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지식의 성장

 

인공지능의 철학 : 이초식, 고려대 출판부, 1993, Page 217~237

 

1. 기술의 세계와 '자연' 의 의미

2. 기술에의 존재론적 접근방식

3. 기술철학과 과학철학

 

 

1. 기술의 세계와 '자연' 의 의미

이제는 과학적 지식의 구조와 성장을 논한 데 이어 그 활용에 관한 철학 문제들을 논의할 차례이다. 현대의 기술 (technology) 은 과학지식을 활용함으로써 성립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에 최첨단 기술로 간주되는 인공지능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기술철학 (philosophy of technology) 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겠다.

현대생활의 특색은 과학지식을 활용한 기술에 크게 의존한다. 의식주 생활의 기본들이 모두 과학기술의 산물이며 교통통신을 비롯한 모든 생활환경이 기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미래사회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컴퓨터 기술과 정보산업의 사회가 될 것이므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근본적으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꼭 필요하다.

기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주석 : 기술철학에 관한 논의는 필자의 <이초식 (1979)>을 근간으로 했다.) 우선 어원을 살펴보면 영어의 'technology' 는 기능이나 기교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τέхυη' 에서 유래 도구들을 생산하는 일에 관여한다. 이런 기술은 과학이론보다 앞서 생겼다. (주석 : Jarvie (1974), p. 88.)  과학이론이 없었던 사회에서도 의식주나 교통에 관한 기술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가령, 식물학이나 농학의 이론이 발달하기 이전의 원시사회에서도 이미 식물재배의 초보적 형태가 발견된다. 그러나 기술의 어원과 발생이 과학이론과 관계 없었다고 해서, 현대의 기술 (技術, technology) 을 모두 기능 (技能, skill) 이나 기교 (技巧, crafts) 의 뜻으로만 풀이해서는 안된다. 아무런 이론도 필요없이 (theory-free) 반복 훈련만을 하는 것이 오늘의 기술은 아니다.

현대의 기술은 전극대적 기술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특색을 지닌다. 수공업중심 사회들에서, 가령, 짚신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어떤 성향처럼 생각되었고 과학이론이 별로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은 과학화됨에 따라 이론이 필요 (theory-laden) 해졌다. 뿐만 아니라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이른 바 우주개발, 핵개발, 게놈조사 등의 거대과학 (big science project science) 이 출현하여 기술의 집단화가 증대되고 있다. 중요한 과학기술의 연구일수록 특정한 개인의 직관적이고 천재적 재능에만 의존할 수 없고 사람들의 조직화된 협력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천재적 발명가의 개척자적 역할이 발명을 주도해 왔으나, 오늘날은 그러한 발명가들을 소규모로나 대규모로 집단화하고 이들의 합리적 힘을 규합하고 그들의 행위를 합리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마하면 인공지능을 비롯한 현대기술들은 대내적으로는 과학이론을 필수적으로 지니며 대외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합리적 조직화를 요망하게 되었다.

기술 자체가 변화했을 뿐 아니라 기술에 관한 철학적 물음의 대상과 가치도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달라져 왔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techne' 의 문제가 명시적으로 토의되었다. 그러나 중세에는 대체로 기술에 관한 암시적 비판에 그쳤다. 르네상스기와 계몽기에는 중세적 전통이 급진적으로 배격되고 근대과학과 산업화에 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모두 기술철학이 학문으로 확립되기 이전의 철학적 활동이다. 기술철학이 독자적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한 때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잡는다. 데사우어 (Friedrich Dessauer, 1881~1963) 는 기술철학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 Dessauer (1927) 는 기술철학의 원조로 꼽힌다.) 이러한 기술철학 형성기에 제기된 문제들이 재음미되고 한층 더 체계화된 때는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사회적 충격을 일으키는 1970년대 초로 잡는다. 특히 지난 30여 년 동안 정보산업이 사회변혁을 예고한 충격은 무척 큰 파장을 일으켰으므로, 인공지능의 철학은 기술철학의 핵심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면 기술의 세계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철학자 스콜리모브스키 (주석 : Skolimowski (1974) 참조.) 나 랩 (주석 : Rapp (1974) 참조.) 에 의하면 기술의 세계는 인공적 사실 (artifact) 로 규정된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잇는 그대로의 사실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힘에 의해 발명되고 창조된 세계라는 뜻이다. 기술의 활동세계는 이런 의미에서 순수과학의 활동세계와 구별된다. 과학의 전통적 이상에 의하면 순수과학자는 미리 규정된 목표를 갖지 않고 오직 놀라움과 호기심을 지닌 채 지적 관조를 한다. 순수과학의 본래 목적은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가령, 자연과학에서 이론들 자체는 엄격히 말해 그것을 적용하는 기술의 문제와는 무관하며, 오직 알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이론들의 주된 목표는 세계를 바르게 기술하여 이해하는 것이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연과학에서도 실험의 경우처럼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구성을 위한 것이지 세계의 개조를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통적 과학이 목표로 하는 진리는 실재론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진리대응설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기술적 활동은 시공적으로 한정된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며, 특정한 목표물과 관련된 목표추구나 가치추구의 활동이다. 어떤 특수한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선행요구들을 만족시키고 물적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인공적 세계의 구현이 기술의 궁극적 목적이다. 우리가 '인공적'이라는 말로 기술의 세계를 규정하고 '인공지능' 을 논할 때 철학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인공적인 것' 은 '자연적인 것' 과 대비되는 철학적 전통을 연상시켜서 때로는 상반되는 가치감정을 유발하고 그릇된 편견에 사로 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인공/자연의 구분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구획기준도 된다. 서양 철학은 근대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에서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개간하는데 치중하므로 '인공적' 이지만, 동양철학은 자연에 순응하고 천명에 복종하는 것을 존중하므로 자연과의 조화를 시도한다고 보아 '자연적'이라고 평한다. 이런 평가는 매우 일반화되어 있으며 때로는 자명한 진리처럼 전제되어 논의되기도 한다. 물론, ㅂ이컨 이래로 전개되어온 영국의 경험론이나 기술적 실천을 강조해온 현대 실용주의 철학들에서는 분명히 자연개발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들 철학이 서양철학을 대표한다고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사 강의에서는 소피스트의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전통보다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성주의 철학이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논해 왔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이 자연적이라는 논지는 도법자연 (道法自然)을 논하는 노장철학이나 만물에 편재한 불심 (佛心)을 따르고자 하는 불교철학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쉽게 수긍이 간다. 그러나 유교사상이 동양철학을 대표한다고 본다면 그것이 자연적이라는 점에 쉽게 동의할 수 없어 망설이게 된다. 천명 (天命) 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인능홍도 비도홍인 (人能弘道 非道弘人) 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의 도에 대한 수동적 복종보다도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점이 노장철학의 시각에서는 인위적 조작으로 보였을는지 모른다. 하여간 '동양철학 = 자연적' 이라는 등식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며 자명한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서양철학의 대표적 전통이 이성주의임을 수긍한다면 서양철학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철학 = 자연적' 이라는 등식이 우세해진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이성이라고 보고 이에 복종하는 생활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참다운 세계는 이성적이라고 보는 서양철학은 이성적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기술적 개간이나 윤리적 실천보다도 자연에 대한 지적 관조를 최고 경지로 꼽았고 이것은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순수과학적 탐구의 이상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서양철학 = 인위적' 이라는 등식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구분은 '서양철학 = 이론적, 동양철학 = 실천적' 이라는 구분과도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동일한 사람의 동일한 입장에서 이 두 가지 구분이 함께 있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이론적 관조가 어떻게 인위적이며 공맹철학에서처럼 실천적이면서 어떻게 인간의 능동성을 배제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좀더 분명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이란 말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어생활에서 보면 대체로 '자연적' 인 것은 좋은 것으로 평가되며 지켜야 할 규범으로 존중되는 데 반해, '인공적'이라고 하면 나쁜 것 또는 배격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이같은 우리의 반응은 인위적이라고 하는 기술이나 인공지능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문화권을 지배한 동양철학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페레 (Frederick Ferré) 는 영어의 'nature', 'natural' 이라는 용어를 우리 문화권에서의 생각과 흡사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주석 : Ferré (1988), pp. 28~29.)

'자연 1' 은 인간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고 '자연 2' 는 시공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집이나 교량 등은 자연 1이 아니지만 자연 2 이다. 과학기술은 초자연적 (supernatural) 인 것이 아니고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기술은 인공적이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자연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발휘하여 자연의 자료들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만들었다는 의미의 자연이므로 자연 2 에는 속하지만 자연 1 은 아니다. 자연 3 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체에 의해 발전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는 것은 자연 3 에 속한다. 그러면 인간의 지능 (human intelligence) 은 어떤 의미로 자연적인가? 그것은 바람이나 구름처럼 자연 2 의 일부인 동시에 외부의 간섭 없이 활동하므로 자연 3 이라고 하겠으나 인간적이므로 자연 1 이라고 보기 어려운 데서 혼란이 야기된다. 인간의 문화를 비롯해 기술은 인공적이기도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1 은 아니지만 자연 2 의 일부이며 자연 3 에 속하는 인간지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새들이 어린 새를 보호하기 위한 둥지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 3 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집을 짓는 것도 자연 3 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자연적 2 일 뿐 아니라 자연적 3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도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면, 자연적인 것은 좋고 인공적인 것은 나쁘다고 판단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의 것인가? 대체로 긍정적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를 충분히 실현한 자연 3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양의 대표적 철학들이 비슷하다. 자연적인 것이 아름다움과 조화의 극치이며 선한 것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공적인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 1 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위장하여 속인다든가 억지로 이치에 맞지 않게 꾸민다는 의미의 인위적 조작을 인공적인 것으로 지칭하기 때문일 것이다. 페레도 경고하듯이, 자연 1을 바꾸고 간섭하는 기술이 필연적으로 죄악이 되는 것만도 아니며 인간의 자연 3 의 산출을 위한 인구증가가 반드시 선으로만 여겨질 수도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을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짜임새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에 뿌리 깊이 파고든 개념적 혼란에서 비롯되는 독단적 편견들을 철저히 가려 내 제거해야 할 것이다.

2. 기술에의 존재론적 접근방식

현대기술을 과학적 지식의 활용으로 간주하는 과학철학적 접근방식에 입각해서 AI 구성의 철학을 논하여 보자. 또한, 기술을 응용과학이나 도구로 간주하는 견해에 반대하고 존재론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토대로 하여 기술철학을 전개한다. 자연의 의미세계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온 동서철학의 존재론들은 각기 기술철학의 세계관으로 전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 기술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데사우어 (Dessauer) 의 존재론적 접근방식을 그 대표 사례로서 검토하고, 존재론에 기반을 둔 자연주의적 접근과 인간학적 접근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AI 구성의 철학적 함축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데사우어는 현대 기술문명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기술부정적 주장들이 잘못된 기술관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오히려 기술에 의한 인간해방을 역설하였다. 그는 철학자들에게는 기술문제에 관심을 돌리도록 하는 한편, 기술자들에게는 자기반성과 철학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하였으며 일반 문화인들에게는 기술의 본질과 가치를 파악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에 의하면, 기술이 나타나는 양태는 다양하지만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통일적 기술관을 표방한다. 그는 칸트의 3대 비판이 자연과학을 비롯한 경험과학의 영역, 도덕률 및 의지의 영역, 미학과 합목적성의 영역에 대한 선천적 전제조건들을 비판하였으나 기술에 관한 비판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데사우어는 제 4 의 비판으로서 대상물을 창조하는 데 요구되는 형식의 선천적 가능성을 비판하고자 한다. 칸트는 경험의 가능성을 물었으나 자신은 사물의 가능성을 물음으로써 기술이 관여된 전체 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비판적 형이상학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이른바 제 4 영역이라는 신천지의 표적은 변화와 풍요에의 힘이며 항상 창조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제 4 영역에서는 칸트의 물자체와 같은 것에 직면한다. 이 물자체에 직면하여 사물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합목적성에 의거해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행한 성과가 발명이다. 발명이라는 행동으로서의 기술은 저 물자체에 동화하려는 범주들의 고리로 이해된다. 물자체는 인간의 정신을 통해 발명된 대상으로서 제 1 의 경험영역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데사우어는 플라톤적 이념실현의 사상을 채용하여 기술의 독립국을 이념의 감성적 실현의 세계로 간주하였다.

데사우어에게 기술의 핵심은 발명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특색은 발명하는 능력이 있다 (home inventer) 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기술을 제품생산과 연결시키지만 그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 새로운 제품이 출현하는 방법을 관찰해야 한다. 대량생산이 되는 복제나 재생산의 측면보다도, 예술가의 창작활동에서처럼, 기술적 제품을 하나의 작품으로서 창조해 내는 행위가 기술의 본질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외부적 특성은 우선 목적에 봉사하는 성질과 자연법칙에 따르는 성질, 기술적 창조의 내적 요인에 대하는 작업의 성질,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논한다.

기술적 작업의 목표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제시된다. 그러나 인간이 발명을 할 때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희망, 계획, 필요 등의 영역과 연결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창조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엄존하므로 이들을 통일하는 작업이 요망된다. 목표와 문제를 설정하고 방법을 선정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자연법칙처럼 인간이 발명의 수단을 취하기 위해 그것에 복종해야 하는 인간외적 제약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자연의 상태에서는 하늘을 날 수 없었으나 기술을 통해 그런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의 노예인 동시에 주인이다. 비행기의 발명은 고립된 창조의 개념이나 자연법칙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 사이의 내적 작업이 충족되어야 한다. 발명가의 작업이 자연법칙에 따른다고 할 때, 사물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들을 던져가면서, 우선 개념화하고 선별하며 결합하여 정렬한다. 그러나 발명가의 내적 작업에는 발명주체의 무의식적 참여와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외부적 힘과의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진정한 발명가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 힘을 적절히 조절해 간다.

기술에 관한 데사우어의 존재론적 접근 외에도 인간학적 접근들이 흥미있게 전개되고 있다. 존재론적 접근은 기술의 세계가 존재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 성질이 어떠한지를 규명하려고 하였으나, 인간학적 접근에서는 기술이 인간의 본질이나 실존과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겔렌 (A. Gehlen) 에 의하면 기술은 처음에 인간의 무의식적 생동력을 지닌 동기로부터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연과정에 대한 기술적 간섭은 합리적 사고나 유용성의 사례로만 간주할 수 없고 신체적 생활의 요구에 의해 창출된 압력의 불가피한 전략으로 본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결핍된 존재다. 적대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이 부여한 재능과 고정된 본능만으로는 부족하여 기술적 간섭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의 인간학적 접근은 근대 기술에 대한 주지주의 철학적 설명방식에 반기를 들고 기술적 행위의 비합리적 생의 요인들에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 특색이다. 근대기술의 주지주의적 기계관을 생철학적 시각에서 좀더 철저하게 비판한 사람은 멈폴드 (Mumfold) 다. 그는 근대 서구기술이 도구사용을 본질로 하는 인간 (homo faber) 의 산물로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인간이 마음을 사용하고 기호를 창조하며 자기를 통제하는 이성적 동물 (homo sapiens) 임을 기본전제로 한다. 둥지를 틀고 먹을 것을 저장하는 것이 기술이라면 동물들도 기술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은 단순한 효율적 도구들보다도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변형하며 기호적 표현들을 의미있게 다루고 언어적 상징에 의해 적절한 문화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기술과 구별된다. 멈폴드는 단순히 작업중심적인 것 (work-centered) 도 아니고 힘 집중적인 것 (power-centered) 도 아닌, 삶에 정초한 (life-oriented) 기술을 제창하며 이를 'bio-technics' (삶의 기술) 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두뇌가 커짐에 따라 남아도는 심리적 에너지의 압력을 받아 초기의 문화형태와 원시적 풍속을 만들어 냈으며 그 에너지가 언어도 창조했다고 본다. 도구나 기계사용도 같은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좁은 의미의 도구사용을 인간의 본질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5000여 년 전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된 삶에 정초한 삶의 기술이 근대 기술에 이르러 그 삶중심의 특성을 상실하게 된 데서 비극이 탄생한다. 삶의 기술은 인간의 다양한 기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인간을 돕는 다양한 공예기술 (polytechnics) 이다. 이에 비해 근대기술은 힘을 추구한다는 하나의 지배목적을 위해 인간과 우주의 물리적 힘을 개발하고 인간의 노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치중하는 단성기술 (monotechnics) 이다. 고대 스파르타나 페르샤의 군대조직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구축들에서 출현했던 바와 같은 기계적인 사회조직체가 등장하여 인간은 이른바 거대기계 (mega-machines) 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의 다양한 삶을 희생한 대가로 힘의 팽창을 추구한 결과 단성기술은 인간관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직화된 노동과 일치하지 않는 인간성은 억압하고, 유기적 환경과 인간집단으로부터 거대기계에 봉사하는 인간활동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으로부터 내린 처방은 저 단성기술이 초래한 비인간화를 극복하고 인간중심의 기술로 다시 전환시켜서 인간문화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힘과 능률추구의 일원화 기술을 인간의 다양한 의미 추구를 위해 다원화해야 한다.

AI 의 구성을 존재론적 기술관에 의거하여 검토해볼 때, 그것은 경험세계에서는 없었던 것, 그러면서도 경험적으로 있는 것들의 배후에서 가능적으로 존재했던 바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술에서 사물의 근원은 이념적 존재라는 플라톤적 존재론에 의하면 AI도 그 이념적 존재를 구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는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바위 속에 잠재하던 불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미 잠재하던 AI의 이념을 현실에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개발이나 컴퓨터의 각종 언어개발,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법칙과 자연법칙과 살현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각종 합목적적 원리들의 당위적 이념존재에 의거하여 가능적 존재들을 인간이 주체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데사우어의 존재론적 기술관은 AI 구성에 대한 훌륭한 해석이며, 우주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상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므로 그러한 형이상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기술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은 주지주의적 기술관이 지배해온 현대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다시금 기술이란 무엇이냐 하는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기술관에 의하면 기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기술의 가치와 의미는 기술 이외의 것을 지향하는 서열에 의해 규정된다. 가령, 마구의 제작에 관계되는 모든 기술들은 승마의 기술에 종속되고 또 승마의 기술과 모든 군사적 행동은 병법에 종속되며 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다른 기술들이 또 다른 기술들에 종속된다. 이처럼 기술들의 서열에서 종속되는 것은 종속하는 것보다 가치서열이 낮게 평가되며 기술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이므로 기술의 가치는 이차적인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학적 접근에 의하면 기술은 인간본질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고유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기술의 발휘 자체가 인간임을 실현해가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특히 현대의 거대기계와 단성기술이 초래한 인간성 말살의 측면은 신중히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겔렌이나 멈포드가 모델로 하는 기술은 전근대적 수공업의 기술이었으므로, 그것이 그대로 거대과학과 대규모 프로젝트 기술을 요망하는 현대기술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문화ㆍ분업화가 필수적이며 힘의 낭비를 막고 전체적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도 개인들간의 보람있는 기술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의 재편성이 필요하다. AI 구성에 관여된 모든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직화하면서도 우리는 이에 관여된 구성원들이 각기 성취의 보람을 찾도록 개별적 완성품을 배정하는 것도 삶에 정초한 기술을 구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기술철학과 과학철학

기술에 관한 인간학적 접근에서는 기술이 인간의 본질과 어떤 종류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접근방식들은 대체로 특정한 형이상학이나 존재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기술은 아무래도 현대 과학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으므로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긴밀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현대 기술철학의 재배적인 추세는 기술을 지식의 한 유형으로 보고 인식론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스콜리노브스키 (Skolinowski) 에 의하면 (주석 : Skolomowski (1974), pp. 72~85.) 기술철학은 기술을 인식론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적 지식의 구조, 목표, 원리들을 탐구한다. 그러나 분게 (Bunge) 는 (주석 : Bunge (1974), pp. 19~38.) 기술철학을 넓은 의미의 과학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페이블맨 (Feibleman) 은 (주석 : Feibleman (1983), pp. 33~41.) 기술철학이 과학철학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논하고 있다. 이렇듯 세부적 의견차이는 있으나, 현대에서 기술철학이 인식론이나 과학철학과 긴밀히 연결된 점을 공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페이블맨에 의하면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은 추구하는 목적을 근거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지식이며,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돈된 이론적 구성물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응용과학의 목표는 실천의 추구이며 실천을 위한 이론과 그 응용이 필요하다. 그는 구체적 우주개발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한다. 첫째는 중력법칙이나 달의 궤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고 둘째는 달에 도달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한 실천이론의 구성이다. 여기에는 우주선과 로켓의 크기 등이 논의된다. 그리고 셋째는 그와 같이 요구된 로켓을 실제로 구성하는 일이다. 이때 우주비행의 구체적 하드웨어를 창조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요컨대, 1961년 달 여행을 계획했고 1969년에 목표달성을 할 때까지의 기간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이므로 기술은 단순한 응용과학이 아니라는 논지이다.

그러나 기술을 응용과학으로 간주하는 분게도 과학이론과 기술이론은 분명히 구별되며 설명이나 예측 등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논하였다. 현대기술은 이론이 없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순수과학에서처럼 이론들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기술이론들 (technological theories)를 실재적 이론 (substantive theories) 과 조작적 이론 (operative theories) 으로 크게 구분한다. (주석 : Bunge (1974), pp. 21~23.) 실재적 기술이론은 과학이론들을 실제상황에 적용한 이론으로서, 예컨대, 유체역학을 응용한 비행이론 (theory of flight) 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언제나 그것에 상응하는 각종 과학이론을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해 조업적 기술이론들은 인간과 기계등의 복합체가 실제상황에 조업 (operations) 하는 데에 관여한다. 가령, 항로경영이론은 비행기 자체에 관여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와 인간의 복합체의 조업에 관련된 조업적 기술이론이다. 가치론, 의사결정론, 게임이론, O.R 기법 등은 조업상의 평가, 결정, 기획, 실행 등을 직접 다루는 조업이론들이다. 여기서는 그 이론들에 상응하는 과학이론들이 아직 없어서 상식이나 논리학· 수학 등의 형식과학이 원용되는 경우가 많다. 조업이론들이 채용하는 것은 실재적 기술의 지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의 방법론적 측면이다.

조업이론들의 목표는 인식적인 (cognitive) 것이 아니라 실천적 (practical) 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종의 행동이론 (theories of action) 으로서 과학의 다른 이론들과 공통성을 갖는다. 그 공통성을 분게는 다음 네 가지로 간추려 논하였다. (1) 조업이론은 과학이론들처럼 실재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실재를 이상화한 모델들에 관여한다. (2) 조업이론은 그 귀결로서 확률과 같은 이론적 개념을 채용하는 점이 과학이론과 흡사하다. (3) 조업이론과 과학이론은 다같이 경험적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근거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사상들을 추리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한다. (4) 조업이론은 과학이론들처럼 엄격한 의미는 아니지만 결국 경험적으로 검사가능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분게는 기술이론과 과학이론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실천의 시각을 취하면 기술이론이 순수과학의 이론들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것들은 이미 정해진 사상이나 사건들의 궤도를 만들거나 변경 또는 중지하기 위해 우리가 하여야 할 바를 발견하는 데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개념상의 의미로 보면 기술이론은 순수 과학처럼 깊이가 없다. 가령, 유용성이 주목적이고 진리의 인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전기기술자의 경우는 순수 물리학자들처럼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 전자설의 난점들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기술이론들은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진리의 문제를 도외시할 때가 있다. 물리학에서는 파동광학 (wave optics) 이 과학적으로 볼 때 광선광학 (ray optics) 보다 진리에 가깝다 하여 중히 여긴다. 그러나 광학기구를 제조하는 현대 광학산업의 기술에서는 오히려 광선광학이 광파광학보다 더 적절하다. 뿐만 아니라 산업의 실천문제에 파동광학을 적용시키면 오히려 기이한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과학연구가 어리석게도 생산의 직접 요구에만 적용된다면, 우리의 사고영역은 지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 갇힐 것이고 순수과학은 물론 응용과학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론을 구성하고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에 의거해 실재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일이다. 기술활동에서도 이론이 작용함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면 기술에서는 어떤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가? 순수과학에서는 대상세계에 관한 객관적 과학법칙 (scientific laws) 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이 주요과제이지만, 기술에서는 행동을 지도해 줄 기술적 규칙 (techno-logical rules) 의 구성과 활용을 주요과제로 삼는다. (주석 : 앞의 책, p. 29~33 참조.) 과학법칙은 실재세계의 변화를 기술하고 해석하며, 그 법칙이 잘된 것인지 못된 것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원리적으로 참 또는 거짓이라는 진리값으로 제시된다. 이에 반해 규칙들은 일종의 규범 (norms) 이기 때문에 기술적 (descriptive) 성질을 지닌 것이 아니라 지시적 (prescriptive) 이다. 규칙의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다. 규칙을 고안해 내고 지키고 위반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규칙은 진리치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율성 (efficiency) 에 따라 판정된다.

인간은 산을 밀어내고 강을 메우는 등 자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있으나, 자연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과학사를 보면 자연법칙들도 바뀌어 왔으나 그것은 객관적 세계의 법칙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규칙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은 인간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인간의 힘으로 규칙들을 바꿀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법칙과 규칙의 차이점을 무시할 때 많은 혼란이 야기된다.

규칙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분게는 이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논한다. 첫째는 행위의 규칙 (rules of action) 이다. 사회 도덕이나 법과 같은 규칙이 이에 속한다. 이런 규칙은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를 안정하게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기능을 한다. 둘째는 과학적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이른 바 전과학적 작업의 규칙 (rules of prescientific work) 이다. 생산 숙련공의 주먹구구식 규칙 (rules of thumb) 이나 기술적 제어가 되지 않은 실무 경험의 지식의 영역들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셋째는 기호의 규칙 (rules of sign) 으로서 구문론과 의미론 등의 규칙을 지칭한다. 이것은 기호를 만들고 사용하며 변형 및 해석하는 방법들을 지시해 준다. 넷째는 과학과 기술의 규칙 (rules of science and technology) 이다. 이 규칙들은 과학탐구와 기술활동의 규칙으로서 어떤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순수과학을 하거나 응용과학에 종사하거나 그 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술적 규칙들이 이에 속하며 그것은 현대의 특수한 생산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 되고 있다.

이런 규칙들의 본성이 무엇인가? 이것은 기술철학의 물음일 뿐 아니라 법철학, 도덕철학의 물음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 작업, 기호, 과학, 기술 등에 관한 많은 규칙들은 인간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개인적 주관이 제멋대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규칙들은 그것은 인정하고 채용하는 사람들의 어떤 공통된 의견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규칙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어떤 합의를 전제로 하는 규약 (convention) 의 성질을 갖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렇게 많은 규칙들을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식으로 합의했단 말인가? 국회에서 법률을 제정하듯이 일일이 회의를 소집했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반론들이 가능하며 실제로 우리는 그런 회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규칙들이 규약의 성질을 지녔다는 것은 그런 발생론적 접근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적 측면에서 제의된 것이다. 규칙의 제정 및 실행에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동의나 합의가 논리적으로 전제된다는 말이다. 이 논조는 사회가 계약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회계약설의 경우와 흡사하다.

우리는 여기서 합의와 합리를 구분해야 한다. 모든 규칙이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합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때때로 합의된 것들 중에는 불합리한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특히 위의 네 번째 과학과 기술의 규칙들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어떤 규칙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것은 그 규칙이 효율을 설명해줄 과학이론이나 법칙이 있다는 뜻이다. 가령, '자동차에 정기적으로 글리세린을 칠하라' 는 규칙은 '윤활유는 마찰에 의한 파손을 감소시킨다'는 법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근거있는 규칙이라고 하겠다. 규칙들이 경험적으로 유용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채택할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그 규칙이 '왜' 유용한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 규칙의 과학법칙적 근거를 마련하고 거꾸로 과학법칙들을 유용한 기술적 규칙으로 변형하도록 노력할 때, 전근대적 기능의 수준을 벗어나 현대 기술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우리가 규칙들이 유용한 까닭은 파악하고 그 까닭을 바탕으로 하여 보다 좋은 규칙으로 개선해 가기 위해서는 그 규칙들 밑에 숨겨진 법칙들을 밝혀내야 한다. 이리하여 현대 기술규칙들은 과학법칙들과 밀접히 연결되게 마련이다.

물론 과학법칙들에 의해 근거를 마련할 수 없는 규칙들 중에도 유용한 것이 많다. 가령, 웃사람에게 모자 벗고 절하는 규칙과 같은 것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규칙이 유용함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건대, 우리는 어떤 규칙이 유용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과학적 근거를 확보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규칙이 유용하다는 이유로서 그것에 의거한 행동이 성공했음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은 유용성을 입증할 때 매우 필요하긴 하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원시인들의 터부나 마술의식의 규칙들이 실생활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근거한 경우가 많으나 그렇다고 해서 터부나 마술이 유용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4' 자를 기피하는 우리의 인습적 규칙이 '죽을 사' 자라는 음의 일치에서 나왔고, 그것이 비록 병원 4층에 입원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실패를 근거로 했다 하더라도, 병원의 4층을 모두 5층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언제나 유용하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들과 관련하여 볼 때 기술철학자들은 유용성, 성패, 과학적 근거들의 연관성을 엄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과학법칙과 기술규칙의 성질이 다른 것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목표로 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를 활용하는 구조도 다르게 마련이다. 기술자는 세계를 관조하는 방관자가 아니며 지적 호기심에만 몰두하는 탐구자도 아니다. 그는 대상세계에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세계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실천가다. 그의 목적은 순수한 지식이 아니라 성공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기술자에게 지식은 목표가 아니라 목표실현을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지식이 목적인 과학자의 경우와 다르다. 과학자로서의 과학자는 지식이 쓸모 있건 없건 관계없이 오직 참된 지식만을 탐구해야 하지만, 지식이 수단이 되는 기술자에게는 아무리 참된 지식이라도 실무상의 목표실현에 도움을 못 주는 것은 배제한다. 가령, 어떤 사물의 정확한 측정치가 아무리 진리에 가깝다 하더라도 실무상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그보다 진리에서는 멀리 떠나 있는 근사치를 이용하는 것이 기술의 세계다.

이리하여 법칙과 규칙이 달랐던 것처럼 과학적 예측 (scientific prediction) 과 기술적 예상 (technological forecast) 도 구별된다. 분게는 예측과 예상의 전형적 형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함으로써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과학적 예측의 전형>

만약 x가 시간 t에 일어난다면 y는 확률 p로 시간 t'에 일어난다.

<기술적 예상의 전형>

만약 y가 확률 p로 시간 t'에 일어나게 하려면 x는 시간 t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시간 t는 시간 t' 보다 앞선 것이다. 과학적 예측은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일어난다면 앞으로 무엇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확률적 인과관계에 의한 예측인 데 비해, 기술적 예상은 확률적 목적과 수단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기술적 예상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목표하는 바를 선정할 필요가 있다. 여려가지 목표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며 그들의 실현가능성은 어떠한지를 검토하려 할 때 예상이 필요하다. 기술자는 목표를 선택한 다음에 그 목표와 관련된 미래사태가 됨 직한 것을 추정하는 예상을 한다. 예컨대, 기술자가 인공위성의 궤도를 예상하는 것은 과학자가 혜성의 궤도를 예측하는 것과는 다르다. 기술자의 예상은 목표달성의 수단이 되는 행동과 연결되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는 아마도 어떤 두 별의 충돌을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그 충돌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산림청 기술자가 산사태를 예상했다면 그 예상은 산사태를 막는 작업과 연결되고 그 결과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본래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결과는 그 예상의 반증사례로 볼 수 없을 것이다.가령, 어떤 경제상태가 일정기간 동안 현재의 상태대로 지속된다면 매상이 연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될 경우, 경영인은 본래의 예상에 맞도록 하기 위해 가격인하나 광고증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연초 예상이 싫증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기술적 예상은 과학적 예측을 검증 또는 반증하는 방식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기술적 예상은 적용되어온 규칙들의 효율검사 (efficiency test) 로써 평가된다.

공학, 의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등에서 기술적 예상은 바로 그 예상의 발표 자체가 변화의 요인이 되어 자기충족적 예상 (self-fulfilling forecast) 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파괴적 예상 (self-defeating forecast) 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술적 예상의 특성은 그것의 논리적 속성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상의 지식을 수용하는 사회의 행동패턴에 기인된 것이다. 그리하여 분게에 의하면 기술적 예상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과적으로 성과있는 예상의 논리를 분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상 속에 들어 있는 세 개의 수준부터 구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예상과 관련된 과학적 예측이 의존하고 있는 개념수준 (conceptual level), 다음에는 그 예측의 인식과 그 지식에 따라 반응하는 심리수준 (psychological level), 그리고 예측된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과학 외적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는 사회수준 (social level) 을 고려하여 기술적 예상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술적 예상은 과학적 예측을 수용하고 이를 실재적 기술이론과 조업적 기술이론으로 처리하고 선별된 목표를 지향하며 구체적 사회현실에서 실천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석 : 앞의 책, p.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