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발생

인간 :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것 : Ernst Peter Fischer 지음, 박규호 옮김, 들녘출판사, 2005 (원서 : Die Bildung des Menschen. Was die Naturwissenschaften über uns wissen), page : 339 ~ 408.

기억 예찬

망각에 대하여

기억의 단계

개념정의의 시도

기억의 장소

기억의 지속과 형식

기억의 흔적

기억의 화학

기억의 착각

무의식의 발견

양극성

발생학적 방법

의식의 문제

생각이란 무엇인가

준비전위

자유의지의 거부권

시간과 언어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초기 교부 敎父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 ~ 430) 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곧 나의 기억이다.

이 말은 지금의 내가 나인 것은 기억을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서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완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기억과 회상, 이것이 이제부터 다룰 주제이다.

이와 같은 우리 두뇌의 경이로운 능력을 기술하고 있는, 서양의 가장 오랜 문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억과 회상 De Memoria et Reminiscentia」이라는 글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뇌의 이 두 가지 능력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논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은 회상의 과정을 통해 체험된, 즉 현재로 끌어올려진 과거의 사건들을 다룬다. 이런 과거 사건의 추가 또는 의식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전달되고 생성된 인상들을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인상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은 (밀쳐둔, 수동적인)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내용을 (능동적인) 회상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하려면 시간이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로서 감각되는 시점에서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사건들 중 어떤 것들은 역사적 현실 안에서는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진행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정상적인 경우에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기억' 과 '기억하기' 는 정확히 말하면 별개의 개념이다. '기억' 은 기억하는 과정과 기억된 내용을 사용 (예를 들어 예전에 들었던 이름이나 이야기를 떠올리려는 필사적 노력) 하는 것까지 뜻할 뿐만 아니라 내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의식의 내용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기억은 기억하기와 기억된 것, 기억 속에서 찾는 행위와 거기서 이미 발견된 것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우리의 지식창고가 지닌 본연의 능력을 보여준다.

기억 예찬

기억은 전화번호나 축구선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하거나 시를 암송하는 능력 이상의 것이다 (현대 신경생물학은 어디서 어떻게 그런 능력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아직 주지 못하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단순한 문장 하나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 문장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문장의 첫 단어를 최소한 문장이 끝날 때까지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와 이해는 우리가 기억 안에서 끄집어내 사용하는 이른바 지식이라는 것에 의존되어 있다. 이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고란 머릿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고를 할 때 우리는 기억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자신이 의도하는 것과 결합시킨다.

최근에 독일 심리학자 바이너르트 Franz Weinert 는 사람들이 "인간의 사고능력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의미를 과소평가한다" 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바이너르트는 '지식과 사고' 의 결합관계를 규명하면서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구분하여 이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문장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첫 부분을 '단기적으로' 기억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이런 세부적 정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전체적 의미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를 우리는 아마도 다음 문장을 대하기 전에 이미 정리해놓았을 것이다). 강연을 들은 후 또는 글을 모두 읽은 후 중요한 것은 강연자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포괄적인 '메시지' 다. 이런 메시지는 (아마도) 청중이나 독자들의 머릿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오늘날 두뇌연구자들은 여기서 나타나는 뇌의 작용을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구분 (앞의 것은 단 몇 초 정도만 지속되지만 뒤의 것은 평생 지속된다) 뿐만 아니라 감각기억 sensory memory 을 통해서도 설명한다. 감각기억은 밀리세컨드의 범위에서 작용하는 기억능력으로 전광석화와도 같이 지각내용의 잔상 (에코) 을 포착한다. 그밖에도 두뇌연구자들은 작업기억 working memory 의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업기억이 담당하는 영역은 두 가지이다. 일부는 단어와 개념을 담당하고, 다른 일부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시공간적 현실의 지각을 담당한다. 작업기억을 통해 기억된 내용은 그에 딸린 '잡기장' sketch pad 에 기록된다.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 (지각) 이 개인의 주의와 관심 정도에 따라 먼저 단기기억에 저장된 뒤 다시 장기기억으로 이전될 거라는 단순한 가정은 오늘날 더 이상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는 다른 가정을 통해 보완된다. 여기와 그림 60 에 언급된 기능들이 어디서 어떻게 어떤 기관이나 세포 또는 분자의 차원에서 작용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 60 : 미국의 두뇌연구자 A. D. 배덜리 Baddeley 는 1990 년에 발표한 책 『휴먼메모리 Human Memory』에서 작업기억 개념을 도입했다. 그에 따르면 작업기억은 단어와 개념을 담당하는 부분 (오른쪽) 과 시공간에서의 감각적 지각을 담당하는 부분 (왼쪽) 으로 구분된다. 이들 두 단위는 그전까지 단기기억이라고 불리던 것을 포괄한다. 두 기억 영역의 협동작업은 중앙집행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루프와 잡기장은 그전까지 단기기억으로 요약되었던 것을 포괄한다.. 이것의 활동은 이제 '중앙집행기' 가 담당하는 두뇌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앙집행기는 지금 소개된 모델을 포함한 기억의 전 과정을 담당한다.

이 모델은 우리 인간의 기억과정에 적합하게 고안된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기억능력을 사용한다. 코끼리의 기억력은 특히 유명하다. 그밖에도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파리들이 냄새에 대한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구별하여 사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그들은 마취제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서 파리의 두 가지 기억이 분명하게 구별됨을 입증했다. 여기서 (후각의) 단기기억은 방해받지 않고 일정하게 사용되는 반면에 장기기억은 곧 사라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장기기억에는 다른 강점이 있다. 훈련을 통해서 장기기억을 확고하게 만들면 (파리들에게 냄새의 지각을 통해서 불쾌한 상황을 모면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번에는 단기기억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인간의 뇌에서 우리가 이제껏 모르고 있던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한 가지 보여주었다. 두 종류의 기억에 별개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장기기억은 단기기억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장기적으로 축적된 경험은 무엇이 '단기적으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한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구분은 심리학자 에빙하우스 Hermann Ebbinghaus 가 1885 년에 발표한 책 『기억에 관하여 Über das Gedäcbtnis』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에빙하우스는 임의의 알파벳 3 개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낱말조합들 (가령 HTZ, LAQ, VRE 등등) 로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에서 에빙하우스는 실험대상자들이 이미 한 번 본 목록을 재빨리 다시 보여주었을 때 첫 번째 때보다 더 빨리 기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에빙하우스는 우리가 무엇을 짧게 기억할 때와 지속적으로 기억할 때 머릿속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장기기억은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뇌의 용량이 평생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기억속에 담아둘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십 년 동안 TV 에서 중계된 모든 축구경기의 골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잇는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1970 년대에 이루어진 한 실험에서는 실험대상자에게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수만 개의 사진들을 한 장당 5 초씩 이틀 간격으로 두 번 보여주고 난 뒤 보여준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을 구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실험대상자는 아주 간단하게 보여준 사진들을 골라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기억용량에 단순한 양적 한계를 매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축구팬들은 뇌용량의 걱정 없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경기들을 모두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1960 년대 이후 등장한 진보적 교육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암기할 때 아이들의 기억용량이 조금씩 소모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들은 뇌에 창조적 사고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어진 재료가 없다면 사고력이 풍부해지는 것도 바랄 수 없다. 교양을 쌓는 데 필요한 것은 뇌 속의 자리가 아니라 흥미이고, 흥미는 예전에 읽어 머릿속에 기억된 텍스트를 통해서 유발된다. 인류 발달의 초기부터 기억은 지식을 쌓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였으며, 그것은 점차 글과 책을 통해서 촉진되었다. 기억의 용량은 많이 쓴다고 줄어드는 것이 절대로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것의 활력을 촉진하고 자극하는 일이다.

망각에 대하여

예전에 사람들은 암기한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 (Michel Montaigne, 1533 ~ 92) 가 한 말이다. 물론 머릿속에는 온갖 가능성들을 다 채워넣었지만 실제로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사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지만 (가령 그는 진공에서 빛이 움직이는 정확한 속도를 몰랐다) 일단 그것을 알고 난 뒤에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책들이 수백 년 전에 기억의 수고를 덜어주었다면 현재 우리는 새로운 기억장치와 대면하고 있다. 이 기억장치는 우리의 사용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저장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컴퓨터이다. 컴퓨터는 인간이 자신의 기억력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완전히 새로운 전제조건들을 만들어 냈다. 이와 관련하여 언어학자 바인리히 Harald Weinrich 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사실을 지적했다.

1980 년대 이 '기억 기계' 가 퍼지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독일어에는 하나의 새로운 표현이 출현하여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영어로 'forget it!' 에 해당하는 '잊어버려' 라는 표현이었다. 바인리히는 여기에 현사회의 '망각에 대한 높은 관용성' 이 드러나 있다고 보았다. 즉, 과거에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시선을 오직 앞으로만 향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어제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였던 그게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이 말을 통해 초대 독일수상은 오늘날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 '유쾌한 망각자 타입' 의 인간형을 독일사회에 도입했다.

망각을 의도적으로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제껏 실험실에서 망각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머리부상이나 전쟁체험 등을 통해서 발생하는 기억상실증에 대한 의학적 조사는 생화학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 記述的 문제라는 인상을 준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망각의 문제는 문화사가나 문예학자들에게 맡겨진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억의 풍경을 따라 진행하는 레테 (망각의 강) 의 흐름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고작 소실과정 또는 차단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기억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 몹시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기억의 단계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억에 대해서 주장했던 많은 사실들 (예를 들어 기억의 내용이 시간적으로뿐만 아니라 공간적 · 내용적으로도 분류가 된다는 주장) 은 지금까지도 두뇌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이 고대그리스의 철학자는 이런 작용이 우리의 머릿속 조직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머리는 몸의 열을 식히는 냉각장치이며, 사고 작용은 심장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비록 해부학적으로는 틀린 생각이지만 우리는 여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견해를 여기서 소개하는 이유는 과학적 차원 (신체기관의 해부학적 차원) 의 오류가 자동적으로 다른 차원에서의 오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분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신체기관들의 위치와 작용조차 혼동하는 사람도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매우 탁월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철학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은 신체적 차원을 뛰어넘어 기억을 더욱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기억이란 표현은 그 성격이 민족의 집단적 기억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하부의 유전학 단계에서 우리는 유전자의 기억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유전물질에서 정보들이 수집되고 저장되는 과정을 말한다. 유전자는 진화과정에서 생명에 유입된 정보들을 이와 같이 '기억' 하고 있어야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며 세대를 이어 생존할 수 있다.

그보다 한 단계 위 차원에서는 또한 세포의 기억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말을 다양한 대상에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0 년대에 미국인 헤이플릭 Leonard Hayflick 은 실험실에서 배양된 세포들이 임의로 계속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암세포로 바뀌는 것은 예외다) 대략 50 번을 넘기면 분열을 종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헤이플릭 리미트' Hayflick Limit 가 가능한 물질적 근거는 곧 밝혀졌다. 그것은 염색체의 말단에 있는 부분인 '텔로미어' telomere 때문이었다. 염색체 말단의 텔로미어는 간단한 생화학적 원인으로 인해 분열을 거듭할수록 점점 짧아지는데, 세포의 분열 횟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이 텔로미어의 길이를 우리는 세포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의 개념은 그밖에도 많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인간의 면역계에 속한 세포들이 병균의 침투에 맞서 항체 antibody 의 형성을 돕는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예방접종을 통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예방접종의 목표는 면역계의 세포들로 하여금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성 병인의 침투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방접종을 하면 면역계에 의해 '기억세포들' 이 만들어지면서 몸에 병균이 침투했을 때 재빨리 반응하여 병균의 작용을 봉쇄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준다.

생물학자들 중에는 면역계를 제 2 의 뇌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견해는 면역계에만 모두 10¹² 개가 넘는 세포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 세포들을 모두 합치면 무게가 1 킬로그램에 육박하는데, 이는 두개골 속의 신경조직과 거의 맞먹는 양이다. 면역생물학자들은 면역계의 작용을 설명할 때 그것이 마치 두뇌를 지닌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가령 그들은 면역계의 분자나 세포들이 자기 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단백질을 '인식' 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기억' 할 수 있고, '자기' self 와 '비자기' nonself 를 구별하는 법을 '학습' 하는 등등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언급한 면역계의 특성들은 인간이라 불리는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에는 전혀 불필요한 사치품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를 위한 기본 장비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의 작동방식은 실제로 진부한 기계적 설명을 통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고 작용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개념정의의 시도

기억 덕분에 우리는 획득한 지식을 모아, 장래에 대비해 보관해둘 수 있다.

이것은 19 세기 초에 영국인 스튜어트 Dugald Stewart 가 내린 '기억' memory 에 대한 정의이다. 이 정의는 유럽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스튜어트의 정의는 면역계에도 간단히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독일의 귀족 폰 파인아이글레 Gregor von Feinaigle 가 1812 년 『기억의 신기술 Die neue Kunst des Gedäcbtnisses』에서 기술한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폰 파인아이글레는 기억을 물품창고에 비유했다. 이런 창고에서 중요한 것은 물품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정리해놓음으로써 필요할 때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폰 파인아이글레의 비유는 도서관의 비유와 함께 오늘날에도 자주 사용된다. 이런 비유가 이처럼 오랫동안 통용되는 것은 그것이 이해를 쉽게 해주는 듯한 허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사용자는 청자 聽者 로부터 즉각적인 이해를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물품이 쌓인 진열장에 대한 상상은 기억의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서 기억하는 사람 자신은 물품창고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물품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다. 물품창고나 도서관 모델에는 기억은 있지만 화상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는 바로 회상, 즉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기억은 생물학적 · 신경학적 방법을 통해 조사하고 측정할 수 있다. 그리고 회상은 주체가 자신의 기억에 담겨 있는 것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한 내용과 우리에게 발생한 일들을 모두 보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상을 통해 어떤 것들은 확고히 하고 다른 것들은 흘려보낸다. 스위스의 작가 프리시 Max Frisch 가 말했듯이, 결국 우리는 일대기를 꾸며내고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노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을까?

기억의 장소

우리는 이제 책보다는 컴퓨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와 함께 기억에 대한 규정도 약간 바뀌었다. 기억이 한때 도서관이었다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완전히 그렇게 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자료들은 하드디스크나 CD - ROM 에 저장된다. 여기서 기억력 (회상능력) 은 PC 가 제공하는 검색프로그램으로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과학자와 작가들은 기억의 실행능력을 비트나 바이트와 같이 정보처리기술에서 유래하는 단위들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데 익숙해졌다. 1970 년대에는 두뇌가 1 비트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의 뉴런이 필요한지를 계산하는 실험이 유행하기도 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또한 사람이 집중하여 책을 읽을 때 1 초에 몇 비트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계산하기도 했다. 답은 약 40 비트였다.

이런 경향에 대해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플로라이 Ernst Florey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견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뇌연구자, 신경학자, 인공지능 (AI) 연구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그것이 잘못된 견해임은 (책읽기의 예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글자 수가 단어의 의미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미 입증되지 않았는가? 컴퓨터에서 '하느님' 이란 단어는 '먼지입자' 라는 단어보다도 더 적은 저장용량을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독서는 그렇게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집중하여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읽은 글자와 단어의 의미를 의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어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기억에서 끄집어낸 내용과 비교하면서 지각된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우리의 뇌가 정보가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작업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과학자들은 이 의미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듯 보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어진 자료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기억력도 더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1801194726101946 이란 수열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이것은 식은 죽 먹기다. 필자와 필자 아내의 생일을 나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차원이 다양하게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해서 정보는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다. 실제로 회상은 본질적으로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회상의 내용들은 단순히 어떤 창고 또는 저장소에서 불러내어 사용한 뒤에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다시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가 회상하는 내용들은 새롭게 바뀐다.

기억을 도서관과 컴퓨터 저장장치에 비유하는 것은 모두 난센스지만, 그럼에도 그런 비유들에는 우리의 상식을 충족시키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런 생각들이 모두 어떤 장소를 (책이나 디스켓이 들어 있든)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그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아직껏 그런 장소를 구체적으로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때 사람들은 뇌안에서 '메모리아' memoria, 즉 기억의 장소를 찾아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두뇌연구자들은 이런 위치를 정확하게 규정하려는 희망을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이들은 또한 더 이상 책이나 컴퓨터를 기억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고 찾으려 한다. 예를 들어 기억은 네덜란드의 작가 노테봄 Cees Nooteboom 이 말했던 것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가서 눕는 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의식 Rituale』)." 아니면 울프 Virginia Woolf 가 『출항 The Voyage Out』에서 기술했듯이, "기억은 바늘을 안팎으로, 위아래로, 이리저리로 꿰며 바느질을 하는 침모와 같다."

그림 63 : 16 세기에 묘사된 '메모리아' 의 위치. 그림에는 영혼의 작용을 정리하기 위해 뇌 연구에 몰두했던 성직자의 노력이 판화로 표현되어 있다. 앞쪽으로 환상 (판타지아 fantasia) 과 공상 (이마기나티비 inaginativa) 이 보이고, 기억 (메모리아 memoria) 은 머리 뒤쪽에 있다.

물론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인지적 능력은 물질적 기초를 갖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기억 (지난여름 휴가나 어제 본 영화) 에 해당하는 뇌의 상태를 생화학적 또는 생물리학적 방식으로 대표하는 분자나 세포, 뇌영역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해서 진행시키다 보면 결국 뇌에 대한 방금 언급한 지식도 나의 기억에 속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의 기관인 두뇌가 기억 안에 어떤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기억이 두뇌 안에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플로라이는 "'기억' 이란 주제는 인간의 지성에 부과된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라고 단언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문제는 기억이 과학과 철학의 모든 영역을 건드린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의식이나 지식 같은 개념과 시간의 차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기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억은 나의 현재 안에 과거로 들어가는 입구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플로라이는 기억의 장소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노련한 신경생물학자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신경의학의 선구자 두 명을 소개했다. 그들은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펜필드 Wilder Penfield 와 재스퍼 Herbert Jasper 였다. 1950 년대에 두 의사는 중증 간질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뇌피질에서 고통스런 자극이 발생하는 영역을 제거하는 치료법을 시술했다. 수술에 앞서 펜필드와 재스퍼는 먼저 제거하고자 하는 신경조직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신경조직에 자극이 가해지면 환자들이 예전의 체험을 현재의 것으로 느낀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두 의사는 해당부위의 뉴런을 미약한 전기충격을 통해 활성화시켜보았다. 그랬더니 환자들은 과거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그때 있었던 일들을 현재의 체험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는 손상된 뉴런을 자극하자 그가 몇 년 전에 살았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심지어는 친구가 눈을 털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고, 그가 들어올 때 바깥의 찬 공기도 함께 실내로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이 환자에게는 너무나 생생해서 그는 자신이 어느 방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는 수술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두 명의 의사가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뇌 (정확히 말하면 대뇌피질) 의 다양한 영역에 가해진 자극은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치 전기충격에 의해 기억의 다양한 저장소들이 열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기억이 특정 위치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극이 가해졌던 영역을 수술을 통해 제거한 뒤에도 동일한 기억이 다른 영역에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뇌가 지식의 일반적인 (총체적인) 관리자라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경험은 동시에 뇌의 도처에 자리잡을 수 있다. 뇌 전체가 기억인 것이다.

기억의 지속과 형식

기억의 정확한 장소를 지정할 수 없다면 기억이 발생하는 정확한 시점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회상은 옛 체험의 현재화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서는 시간의 3 가지 구분이 모두 만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 Confessions』11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다. 시간은 지나간 것의 현재, 지금 있는 것의 현재, 다가올 것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시간은 일종의 영혼의 삼위일체이며, 나는 그것을 다르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나간 것의 현재는 기억이고, 지금 있는 것은 찰나이며, 다가올 것의 현재는 기대이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의식적 기억이 지닌 시간적 범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 '범위' 라는 표현은 '지속' 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의 '지속' (durée) 에 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 Henri Bergson 은 그의 책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에서 명쾌하게 다룬 바 있다.

베르그송의 생각들이 현대의 두뇌연구와 관련하여 비상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심리학자 푀펠 Ernst Pöppel 을 통해서였다. 푀펠은 『의식의 한계 Grenzen des Bewusstseins』에서 우리가 현재로서 체험하는 시간은 3 초 동안 지속된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숫자 3 은 순전히 우연적이며 시간의 세 가지 구분이나 기독교적 삼위일체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푀펠은 시 운율의 길이나 음악 소절 (가령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의 현악 5 중주 '숭어') 의 지속시간도 이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푀펠은 우리의 뇌가 뛰어넘을 수 없는 '주관적 현재의 시간적 상위 한계' 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위에서 언급한 기억의 능력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재생산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슈베르트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거나 휘파람으로 불 수 있으며, 괴테의 시를 몇 구절 암송할 수 있다. 두뇌 연구자들은 이런 것을 '서술적 declarative 기억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우리가 머릿속에 보관한 내용을 처리하는 방식을 4 가지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위와 같이 서술적으로 표현되는 기억 이외에도 자전거를 타거나 골프를 치는 등 우리에게 일정한 능력을 부여하는 '절차적' procedural 기억이 있다 (주석 :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절차적 기억은 '노하오' know - how, 서술적 기억은 '노왔' know - what 이 된다. 여기서 '노하우' 는 이미 일상용어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속하는 운동과정은 한번 배우고 나면 자동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육체적 능력으로 표현되는 기억과 사실에 대한 지식 또는 시를 암기하는 능력 사이의 구분은 무엇보다도 '무의식' 과 '의식' 의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줄줄 암송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의식적인 (즉, 명시적인 explicit)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전거 등을 탈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가능하다. 두뇌연구자들에 따르면 무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이런 (함축적인 implicit) 기억에는 감감적 경험에서 나오는 기본인식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바닷물은 짜다', '얼음은 차다', '나뭇잎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고양이는 야옹 하고 운다' 와 같은 문장들이 이런 종류의 기본인식에 속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세계의 공통적 기본인식이나 이전에 지각된 상황 (자극패턴) 과 다르게 지각할 때만 그것을 의식한다 (가령 고양이가 멍멍 짖거나 바닷물이 달콤할 때).

두뇌연구자들은 영어식 표현인 '프라이밍' 이 이런 가벼운 기억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필자는 별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라이밍' 은 이미 일상용어로 자리잡은 '타이밍' timing 과 비슷한 뜻으로 시간적으로 서로 잘 어울리는 행동방식이나 사건을 지시하는 말이다. 무의식적 지각내용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타이밍' 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널리 쓰일 것 같지는 않다.

그림 64 : 오늘날의 두뇌연구는 기억을 4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먼저 일화적 episodic 기억이 있다. 일화적 기억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생활의 중요한 사건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결혼식 날이나 지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때의 기억이 그런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사람들은 그때 날씨가 어땠는지까지 자세히 기억한다. 일화적 기억은 기억내용을 저장하고 유지하고 불러내기 위해서 (림프계에서 대뇌피질까지) 뇌의 여러 부분을 필요로 한다. 서술적 기억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기억으로서 우리에게 세계 대한 일반적 지식을 제공한다.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시험에 통과하고, 계산문제를 풀고, 문장을 올바르게 구성할 수 있다. 절차적 기억은 운동능력과 기계적 행동능력의 습득을 가능하게 해준다. 절차적 기억은 소뇌에 있는 뇌기저핵 basal ganglia 이라 불리는 세포를 사용한다. 이 세포는 또한 '프라이밍' priming 노력에도 기여한다. 프라이밍은 기억의 4 번째 형태로서 이미 익숙한 자극패턴이나 비슷하게 진행되는 경험을 (예를 들어 호텔방으오 들어가거나 해변에 도착했을 때) 잘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과학은 '대칭' 에 유별나게 집착한다. 그 때문에 과학자들은 두 번째 무의식적 기억에 대응하는 두 번째 의식적 기억을 제시한다. 이 기억에서는 입학, 파티참석 등과 같은 개인적 체험과 그에 따른 감정이 주로 다루어진다. 이런 이유로 이 기억에는 '일화적'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의학 보고에 나와 있듯이 이 4 가지 형태의 기억이 모두 소실될 수가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거나, 전혀 다른 사람들을 대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우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이 바뀌면 우리도 다른 사람이 된다.

때로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이미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런 기이한 현상을 과학자들은 '데자뷰 déjà - vu 체험' 이라고 부른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의 감성적 평가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초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미 이런 현상 (왠지 어떤 사람이나 주변경치가 낯익은 듯이 다가오고, 방금 경험한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이 이미 있는 듯이 느껴지며, 그와 동시에 이런 감정이 적절치 못하고 우리를 오류로 이끈다는 느낌도 든다) 을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잘못된 기억' falsae memoriae 이라고 표현했다.

한때 독일에서도 새로운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 느끼는 이 현상을 '기억착각', '기억오류', '재인식오류' 와 같은 개념들로 표현했지만 이런 모순적 체험의 원인을 규명하지는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의학적 치료를 요하는 장애가 아니며 주의력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익숙함의 원인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과학자들은 일화적 기억의 연구를 통해서 이것이 착각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억내용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인상이 근거 없음을 밝히면 데자뷰 체험은 곧 사라진다. 체계적이고 성실하게 비교를 해보면 결국 즉흥적 인상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기억의 흔적

기억력은 생명의 차원에서 어떤 일을 수행하는가? 오늘날 과학자들은 기억의 작용과정과 인과성을 세부적으로 연구할 때 세포 내부의 분자에서부터 관찰을 시작한다. 두뇌연구자들이 기억의 메커니즘을 이해했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거기서 활동하는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전적 · 화학적 분석을 통해) 파악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신경계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세포의 전체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수많은 세포 내 구성요소들을 알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적 개념들로는 시냅스 synapse, 전달물질 transmitter, 장기증강 long - term - potentiation 등을 꼽을 수 있다. 과학자들의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기억의 형성' 이 뇌에 흔적을 남기며 이를 생화학적 (또는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추적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평소 자신의 기억을 추적하는 일이 잦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억의 흔적에 대한 이런 생각은 독일의 심리학자 세몬 Richard Semon 의 1 백 년이나 된 글에도 등장한다. 1904 년 『유기적 대사의 보존원칙으로서의 기억 Die Mneme als erbaltendes Prinzip』에서 세몬은 '엔그램' engram, 즉 기억흔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엔그램은 외부적 자극에 의해 발생한 변화가 신경조직에 남아있는 것을 뜻한다. 세몬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뇌에 '기록' 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머릿속에 우리 자신과는 별도의 기록자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림 65 : 캐나다의 심리학자 헵 Donald Hebb 은 1949 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두 개의 뉴런이 가능한 한 동시에 활성화되도록 둘 사이의 시냅스를 변화시키는 것이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a). 이렇게 작용이 강화된 시냅스를 통과하는 신경신호의 소통이 바로 '기억흔적' 의 일부로 생각된다. 헵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신경생물학의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경신호의 소통은 그밖에도 시냅스틈 앞에 있는 뉴런들의 도움을 받아 생겨나기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절 뉴런이라 불리는 이 뉴런들은 또한 전달물질 (세로토닌) 과 함께 작용한다.

그림 66 : 장기증강 (long - term - potentiation, LTP) 으로 표현되는 기억현상의 분자적 모델. 시냅스에서 방출된 전달물질인 글루탐산염이 NMDA 수용체로 이동하여 그것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세포막에는 칼륨이 드나드는 통로가 열린다. 이 상태에서 또 다른 신호가 도착하면 수용체는 또 다른 통로를 열어서 이번에는 칼슘을 통과시킨다. 칼슘은 글루탐산염의 재방출 때 전보다 더 많은 나트륨 (염) 을 통과시킴으로써 LTP 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하면, 세포는 똑같은 자극에 더 강하게 반응하며, 이런 강화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림 67 : 위에서 제시된 설명은 너무 학문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무언가를 학습하고 저장하기 위해서 개체는 어떤 일을 하는가 이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두뇌이다 (a). 더 정확히 말하면 두뇌 속의 신경조직과 그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개별적 세포의 특성이다 (b).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인 시냅스에 시선을 집중시켜보면 (c). 이것의 능력이 그곳에 있는 분자들에 기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d).

세몬은 인간이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다시 말해서 자극에 대한 반응을 훈련하고 개선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신경신호가 뇌 속 복잡한 신경덤불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기억흔적들 중 하나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억흔적들의 총합이다.

세몬이 20 세기 초에 개략적으로 생각했던 내용을 헵 Donald Hebb 은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정교하게 다듬었다. 헵은 신경세포들이 시냅스를 매개로 서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9 년 그는 이 접합부위에서 기억흔적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증거로 시냅스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변화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이 변화는 시냅스에 있는 2 개의 뉴런이 동시에 흥분할 때 발생하며, 이런 변화가 생겨난 뒤에는 두 뉴런 사이의 신호전달이 훨씬 쉽게 이루어진다. 정보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주 지나다니는 길을 마련한다. 이와 같은 '소통' facilitation 과 그에 속한 '헵 - 시냅스' 는 그후 실험을 통해서 그 존재가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자적 차원의 분석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대부분의 연구는 아직 인간의 뇌가 아니라 아플리시아라는 바다민달팽이의 조그만 신경조직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노벨의학상에 빛나는 두뇌 연구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캔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곧 인간의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약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캔들의 이 알약은 노화로 둔화된 시냅스의 분자적 메커니즘에 작용하여 기능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한다.

민달팽이에게 가능하다면 인간에게도 가능할 수 있다. 우리의 신경계에도 헵 - 시냅스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헵 - 시냅스는 해마라 불리는 뇌 영역에 있다. 이곳에서 글루탐산염이라 불리는 단순한 전달물질을 통해서 작용하는 뉴런들 사이의 접합부가 활동한다. 이곳에 도착한 신경충격은 먼저 글루탐산염을 방출시킨다. 그러면 이 화학적 신호물질은 시냅스틈을 가로질러 이웃한 뉴런의 수용체로 이동한다. 이와 같은 연결 작용은 한편으로는 세포막에 있는 분자적 통로를 열어 신경신호를 이웃뉴런에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전달물질 (2 차 전달자 second messenger) 을 활성화시켜 신호전달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런 빠른 화학반응과 세포 차원의 전달과정에서 기억흔적이 만들어진다고 말하려면, 이곳의 시냅스가 한번 활성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전보다 훨씬 쉽게 흥분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다시 말해서 신경신호가 더 빨리 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 길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이어지는가는 기억전문가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세포들의 이런 반응이 인간 뇌의 해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1970 년대 초반에 알려졌다. 장기증강 (LTP) 이라는 표현도 이때 생겨났다.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밝혀진 부분은 글루탐산염 수용체와 함께 작용하는 시냅스들이다. 뇌에는 이 수용체 외에도 다른 많은 수용체들이 있다. 뇌의 수용체들은 각각 어떤 물질과 결합하는가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N - 메틸 - D - 아스파라긴산염 (N - methyl - D - aspartate, NMDA) 과 결합하는 수용체이다. 이 NMDA 수용체는 뇌에 적절한 자극이 가해졌을 때 글루탐산염과 결합하여 나트륨이 통과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다음 단계에서 벌어진다. 방금 언급한 흥분기 동안에 또 신경충격이 발생하여 글루탐산염이 새로 도착하면 NMDA 수용체는 또 다른 통로를 여는데, 이곳으로 통과하는 것은 나트륨이 아니라 칼슘이다. 이 칼슘이온의 흐름은 막의 특성을 변화시켜 나중에 글루탐산염이 다시 도착했을 때 나트륨의 일차적 흐름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준다. 다시 말하면, 해당 시냅스들이 훨씬 쉽게 흥분하게 되므로 기억내용에 대한 탐색이 더 빠르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이런 결합이 일정기간 이상 (시간, 날, 주일) 지속되므로 과학자들은 여기에 '장기 long - term'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이 장기증강에 대한 분자적 차원의 설명이다.

"Just say NO"

이것이 사실인가? 이로써 정말 장기증강 (LTP) 의 작용에 대한 분자적 차원의 설명이 모두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다만 그것의 한 가지 작용이 설명되었을 뿐인가? 기억의 작용을 분자의 작용에 환원시키는 이런 방식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1990 년대에 들어 몇 가지 문제점이 확인되었을 때 자신들의 견해가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글루탐산염 수용체의 작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세포의 흥분속도를 높이는 LTP 의 작용이 매우 미세한, 또 다른 분자의 움직임과도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분자는 질소 (N) 와 산소 (O) 의 두 원소로 이루어진 질산이었다. 질산은 화학식 NO 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재미있게도 부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 와 모양이 같다.

"Just say NO." 이것은 미국의 과학전문잡지 <사이언스 Science> 가 NO 를 1992 년을 대표하는 분자로 선정하면서 붙인 제목이다. 선정 이유는 이 분자의 발견이 시냅스의 메커니즘을 단순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들을 차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LTP 의 작용은 NO 가 흥분된 글루탐산염과는 반대 방향으로, 즉 신경충격이 도착하는 시냅스로 이동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NO 는 전달물질이 쉽게 방출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NO 는 흥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능력 덕분에 최근 들어 이 작은 분자는 아주 유명해졌다. NO 는 생물학적 전달물질로서 우리의 신체작용에도 투입되는데, 그 신체작용이란 다름 아닌 남성의 발기이다.

이럴 때 NO 는 축복의 단어이지만 "Oh No!" 라는 외침은 또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질산은 축복이 아니라 몸에 해로운 유해물질인 산업가스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자연의 작용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많으면 죽음을 부르는 것이 적을 땐 생명에 훌륭하게 기여한다.

하지만 NO 자체는 우리에게는 지엽적인 주제에 불과하다. 혹시 이 주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주라시 Carl Djerassi 가 1998 년에 발표한 소설 『질산 NO』을 읽어보기 바란다. 다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로 돌아가자. 그것은 우리가 LTP 를 포괄적으로 이해했는지 여부와 이것이 과연 기억 흔적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는가이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흥분된 전달물질이 쉽게 방출되도록 도와주는 역행성 전달자 질산 NO 뿐만 아니라, 통로를 열고 이온들을 이동시켜 주는 단백질의 활성화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초파리의 돌연변이 중에는 정상적인 초파리에 비해서 학습내용의 보관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 돌연변이들에는 '멍청이' 라는 다소 모욕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이 멍청이 초파리들에서는 방금 언급한 단백질의 활성화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단백질이 기억의 형성에 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곧장 기억을 위한 특수한 유전자가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장기증강의 발생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실제로 있고 또 그것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도 있다. 하지만 이 단백질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경학자들은 이제까지 기술한 LTP 의 메커니즘이 기억의 발생을 기술하는 모델로서 타당하다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기억은 생화학적으로 (해마 안에) 일정한 위치를 갖게 되지만 (이런 위치는 신경학적으로는 별로 가능해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신경학자들은 이런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LTP 와 함께 기억흔적을 발견했다는 이들의 확신은 수많은 들쥐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들쥐를 미로에 집어넣고 길을 찾아가도록 훈련시켰다. 이 실험에서 그들은 들쥐의 뇌에 나타나는 LTP 의 작용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마속의 세포들을 파괴하거나 LTP 의 생화학적 메커니즘을 억제하자 들쥐들은 학습한 내용을 잊어버리거나 아예 기억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를 나타냈다. 뇌의 이 부분이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담당한다는 것은 오늘날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에 속한다 (하지만 장소에 대한 기억이 곧 기억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직업적인 이유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택시운전사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해마가 훨씬 더 크다.

문제는 LTP 의 생화학적 과정이 기억을 위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극이 풍부하지 못한 실험실에서 성장하여 원래의 생존환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민달팽이와 들쥐를 대상으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데서 찾았다. 들쥐를 철장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게 하자 점차 장기증강이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LTP 로 알려진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변화가 사실은 실험실의 생활이 만들어낸 인위적 변화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런 변화에 대한 생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계산을 하고 주변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뇌의 메커니즘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기억의 화학

기억에 대한 모든 논의에는 학습의 개념이 개입된다. 이때 학습이란 동물이나 사람이 새로운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이, 비슷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던 이전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한다. 외상을 학습과정에 의해 변형된 행동이 표출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기억은 이 두 가지 특성, 즉 학습과 회상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체가 경험을 쌓을 때 다음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뉴런에서 벌어지는 과정과 뇌구조의 가변성으로 가소성 plasticity 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앞의 것을 보완하는 견고성의 측면으로서 안정성 stability 이라고 부르며 특이성 specificity 을 지닌다. 경험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두 번째 측면에 집중되어왔다. 기억에 대한 분자 차원의 연구에서 뇌의 가변성에 대한 관찰이 가능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그중에는 벌레에게 먼저 무엇인가를 학습시킨 뒤 그것을 갈아서 같은 종의 벌레에게 먹이는 실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앞의 벌레가 학습한 내용이 다른 벌레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만약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났다면 사람들은 학습의 화학적 성격이 입증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정말로 이 실험이 성공했다면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그들이 교수를 먹어치우는 사태도 생겼을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실험 결과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이제 생화학자들은 기억을 좀더 정교하고 합리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실험이 항상 그렇듯이 수많은 성과와 더불어 그보다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무엇인가를 배웠을 때 학습자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분자생물학자 로즈 Steven Rose 는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무척이나 세심하게 병아리를 연구했다. 그는 병아리의 학습능력을 '수동적 회피' 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병아리들은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무언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 땅에 떨어진 알갱이들을 맹렬하게 쪼기 시작한다. 이때 사람들은 병아리 앞에 한 번은 물에, 또 한번은 독성은 없지만 무척 쓴 물질인 메틸안트라닐레이트 methylantranilate 에 담갔던 알갱이들을 떨어뜨려 주었다. 쓴 알갱이를 먹은 병아리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더 이상 그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병아리는 쓴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 병아리의 뇌에는 어떤 생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을까? 과학자들은 여기서 근육운동이나 흥분과 같이 학습에 기여하는 프로세스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특수한 변화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 결과 병아리의 뇌에서는 NMDA 수용체와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활성단백질이 작용하는 2 개의 영역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기억의 분자를 관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병아리의 기억은 곧이어 더 놀라운 활동을 보여주었다. 알갱이를 쫄 때 방금 언급한 뇌 영역의 활동이 극단적으로 증가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동물이 알갱이를 쫄 때 왜 뇌의 전기적 활동이 60 퍼센트나 증가했을까?

이들 두 영역이 뇌의 좌우에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에는 왼쪽 반구의 장애만 학습을 방해하고 다른 경우에는 오른쪽 반구의 장애만 학습을 방해한다는 사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첫 번째 경우는 훈련 '이전' 에, 두 번째 경우는 훈련 '이후' 에 장애가 나타날 때만 학습을 방해했다. 실험에서 학습을 방해하는 조합을 찾아내 병아리의 학습능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자 했을 때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 경우에도 병아리가 여전히 학습능력을 보였던 것이다. 기억은 예상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전혀 다른 장소로 옮겨갔음에 틀림없었다. 옮겨간 장소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기억의 착각

기억은 실험실에서만 (찾고자 하는 객체로서) 우리를 착각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찾는 주체로서) 우리를 오류로 이끈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 전혀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심각한 장애나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의 상황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두뇌를 가지고도 기억에 착오를 일으킨다고 심리학자 헬 Wolfgang Hell 은 말한다. 물론 이 심리학자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그의 기억이 완전히 믿을 만하다는 전제를 한다.

한번은 유명한 심리학자가 사망한 해를 놓고 두 명의 교수가 내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 그가 죽은 것은 1940 년대의 어느 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한 사람은 그 심리학자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었다. 다른 사람은 잊을 수 없는 개인적 경험이 있었다. 그의 박사학위 시험이 그 교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연기되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들으셨어요? B 교수가 돌아가셨대요' 라는 말을 했고 그는 그 말을 마치 오늘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누가 옳은지 내기를 했다. 승자를 가리는 것은 간단했다.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B 교수에 대한 추도사를 찾아보았다. 개인적 체험을 맹신했던 교수가 틀렸다. 하지만 그는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명명백백한 정보조차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노라고 단언했다. 이렇게 그의 기억을 바로잡는 데 끼어듦으로써 나 역시 그의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법정에서 목격자 증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들은 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분명하게 뒷받침해준다.

눈으로 직접 본 내용에 근거한, 절대적으로 생생한 기억도 실제 사건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기억은 간단히 틀릴 수 있다. 자기 기억이 정말로 옳다고 강조하는 주관적 확신은 내용의 신빙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기억의 착각은 내부적으로는 알코올이나 약물 같은 수많은 원인들에 의해 생겨나며, 외부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하나는 떠올리고자 하는 기억흔적이 또 다른 기억흔적과 겹치는 것이다. 이때 다른 기억흔적은 대개 문제의 사건이 있은 직후에 발생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교통사고의 목격자가 된 어떤 여자가 곧이어 자기 애인이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 여자에게는 조금전에 목격한 자동차 사고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기대할 수 없다. 특히 경찰이 자동차의 번호라든가 교통표지판의 위치같이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내용을 묻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 나쁘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사후 정보의 오도' 라고 부른다. 이것은 정보에 감정적 내용이나 개인적 의미가 담겼을 때 특히 강력하게 작용한다.

기억의 두 번째 왜곡은 과거의 사건을 재현할 때 어떤 확고한 관점을 고수하면서 여기에 근거해 부적절하게 중요한 사실과 중요하지 않는 사실을 임의로 구분하려 할 때 쉽게 발생한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문화적 착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주제가 되어왔다. 우리는 이런 기억의 왜곡을 스스로를 대상으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민족의 동화를 읽은 뒤에 그것을 다시 이야기해보라. 1932 년에 이미 영국의 심리학자 F. C. 바틀렛 Bartlett 은 기억에 관한 자신의 책 『리멤버링 remembering』에서 유럽인들이 에스키모의 동화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 에스키모 특유의 문화가 어떻게 희석되는지 확인했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들이 물개를 잡으러 갈 때 타는 카누는 보트로 대체되는 식이었다.

당시에 바틀렛은 기억이 수동적 현상이 아니라 능동적 구성이라는 생각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이런 능동적 구성을 흔히 시적 인식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수많은 기억흔적 또는 기억내용들을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맥락에 맞추어 결합시킨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회상을 통해 떠올린 별개의 이야기들을 마치 거기에 어떤 연관성이나 맥락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이야기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수용자가 된다.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기억에서 가져온 원료로 만들어지지만, 머릿속의 또 다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곳은 내가, 즉 나의 자아가 존재하는 곳이다. 나의 자아는, 적어도 내게 주어진 관점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의 통일적 과정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떠들어대는 수많은 개별적인 이야기들 이외에 우리 모두가 포함되고 또 만들어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역사이다. 이런 하나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문화 속에 자리잡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다수의 개별적인 '역사들' 을 기술했다. '하나의 역사' 에 대한 생각은 19 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와 함께 역사는 역사가가 과거로부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때 역사가는 자료실, 도서관 등의 물질적 기억이나 사실 fact 을 재료로 사용한다. 역사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서술자의 발명품이다. 물론 역사의 서술자는 완전히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고 사실에 의거해야 한다. 하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이런 사실들이 역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오직 거부권만을 행사한다. 역사가는 이런 사실의 거부권을 통해 무의미하거나 허황된 변종들을 인식하여 솎아낸다.

잠시 후 우리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거부권을 다시 한 번 활용하게 될 것이다.

무의식의 발견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것은 자신의 의식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용 가능한 (한때 사용했고 현재 대기 중인) 내용에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의식에는 없지만 언제든지 의식으로 불러낼 수 있는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주석 : 의식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ncience' 에는 'con - scientia', 즉 '동반 지식' 또는 '이미 알고 있음' 이라는 라틴어 어원의 의미가 드러나 있다. 즉, 의식은 지식과 관련이 있다. 즉,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머릿속은 의식으로 전환되어 현재에 작용되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무의식적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체험하는 모든 순간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잠재적으로 뇌 안에 축적한 전체 내용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의 내부보다는 의식의 외부나 주변에 훨씬 더 많은 내용들이 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양적으로 뇌의 도메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문을 던진다. 과학과 인문학이 이렇게 엄청난 지식의 보고에 주목하기까지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마침내 무의식의 영역으로 진입한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19 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최초로 정신분석학을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뇌의 무의식적 작용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에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밝은' 측면 이외에 거기에서 벗어난 '어두운' 측면도 있다는 생각은 최소한 1800 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당시는 음악, 미술, 문학을 모두 아우르는 낭만주의적 사조가 강력하게 발흥하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낭만주의가 가장 융성하던 시기는 1790 ~ 1840 년이다. 낭만주의 Romanticism 는 소설 roman 이나 영웅담 romance 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런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는 그 이전의, 이성에 중점을 둔 계몽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대했다. 낭만주의의 어두운 면은 계몽주의의 밝고 명쾌한 생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다소 모순되게 들리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과학자들은 이성의 한계를 경험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결코 비이성적 태도가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출발해보면 이런 태도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낭만주의의 대표자들은 개인의 운명이 이성에 근거하는 보편적 자연법칙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개인의 삶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며 어떤 합리적 통제에서도 벗어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불합리한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런 생각이 합리적 수단을 통해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합리적 방법을 끝까지 고수하다 보면 결국 불합리성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런 사고방식을 한번 계속 고수해보자.

의식적 연구는 우리를 무의식과 마주치게 했다. 또 가시적 자연은 그뒤에 비가시적 영역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의 기본사고 중 하나이다. 이런 생각의 대표자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눈이 있다고 말한다. '밝은 것' 을 볼 수 있는 외적인 눈 이외에 '어두운 것' 을 볼 수 있는 내적인 눈이 한 쌍 더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외적인 눈은 개인에게 속한 것으로 오직 머리가 향한 방향만 볼 수 있다면, 내적인 눈은 모든 인간에게 속한 것으로서 모두가 보는 것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부와 외부 또는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의 구분을 우리는 양극성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런 사고방식을 통해서 철학적 차원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험과학의 차원에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 리터 (Johann Wilhelm Ritter, 1776 ~ 1810) 는 이런 방식으로 가시광선 이외에 비가시광선이 존재하리란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이 생각은 결국 이중의 결과물로 나타났다. 리터의 비가시광선은 빛의 파장이 가시광선보다 크냐 아니면 작으냐에 따라 적외선 또는 자외선으로 불린다. 가시광선과 비가시광선은 모두 태양에서 나온다.

양극성의 개념은 괴테에게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괴테는 자신에게 낭만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결코 칭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탐구할 수 있는 것은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은 경탄하라" 는 괴테의 유명한 말은 감성적 자연예찬과 이성적 자연탐구의 낭만주의적 조합을 정확히 표현해주고 있다.

이런 생각은 그후 플랑크 Max Planck 와 보어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들에 의해 분명한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20 세기 초에 이들은 일상적 실재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원자의 실재를 입증할 수 있었다. 원자의 극미한 차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성적 능력 이외에, 오류에 빠지고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과감하게 이성의 한계에 부딪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 당시에 플랑크와 보여는 자신들에게는 탐구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는 용기와 탐구할 수 없는 것에는 조용히 경탄을 보내는 겸손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양극성

감정, 예찬, 비합리성 등과 같은 낭만주의의 수식어들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더 중요한 것을 양극성의 개념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무의식적 사고에 대한 관념이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이 개념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괴테 시대의 무의식은, 그보다 100 년 뒤 프로이트가 그려낸 것처럼 떨쳐버리고 싶은 지나간 기억을 처리하는 쓰레기통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무의식에 담겨 있는 것은 지나간 것의 잔해가 아니라 다가올 것의 씨앗이었다. 그것은 의식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인식되는 표현형식과 상징들의 보고 寶庫 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런 무의식은 꿈이나 영감 등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된다. 낭만주의의 무의식은 개인적으로 주어진, 없애버리거나 억압하고 싶은 기억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여기에는 오히려 인간의 상상력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요소들이 담겨 있다. 이것들은 기호와 개념의 형태로 우리에게 의식될 수 있다. 우리가 의도적인 노력 (사유) 을 통해 그것을 얻고자 애쓴다면 말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주로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면, 무의식이라는 개념에는 인류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할 집단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것은 아마도 우주 안에 우리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소망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의식은 우주의 보이지 않는 생명 속에 뿌리내린 인간의 근간이다.

이것은 정신의학자 엘렌버거 Henry Ellenberger 가 『무의식의 발견 The Discovery of the Unconscious』에서 했던 말이다. 엘렌버거는 낭만주의적 사고와 융 C. G. Jung 심리학의 인접성을 지적했다. 융은 무의식으로부터 우리의 인식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형 archetype 이라 표현했다. 예를 들어 케플러는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원형적 상들이 있으며, 자연의 진행과정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원형적 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바 있다. 이때 과학자가 자기 내부로부터 얻는 이런 원형적 상은 외부 세계로부터 지각된 상들과 일치해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일치의 과정인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케플러는 우리의 인식능력이 원형의 관념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다. 19 세기가 낳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위대한 물리학자 맥스웰 Clerk Maxwell 도 자신에게서 이런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맥스웰은 1870 년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느낌에는, 내 안이 있는 내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관을 바꾸어놓는다. 자신을 합리적으로 제어하는 자율적 존재는 이제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내부의 힘들에 의해 조종되는 비합리적인 개체로 바뀐다. 이런 생각은 또한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 의 관심을 끌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비합리적인 힘들을 충동으로 규정했다 (자기보존충동과 번식충동). 1819 년에 출간된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는데, 이 책은 그후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46 년에는 의사이자 화가인 카루스 (Carl Gustav Carus, 1789 ~ 1869) 의 책 『정신 Psyche』이 발표되었다. 여기서 카루스는 정신의 발달사를 기술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정의했다. 그것은 낭만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한 심리학이었다. 카루스는 심리학의 과제를 정신이 밤의 측면에서 낮의 측면으로 무의식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단계들을 규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카루스는 인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신의 발달과정을 기술했다. 우선 우리는 어머니의 난자 안에 '원형세포' 로 존재한다. 그 다음 수정을 통해서 '스스로 형성하는 무의식' 이 생겨난다. 이 무의식은 기관의 성장과 기능을 돌본다. 무의식은 차차 의식으로 바뀐다. 잠을 잘 때 의식은 무의식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형성 작용을 계속 수행한다.

발생학적 방법

끊임없이 주장들이 제기되었지만, 그 검증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정신세계를 세포분열처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낭만주의적' 생물학이 발전되지 못한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래에도 이런 종류의 생명과학이 생겨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바람직하고 또 필요하다면 말이다. 이런 견해의 근거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생물학의 궁극적 목표는 '생명의 생성' 을 이해하는 것이란 사실에 있다. '생명의 생성' 은 노벨상을 수상한 뉘슬라인 - 폴하르트 Christiane Nüsslein - Volhard 가 발표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생명의 생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낭만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때 처음으로 '발생학적 방법' 에 대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을 유전자에서 출발하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접근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유전자라는 단위에 대해서는 카루스나 괴테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발생학적 요인과 생성의 문제에 주목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세계를 양극성 속에서 관찰하고 사물의 원형이나 근원현상에 질문을 던지는 낭만주의적 방법 덕분에 과학자는 현상의 기원과 그 생성과정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 이라는 관념은 밤과 낮, 의식과 무의식 같은 양극성의 관념과 함께 변형 metamorphosis 의 문제를 다룰 수 잇게 해주었다. 일자 - 者 가 타자 他者 와 결합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국 변형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탄생, 변형, 완성의 문제를 발생학적 방법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발생학적 방법은 비단 생물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과학문들이 세부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문학에는 성장소설이라는 장르가 있고, 심리학자들은 개체화 individuation (개체화란 내부 인성의 발견, 즉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나에서 자아로의 발전을 뜻한다) 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생물학은 배아발생을 탐구한다. 이런 학문분야의 대표자들은 모두 자연과학적 교양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중요한 것은 관게와 변형의 법칙을 꾸준히 탐구하는 일이며, 우리는 오늘날까지 이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의식의 문제

무의식과는 달리 의식은 따로 규명될 필요가 없다. 가령 누군가가 무엇을 의식한다거나 자기 책임을 의식하고 행동한다고 말할 때, 아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몇 초 후에는 어떤가? 조금 전에 말하고 생각한 내용은 이미 다른 장소로 옮겨져서 '호출' 을 기다리는 상태가 된다. 그래도 의식은 게속해서 새로 만들어져야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곧 끊임없는 의식화 또는 의식형성의 과정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지속적인 생성 중에 있으며 아직 일반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에 의식의 오랜 문제가 있다. 의식의 실재에는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다양한 문제점들이 얽혀 있는데 여기서는 생물학에 속하는 것들만 살펴보도록 한다.

뇌 속의 신경학적 과정들은 우리가 의식으로서 체험하는 감성의 내적 상태를 어떻게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자극이 도착하는 것과 그것이 의식에 의해 경험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결합이 발생하는가? 의식과 결합된 신경계의 프로세스들은 그렇지 못한 프로세스들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 곧바로 문학적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만다. 그 이유는 우선 의식이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깨어 있을 때, 깨어날 때, 잠들 때, 꿈을 꿀 때,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각각 다른 형태의 의식을 지닌다. 의식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예는 그 밖에도 많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의식의 근원을 규명하는 작업이 항상 철학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의식의 인과적 요인과 상관적 요인은 세심하게 구별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의 비경험적 논의가 중요한 까닭은, 의식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모든 두뇌 안에서 작용하지만 오직 하나의 주체인 '나' 만이 그것의 실제적 형태와 특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내가 나의 기쁨을 어떻게 느끼고, 나의 고통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는 오직 '나' 만이 알 수 있다. 이른바 '퀄리아' qualia 라고 표현되는 이런 느낌은 실제로 반복 가능한 (재생산될 수 있는) 사실만을 다루는 학문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의 기쁨이나 고통은 일회적이다.그러므로 의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퀼리아' 와 같은 민가만 감성의 내적 특성을 어떤 비밀스럽고 불가해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뇌의 의식 활동은 오히려 무언가를 인식하게 해줌과 동시에 스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낭만주의가 강조했듯이 무언가는 항상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서 인간을 유하는 비밀이 세계를 탄생시킨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어느 시대나 너무나 신기해서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끄는 대상은 항상 존재했다. (죽은) 물질이 생명으로 변하고, 그것이 또 계속해서 분열한다는 사실이 불가해한 수수께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생명이 없는 화학 물질에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기 위해 '생명력' 이라는 개념이 제시되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런 생명력을 끌어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명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해답이 이미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생명의 수수께끼가 예전에 비해 많이 풀린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생명이 생겨나는 과정과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 훨씬 더 풍부한 개념들을 갖게 된 덕택이다. 낭만주의적 양극성의 맥락에서 옛 수수께끼를 풀면 새로운 비밀이 출현하고 아마도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 예전에 과학자들에게 신비감을 주었던 세포분열은 이제 이중나선의 복제라는 새로운 신비로 바뀌었다. 우리는 아직도 어떻게 4 개의 단순한 (밋밋하고 평평한) 구성요소로부터 분자건축물의 '걸작' 이 만들어지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우리는 DNA 의 각 부분들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지닌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그 모든 놀라움을 뒤로 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과감하게 나아간다.

물론 저명한 두뇌연구자들 중에도 이중나선의 발견으로 '유전의 신비가 단숨에 밝혀졌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석 : 코흐 Christof Koch 가 2004 년 2 월 20 일자 <F. A. Z.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의 문예란에 발표한 에세이 「우리는 좀비가 아니다」참조.). 이들은 '의식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최근에 발표된 책 『생각이란 무엇인가? What is Thought?』는 정신발달에 대한 연구가 유전자 증식에 대한 연구보다 길고 힘겨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의 주제는 2 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발표된 유명한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 Was ist Leben?』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리학자 슈뢰딩거 Erwin Schrödinger 의 저술이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물학의 아웃사이더로서, 생물학자들이 그들의 중심대상을 좀더 잘 이해하고 훗날 이중나선 발견으로까지 이어질 성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가 해명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는 컴퓨터공학자 바움 Eric Baum 의 저술이다. 그도 슈뢰딩거처럼 아웃사이더로서 생물학자들이 무엇을 해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바움은 뇌 속의 정신이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각은 보기, 듣기, 냄새 맡기와 같은 특수한 과제를 담당하는 하위단위들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듈구조는 유전자 (DNA) 에 의해 만들어지며, 유전자는 진화를 통해 이런 구조를 발전시켜나간다. 바움은 또한 뇌의 과제가 세계의 표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결국 우리는 사고기관은 그것의 담지자인 지식인, 즉 학자들의 활동방식과 유사하게 활동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인간의 장기인 모방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기관으로부터 그들의 행동방식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의 사고기관은 가능한 한 간소하게 세계를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최소한의 재구성을 통해서 파악하려 한다.

컴퓨터와 프로그래머도 (DNA 를 제외하면) 이와 비슷한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바움은 한 가지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 그는 브라헤 (Tycho Brahe, 1546 ~ 1601) 에서 케플러로의 이행 과정을 정신의 진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브라헤가 16 세기 말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모은 화성의 위치 자료들을 가지고 케플러는 행성의 운행에 관한 멋진 법칙을 만들어냈다. 케플러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천체의 움직임에 질서를 부여했다. 중추신경계와 같은 정보처리 조직에 의식과 의미가 생겨나는 과정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뇌가 고도의 함축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서술하고 그로부터 의미 있는 내용이 도출되는 방식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뇌의 활동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을 간과한다 (가령 뇌의 직관적 능력과 부정확한 신호의 처리 등등). '생명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대한 슈뢰딩거의 답은 이미 오래 전에 불충분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유전자와 단백질, 정보와 물질대사, 신호전환과 자동조절시스템, 인식과 적응 등의 작용에 대한 다른 많은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 중 의식이나 사고와 관련된 부분을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들과 비교해보면, 오늘날의 대답들이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과 지식이 필요하리란 점을 깨닫게 된다.

의식의 문제를 둘러싼 학문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대학에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한 적잖은 과학자들이 이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사람들은 의식이 마침내 빅토리아시대에 '섹스' 가 처했던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누구나 섹스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감히 터놓고 말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의식을 지니고 있는 줄 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많은 미숙한 선구자들이 등장하여 조율되지 않은 불협화음들을 쏟아낸다.

신경생물학자나 신경철학자들 중에는 의식이 뇌에서 (창발성 emergence 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의식이 마치 눈이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일종의 '뇌의 지각' 이라고 말한다 (선험성이 내재성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은 기존의 (서구적) 두뇌과학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뇌의 완전히 다른 측면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생명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의식은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의식이란 신경생물학적 사실로 소급될 수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새로운 제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 이런 상황은, 의식의 수수께끼를 신경의 문제를 다룰 때와 같은 방식으로 풀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신경계의 경우, 최근 과학자들은 더 높은 차원에 자리잡은 특성을 그보다 아래에 있는 구성요소들의 특성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뉴런들 중 몇 가지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때 뉴런의 활동에 대한 설명은 이온이 세포막을 통과하여 이동하고, 그 결과 신경전달물질이 건너편의 수용체를 찾아가는 등등의 과정을 기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전체과정이 이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복잡한 것도 아니다. 밑에서부터 위로, 즉 원자에서 분자를 거쳐 세포와 조직으로 차원을 높여가며 머릿속 덩어리의 작용을 설명하는 뇌의 생리학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신경생물학자 샹제 Jean - Pierre Changeux 가 최근 자신의 저술에서 주장했던 '진실의 생리학' 도 존재할까? 같은 제목의 책에서 샹제는 데카르트가 4 백여 년 전에 이미 인식한 바 있는 생명의 각 차원들을 차례로 다루어나갔다. 그의 작업은 (수용체와 다른 여러 분자들을 지닌) 뉴런의 차원에서 출발하여 그가 하고 있는 인식과 탐구의 차원에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샹제는 자신이 학문적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세포 차원의 역동성에 불과한 것으로 어떤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모든 컴퓨터가 궁극적으로 칩의 궤도를 달리는 전자들의 움직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여 워드프로세서와 같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프로그래머들이 각각 다른 가능성들을 제시했지만, 이것이 모두 똑같은 메커니즘 (하위 차원) 에 기초하여 똑같은 결과 (상위 차원) 를 얻어낼 수도 있다. 컴퓨터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의 타당성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뇌를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준비전위

샹제는 유전자 이후에 작용하는 후성적 epigenetic 메커니즘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는 타당한 생각이다. 게놈은 뉴런에 자연선택의 결과로 얻어진 자발적 시냅스 결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틀을 제시할 뿐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런 시각을 흔히 뉴런적 다윈주의라 부르곤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생명의 형성과정 일반에 관한 진화론적 이념을 신체 내부의 각 기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그대로 대입시키는 것은 두 중 어느 한 가지 문제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윈의 이론에 기대어 이들은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인식의 능력을 낮은 차원의 생리학적 과정으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이와는 별도로 생물학자들은 행명의 어떤 특성을 인식했을 때 그것이 진화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의 철학자 설 John R. Searle 은 이와 관련하여 "의식의 진화적 기능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진지한 생물학적 문제가 되려면 "우리가 걷고, 달리고, 앉고, 먹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고, 번식하고, 아이를 기르고,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음식을 구하고, 위험을 피하고, 곡식을 재배하고, 집을 짓는 등등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건 어떤 진화적 기능을 지니는가?" 라는 구체적인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경우 이 모든 활동 (과 그밖에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수없이 많은 활동들) 은 의식적으로 실행된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면, '의식' 은 생명의 다른 모든 측면들로부터 고립된 어떤 별개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높은 차원의 생명체들이 자기 생명의 근본적 활동을 실행해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의식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와 같이 실제적인 문제에 다시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준비전위' readiness potential 라는 특이한 현상을 관찰하게 된다. 이 현상은 어떤 행동을 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뇌전도 (EEG : electroencephalogram) 측정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1960 년대 이후부터 언급되었다. '준비전위' 는 행동이 시작되기 이미 1 초 전쯤에 두뇌 속 전기적 압력장의 변화를 통해 관측된다. 이런 사실은 먼저 행동을 위한 우리의 의식적 결정이 언제 내려지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시점이 준비전위가 관측된 시점보다 나중이라면 이번에는 그런 의식적 결정이 도대체 누구에 의해서 내려지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자동적으로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 번째 질문, 즉 뇌가 이미 의식적 결정에 앞서 활성화되어 행동을 유도한다면 우리가 과연 자유의지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리벳 Benjamin Libet 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몰두했다. 초기실험에서 리벳은 1 ~ 12 까지의 숫자가 적힌 원판을 활용했다. 원판에 달려 있는 바늘을 기준으로 원판이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 초였다. 리벳은 원판을 돌린 후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바늘의 위치를 말하라고 실험대상자들에게 요구했다 (가령 '3 과 4 사이' 또는 '7 바로 뒤' 등등). 진술 시점의 정확도는 0.2 초 정도에서 결정되었다. 이 장치는 19 세기의 독일 심리학자 분트 Wilhelm Wundt 의 발명품으로서 '분트의 시계' 로 불린다.

1980 년대에 이루어진 리벳의 실험 결과는 분명했다. 준비전위는 0.5 초 이전에 발생하지만 의식의 결정은 대략 0.2 초 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뇌가 결정을 내릴 준비를 시작한 지 거의 0.5 초 이상이 지난 뒤였다.

먼저 준비가 이루어진 뒤에 이 사실이 의식되며, 마지막으로 행동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했다고 믿을 때조차도 뇌는 이미 그보다 0.5 초 전에 활동을 개시한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의지의 시초에는 무의식적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자유의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림 68 : 리벳의 '준비전위' 측정. 더 정확히 말해서 의식의 지각 知覺 측정. 행동은 0 으로 표시된 시점에서 발생한다. 시점을 정확히 결정하기 위해서 피부자극에 대한 실험대상자의 반응을 먼저 조사했다. 피부에 가해진 자극은 표에 -0.02 초로 표시된 시점에서 체험된다. 실험대상자들이 제시된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의식적 결정을 내리는 시점은 -0.2 초, 즉 행동을 시작하기 10 분의 2 초 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준비가 나타나는 시점은 간단한 행동의 경우는 0.5 초 전, 복잡한 행동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 이전인 행동개시 1 초 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결정은 의식적 결정이 내려지기 훨씬 전에 이미 이루어진다.

자유의지의 거부권

리벳의 실험결과는 1990 년 이후에도 거듭하여 그 확실성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리벳 자신은 '자유의지' 를 거부권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옹호하고자 했다. '거부권' 은 '생명' 으로까지 소급된다.

의식은 뇌가 활성화된 이후에야 생겨난다. 하지만 이 역시 아직 행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일이다. 리벳은 그 사이에 놓인 0.2 초의 시간이면 의식의 결정을 내려 전체 행동을 중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리벳은 이를 자유의지의 거부권이라 불렀다. 의식 (나) 은 행동을 시작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있는 그 무엇 (이드) 은 결정을 내려 행동이 실행되지 않게 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가능성들 중에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의지는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적 법칙과 유사하게 작용한다.

개인의 행동방식과 진화적 태도를 생존투쟁의 관점에서 관찰해보면,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태에 대해서 곰곰이 숙고하고 그에 따라 철저한 행동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재빨리 주어진 행동가능성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곧바로 실행에 돌입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존에도 더 유리할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우리는 생존의 문제에 걸린 급박한 상황이 아닌, 일상의 평범한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테니스를 웬만큼 치거나 축구 골키퍼를 해본 사람은 공이 날아올 때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에 필요한 시간보다 더 빠르게 라켓을 휘두르거나 손을 뻗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상대방이 서비스한 공을 리턴하거나 패널티킥을 방어할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공을 제대로 방어하기 힘들다. 운동선수들은 아마도 리벳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기 전에 이미 행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것인가를 누가 결정하는지의 질문에는 아직 답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런 것을 주관하는 단위는 리벳과 그의 동료들이 추정하는 장소인 머리 맨 위쪽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온몸에 골고루 나뉘어 분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테니스 경기에서 점수를 따거나 축구 경기에서 점수를 잃지 않기 위해서 팔다리와 조화로운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 것은 결국 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킨다면 우리의 논의는 순식간에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어떤 상황에든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몸이다.

어쨌든 자유의지의 거부권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거부권' 이라는 개념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지의 딜레마를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자유의지의 딜레마는 이 세계가 엄격한 규칙에 따라 마치 시계처럼 작동하는 우주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20 세기로 들어설 때만 해도 우리는 뉴턴의 역학에 근거해서 세계를 이해했다. 물론 세계의 운행은 실제로 어느 정도 질서에 맞추어 (심지어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코셀렉 Reinhardt Koselleck 은 일회성이 '반복경험' 에 의해 그와 같은 '질서' 를 부여받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일상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우연과 확률이다. 그 속에서 개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무엇을 말하거나 결정을 내리려 한다면 먼저 이런 혼동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법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자유의지의 거부권에 따른 선택이 유일한 행동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리벳의 이론 덕분에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거부권' 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과 같은 지침들은 대부분 우리가 해야 할 것보다는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한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등. 언제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심지어는 헌법조차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함께 시작된다.

시간과 언어

최근 리벳은 의식에 관한 통찰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책의 제목이 자유의지와 관련되어 있지 않고 신경생물학자로서 리벳의 실질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벳은 책의 제목을 의식에 담긴 시간적 요소를 표현하는 『마음의 시간 Mind Time』으로 정했다. 이 책은 제목처럼 시간의 이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물론 스톱워치로 확인할 수 있는 축구 경기의 종료시간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간은 그런 것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인 언어구사력을 부여해준 어떤 차원을 포괄하는 문제이다.

시간은 인간의 완성에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분명하다. 학자들에게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언어 현상을 꼽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꿀벌의 언어' 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설명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과는 다른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 Bertrand Russell 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는 리벳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이 두 가지 측면의 작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러셀은 우연치 않게 갑자기 모렐 Ottoline Morrell 양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러셀은 그때 자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당신에게 털어놓기 전까지, 그러니까 내 말이 내 귀에 들려오기 전까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곧 그것이 진심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러셀의 체험은 누구나 흔히 겪는 일이다. 사람들은 곧잘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리벳은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의식이 행동보다 시간적으로 지연되어 나타난다고 했을 것이다. 현실은 몇 분의 1 초 정도 우리의 의식적 지각을 앞서가고 그것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 시간을 추월할 수 없다. 말은 그렇게 우리 입에서 튀어나오며, 우리는 매순간 적절한 말들만 튀어나오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독일작가 클라이스트 Heinrich von Kleist 는 자신의 그런 경험을 문학작품에 담아냈다. 클라이스트는 에세이에서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점차 형성되는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네가 무언가를 인식하고 싶은데 명상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근처에 사는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게.

클라이스트는 언어를 '정신이라는 수레바퀴에 설치된 브레이크' 로 보려는 당시의 경향에 반대했다. 언어는 오히려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수레바퀴' 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클라이스트는 생각했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말을 시작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가장 처음에 아는 것은 '우리' 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상태' 이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활동을 할 때 언어적 준비전위와 다른 준비전위들을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머리는 언제든 마음대로 행동하고 반응할 수 있게 전화해왔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긴 문장을 구성하고 테니스를 칠 수 있게 해주는 언어 및 운동의 내적 과정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리벳의 책제목이 환기시켜주듯이 '마음의 시간' 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이것을 앞에서 기억과 의식을 살펴볼 때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사물과 현상들이 마치 있는 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사물과 현상은 (아직) 거기에 없다. 그것은 이제 비로소 생성된다. 중요한 것은 '존재와 시간' 이 아니라 '시간과 생성' 이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우리는 시계가 어떻게 시간을 측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가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지는 알고 있는가?

우리는 바깥의 모든 현실이 내부에서 신경충동으로 바뀐다고 말한 바 있다. 뉴런들은 열심히 활동전위를 '발사' 한다. 그런데 방금 누군가가 내게 말한 정보는 정확히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존재하여 나에게 전해진 것일까? 예전에 신경생리학자들이 개개의 신경세포들을 관찰했을 때 그들은 천차만별의 활동패턴을 지닌 수많은 우연적 방전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측정방법과 통계적 분석방법을 사용하여 뉴런의 방전이 시공간적인 패턴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뉴런은 자신의 활동을 다른 (이웃한) 세포도 따르게 하고, 앞으로 이동하면서 결합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뉴런들은 조화롭게 활동하여 우리가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도와주는 (궁극적으로는 허락하는) 것이다.

동시적 패턴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형성된다. 동시적 패턴이 만들어지는 동안, 그러니까 여기에 참여한 세포들이 변형되는 동안 뉴런들은 심지어 다른 신호분자들에까지 달려들어 그들의 특성을 활용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관찰되었다. 세포들은 이미 변형이 가능하고 학습능력도 갖추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운동이고 변화이다. 모든 것은 생성 중에 있다. 문제는 이런 지속적인 역동성을 포착하고 그 생성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이다.

이미 그런 능력을 갖춘 과학이 있을까? 아니면 20 세기 물리학계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파울리가 말했듯이 더 이상 법칙에 구속되지 않고 '생성의 참된 이론' 을 가져다줄 새로운 형태의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물리학은 파울리가 아직 어린아이일 때 그 첫 번째 가능성을 발견했다. 당시 양자비약 quantum jump (주석 : 오늘날 아주 유명해진 이 양자비약이란 말은 안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즉 양자와 비약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이 상호보완적 쌍은 견고함과 유연함이 하나로 결합된 형성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물리학 덕택에 우리는 물체가 과학의 가장 낮은 차원 (가장 작은 단위의 차원) 에서조차도 확실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존재' 하며 그 자체로 불확정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뒤에 이루어진 실험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통해서 원자와 그에 딸린 전자가 어떻게 '현실성으로 존재'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작은 것에서는 간단히 이루어지지만 큰 것은 복잡한 실행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생명체의 가장 높은 차원에는 아마도 엄청나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 가능성은 스스로를 발현하고자 한다. 시간 속에서 언어를 통해 또는 행동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