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추 논리
논리와 사고 : 소흥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age 382 ~ 392.
귀추 (歸推) 논리 (abduction) 는 복잡한 경험 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 개념을 통해 경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사유 방식이다. 종교, 예술, 문학, 철학에서 우리의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체험하게 하는 사유 방식으로 적용되어 온 비연역적 논리이다. 현대 과학도 만일 연역적 - 법칙적 설명, 즉 원인 설명을 넘어서 복잡한 자연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귀추법적 사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과학적 세계관이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이나 철학적 세계관과 유기적으로 종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귀추법적 사유는 필수적 사유 방식이 될 것이다.
귀추 논리가 귀납 논리와 다른 점은, 귀납 논리가 개별적 현상들 뒤에 있는 일반적 질서를 찾는 데 필요한 논리인 데에 비해, 귀추 논리는 경험 세계로부터 포괄적 개념화의 차원으로 갔다가 다시 경험 세계로 돌아와 그 포괄적 개념을 적용해 보는 회귀적 사유의 논리라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회귀적 사유는 법칙적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이 함축하는 검증 조건을 찾아서 가설 검증을 하는 논리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가설을 법칙으로 받아들일 때 연역적 - 법칙적 설명이나 예측을 할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은 회귀적 사유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연역적 - 법칙적 설명' 이 말해 주듯 이러한 회귀적 사유에 적용되는 논리는 연역 논리라는 것이 귀추 논리와 다르다. 법칙적 가설은 개별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기 위한 가설이므로 연역 논리가 적용되는 지배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귀추 논리에서의 포괄적 개념화는 법칙적 설명과는 다른 의미의 설명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가정이므로 귀추 논리는 비연역적 논리로 유형화되는 것이다.
'하느님' 은 우리 인간의 귀추법적 사유가 만들어 낸 가장 포괄적 개념일 것이다. 문화권에 따라서, 또한 종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적 교리에 관계 없이 '하느님' 의 개념을 귀추법적 가정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런 '하느님' 개념이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에서 어떤 대상의 존재를 지칭하느냐에 대해서는 유신론, 무신론, 또는 불가지론 (不可知論) 으로 입장을 다르게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과학의 발전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러한 '하느님' 개념에 대한 경험적 내용을 과학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로 남아 있다.
'하느님' 개념이 문화적 특수성과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가장 포괄적이어야 할 개념으로서의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은 '하느님' 대신 '포괄자' 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가장 포괄적이어야 할 '포괄자' 개념을 경험 세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들의 설명과 이해를 위해 적용하고자 하면, 그것이 너무 공허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 개념이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더해 가게 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귀추법적 가정의 개념은 포괄적이면서도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는 개념이어야 한다. '하느님' 의 개념을 종교적 신앙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개념을 통해 자신의 경험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 세계관이 다르게 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 개념이 이처럼 강력한 설명력을 갖게 하는 속성 중의 하나가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창조주' 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느님은 이 세상의 존재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해 온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 개념은 이러한 초월주의적 존재론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초월주의적 '하느님' 을 받아들이는 유대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지만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유대교의 초월주의를 거부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인과 관계의 보편성을 하나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원인 작용이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도 하나의 원인 작용이며, 그것의 결과가 이 세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생각한 인과 (因果) 의 원리는 인과 작용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조건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즉, 원인 사건과 결과 사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원인과 결과가 다 같이 물리적 사건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도 물질 세계의 사건이어야 하고 결과도 물질 세계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은 물질 세계로부터 완전히 초월하여 존재하는 순수 정신이라면, 그런 정신이 물질 세계에 원인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창조 행위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과 정신 간의 인과 작용, 또는 물질과 물질 간의 인과 작용은 가능하겠지만 정신과 물질 간의 인과 작용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 세상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게도 물질적 속성이 있어야 하며, 하느님도 물질적 자연과 함께 존재하면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자연주의적 하느님'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 개념이 '인과' 개념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게 된 지금에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도 일종의 정보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있으라!" 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은 정보 기능으로서의 창조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정보 기능의 관계, 즉 발신과 수신의 정보 작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보 매체가 있어야 한다. 공통의 정보 매체를 통해 정보 전달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정보 매체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도 하느님은 '자연주의적 하느님' 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이 곧 '하느님' 이라는 뜻이다.
자연주의적 존재론에서의 '자연' 은 '하느님' 과 다름없는 포괄적 개념이다. 불교 존재론에서의 '공 (空)' 과 '연기 (緣起)' 도 자연주의적이면서 포괄적인 개념들이다. 도가 사상 (道家思想) 의 '도 (道)' 개념도 '자연' 개념만큼 포괄적인 자연주의적 개념이다. 또한 '자연' 과 마찬가지로 '도 (道)' 역시 일상적 개념이지만 귀추법적 사유에 의해 모든 것을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것이다.
노자 (老子) 의 『도덕경 (道德經)』에 첫 문장인 "道不道非常道" 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기존의 여러 가지 해석에 덧붙여서 또다른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은 귀추법적 가정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도 (道)' 개념은 일상적 의미의 '도' 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귀추법적 사유가 필요로 하는 포괄적 개념은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특수한 의미의 개념이므로, 일상 언어의 개념일 경우 구체적 경험 세계에 적용될 때의 일상적 의미와 귀추법적 개념화에 적용될 때의 추상적 의미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도덕경』의 둘째 문장인 "名不名非常名" 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글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짓거나 글의 제목을 붙이는 데는 귀추법적 사유가 적용된다. 인물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이름은 추상적이다. 추상적이므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인물의 특성 중에서 아직 표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특성까지도 함축하는 추상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글의 제목도 그런 뜻에서 추상적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중국 (中國)' 이라는 이름에 관해 흥미로운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땅에는 많은 나라들이 명멸했다. 여러 부족이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몽고나 오랑캐라고 여겨졌던 민족들이 들어와서 중국을 통치하기도 했고, 시대마다 다른 부족이 중원 (中原) 을 차지하고 또 다른 중국의 정통이 되어 왔다. 어쩌면 '중국' 은 추상적인 이름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관용하며, 모든 것을 용해하는 용광로 같은 땅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중국' 이라는 용광로가 지금 격렬한 불꽃을 내며 모든 것을 녹이고 있다. 아무도 그 열화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며, 어떤 사회가 또 '중국' 의 이름을 차지하고 중원을 다스릴지 짐작하기 어렵다" (『空間』제 422 호, 2003 년 1 월, 73 쪽).
건축가다운 관찰이며 해석이다. 왜냐 하면, 건축 설계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귀추법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에는 연역 논리적 계산도 필요하고, 귀납 논리적 공간 배열도 필요하다. 유비 논리가 적용되는 창의적 사유도 필요하고, 변증 논리적 공간 전개도 필요하다. 하지만 건축 설계에 적용되는 가장 포괄적인 사유는 귀추법적 사유이다. 다양한 기능의 공간들을 전체적으로 포괄하여 개념화하는 귀추법적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귀추법적 개념화가 잡히면, 비로소 그것이 추상화하여 표현하는 내용을 구체적이고 다양한 공간 기능으로 풀어 내는 설계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공간 설계를 하다가 다시 돌아가 전체적인 추상 개념을 고칠 수도 있다. 다양한 부분들을 포괄해 주어야 하는 추상적 개념이 맞지 않을 때는 더 적절한 개념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름짓기와 제목 붙이기에 적용되는 귀추법적 사유도 언제나 더 적절한 이름이나 더 적절한 제목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개방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글의 제목만이 아니라 그림의 제목을 붙이는 데도 귀추법적 사유의 적용은 중요하다. 구상적 (具象的) 그림의 제목은 그 그림의 추상적 의미를 읽어 낼 수 있게 하므로 좀더 깊은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추상적 (抽象的) 그림의 제목은 그림의 추상성과 제목의 추상성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제목 붙이기가 어렵다. 그림과 제목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추상적 그림은 우선 그림에서 표현된 내용이 그야말로 구상적인 것을 추상화한 것이어야 한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그림의 내용이지만 그것을 통해 구상적인 내용,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복잡한 정보 내용을 압축했다가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다시 복잡한 본래의 정보 내용으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추상화를 통한 단순화는 예술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내용이 없는 단순화는 곤란하다. 귀추법적 추상화가 의미하듯이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단순화시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용이 있는 추상적 표현이 될 수 있고, 그런 추상화의 제목도 '압축된' 정보의 내용을 표현해 주는 적절한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추상 예술을 지향하는 사유가 귀추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불교에서의 수행 과정에 비유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 불교적 수행의 과정은 출가 (出家) 로부터 시작된다. 복잡한 일상의 속세를 떠나는 행위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작되는 수행의 과정은 마음, 즉 인식의 세계를 점차로 추상화시키고 단순화시켜 간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 어느 순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아마 모든 것이 추상화되고 단순화되면서 또한 모든 것을 포괄하여 인식하게 되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주관적인 체험이면서도 가장 일반성 있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체적인 진리의 체험이면서 아무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깨달음의 체험으로 만족하고 멈추어 버린다면 수행의 종교적 의미가 없어진다. 깨달음을 체험한 수행자는 산사 (山寺) 를 떠나서 중생을 제도 (濟度) 하기 위한 종교적 실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러한 종교적 실천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그러한 불교적 가르침을 경전화한 것이 팔만대장경으로 집대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추상적인 깨달음의 내용을 일상 언어적으로 설명하고 서술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 준다. 그러면서 또한 깨달음이라는 체험에 추상화되고 '압축된' 내용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것인가도 말해 준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뜻이며, 심지어는 팔만대장경에서 언급되지 못한 새로운 의미의 깨달음이 더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추상 예술이 필요로 하는 사유는 이러한 불교적 수행의 과정과 같다. 추상적인 표현이 구체적인 체험 내용을 담고 있음으로써 그런 풍부한 내용이 감상자의 체험으로 전달될 때 비로소 감동이 있는 예술적 체험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 자신이 종교적 수도자의 체험과 같은 심오한 체험을 하지 않으면 표현될 수 없는 작품의 내용이다. 작품 자체가 그런 체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면 감상자가 심오한 체험이나 감동을 받을 수 없다. 관람객이 없는 텅 빈 전시장을 보면 예술 작품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내용이 없는 그림, 아무런 감동이 없는 그림을 전시하면서도 무엇이 문제인가를 의식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추상 예술의 추상성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추상은 귀추논리가 적용된 추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귀추법적 개념화는 우리의 세계를 포괄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추상적으로 볼 수 있게 하면서 또한 상징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추상화된 개념을 다시 일상 언어적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데는 상징적 표현이 필요하다. 일상 언어적 표현 이상의 것을 전할 수 있는 상징적 표현이 필요하다. 상징적 의미를 전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정보 기능 또는 정보 능력에 관한 새로운 측면을 의미한다. 언어적 정보 기능 이전의 정보 능력을 언어적 정보 기능에 보완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도 언어화된 정보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적인 정보 기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능적 정보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자연적인 정보 기능 또는 자연과의 정보 기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언어적 정보 기능이 지배적이므로 상대적으로 자연적 · 본능적 정보 기능은 퇴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중에는 그런 자연적 정보 기능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 수행 과정에서처럼 언어적 정보 기능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적 정보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상징화된 정보는 언어적 정보가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사의 정보 내용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정보를 우리 인간은 특수한 자연물에서 얻고자 한다. 기이한 자연 현상에서 그러한 정보를 예감하고자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중요한 정보를 상징적으로 계시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자연적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특수한 자연물을 상징화하여 인간의 기원을 표현하기도 한다.
무속 신앙이나 점성술로 남아 있는 자연적 정보에 대한 믿음을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언어적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정보 내용이 전달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 해석 또는 특정한 사람의 해석을 참 정보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신빙성과 타당성의 문제가 생긴다. 미신적 믿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화와 미신적 상징화의 차이는 정보 내용의 진리 문제에 있다. 종교적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무속적 진리나 점성술적 진리를 말할 수 있느냐가 문제된다. 종교적 상징화의 진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종교적 사건이며, 종교적 기적이며, 종교적 신비의 체험이다. 그러한 종교적 체험의 현상을 개념화하고 추상화한 내용을 상징화하여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와 함께 상징적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귀추법적 개념화와 추상화를 바탕으로 한 상징화가 종교적 상징화의 진리를 보장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귀추법적 사유가 종교적 상징화의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는 끊임없이 정당화의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상징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도전받을 수 있다. 상징적 의미의 상실을 지적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종교적 상징화 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상징적 의미와 상징적 표현 방법에 의한 종교적 진리의 전달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의 특성이며, 종교적 영역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 기독교적인 초월주의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불교적 - 도가적 자연주의를 받아들이느냐라는 것은 존재론적 선택의 문제이므로 어느 쪽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존재론에 관한 한 종교적 진리는 가정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에 관해서는 진실성을 주장할 수 있고 신빙성을 주장할 수 있다. 체험적 믿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성한' '신령한' '거룩한' '성스러운' '신비로운' '숭고한' 등의 개념으로 표현하게 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적 표현은 초월주의든 자연주의든 상관 없이 공통된 종교적 표현이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어떤 존재론을 가정하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스피노자가 파문을 당해야만 했던 그 시대보다 지금은 그런 존재론적 선택이 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종교의 미래 역사는 존재론의 선택 문제를 더욱 문제시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통의 종교적 체험을 어떻게 상징화하여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 하면, 상징적 표현은 그 자체로써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의 심오함과 신비로움은 상징적 표현을 불가피하게 하지만, 그러한 상징화는 그 자체로서도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종교적 체험에 수반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가치 체험은 심미적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다양한 개념들 중에서 '숭고함' 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심미적 의미를 표현해 준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숭고한 아름다움' 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상징화가 아름다움의 가치를 수반하게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적 현상이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왜 자연은 아름다운 형상들을 만들어 내는지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왜 피조된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창조 작업이 끝난 후에야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종교적 상징화가 종교 건축, 종교 미술, 종교 음악, 종교 문학 등으로 표현되고 실현된다는 사실은 종교와 예술의 관계가 우연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모든 예술은 종교 예술로 시작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술적 추상화와 상징화가 공허한 내용으로 장식되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 예술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종교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적 진리를 내용으로 하지 않을 때도 종교적 심오함이나 종교적 숭고함에 비유될 수 있는 예술적 체험을 내용으로 상징화하는 것은 필요하다. 귀추법적 개념화와 추상화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상징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가상 공간 (cyberspace) 이라는 매체가 다양한 상징화를 가능하게 해 준다. 고목이나 바위와 같은 자연 공간의 대상을 상징화하는 것과는 다르게 가상 공간에서는 어떠한 상징물도 자유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 어떤 내용을 상징화하느냐에 상관 없이 다양한 상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상징화의 기술과 기교만으로도 놀랍고 새로운 상징물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가상적 상징화' 가 그대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이상한 나무뿌리 하나가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아 전시될 수 있는 것처럼, 가상 공간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상징물이 예술성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화와 추상화를 거쳐서 상징화되는 예술과 종교의 상징물과는 다르다. 귀추법적 사유의 조건이 충족된 상징화와 그렇지 못한 기술적 상징화의 차이이다.
가상 공간에서의 상징화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종교와 예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교적 진리나 예술적 진리와는 무관하게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상징화의 수준에 머물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장난과 재미로 받아들이는 경박함에 익숙하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상적 상징화의 역기능을 피하기 위해서는 귀추법적 개념화와 추상화를 통한 상징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귀추법적 사유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