계를 비하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계가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토론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인간이 자성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이 해로울 것은 없다. 불행하게도 이와 동일한 태도가 교육시스템을 망치고 있다. 의식적 지식을 기본적인 통화로 가지고 있는 교육 시스템을 운영한다면 본질적으로 지능에 대한 논쟁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 지식이 인간성 또는 지능의 필수조건이라고 내세우는 방식으로 의식을 개념화하는 것은 비의식적 지식을 가르칠 가치가 없는 지하세계의 지식으로 내쫓아버리는 효과를 갖는다. "알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는 것" 이 본질적으로 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는 한에 있어서, 교육시스템은 필연코 실패하고 만다.

만일 학생들에게 실제를 수행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들의 수행에 대해 명시적으로 아는 것이 그 수행에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학교에서 잘못된 유형의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지능적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보다는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는 지식을 가르치고 있으며, 전자의 지식은 대부분이 의식 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모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형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학습해야 한다는 Bransford 등 (1989) 의 주장이야말로 비의식적 지식과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의식적 지식간의 괴리를 확연하게 드러내 준다.

무의식적 지식을 가르친다는 생각은 자가당착인 것처럼 보인다.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John Dewey 는 수행이야말로 교육에서 진정한 과제이지 의식적 지식의 시범보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의식적 지식에 그렇게나 매료되어 교육 시스템이 그 지식에 매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어쨌거나 의식적 사고와 비의식적 사고간의 차이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고찰하려면 의식적 사고의 수준보다 낮은 수준에 존재하는 지하세계의 사고를 관찰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생각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를 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 사고는 어떻게 생긴 것이며, 수행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을 사고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에 대한 교육인가에 대한 놀랄 만한 견해를 내놓게 된다.

통계 착각

한밤중에 깨어서 다시 자려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보자. 마음은 이리저리 내달리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어제 일어난 일들을 되새겨보기도 하며, 밑도 끝도 없이 오래 전에 망각하였던 사건을 되짚어보기도 한다. 생각을 꺼버리고는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마음은 통제권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아침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을 보다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으며, 고민하던 문제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마음은 통제를 벗어나서 나름대로의 진로를 따라 계속해서 내달리고 있다.

이 현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합리적 사고와 비의식적 사고간에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용의주도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적절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사실들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서 이러한 추론과정을 자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추론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다. 반면에 컴퓨터는 사람들의 합리적 사고를 흉내내도록 부여한 규칙을 따르도록 만들 수가 있지만, 자기가 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시뮬레이션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논쟁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오직 밤에만 볼 수 있는 부분, 즉 스스로 생각하고는 없어져버리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꿈을 꿀 때 자기 자신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무엇인가가 머리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마치 어떤 꿈 제조자가 합리적 자기를 벗어난 곳에서 마음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합리적 마음 속에서는 돼지가 날 수 있다거나, 죽은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거나, 움직이려고 했는데 다리가 없다거나 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는다. 꿈의 내용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꿈은 자신의 사고과정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정상적인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불안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밤에 내달릴 때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날아다니는 돼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도 자신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 마음을 통제할 수가 없으며 마치 사고를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한밤중의 현상이 어딘가 이상한 것이라고 느끼며, 중요한 측면에서 진정한 인지과정의 부분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만이 한밤중의 현상은 결코 아니다.

이것만이 밤에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자. 아무런 외부자극도 없고 쳐다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어두운 방에 혼자 있어 보라. 그저 편안하게 있으면 된다. 이제 마음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내 버려두어라.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특정한 어떤 것에 집중하지도 말고, 마음을 가능한 한 명정한 상태로 만들어라. 10 분간 그렇게 있어 보아라. 끝났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적어보아라. 그 시점에서 여러분이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했었는지 아니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생각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는지를 자문해 보라.

그 상황에서 여러분이 경험하였을 것은 밤에 일어나는 마음의 질주에 대한 낮의 대응체이다. 그 내용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정말로 이상한 현상인가? 이 현상은 의식적 사고과정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내달리는 마음은 인간이 사용하는 (아마도 다른 동물들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진정한 도구라는 점이다. 합리적 사고가 일어난다는 소위 의식적 마음은 착시일 뿐이다. 사람들이 합리적 사고를 하지만, 실제 사고과정과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덜 관련되어 있다. 마음이 내달리는 것을 볼 때, 일어나고 있는 일은 실제의 사고과정에 달려 있는 창문이 의식 (합리적 사고의 도구) 에 노출되는 것뿐이다. 의식은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내달리는 마음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고 느낄 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창문을 닫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내달린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단지 그 과정을 항상 들여다볼 수 없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의식적인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며, 그 결정을 수행할 수 있다.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어떤 작업을 갖고 싶은지, 어디로 휴가를 떠날 것인지 등등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유형의 결정이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합리적 사고는 착시이다. 그러한 의사결정의 의식적 측면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특정짓는다는 망상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사고는 그렇게 단순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호흡에 유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숨을 내쉴 것인지 아니면 멈추고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호흡하는 방법을 이상하게 변경할 수 있으며, 스쿠버 장치를 통해서 호흡할 수도 있으며,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호흡할 수도 있으며,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호흡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라고 요구받을 때,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만두거나 아니면 다 끝내고 나면, 호흡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호흡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잠을 자고 있을 때나 부상당했을 때나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나 호흡을 하고 있으며, 그 과정을 거의 자각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그 과정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생리학자들이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호흡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호흡에 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호흡은 더욱 불규칙하게 된다. 그 생각을 멈추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게 되면, 호흡은 저 혼자서 잘 진행된다.

기억 그리고 기억구조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처하는 방법, 판매를 종료하는 방법,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 또는 자신이 갈 길을 가는 방법 등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비록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알고 있으며 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영역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양한 MOP 와 TOP 로 일반화되어 버린 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MOP 와 TOP 는 과거 사례들과의 유추를 통해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Ross, 1984; Johnson & Seifert, 1992; Kolodner, 1993; Gholsen et al. 1996).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유추를 인식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 유추는 의식되지는 않지만, 기억과 사고를 실제로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고는 의식적이든 아니든지간에 설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명을 만들어 내기위해서는 물음을 생성하고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어느 지능적 개체라도 스스로 알고자하는 욕구가 없이는 학습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알고자 하는 욕구가 의식적일 필요는 없으며, 일반적으로는 그럴 수도 없다. 예컨대, 휘둘러봄으로써 여행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확인하지는 않는다. 마음은 실제 증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해낸다. 두 번째 여행에서 무엇인가 변했다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고 해도, 일반적으로는 무엇이 변했는지를 말할 수는 없다. 재인할 수는 있어도 회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학습은 목표에 의존한다 (Trzebinski & Richards, 1986; Seifert, 1990). 친구를 알아볼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친구를 보고는 얼굴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친구가 수염을 깍아 버렸다는 사실은 재인하지 못하고 그 친구가 수염을 길렀었는지를 물음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 친구를 의식적으로 재인하고 만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억에 저장한 친구 얼굴의 데이터구조가 역동적 기억에 들어 있어서 거의 접근하기 어려운 일련의 절차 (procedure) 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특정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누군가가 어떤 것을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일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의식에 대한 어휘를 그 사람들이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과 쉽게 대치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문장에 들어 있는 단어들을 읽을 때 그 단어들을 개념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대상들에 대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에는 알고 있다고 말하며 동시에 명시적으로 지식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들간의 경계가 존재한다. 조지 워싱톤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전거 탈 줄 안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식이다. 나는 워싱톤 대통령을 의식하며, 그의 얼굴을 그릴 수 있으며, 그의 얼굴과 1 달러 짜리 지폐를 의식적으로 연합시킬 수 있다. 나는 내가 조지 워싱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전거 타기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나는 단지 자전거를 탈 줄 알뿐이다. 자전거에 대해서 몇몇 사실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이 사실들은 내가 자전거 탈 때 하는 행위와 별 관계가 없다. 균형과 운동에 대한 몇몇 원리를 이해하지만,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 그 원리 중 어느 것도 명시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동안 나는 의식상태에 있으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자전거 타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의식한다. 그런데 단지 자전거 타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과 지식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내가 논의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최선의 본보기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으면서 현재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문장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컨대, 여러분은 book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 book 을 정의해 보라고 요청받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book 을 정의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book 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문장을 읽는 맥락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적 지식은 학교에서 학습한 지식이거나 그렇게 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스스로 만들어 낸 지식이다. book 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book" 에 관한 지식은 문맥 속에서 그 단어를 접할 때 하는 짓거리에 대한 지식이며, 이 지식은 전혀 다른 유형의 지식이다, 어느 누구도 언어처리 지식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유형의 지식을 명시적으로 학습할 수는 없다. 단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컨대, book 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의 형태로 그 단어의 의미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That possibility is so likely you could book it." book 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동사로서의 용도가 마음에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book 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그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제거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명시적으로는 거의 자각하지 않는 모든 유형의 언어처리 지식을 사용한다. 모든 지식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의식되느냐의 여부에 관계없이, 다양한 상황에 걸친 맥락에서 그 지식을 사용하거나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학습이 이루어졌다는 타당한 검증이 된다.

예컨대, take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 잠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 "John took a bath" 에서 사용된 의미로 받아들였는가? "John took an aspirin" 이나 "John took a wife" 는 어떤가? 여러분은 그 단어에 대해서 별 생각을 하지 않고도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 그렇지만 처음에 그 의미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take 에 대한 이러한 여러 의미들을 생각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도 take 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지를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물어보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가 없다. 더 많이 생각해 보아도 정의 내리기는 여전히 어려울 뿐이다.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다른 유형의 지식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안다는 것" (knowing) 이 모든 경우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지식을 바라다보는 데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1. 합리적 지식 : 논리적 사고를 위해 필요한 사실들

2. 정서적 지식 : 어떻게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를 아는 것

3. 하의식적 지식 :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지식

4. 물리적 지식 : 우리의 신체가 사용하는 지식

5. 비의식적 지식 : 기본 심적 활동에서 사용되며 명세화 할 수 없는 지식

합리적 지식은 우리가 명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지식이다. 여기에는 정의적 지식, 사실적 지식, 경험적 지식이 포함되며, 일반적으로 학교나 책에서 배우는 유형의 지식이다. 전형적으로 내가 이 책에 들어있는 지식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합리적 지식 (rational knowledge) 이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서적 의식이 채택하는 지식은 어떤 것인가? 예컨대, 나는 언제 학생들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지를 안다. 남편은 언제 자기 부인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안다. 이것은 어떤유형의 지식인가? 이것이 다른 유형의 지식인 것은 확실하다. 냉정하고 조용하며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러한 지식에 대한 근거를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다고 주저없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그 순간에 제 정신이 아니거나 비합리적이란 말인가? 비합리적이고 언급되지도 않으며 어두운 측면이 튀어나온 것이란 말인가? 그 사람들이 이러한 지식을 학교에서 배우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어디에서 이 지식을 얻는 것인가?

하의식적 지식에는 접근하기가 비교적 어렵지만, 사람들은 그 지식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예컨대, Timothy  Gallwey 는 그의 저서 The Inner Game Tennis 에서 테니스를 칠 때 항상 갈등을 일으키는 두 자기 (self)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코트에서 항상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볼에서 눈을 떼지마" , "무릎을 굽혀야지" … 어느 날 나는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자기 자신한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라고 대부분의 사람이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며 자기 자신은 또 누구인가? … "나" 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 은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 는 행위를 평가하고는 다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Gallwey는 명령을 받고 있는 속내의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고 흉내내도록 만듦으로써 테니스를 더 잘 칠 수 있게 되는 방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마음 속에 볼을 보내고자 하는 위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나서 몸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볼을 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나타내도록 할 수가 있다 … 예컨대, 당신이 폴로스루 힐 때 일정하게 라켓을 돌리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 (당신의 속내 자신에게) 당신이 요구하는 행위에 대한 아주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하여야 한다 … 눈을 감고 상상해 보라 … 포핸드로 스윙을 하는 동안 라켓이 플랫한 상태를 유지한다 … 라켓을 플랫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의식적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Gallwey 에 따르면, 의식적 지식은 테니스를 치는 데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은 신체를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적 마음은 신체가 수행하기를 원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만, 의도적인 지시나 명령은 거의 쓸모가 없는 것이다.

물론 동물이 제어할 수 있는 신체를 수백만 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의식적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신체의 행위를 명령하는 것이 아닌 다른 수단을 가지고 의식적 사고와 언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Gallwey 의 요점은 근본적으로 신체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실제로는 사태를 악화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신체는 누가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arville Hendrix 는 사랑에 대한 글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무의식적 의사결정이 의식적 의사결정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무의식적 결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논의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자라면서 갈등을 겪었던 어머니나 아버지의 특성을 나타내는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 배우자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친숙한 어렸을 적의 감각과 동일한 것이 일어나도록 무의식적으로 시도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은 배우자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육장면을 벗어나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컨대, 시카고 트리뷴 지의 스포츠 면에 실린 야구의 스트라이크 존이 왜 작아져 왔는지에 대한 기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였다:

10년 전에는 스트라이크로 판정되었던 투수의 볼이 이제는 더 이상 스트라이크로 판정되지 않는다 … "타자에게는 모든 투구에 대해 항의가 허용된다. 투수에게는 한 마디의 말도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투구가 무엇이든 말을 하게 되면, 주심의 면전에 대고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주심의 눈에 뜨인다. 타자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관중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월이 지나가면서 어려운 판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의식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투수가 투구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Jack McDowell 이 말하는 주심이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만일 물어본다면 그 주심은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공식적 정의를 인용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 판정에서는 그 정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스트라이크 존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 지식은 소위 그의 하의식적 지식과는 다를 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의식적 지식과는 다를 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의식적 마음에 대한 임상심리학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 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합리적으로 안다는 것이 하의식적 마음에서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경우라면 누가 이기겠는가? 만일 하의식이 승리한다면, 진정한 지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 지식이 들어있는 위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의식적 지식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학교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교육과 학습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인가?

물리적 의식이라는 측면에도 동일한 논쟁이 적용된다. 테니스를 할 줄 안다고 말할 때,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라켓으로 볼을 치는 방법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고 글을 읽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볼을 실제로 치는 것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Gallwey 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를 관찰하고 그가 하는 것을 흉내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선수가 행동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후에, 그렇게 해서 기억한 내용을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도록 말해보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는 단지 관찰하고 흉내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적 지식이 중요한 지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Gallwey 에 따르면 관찰한 것을 언어화하는 것보다 흉내를 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발달적인 견지에서도 이러한 지식이 다른 모든 지식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어린 아동은 어떻게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뛰는 것인지, 어떻게 공을 던지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블록을 쌓는 것인지에 대해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아동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의 핵심은 알기 시작한 것을 언어화하거나 지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초기에 아는 것은 관찰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관찰한 것을 흉내내려는 시도로 변환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기존 지식, 특히 전형적인 사례에 근거하여 작동하는 것이며, 전형적 사례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관찰에 근거하는 것이지, 자신의 경험이나 의식적 지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적으로 흉내낼 수 있을 때, 무엇이든지 흉내내려고 시도하였던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 게 된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더 잘 할 수가 있다. Gallwey 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의식적 지식은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논의하여온 유형의 합리적 지식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의 핵심에는 비의식적 지식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 그리고 읽거나 들을 때 문장을 이해하는 방법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나 공감을 나타내는 방법 아니면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주제의 전문가가 그 주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마지막 진술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지식에 대한 핵심적인 논쟁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문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자주 시범보인다. 알고 있는 것에 책을 쓰기도 하고 강의를 하기도 한다. 전문가의 지식을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책을 구입하고 강의를 듣는다. 능력이 된다면, 그 전문가를 자문역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전문가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청중은 전문가가 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학습할 것을 희망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전문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전문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중들도 자신이 들은 것을 가지고 행동을 변화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행위를 통하여 학습하는 것이지 듣고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이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책이 주도하는 시대에 지식으로 통용되어온 것들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사람들이겠다. 책이 지식을 전달하는 주도적 매체인 한에 있어서, 많은 책을 읽고 이 방법으로 대부분의 지식을 획득한 사람들은 "책 지식" 을 존경하는 자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덜 책지향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합리적 지식에 대해서 그렇게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날 지식의 본질에 대해서 일종의 소리없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젊은이와 장년간의 전쟁이며,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들간의 전쟁이며, 교육받은 자와 교육받지 못한 자들간의 전쟁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컴퓨터를 다루는 자와 컴퓨터를 기피하는 자들간의 전쟁이겠다. 이러한 전쟁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논쟁은 교육개혁, 문화적 유능성, 의식, 또는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제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논쟁은 비다오게임의 가치, 컴퓨터의역할, 텔레비전의 무가치함, 또는 정보고속도로의 중요성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실제에 있어서는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과거에는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컴퓨터는 이 세상에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버렸다. 최근 의식에 대한 책이 그토록 많이 출판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지난 10 년이나 한 세기 동안에는 매료되지 않았던 마음의 측면에 어느 날 갑자기 매료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자기지식 (self - knowledge) 에 대해서 항상 가정하고 있었던 것들을 컴퓨터가 위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감을 확인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인가?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자 유력자이며 연장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본질을 재확인함에 따라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데이터 전송속도와 광섬유 또는 메모리의 기가바이트 등과 관련된 컴퓨터 혁명이 아니다. 알 가치가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지식 혁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논쟁은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 매우 지능적인 기계가 다음 주에 가전제품 가게에 진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세계적으로 많은 가정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것 그리고 향후 10 년에 걸쳐 점증하는 속도로 들어오게 될 것은 미래에 대한 비의식적 인식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사람들이 지식으로 삼을만 하다고 평가하였던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 1980 년대에 컴퓨터 퀴즈게임에서 우승하는 것이나 1950 년대에 퀴즈쇼에서 맹위를 떨치는 것이 2000 년대에는 더 이상 박학다식의 징표로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 사실들은 점점 가치가 떨어지는 통화(通貨)가 되어 가고 있다. 1950 년대 아이들은 야구선수의 타율과 같이 무의미한 지식들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사실이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 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밖에 나가서 요즈음 아이들에게 말을 붙여보면, 아이들이 더 이상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음악, 영화, 또는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식인들은 가치의 이러한 변화를 개탄한다. 그들은 젊은 세대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평가절하한다. 학교시스템의 실패에 대해서 논하지만, 사실 실패한 것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지식의 통화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있거나 넓히려고 애쓰고 있는 현대의 지식인들은 50 년 전 당대의 지식인들이 행동하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예를 가지고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최근 나는 한 여성 임상심리학자가 자신의 임상진료를 확장하면서 지식을 넓혀가고 있는 것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성생활에 문제가 있는 한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 그런 환자를 치료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서점에 가서 그 주제에 대한 책을 한 권 샀다. 다음 번에는 성전환에 관심이 있는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서점에 갔다. 그  다음에는 동성애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다시 서점에 갔다. 드디어는 레즈비언 커플을 치료하게 되었다. 또 다시 서점에 갔다. 만일 50 년 전이었다면, 이렇게 필요한 시점에 자가교육을 받는 과정을 밟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책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존재하는 것조차도 항상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시대에 지식의 개념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가교육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자격증이야말로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으며, 경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술한 장면 속에는 컴퓨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기 바란다. 만일 이러한 책들이 온라인으로 가용하였다면 그 심리학자는 어떻게 하였겠는가? 아마도 그녀는 서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지식에 대한 개념화를 변화시키는가? 물론 아니다. 몇 년 후의 미래로 가보도록 하자. 그녀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책을 찾는 대신에, 필요할 때 컴퓨터에게 물음을 던지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이 지식의 개념화를 변화 시키겠는가? 별로 변화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람들은 항상 물음을 던지고 답을 얻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물음을 던질 수 있지만, 올바른 답을 얻고 있는지를 항상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게임을 약간 수정해보자. 질문을 던지면 답을 얻는 대신에 정보가 필요한 분야에 대한 한 명 이상의 전문가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원격학습을 제창하는 사람들은 정보고속도로상에서 전문가들에게 전자메일을 쓰거나 그들과의 화상회의를 통해 이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제안해왔다. 나에게는 그러한 전문가들이 필요할 때에 언제든지 가용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가능성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미 전문가들에게 주어졌었으며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되어서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서 컴퓨터가 선택할 수 있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모든 자료에 표지를 붙이는 것이다. 전문가의 100 시간짜리 비디오 테이프가 있는데 필요한 것을 찾으려면 100 시간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 작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최선의  유능한 전문가에게 묻고, 원한다면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접속함으로써 논쟁을 벌릴 수도 있으며, 자신이 원하였던 것을 찾았다고 느낄 때 대화를 종료할 수가 있다.

지금 내가 기술하고 있는 시스템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가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존재한다. 그러한 시스템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의 의미를 변화시키는가? 나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때는 그 정보 자체의 가치가 상당히 감소하게 된다. 가치가 증가하는 것은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Resnick, 1987; Collins, 1991; Murnance & Levy, 1996).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당연히 교육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개념화를 필연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상대적으로 쉽게 전문가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 전문가가 해야 할 말을 인용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전문가가 제공하는 지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오늘날의 아이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 비디오 게임에 대한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이다. 비트와 바이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을 향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가지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점점 부적절한 곳이 되고 있다. 학생들이 텔레비전이나 실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비인간적인 되는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학생들이 용도를 알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 어느 것도 알아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

옛 전통의 지식인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확실하다. Searle, Chomsky, Wittgenstein, Freud, Kant 등 많은 학자들은 지식에 대해서 전혀 다른 개념화를 가지고 있다. 인공지능 (AI) 연구자들은 이러한 학자들과 대립한다. AI 연구자들은 지능적인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를 통해서 오늘날의 아이들과 앞에서 언급한 임상심리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었다.

기계에서 지식을 갖게 만드는 것이 AI 에서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지식은 기계에게 별 쓸모가 없다. 과정지식, 즉 무엇을 할 것인가 대신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 지능적 기계와 비지능적 기계간의 차이이다. 학습할 수 없는 기계는 지능적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는 생각을 곰곰히 따져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습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학습하지만, 어떻게 학습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컴퓨터는 학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능적이지 않다. 어떻게 기계를 지능적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답은 컴퓨터에게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오해가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사실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들이야말로 지식의 통화라고 생각해왔으며, 의식이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자기 지식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학습하는 것인지,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믿고 있는 것을 어떻게 믿게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잇는 모든 것은 자신의 감각, 자신의 생각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리고 사실들뿐이다. 지식을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비유하자면 암송하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하기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지능적 존재에서 행동을 주도하는 핵심이 목표이지만, 그 목표는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교육시스템을 설계할 때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교육설계는 학생들의 목표를 잘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이해는 학생들을 동기화 시킨다는 측면 (Brinkerhoff & Gill, 1994) 심적 표상에 들어 있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측면 (Trzebinski & Richards, 1986; Seifert, 1990) 모두에게 결정적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신의 목표를 알지 못하기가 십상이다. 실제로 학생들 자신의 목표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 교육설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학부생의 지도 교수로서 나는 졸업 후에 평화봉사단으로 일하려고 하는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학생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였다. 나는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으며, 대부분의 방법들에는 그렇게 멀리 떠나는 일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나는 혹시 그 학생의 진정한 목표가 멀리 떠나서 전혀 다른 문화에서 살고 싶은 것은 아닌지를 물었으며, 목표가 그것이라면 평화봉사단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만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 학생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왜 평화봉사단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답하였다.

이것은 합리적 지식처럼 가장한 비의식적 목표의 한 가지 예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물론 목표를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행위가 다른 것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된다.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한 비의식적 목표와 진술하고 있는 의식적 목표가 상당히 다를 가능성이 있다.

계획이라는 측면에서도 상황은 거의 동일하다. 사람들은 비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의식적 계획은 토론을 벌이고 평가하며 수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보다 복잡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반추가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의식은 계획세우기 과정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비의식적 계획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개가 자각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개도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계획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계획세우기는 비의식적 과정일 수 있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비록 계획세우기가 일차적으로는 의식적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물음은 한밤중에 잠을 자면서 좋은 계획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된다. 좋은 계획을 담은 꿈을 꿀 수 있는가?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 마음이 막 내닫기 시작할 때 그 계획이 떠오르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그렇다" 라고 한다면, 비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사람들이 보다 우수한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려면 어떤 유형의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 사람들에게 계획을 말해주거나 여러 계획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유형의 교육이 아님은 명백하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실질적으로 심리적 효과를 갖는 방식으로 그 계획이 초래하는 결과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상황들을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계획을 세우도록 가르치려면 계획세우는 방법을 알도록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데는 계획세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단어들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것도 아니며 의식의 생리학에 대한 것도 아니게 된다. 진정한 문제는 지식이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무엇인가를 학습하거나 가르쳐야 한다면, 어떤 유형의 지식에 대해서 말할 것이냐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전달하려는 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그 지식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