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으로

인간 :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것 : Ernst Peter Fischer 지음, 박규호 옮김, 들녘출판사, 2005 (원서 : Die Bildung des Menschen. Was die Naturwissenschaften über uns wissen), page : 259 ~ 338.

멀고 가까움

공통감각

천성이냐, 경험이냐?

모방의 즐거움

아이가 세계를 볼 때

얼굴 쳐다보기

뇌 해석학, 머리 안의 과학

지능의 발달

수감각

손에 잡힌 세계

인지의 발달단계

또 다른 사물들

양의 불변성

물질의 불변성

녹아버린 물질

첫 번째 평행선

마지막 단계

상상 속의 힘

성인의 세계

비유클리드적 현실

흘러가는 시간

타당한 순서

전달된 에너지

다시 수감각으로 돌아가서

머릿속의 숫자

셈하기에서 말하기로

거울 속의 인간

천성적으로 다르다

환경 유전자

세계로 나가는 길은 좁다. 그러므로 자신과 엄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세계와 만나려면 머리가 너무 커서는 안 된다. 여자가 자신의 아이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것을 독일의 시인 로트 Eugen Roth 는 "한 인간이 세상의 빛을 보았네!" 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감격적인 순간 뒤에는 곧바로 어두운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많은 우울한 해들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거야
그것이 유일한 빛이었음을

시에서와 같이 우리에게는 출생과 함께 시각이 열리고, 그로써 세상의 방향을 가늠한다. 이를 위해 마련된 신경세포들은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뇌 안에서 밖으로부터 많은 신호들이 자극을 통해 정보를 전해주기만을 기다린다. 생후 첫 달 동안 시각피질 안의 신경결합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면 뇌가 실제로 그런 자극을, 즉 바깥세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표명하는 이런 태도에서 우리는 뇌가 왜 그렇게 서둘러 자신의 담지자에게 세상의 빛을 보여주려 애쓰는지 알 수 있다.

그림 53  : 그림은 출생 직후에 시각피질에서 신경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포들은 이리저리 뻗으며 다른 뉴런들과 결합한다. 신생아의 뇌 (a) 가 생후 3 개월 때와 6 개월 때 세상을 각각 다르게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고 가까움

과학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을 원격감각이라 부른다. 지각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직접적인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원격감각 또는 원격지각은 가까이에서 작용하는 신체감각, 즉 근접감각을 통해서 보완된다. 이런 근접감각은 촉감을 통해 온도, 습도, 접촉 등에 반응한다. 이런 지각능력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사용된다. 아이들은 촉각을 통해 바깥세계와 처음 접하게 된다. 임신 7 주째부터 태아는 누군가 엄마의 배를 만지면 이것을 느낀다.

한창 형성 중에 있는 이 작은 생명체는 추측컨대 자궁 속의 온기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자세로 있는지도 알 것이다. 임신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면 태아의 감각은 점점 더 발달해서 듣거나 냄새를 맡고 맛을 느낄 수도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태아는 세상의 소음을 (거리의 자동차 소리든 CD 플레이어의 모차르트 음악이든) 모두 엄마의 배를 통해 받아들인다. 또 엄마가 먹은 음식을 통해 태아는 처음으로 맛을 느낀다. 이것은 아니스 향료를 사용한 실험에서 밝혀졌다 (아니스 향료는 인체의 모든 체액에 골고루 퍼지는 장점이 있다).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갓난아기들의 코밑에 아니스 기름을 묻힌 솜뭉치를 갖다대자 인신 중에 이 향료를 자주 먹었던 산모의 아기들은 미소를 지었다. 이 아기들이 아니스 향료를 먹지 않았던 사놈의 아기들보다 더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출생 전에 알았던 맛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공통감각

우리는 모체의 보호를 받는 동안에 이미 외부의 자극에 대해 감각의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그리고 자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곧 눈을 뜬다. 이것은 과학자들에게 최소한 두 가지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갓난아기는 무엇을 얼마나 잘 볼 수 있으며, 아기의 시력은 자라면서 얼마나 변하는가? 각각 다른 곳에서 형성된 감각들은 어떻게 하나로 모이는가? 아기는 손에 묻은 음식을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갓난아기는 이 4 가지 감각인상이 한 개의 대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는가? 얼마 뒤에는 아이에게 그 대상의 이름도 가르칠 수 있다. 죽이든 사과든, 음식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극은 대수로울 것도 없다. 아기는 사람, 다시 말하면 엄마도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을 모두 이용해서 받아들인다.

아기가 무언가를 볼 때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은 사람의 얼굴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부모들은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른의 기준으로 볼 때, 아기들은 세계를 선명하게 보지 못한다. 아기는 눈앞에서 30 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대상은 초점을 또렷이 맞추지 못한다고 한다. 이 거리는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아기와 엄마의 얼굴 사이의 간격에 해당한다. 출생 후 첫 달 동안 아기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심리학자 고프닉 Alison Gopnik 에 따르자면) 마치 미술전시관과도 같다. 거기에는 마치 렘브란트의 초상화와도 같이 수많은 얼굴이 어슴푸레한 어둠을 배경으로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세계는 이와 같은 광경으로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고 있다).

여러 자극이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어떻게 아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오랜 의문이다. 이 문제는 17 세기 말 아일랜드인인 몰리뉴 William Molyneux 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1689 년 몰리뉴는 영국의 철학자 로크 (John Locke, 1632 ~ 1704) 에게 이런 능력이 타고난 것인지 학습된 것인지를 물었다. 하나의 대상에서 나오는 다양한 자극들을 하나의 공통감각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아무 노력 없이 얻어지는 생명의 선물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경험에 의해 학습된 것인가?

이로써 몰리뉴는 오늘날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몰리뉴의 문제' Molyneux's Problem 를 세상에 제기했다.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되찾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몰리뉴는 로크에게 이런식으로 질문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공과 주사위를 보여주었다. 이 물건들은 그가 이제껏 촉각을 통해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시력을 갖게 된 이 사람은 눈앞의 물건을 만져보지 않고도 어느 것이 둥글고 어느 것이 각이 졌는지를 과연 알 수 있을까?

몰리뉴의 문제는 과학자들을 양편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이 대립은 결정적인 실험이 실시되지 못하는 동안 계속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대상에서 나오는 다양한 자극들을 하나의 공통감각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을 타고난 것, 즉 유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런 능력은 오직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유전적인 것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선천주의자 nativist, 학습적인 것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경험주의자 empiricist 라 불린다. 이들 두 진영 간의 의견대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선천주의자' 라는 단어는 출생을 뜻하는 라틴어 '나투스' natus 에서 유래했다. '경험주의자' 라는 단어는 '엠피리키' empirici (그리스어 '엠페이리아' empeiria 에서 유래) 에서 나왔는데, 고대에는 경험에 의존하여 치료하는 의사를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훌륭한 철학자라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경험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직관, 즉 '테오리아' theoria 만 있으면 충분했다. 현재 우리는 이 단어 (테오리아) 를 아직 증명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좀더 경험적인 검증이 필요한 학설을 뜻하는 '이론' theory 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몰리뉴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을 풀어줄 실험이 과연 존재할까? 그와 관련하여 근래 한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비디오촬영을 통해 어린아이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이제 캠코더 덕분에 아이들의 이해력과 구성능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용이해진 것이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와 관련하여 지난 2 천 5 백 년 동안 밝혀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을 최근 30 년간 밝혀냈다.

고프닉, 쿨 Patricia Kuhl, 멜초프 Andrew Meltzoff 는 공조 『아기침대 속의 과학자 The Scientist in the Crib』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실 부모들은 아이가 부모를 따라 얼굴표정을 짓고 혀를 내민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이런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자기가 혀를 내민다는 것을 (그것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만 있을 뿐인데)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지도 해명되었다. 이것은 몰리뉴의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비디오기법 덕분에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디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캠코더의 도움으로 생후 1 개월 된 젖먹이는 얼굴표정을 흉내낼 수 있고, 6 개월짜리는 두 가지 언어 (영어와 스웨덴어) 를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특히 두 가지 언어를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청취력이 매우 일찍 세분화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디오기법은 또한 젖먹이들이 관심을 어떻게 분산시키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갓난아기들은 시야에 새로 들어오는 대상에 더 관심을 갖는가, 아니면 익숙한 물체를 더 좋아하는가? 아기들 눈앞에 여러 개의 물건들을 제시한 결과 언제나 나중에 보여준 물건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기에게 공을 보여주고 곧이어 공과 함께 막대를 보여주면 아기는 막대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

이런 사실을 통해 몰리뉴의 문제에 대한 첫 번째 해결방안에 접근할 수 있다. 먼저 어린아이의 두 손을 탁자 밑에 내리게 하고 손으로 몇 개의 나무토막을 만져보게 했다. 물론 눈으로 자신이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볼 수 없게 했다. 아이들이 나무토막을 충분히 가지고 논 후, 그 나무토막의 그림을 포함한 여러 장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의 시선이 어느 곳에 오래 머무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는 비교적 명확했다.

아주 어린아이들은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이미 충분히 만져보아서 익숙해진 물체보다는 새로운 물체를 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동심리학자 스트레리 Arlette Streri 는 실험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 즉, 감각조직들은 내부적으로 상호교환과 결합을 통해 아기가 '주변세계의 요구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스트레리는 여기서 '학습의 기초' 를 발견할 수 있다고도 했는데, 이는 다소 지나친 추론으로 보인다. 이 실험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기본형태들 (둥근 것, 긴 것, 각진 것 등등) 이 사용되었으므로, 먼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선호하는 시각이나 이해의 형식이 아이들에게 존재하는지 여부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그밖에도 예를 들어 나무공과 둥근 사과가 제시되었을 때도 아이들이 새로운 것에 먼저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어쨌든 새것에 대한 관심은 학습된 반응은 아니다. 앞에서 아이가 보인 선호의 성향이 한 달 정도 지나면 사라진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아기들은 제시된 두 개의 물체에 똑같은 강도로 반응한다. 무엇이 이런 반응을 유발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점차 이들의 뇌가 눈앞에 제시된 두 대상의 세부적인 것까지 인식하려 한다는 것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나무토막도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거나 가지고 논 것들은 더욱 그렇다. 실제로 정교한 시력은 생후 1 년 무렵에야 생겨난다. 그때까지 아기는 눈에 보이는 장면과 소리를 연결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슬픈 목소리가 들릴 때는 슬픈 표정을 한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생후 몇 개월 동안은 아직 이런 연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성이냐, 경험이냐?

어떤 능력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최근 지능의 대략 45 퍼센트 정도는 환경을 통해서, 나머지 55 퍼센트는 유전자를 통해서 결정된다는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내용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이런 정보를 세상에 내놓는 사람은 생물학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오직 감각기관과 기타 여러 기관들을 통해서만 환경에 반응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런 기관들을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유전자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유전자는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유전자냐, 환경이냐' 의 양자택일은 원칙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의미가 없다.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묻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환경은 자신에게 잘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일 처음에 있었던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형성이며, 이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중의 프로세스이다.

다행히도 이제 양자택일의 배타적 논리를 상호작용의 포용적 관계로 바꾸고, 유전자와 환경의 (안정성이 아닌) 역동성 쪽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힘을 얻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냐, 경험이냐?' 또는 옛 음유시인의 멋진 표현을 빌면 '천성이냐, 환경이냐?' nature or nurture? 의 오랜 질문에 대해 최근 새로운 답이 구해지고 있다. 즉 '환경을 통한 천성' nature via nurture 또는 '환경을 통한 천성의 완성' 이 그것이다.

여기서 환경의 뜻으로 번역한 영어단어 'nurture' 는 '양육' 에서부터 '교육' 을 거쳐 '교양' 에 이르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개념 역시 완성된 것과 완성과정을 모두 포괄한다. 유전자가 이런 이중적 역할, 즉 무언가 완성된 것인 동시에 완성시키는 것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유전자와 경험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경악반응' 과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뱀을 보면 깜짝 놀란다. 그러고는 이런 반응을 타고난 것, 즉 유전자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사람이 아닌 다른 영장류를 실험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원숭이도 뱀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원숭이에게 이런 두려움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60 년대 중반에는 이런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동물원 또는 영장류 실험실에서 성장한 원숭이는 뱀을 보아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원숭이는 야생에서 자란 (그래서 실제로 뱀과 마주친 적이 있는) 다른 원숭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야생의 환경에서 자란 원숭이 중에도 실제 뱀 때문에 위험에 처한 적이 있는 원숭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1980 년대에는 생물학자 미네커 Susan Mineka 는 야생의 원숭이들이 뱀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는지 의문을 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준비했다. 미네커는 원숭이들이, 놀라 도망치는 다른 원숭이들을 보고서 뱀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했다. 미네커는 뱀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실험실의 원숭이에게 다른 원숭이들이 뱀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필름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이 원숭이는 본 대로 따라했다. 그때부터 이 원숭이는 뱀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네커는 비디오필름을 보여주는 대신 실험 대상 원숭이를, 뱀을 두려워하는 다른 원숭이들과 일정 기간 함께 생활하도록 함으로써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디오필름을 이용한 실험은 또 다른 실험을 용이하게 했다. 필름조작을 통해서 뱀을 꽃으로 대체했더니 실험대상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이 꽃에 놀라 도망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실험 대상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들의 이런 (무의미한) 행동을 과연 따라할까라는 흥미로운 물음에 대한 답은 확실히 "아니다" 로 내려졌다. 여기서 우리는 유전자와 경험 (천성과 환경) 의 문제와 관련하여 개체의 학습능력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개체의 행동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될까? 개체의 유전자 (게놈) 로 대표되는 천성이 더 우위를 차지할까, 아니면 환경과 그 안에서 개체가 획득한 경험이 더 앞자리를 차질할까?

영장류는 분명히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자신의 삶에 필요한 내용들을 배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이 유전자 덕택에 주어진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유전자가 개체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가 무엇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이 쌓여야 한다.

원숭이에게는 (그리고 인간에게도 확실히) 도망칠 줄 아는 능력뿐만 아니라 뱀 앞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도 모두 천성적으로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두 가지 능력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조절해주는 것이 바로 유전자이다.

학습은 이제 본능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본능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작동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천성과 환경의 상호작요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환경은 천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은 천성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천성은 환경을 통해서만 활동 (기능)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는 환경의 위임을 받아 활동하는 대리자이다. 유전자는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학습의 가능성도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유전자는 원인일 뿐만 아니라 결과이기도 하며, 항상 (유전자의) 담지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원숭이는 꽃이 아니라 뱀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는 우리가 우리의 천성과 모순되지 않는 것들만 문화로서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우리가 유전자의 꼭두각시라는 증거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헉슬리 Aldous Huxley 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는 이런 생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1932 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는 우수한 인간과 저급한 인간이 체계적으로 생산 (복제) 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쯤에서 책을 덮고 이렇게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유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소설의 내용은 그와 다르다. '멋진 신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새 인간은 이런 유전적 준비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 갖가지 세뇌와 조건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탄생된다. 그렇게 해서 신세계의 어린아이들은 꽃을 무서워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일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 헉슬리가 묘사한 것과 같은 지옥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학자 미네커의 실험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愕낮�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그런 것에 두려움을 없애준다.

모방의 즐거움

원숭이는 남의 행동을 잘 따라한다. 이것은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이렇게 남을 따라함으로써 생존에 더 유리하게 되고 또 본성과도 조화를 이룬다. 모방은 의미 있고 유익한 행동방식을 제시한다. '모방' 이란 단어에서 멋진 오리지널을 흉내내는 좋지 않은 싸구려를 떠올리는 사람은 물론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자신도 누가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을 모방하면 원숭이처럼 흉내나 낸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한다. 그럼에도 모방은 생명체의 중요한 특성이다. 이것은 심지어 돌고래나 앵무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앵무새가 상대방의 말을 잘 따라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간혹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는 이 새의 수다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지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 따라하기, 즉 모방이다. 가령 아이는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더 마시고 싶으냐는 질문을 계속 되풀이해서 받으면서 '더' 라는 단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의 동생은 부모로부터 너도 무언가를 마시고 싶으냐는 질문을 계속 되풀이해서 받으면서 '너도' 라는 말을 배우게 된다.

과학자들은 놀랍게도 이런 모방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뉴런을 발견해냈다. 이 뉴런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때에만 (예를 들어 공을 찰 때)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기만 할 때도 활성화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여기에 거울상 뉴런 mirror neuron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거울상 뉴런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어떤 행동을 생각하기만 해도 (예를 들어 공을 던지는 상상만 해도) 충격을 내보낸다. 이런 뉴런이 인간이 언어습득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뉴런은 침팬지의 뇌 안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신경생물학자들은 한 가지 결론을 끌어냈다. 그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원숭이도 이런 거울상 뉴런과 모방능력 덕분에 자기가 관찰하는 다른 원숭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원숭이는 비록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머릿속으로 다른 원숭이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침팬지는 이미 '마음의 이론' theory of mind 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직관력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본다는 사실을 상상할 때, 그 사람은 '마음의 이론' 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단순한 따라하기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이론과 같은 거창한 심리학적 개념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는 흔히 떠도는 말도 충분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나쁜 모범을 보이는 부모를 만났을 때에도 더 나은 모범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방은 어른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가 세계를 볼 때

이제 다시 유전자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유전자는 우리에게 풍부한 신경세포들을 공급해준다. 이 뉴런들은 서로 결합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사방으로 신호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아기는 세계를 바라본다. 하지만 아기는 아직 그 세계 속에서 무언가를 또렷하게 인식하지는 못한다. 아기가 한 가지 대상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는 머리를 (그와 더불어 시각을) 부지런히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가끔씩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아기가 이렇게 할 때는 대부분 누군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가장 좋아한다). 이때 아기는 우리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초점을 또렷이 맞추어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아기의 눈에 있는 망막의 중심에는 아직 중심와 fovea 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55 : 중심와는 망막에서 또렷하게 초점이 모아지는 곳이다 (a). 이렇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시신경이 적절히 형성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제 시세포에는 수초가 생겨났다). 그것은 또한 감광성 세포들 (추상체) 이 가늘어지면서 조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c). 신생아의 경우 (b) 추상체들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듬성듬성 분포하게 된다.

우리가 대략 비슷한 키의 사람과 마주설 때 상대방의 얼굴에서 반사된 빛은 곧장 중심와로 들어간다. 이곳은 감광성 세포들이 가장 밀도 높게 모여 있는 곳이다. 보통 식탁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얼굴은 초점이 또렷하게 맞아 선명한 반면에 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흐릿하게 보인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세계를 관찰할 때 우리는 (성인들은) 형상 figure 과 매질 medium 을 구분하는데 어린아이들은 아직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매질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흐릿한 세계이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매질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흐릿한 세계이다. 이 흐릿한 세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아이가 구체적으로 겨냥하여 볼 수 있는 구성요소들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런 구분이 가능하려면 먼저 중심와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부위에 자리잡은 시세포들이 적절한 구조를 갖추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밖에도 그곳에 연결된 뉴런들이 적당한 방식으로 결합되거나 분리되어서 지각을 담당하는 기관의 세부 작용들이 적절하게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뉴런이 사용되고 어떤 것이 사용되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감각적 경험이 쌓일 때까지 우리의 유전자가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시각에 들어오는 인상이 명료하지 못함에도 젖먹이들은 한 살이 되면 벌써 주변을 돌아보면서 수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기들이 눈에 보이는 장면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기들은 선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 점이 세 개인지 네 개인지 따위를 헤아린다. 이 과정을 더 정확히 설명하려면 갓난아기들에게 숫자감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다루어야 하지만, 이는 좀더 나중의 발달단계에서 다룰 문제이다.

얼굴 쳐다보기

명료하지 못한 시각적 인식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는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신경계 때문이다) 일찍부터 아기의 주의를 끄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얼굴이다. 실제로 아기들은 갓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얼굴에 반응을 보인다 (생후 40 분만 지나면 벌써 그렇다!). 그밖에도 이때부터 벌써 성의 차이도 나타난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평균적으로 좀더 오랫동안 얼굴을 바라본다. 남자아이들은 훨씬 더 주의가 산만하다. 둘의 반응이 비슷해지는 것은 생후 한달 정도가 지나 부모를 따라 혀를 내밀거나 얼굴표정을 지을 정도가 되었을 때이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은 두뇌의 특정한 부위와 관련이 있다 (대략 18 개월 때부터 어린아이들은 얼굴표정을 보고 상대방이 자신과는 다른 요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몇몇 과학자들은 두뇌의 그 부위에서 아주 특수한 '얼굴뉴런' 이란 것을 발견해내기도 했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명쾌해 보이는 이 사실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문점이 담겨 있다. 아이들은 처음 (아직 분별능력이 없을 때) 여기에서 무엇을 보며, 나중에 많은 얼굴들을 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개별적인 뉴런 또는 한 영역의 뉴런그룹은 어떤 학습 과정을 거친 뒤 '얼굴' 을 뇌에 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얼굴의 인식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막연히 추측만 하던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냈다. 첫 번째 단계 (망막과 감각신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세계에 대한 흐릿한 상이 제공되는 시기) 에서는 '얼굴' 에 대한 일반적인 지각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시각체계의 수용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수용야는 생후 초기부터 작용하며, 진화과정에서도 비교적 일찌감치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갓난아기는 아직 사람의 얼굴과 원숭이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며, 눈앞에 보고 있는 얼굴이 거꾸로 되었는지 (턱이 위로, 이마가 아래로) 아니면 제대로 된 모습인지도 (턱이 아래로, 이마가 위로) 잘 구별하지 못한다. 처음에 아기는 그냥 '얼굴' 을 볼 뿐이다. 그러다가 얼마 뒤부터는 주변과 구별되는 형태를 좀더 정확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우며, 시간이 좀더 지나면 마침내 이 두 가지 얼굴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아직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얼굴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동양인은 서양인의 얼굴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최초로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 파견된 관리는 한시라도 빨리 본국에 돌아가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긴 나라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은 '얼굴' 을 받아들이는 지각의 창문에 두꺼운 창살을 붙인다. 하지만 이 창살이 우리의 시각을 좁게 만드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특정한 타입의 얼굴들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그러나 아직 세부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얼굴 지각능력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후, 외투깃이나 목도리로 반쯤 얼굴을 가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때도 옆을 스쳐 가는 수천의 인파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을 순식간에 찾아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옆얼굴만 보고서도 말이다. 어떤 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지각능력이 먼저 그 사람의 낯익은 얼굴을 알아본다.

뇌 해석학, 머리 안의 과학

우리가 얼굴을 읽어내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이미 언급한 뇌영역 덕분이다. 그 부위에 모여 있는 뉴런들은 우리의 아이 얼굴을 향할 때 신호를 보낸다. 이 뇌영역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얼굴을 인식하려면 이곳의 뉴런들은 다른 신경세포나 감각기관들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해야 하는가? 이 뉴런들은 '얼굴' 의 정보를 어떻게 골라내는가? 점과 선 이외에 어떤 특징이 조합되어야만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되는 '얼굴' 이 지각될 수 있는가? 가령 우리는 어떻게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구별하며, 또 어떻게 얼굴만 보고 그 사람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있는가?

'얼굴뉴런' 의 개념은 모서리나 선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수용야들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 개념은 시각적 지각을 하나의 프로세스로서, 즉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패턴들을 찾은 뒤 단계적으로 선별하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려면 뇌는 수를 헤아려야 한다. 이 프로세스를 통해서 하나씩 차례로 정보들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눈으로 본 장면에서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뽑아내고 그와 관련된 패턴을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적인 뉴런들의 계층적 질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이 뉴런들은 점점 더 선별적인, 다시 말하면 점점 더 의미가 선명해지는 정보들의 신호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흥분하는 뉴런이 최종적 인식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뉴런의 활성화가 곧 지각인 셈이다.

이처럼 모든 인식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최종적 신경세포를 갖는다. 예를 들어 할머니의 수많은 얼굴표정은 각각 이런 최종적 신경세포를 갖는다. '할머니세포' grandmother cell 의 개념은 바로 이런 시각모델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1990 년대부터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얼굴뉴런' 의 존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개별적인 세포들을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뉴런 그룹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얼굴뉴런' 이나 '할머니세포' 와 같은 개념들은 언뜻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네커육면체' Necker cube 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아주 간단한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육면체는 19 세기에 네커 Necker 라는 스위스 과학자가 고안한 것으로 3 차원의 대상 (육면체) 을 2 차원의 평면에 그려놓았을 때 그림이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56 : 공간적 형상을 평면에 표현한 네커육면체 (a). 관찰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육면체를 인식 (구성) 한다. '왼쪽 아래' 에 있는 사각형이 뒤에 있는 것으로 보이거나, 반대로 앞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인식하고 나면 우리는 그림의 지각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략 3 초의 간격으로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림 (b)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은 오른쪽으로 보면 토끼가 되고 왼쪽으로 보면 오리가 된다.

이 그림은 뇌가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을 어떻게 현실 속의 육면체로 바꾸어 해석하는지, 시각작용 (그리고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감각적 파악능력들) 의 기본원리를 알 게 해준다. 대상을 볼 때 우리는 제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선지식 先知識 을 가지고 인식한다. 육면체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세계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그 속에 있는 대상도 3 차원 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본 후 이 전제에 새로운 (대개는 구체적인) 지식을 추가한다. 그 결과 다음에 같은 그림을 볼 때는 전과는 또 다른 선지식을 가지고 보게 된다. 실제로 같은 대상을 두 번째로 볼 때 우리는 빛의 반사 등 다른 조건이 이전과 같음에도 다르게 인식한다.

이로써 우리의 인식작용은 순수한 지각 (감각적 지각) 이 눈앞의 장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보는 행위' 를 이제 해석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많은 의미를 지닌다.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올바른 상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빨리 파악하는 것이다. 바위가 나를 향해 굴러오고 있을 때 바위의 모양이나 구르는 속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가오는 위험을 인식하고 재빨리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두개골 속의 신경계는 어떻게 '명시적' explicit 으로 전달된 정보 (돌, 구른다) 에 오직 '함축적' implicit 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의미 (생명의 위협) 를 부여하는가? 실제로 이것은 생존을 위해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명시적' 과 '함축적' 이란 말은 언어학의 개념이다. "나는 콘스탄츠에서 뮌헨으로 간다" 라는 단순한 문장에도 명시적인 (말 그대로의) 정보와 함축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두 번째 정보가 더 많은 내용을 제공한다. 위의 문장은 명시적으로는 내가 콘스탄츠라는 도시에서 뮌헨이라는 도시로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때 '간다' 는 말은 걸어거 가거나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버스, 기차로 가는 등의 수많은 이동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이 단어 안에는 많은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으며, 정확한 의미는 문맥을 통해서 비로소 파악될 수 있다. 말한 사람이 기차역에 있다면 '간다' 는 기차를 타고 간다는 뜻이 되고, 주유소에 있다면 대개는 자동차를 타고 간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시각작용 (과 다른 감각작용) 에서도 중요한 것은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두뇌의 본래 임무는 시각적으로 들어온 장면이 제공하는 명시적 정보를 함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위가 자기 쪽으로 굴러올 때 중요한 것은 바위의 모서리나 윤곽선 따위가 아니라 그것이 몹시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명시적 정보가 흥분패턴의 형태로 시각피질에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추려내는 곳은 어디일까? 과학자들은 우리가 수직의 선을 보았을 때 그것이 숫자 1 인지 알파벳 I 인지를 결정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다. 함축적으로 선 안에 담겨 있는 감추어진 의미는 문맥을 통해서, 가령 다음에 오는 것이 2 인지 A 인지에 따라서 드러난다. 이때 사건이 의미를 획득하는 장소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본 곳이 아닌 다른 지점으로, 뇌에서 이 지점은 명시적으로 보는 곳보다 훨씬 앞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함축된 의미의 추출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뇌의 전기적 활동을 관찰해보면 사람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의미를 추출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방법에 따라 의미를 인식한다. 비록 그 결과는 모두 같지만.

시각과정이 시작될 때 사람들은 이미 저마다 고유한 세계상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눈으로 보며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 일정한 선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본다" 는 괴테의 말에도 담겨 있다. 이 말은 여행안내서의 광고문구로 널리 활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선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관광객은 많은 문화적 볼거리들을 놓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본다" 는 말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이든 먼저 잘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대한 괴테는 만약 우리가 하나도 아는 게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고약한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때 우리는 인문학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인문학은 방금 살펴본 순환귀결의 문제를 해석학적 순환으로서 이해한다. 여기서 '해석학적' hermeneutic 이라는 수식어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헤르메스에게는 불사의 존재인 신들의 메시지를 사멸하는 존재인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다. 인간과 신들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성서의 저자들과도 직접 접촉할 수 없다. 따라서 성서를 읽을 때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그 의미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해석의 행위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의 이름을 딴 해석학 hermeneutics 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해석학은 텍스트의 의미를 오직 텍스트 자체에 의거해서 해석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해석학에서는 텍스트 안에 저자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텍스트가 작성될 당시의 삶의 틀 안에서는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보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전제한다. 예전에는 편지를 보낸다고 말할 때 우편을 이용한다거나 종이에 글씨를 쓴다는 따위의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편지를 보낸다고 말하려면 이런 부차적 내용들을 명시적으로 밝혀야 한다. 반대로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보낸다고 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때는 해석학적 순환이 시작된다. 이럴 경우 전체 텍스트를 이미 알고 있을 때만 감추어진 개별적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텍스트에 담긴 함축적 의미가 추가될 때마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바뀌게 된다. 아무튼 텍스트를 읽는 (또는 시각적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선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선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최초에 읽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해석학은 읽는 주체의 이와 같은 능동적 기여를 반드시 요구하기 때문에 물리학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줄기차게 스스로에게 요구해온 것과 같은 객관적 학문은 될 수 없다.

두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물리학보다는 해석학을 더 많이 사용한다. 첫째 이유는 머릿속에서 활동하는 모든 세포와 신경절이 저마다 진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이들의 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선이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경사면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공의 운동을 보며 시간과 속도 사이의 물리법칙을 밝혀내려는 사람들보다는 감각기관에서 뇌영역으로 전달되는 신경충격을 관찰하는 사람이 관찰을 위한 전제조건을 훨씬 더 많이 필요로 한다.

둘째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뇌 자체가 감각적으로 관찰된 장면에 접근할 때 이런 선이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뇌의 선이해가 있어야만 관찰된 내용에 감추어진 함축적 정보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제시한 이 두 가지 근거에는 모두 진화사라는 공통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화사를 빼놓고는 생물학을 생각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생물학에는 (따라서 뇌에는) 생물리학 biophysics 의 연구대상인 인과적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규명을 요구하는 역사적 요인들도 존재한다. 신경학은 뉴런들의 결합에서 작용하는 물리화학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빛을 단순히 시각이 아닌 인식의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두뇌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생명의 영역에서 분자와 신호전달체계만이 아니라 해석과 이해의 문제까지도 제기되자 전통적인 물리학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물리학은 무의식의  탐구로까지 영역을 넓혀야 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탐구를 '영혼의 물리학' 이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무엇보다 열과 운동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에너지의 보존에 관한 고전적 명제를 외부세계에서 내부세계로 전환하여 정신적 에너지의 보존에 관한 명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영혼의 물리학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기껏해야 영혼의 해석학, 즉 정신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기술이 될 뿐이다. 정신분석가는 의뢰인과의 상담을 통해서 그의 개인적 역사 안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상태로 있는) 정보를 찾아내고자 한다.

두뇌해석학은 과학의 진보와 함께 변했다. 선과 모서리에 반응하는 대뇌피질의 뉴런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그것을 '할머니세포' 나 '얼굴뉴런' 과 유사하게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는 검출기 detector 로 이해하려 했다.

해석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은 간단히 검증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 첫째로 오직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도 상황 자체와 동일한 전체 정보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명한 인물들의 얼굴을 몇 개의 선으로만 표현한 캐리커처도 금방 알아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뇌는 우리가 보는 세계를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마치 화가가 세계라는 대상에 접근하여 스케치를 완성하듯이 세계를 받아들인다. 스케치라는 개념은 3 차원적 상이 (대상을) 2 차원적으로 이해하는 망막에 처음으로 맺힌다는 사실 (이중의 방식으로, 한 번은 오른쪽, 한 번은 왼쪽) 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둘째로 '검출기' 는 바로 이런 과제, 즉 명암의 교차가 진행되는 지점들을 지시 (표시) 하는 일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런 지점을 빛의 세기, 즉 광도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완만한 곡선으로 표시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뇌에서 활동하는 뉴런의 실질적인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는 얼굴이 시작되거나 또는 끝나는 지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길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빛과 그림자가 혼합된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림 57 : 광도가 원래의 곡선에 나타난 것처럼 변한다고 가정하자. 그밖에도 눈이 빛의 진로를 정확하게 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측정기이고 우리 몸은 분석기라고 가정하자. 아주 간단한 분석기라도 주어진 곡선 (원래의 곡선) 의 어느 지점에서 변화가 시작되는지 나타낼 수 있다. 처음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심해지다가 다시 약해지고 다시 거의 변화가 없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기서 우리는 1 차 미분값을 얻은 뒤, 그 변화를 다시 분석하여 2 차 미분값도 얻어낼 수 있다. 이때 1 차 미분값이 최고인 지점에서 2 차 미분값은 영점을 통과한다. 이 최고점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1 차 미분값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상승하고 이후에는 하강하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곳에서도 뇌는 명확하게 교차점을 찾아낸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배웠다. 그것도 미술시간이 아니라 수학시간에, 하지만 수학선생님이나 미술선생님은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답은 '2 차 미분', 즉 2 단계에 걸쳐 주어진 미분에 있다. 측정곡선 (예를 들어 얼굴 광도의 변화곡선) 을 분석할 때 기술자들은 곡선의 형태만이 아니라 변화도 관찰한다. 이런 변화를 그래프로 표시하면 측정곡선의 1 차 미분값을 얻을 수 잇다. 미분값은 처음 눈에 들어온 빛의 밝기가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는 지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최대점이 바로 뇌가 인식하고자 하는 지점으로, 바로 여기서부터 얼굴이 (또는 다른 관찰 대상이) 시작되어 뒤편의 배경 (매질) 과 분리된다.

2 차 미분의 절대적인 장점은 그것이 한 지점 (영점) 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바로 우리의 뇌가 인식하고 싶어하는 곳으로서, 여기서 광도가 가장 크게 변한다 (1 차 미분값이 최고에 도달한다). 영점의 좋은 점은 무엇이 없는지 (영) 있는지 (영이 아님) 를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느 정도 변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시각피질의 '검출기' 들도 바로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 그것들은 눈으로 들어오는 광도의 2 차 미분값을 구한다. 이것을 발견한 뒤 뇌는 대상의 첫 번째 스케치를 끝낸다. 세계는 이제 처음으로 하나의 상으로 머릿속에 담겨진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세게는 상이한 광도로 이루어진 모자이크로 제시된다. 그 다음 뇌는 새로운 과제에 착수한다. 뇌의 다음 과제는 이렇게 대략적으로 스케치한 그림을 자신의 담지자에게 설명해주는 일이다. 이 그림은 곰 인형이라고 말이다.

그림 58 : 우리의 시각체계가 완성시킨 곰 인형의 1 차 스케치.

할머니세포나 얼굴뉴런과 같은 예전의 가설들은 아마도 주어진 미분 패턴에서 특정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역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망치에 대한 관찰을 들어보자. 이런 가설에 따르면 우리의 시각은 직각을 망치의 머리로 해석할 것이므로 우리의 신경계는 그 주변에서 손잡이로 보이는 시각적 인상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 가설에서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미 너무 많은 선지식을 지각과정에 끌어들인 탓에 해석학적 순환 자체를 중단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망치의 손잡이를 찾는다는 것은 망치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애당초 손잡이를 찾을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이에 반해서 새로운 가설은 선지식을 결말부분에야 비로소 투입한다. 다시 말해서, 대략적으로 스케치한 형상에서 가능한 모든 의미들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런 형상을 우리는 '1 차 스케치' 라고 부른다. 대개 여기서는 관찰된 형상과 매질 (뒷배경) 이 모두 비슷한 패턴을 형성한다. 따라서 뇌는 우선 어떤 선이 관찰대상 (또는 대상의 얼굴) 의 윤곽을 이루는 것인지 찾아내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두 개의 눈으로 세계를 관찰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해결된다. 두 눈은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약간 차이가 나는 두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이 정보를 점과 점을 비교해가며 자세히 관찰해보면 무엇보다도 얼굴 (형상) 에 속하는 점들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배경은 두 경우 모두 매우 비슷하다. 실제로 대상의 각 부분을 정렬하고 헤아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1 차 스케치의 도움으로 얼굴에서 두 개의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점은 사실 모두 한 점에서 나온 것이다. 1 차 스케치에 있는 두 점 사이의 간격을 통해 대상의 모습이 구성된다. 처음에 이것은 오직 관찰자의 관점에서만 발생하지만, 점차 관찰자의 관점에서 대상의 관점으로 적절하게 옮겨간다. 선지식이 투입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 뇌는 시각에 들어온 대상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데, 이러한 설명을 통해 관찰자는 그것을 그가 이미 본 적이 있는 어떤 것으로 다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은 실제로 아는 만큼 본다.

이제부터의 문제는 신경생물학, 즉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지금까지 기술한 이론적 생각들이 실제로 뇌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뉴런들의 활동 안에서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지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제 중요한 것은 특정한 형태를 개별적인 부분들로 체계적으로 쪼개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전문가들이 두뇌연구자들보다 이 문제의 해법을 더 잘 알 수 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경학자들은 미술전문가들에게 협조를 구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육체의 해체를 시도했다. 물론 컴퓨터전문가들의 도움까지도 물리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컴퓨터의 도움은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측면도 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우리의 뇌는 감각적 정보들을 컴퓨터처럼 나름대로의 연산작용을 통해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생명체의 실제적인 다양성을 모두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쪼갬으로써 우리는 이란 계산에서 벗어나는 것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가장 흥미롭다) 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지만) 이와 같은 해체는 과학의 놀라운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해체란 고정적 방향축을 설정하여 형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수학자들은 이것을 '일반화원통' generalized cylinders 이라 부른다. 일반화원통이란 축을 기준으로 선을 회전시켰을 때 만들어진 형체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났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체를 표현할 수 있다.

그림 59 : 인간의 형상 (형태) 을 일반화원통으로 쪼갠 모습

이런 원통이 인간의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했다든가 아름답게 보인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을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하여 인식하려는 시도는 이미 입체파라고 불리는 화가들을 통해서 알려진 바 있다. 20 세기 초 피카스 Pablo Picasso 같은 화가들이 이런 입체파의 양식으로 분석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묘사 대상을 형식적 분석을 통해 개별적 도형으로 분해한 뒤 그 도형들을 다시 조합하는 식으로 대상을 그렸다. 여기서도 화가들은 뇌가 활동하는 방식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정해볼 수 있다. 우리가 미술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시각적 정보가 뇌 안에서 처리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창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미술작품은 우리 내부에 말 그대로 확실한 자기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여기서 예술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이 하나의 상으로 합쳐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이와 같은 일반화원통을 통해서 눈에 인식된 형체가 특수한 도형들로 전환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그 형체를 체계적이고 수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다. 이로써 우리는 선지식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투입되는지) 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선지식은 우리 머릿속에 카달로그 형태로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잇다. 카탈로그 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들이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일반화원통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와 같은 카탈로그는 계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신속하게, 전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두뇌는 관찰된 대상의 (힘들게 완성된) 3 차원적 스케치와 일치하는 항목을 카탈로그에서 찾아내 세계에 대한 설명을 관찰자에게 제공한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목표' 에 도달한 셈이다. 눈에 들어온 빛은 이제 선명한 시각적 상으로 바뀌었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시각 이론이 신경세포와 시냅스로 이루어진 신경생리학적 네트워크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 시도를 통해서 적어도 뇌의 어느 차원이 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고 또 적절하게 설명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인상을 얻을 수는 있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이미 언급된 신경회로들과 접속부위들에 대한 지식이다. 그 다음 이런 요소들이 어떻게 다양한 신호와 정보들을 (더하고 곱하여) 통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단계를 산술의 차원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컴퓨터와 같은 복잡한 연산 작용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오직 3 차원의 성과만이 다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대상에 어떻게 적용되며, 단지 선 몇개로만 이루어진 대상을 어떻게 우리가 육면체로 인식하는지가 규명된다.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도안 1 단계와 2 단계 사이에서 사이에 머무고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이 4 개의 차원이 모두 합쳐져야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내용이 일반화통으로 분해 가능한 형체를 올바르게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물결이 반짝이는 광활한 바다의 풍경을 우기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며, 그대대 우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얼굴을 측면도나 사진으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대략적인 스케치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도 아직 의문이다. 옆얼굴을 보고 그 사람이 어제 정면으로 얼굴을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눈으로 내용을 컴퓨터와 같이 시뮬레이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론에서든실 제이든 마찬가지이다.

지능의 발달

뇌의 외적 구조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내적 구조 역시 한 단계씩 점차적으로 형성된다. 발생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자들은 지난 세기부터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인지심리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네 (Jean Piaget, 1896 ~ 1980) 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미 일찍부터 "세포, 개체, 종, 개념, 논리적 원칙 등 모든 차원에서 전체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고 확신했다.

피아제는 '철학과 생물학 사이에 밀접한 결합' 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리학을 꿈꾸었다. 그것은 유기체의 생성뿐만 아니라 사고패턴 (범주) 의 생성까지도 탐구하는, 즉 그의 책 제목처럼 '지능의 발달'을 다루는 학문이었다. 피아제는 생명 자체를 하나의 창조적인 프로세스로 보았다.

발생학에 대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적합한 접근방법을 찾던 피아제는 20 세기 초반 어린이들의 정신발달을 연구할 때 사용되던 지능테스트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프랑스 초등학교 학생들의 지능테스트 문제들을 검토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피아제는 학생들의 이른 바 '틀린' 대답들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학생들의 '오답' 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며, 연령층에 따라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답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아제는 이런 현상을 나타나는 일종의 전략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그는 9 ~ 10 세의 아이들이 "모든 꽃은 빨갛다" 와 "꽃 몇 송이는 빨갛다" 라는 문장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한 다발의 꽃 중 일부가 빨갛다고 해서 그 꽃다발이 완전히 빨간 것은 아니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많은 수의 동전을 각각 두 개씩 마주보도록 길 게 두 줄로 늘어놓고는 4 ~ 5 세의 아이들에게 각 줄에 있는 동전의 개수가 같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동전의 수가 같다고 '정답'을 말했다. 다음에는 동전의 대열을 흩어놓고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동전의 개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6 세 아이들도 두 줄의 길이를 다르게 해놓고 같은 질문을 하면 줄이 더 긴 쪽에 동전도 더 많다고 대답했다. 피아제는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아직 적절한 '수감각' number sense 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동전의 길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피아제가 '수감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동전이 더 많은가 적은가를 판단할 때 아이들이 동전의 양과 분포라는 두 가지의 감각적 인상을 서로 비교해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감각

당연한 말이지만 전문가도 틀릴 수 있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위대한 발견뿐만 아니라 참담한 실패도 맛보았다. 수감각과 관련해서 피아제는 실제로 상당히 큰 오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온 프랑스의 수학자 드하네 Stanislas Dehaene 는 최근에 발표한 책 『수감각』에서 피아제의 오류를 지적했다. 드하네는 실험자가 4 ~ 5 세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한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발달한 상태라고 말한다. 또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강하고 똑똑하며,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실험자 역시 어른이기 때문에 강하고 똑똑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드하네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게 막강한 인물이 먼저 똑같은 수의 유리컵과 병을 두 줄로 세워놓고 어떤 줄이 더 많으냐고 물은 다음 유리컵의 간격만 조금 바꾸어놓고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연쇄적 사고가 형성된다고 한다.

이 어른이 두 번째로 똑같은 질문을 한 것은 다른 대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과 바뀐 것이라고는 두 줄의 길이가 달라졌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므로 새 질문은 얼핏 듣기에는 마치 수를 문제 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줄의 길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수가 아니라 줄에 기초해서 대답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영국의 수학자 데블린 Keith Devlin 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피아제의 실험을 생각해보았다. 그는 아이들의 생각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음, 이 질문은 방금 전에도 했던 거잖아. 어른들은 멍청한 사람이 아닌데, 더구나 이 남자는 아주 영리해 보이거든. 물체의 수가 바뀌지 않았다는 겉 갓난애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조금 전에 내가 질문을 잘못 이해했단 뜻이군. 나는 이 사람이 물체의 수를 묻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두 줄의 길이를 알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 그것을 바꾸어놓은 거야.

이제 아이들은 어른들이 기대할 것으로 생각되는 대답을 말한다. 그러고는 그 심리학자가 이 관찰결과를 발표할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제를 비웃기 전에 데블린과 드하네의 대답도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니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 좀더 수긍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것이라도 과학의 그물로 건져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고, 또 생각은 얼마나 많은 모서리를 돌아야 하는지 모른다 (주석 : 인지심리학에 관한 이하의 내용은 나의 책 『상식비판』(2002 년) 에 수록된 텍스트를 참조했다.).

수감각, 또는 언제 덧셈이나 곱셈같이 수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기에 앞서 '지능발생학' 과 관련된 피아제의 기본인식 몇 가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심리학자는 사고의 범주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그는 이것이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피아제에게 정신은, 정해진 패턴에 따라 들어와서 외부세계의 정보를 전달해주는 감각적 데이터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장치가 아니었다.

피아제는 인간의 지능을 지각된 현실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으로 생각했다. 두뇌, 즉 정신은 적극적으로 신호를 찾아다니고, 신호에서 받아들인 내용을 유전적으로 형성된 능력을 통해 변형시킨다.

피아제는 인식의 감성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피하고 오직 인지적 능력, 특히 그것이 개체발생의 과정에서 겪는 발달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이런 방식은 1970 년대부터는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연구방식은 철학이 수천 년 동안 찾아내지 못했던 인식론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오직 인간의 성숙한 정신이 소유한 지식과 진리만을 논했을 뿐 그 기원이 어린 정신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18 세기 초반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는, 성인이 되기 전 아이의 본성은 그냥 아이이기를 원한다는 사실과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과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 (특히 볼드윈 James Baldwin) 이 체계적으로 어린 이성의 인지능력을 평가하고 그 성장단계들을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20 세기에 들어서였다. 피아제의 연구가 시작된 뒤로도 20 여 년이 더 지나자 비로소 그의 연구성과들은 인식론적 사고에 뚜렷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자생물학의 선구자로서 1969 년에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델브뤽 (Max Delbrück, 1906 ~ 1981) 의 말이다.

피아제는 처음에 3 ~ 4 세 아이들의 언어적 발달에 연구를 집중했다. 여기서 그는 그전까지 혼란스러운 인상만을 주던 어린아이들의 정신세계에 처음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르면 5 ~ 6 세의 아이들은 기존의 입장이나 태도를 바꾸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형이나 동생이 있는 아이들의 경우 자신도 당연히 다른 형제의 동생이나 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대체로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

손에 잡힌 세계

피아제는 지능의 발달을 타고난 기질이 (수동적으로) 발현되거나 환경의 영향을 통해 (마찬가지로 수동적으로) 각인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정신적 발달은 아이의 내적 추진력 (충동) 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이는 세계를 (능동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타고난 지각능력과 행위능력은 일상의 사물들을 대하면서 점차 실제적인 능력으로 발전한다.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 정돈 (동화) 되고, 또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에 적응한다. 가령 우리가 반사적으로 쥐는 동작 (선천적 능력) 을 통해 새로운 대상, 예를 들어 신발을 손에 쥐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신발을 '쥘 수 있는 대상' 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그밖에도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신발의 형태에 맞게 쥐는 신기술도 습득 (적응) 하게 된다.

이렇게 아이는 먼저 '구체적 활동' 을 실행한다. 즉, 아이는 대상을 손으로 잡아보면서 세계를 '파악' 한다. 그러고 나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이런 행동과 그 결과를 정신적으로 내면화시킴으로써 '형식적 활동' 을 실행하게 된다. 이런 적극적 활동을 통해 아이는 대상을 마침내 '이해' 하게 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마르크스 Karl Marx 의 유명한 문장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에 대비시켜 표현해볼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 문장은 문학에서는, "먹을 게 있어야 도덕이고 나발이고 있다" 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이런 말을 다시 아이들에 맞추어 발생심리학적으로 바꾸어보면 "존재가 아니라 행동이 의식의 생성을 결정한다" 고 말할 수 있다.

인지의 발달단계

피아제와 그의 동료들은 수십년 동안 관찰에 관찰을 거듭한 끝에 아이들이 단계적으로 성장의 각 범주에 도달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초기의 심리학 연구에서 이들은 지능의 발달과정을 나이에 따라 4 단계로 구분했다. 피아제는 이를 1947 년에 발표된 책 『지능의 심리학』에서 상세히 기술했다.

첫 단계에서는 (생후 2 세까지) 이른바 감각운동적 지능이 나타난다. 아이의 모든 생각은 행동을 통해 실현된다. 이때 이런 최초의 행동들은 내면화되고 일종의 초기 형태의 이해로 전환되어 직관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흔히 '실재성' 으로 표현하는 사고의 특징은 이런 초기단계 (감각운동단계) 에서 생겨난다. 감각운동단계에는 또한 대상의 개념이 형성된다. 이 시기의 갓난아기들은 대상의 지속성을 배운다. 대상의 지속성이란 예를 들어서 머리빗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곧이어 수건 속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에도 여전히 동일한 대상이란 뜻이다. 더 나아가서 빗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것은 절대 당연한 사실은 아니며, 아이들이 처음부터 이를 아는 것도 아니다. 수건 속에 감춘 머리빗은 갓난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의 아기들은 아무도 그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기의 운동 능력들이 협동작용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오늘날 많이 주장되는 가설이다) 아니면 피아제가 생각했듯이 아예 그럴 생각을 못하는 탓이다. 피아제는 아이들이 감각운동기의 끝 무렵에야 비로소 대상의 지속성을 이해한다고 보았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이러한 대상의 지속성을 통해 생명의 개념도 갖게 된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대상 (예를 들어 문 뒤편으로 굴러간 공) 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대상을 지속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무의식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공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다. 이때 감각이 제공한 인상은 처음으로 억제되고, 사고력과 그 구조들이 점차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지만 다음 단계에서 볼 수 있듯이, 지각능력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전히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피아제는 이것을 상징적이고 직관적인 사고의 단계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사물들

지능발달의 초기에 아이들은 대상의 지속성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그와 동시에, 아니면 그보다 앞서, 아직 보지 못한 모든 대상들도 이미 알고 있는 대상들과 똑같이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예를 들어 공이 하나의 사물이듯이 원자도, 비록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의 사물일 수 있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공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나 유전자, 원자 따위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건강한 인간이성, 즉 상식은 그런 것들이 원칙적으로 일상의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원자는 작은 공이 아니다. 에너지는, 우리가 매월 그 사용료를 내고 있지만, 주머니 속에 넣거나 쓰다듬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에너지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에너지에 대한 생각은 19 세기에 처음으로 물리학에서 발전되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의 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개념이 되었다. 현재 우리들은 에너지를 구체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거기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인식의 세계에 그와 같이 사고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개념이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반가워한다.

양의 불변성

감각운동기 다음 단계가 되면 3 ~ 7 세의 아이들은 상징을 다루고 직관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점차 기억된 내용으로 말하기 시작하며 유추능력도 사용한다. 상징적 사고는 대개 모방과 더불어 시작되며 그것이 점점 더 내면화되면서 더욱 발달한다.

이 단계에서도 감각적 경험은 아직 사고보다 우위에 있다. 피아제는 이 단계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명한 실험을 실시했다. 그것은 액체를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쏟아붓고 난 뒤 양의 변화를 묻는 실험이었다. 이때 액체의 양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 (물론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약간의 양적 소실은 무시한다) 은 성인에게는 자명하다. 하지만 이 발달단계에 있는 아이들은 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알 수 있다. 4 ~ 5 세의 아이들은 액체표면의 높이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감각적 인상이다) 를 보고 속아서 판단을 내린다. 가늘고 긴 유리용기에 든 액체를 넓은 용기에 부으면 이 또래의 아이들은 물의 양이 전보다 적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들보다 나이가 한 두 살 더 많은 아이들은 (이들도 아직 상징적 사고단계에 있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변수가 두 개 이상일 경우에만 양의 불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질의 불변성

다음 단계에서 사고는 드디어 감각적 인상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양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는 것을 쉽게 안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아도 양의 불변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터득한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피아제의 인지발달에서 3 번째 단계에 속한다. 여기에는 구체적 조작단계라는 명칭이 붙는다. 이 단계는 10 세가 넘어서까지 지속되며, 아이들에게는 이제 서열과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이들은 또한 양의 등가성과 수의 개념을 이해하고, 무게나 부피와 같은 지속적인 특성도 파악할 줄 알게 된다.

이 발달단계에 이르면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물리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들을 꼬마 과학도로 만든다. 이들은,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원자에까지 이르는 과학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은 점차 물질이 불변성에 대한 생각을 키워간다. 설탕이 찻잔 속에서 녹아서 형체가 이미 사라져버려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존재한다.

피아제는 찰흙 공을 이용한 실험에서 아이들이 물질의 불변성에 대해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똑같은 크기의 찰흙 공 두 개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이 두 개의 공 안에 똑같은 양의 찰흙이 들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중 한 개는 속이 비었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작은 공이 들어 있었다. 위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3 단계의 아이들은 '양' 의 불변이며 이것은 형태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것이 '무게' 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9 ~ 10 세가 되면 비로소 무게가 형태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찰흙의 '부피' 가 아무리 형태를 바꾸어도 똑같이 유지된다는 '부피의 불변성' 을 이해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해에 차이가 나는 것은 감각적 인상 때문이다. 양은 무게보다 눈으로 구별하기가 쉽다. 하지만 무게도 (근육을 이용하면) 손쉽게 경험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찰흙의 부피는 감각적으로 경험하기가 훨씬 어렵다. 우선 측정할 수 있는 용기나 도구가 필요한데다가 그렇게 해도 간접적인 경험만 가능할 뿐이다.

10 ~ 11 세의 아이들은 부피가 형태와 관련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찰흙의 모양이 변하면 그것의 단단함, 즉 밀도도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찰흙이 탄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긴 찰흙 막대는 동그란 찰흙 공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감각적 인상 때문에 찰흙 막대의 부피가 더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나이를 지났기 때문이다.

이런 부피의 불변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찰흙의 성질, 즉 마음대로 주물러서 모양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또 조그만 입자 (원자) 들이 수없이 모여 찰흙이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의 밀도와 관련하여 아이들이 물체를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상상한다는 사실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쉽게 입증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작은 쇳조각과 그보다 부피는 더 크지만 가벼운 코르크 조각을 하나씩 주고 왜 작은 것이 더 무거운지를 물어보라. 그러면 12 세 정도된 아이들은 원자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것은 쇳조각이 더 단단하고 속이 꽉 찼기 때문'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녹아버린 물질

소파 뒤로 들어간 공은 다시 꺼낼 수 있고, 찰흙 막대도 다시 공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찻잔 속에서 녹아버린 설탕은 쉽사리 원래의 형태로 만들 수 없다.

아이는 두 살이 되면 이미 어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녹아버린 설탕을 간단한 공간적 조작을 통해서 다시 원래의 형태로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다. 설탕의 용해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조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는 훨씬 나중에야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3 단계 초기의 아이들은 (이 시기는 구체적이고 조작적인 사고력을 특징으로 한다) 녹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설탕은 이제 없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8 ~ 9 세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설탕이 아직 그 안에 있다고 믿게 된다. 아이들은 그 안에 있는 설탕이 아주 작은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며, 그 입자는 아무런 무게나 부피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12 세 정도는 되어야 녹아버린 설탕이 무게나 부피를 전혀 잃어버린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첫 번째 평행선

아이들이 녹아버린 설탕을 보며 물질의 불변성을 비교적 쉽게 인정하는 것은 차의 단맛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은 매우 일찍부터 사라져버린 설탕이 어떤 모습일지를 순전히 질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때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얻은 모습들을 떠올리며 설탕이 먼지나 빵부스러기와 같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곧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설탕이 녹아서 액체가 되어버린 모습도 등장한다.

물질의 구성과 관련하여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나란히 발전하는 이런 두 가지 생각은 흥미롭게도 과학사에서도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바로 데모크리토스가 처음으로 주장한 물질의 원자 모델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하는 물질의 연속성 모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이 세상에 원자와 빈 공간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도 빈 공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액체 모델은 곧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뒤편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세계가 온통 작은 입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 아이들을 14 세까지 지배한다.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보다 더 간단히 머릿속에서 그려질 수 있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과학사에서도 곧 매력을 상실했다.

여기서 우리는 지능발달의 유사성 parallelism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이 자신의 성장을 위해 기어올라야 하는 사다리와 인류가 그들의 발전을 위해 한 걸음씩 기어올라야 하는 (건너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사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삶과 인류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유사성을 우리는 이미 비코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비코는 인류의 역사에서 3 개의 '시대' 를 발견했으며, 이를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처음에 인간은 지각이 없이 받아들이기만 했고, 그 다음에는 놀랍고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관찰했으며, 마지막으로 명료한 정신과 더불어 성찰을 했다.

여기서 '공통감각' 의 개념을 다시 떠올려서 피아제의 도식에 대입해보면 우리는 이것을 아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공통감각 common sense, 즉 상식은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정신적인 조작' 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신의 이런 '구체적 조작' concrete operation 능력은 우리의 생물학적 유산의 일부이며 진화의 틀에서 생겨난 것이다.

마지막 단계

이제 인지발달의 네 번째이자 (피아제에 따르면) 마지막 단계를 살펴보자. 이 단계는 형식적 조작의 시기로서 '상식' 을 넘어선다. 12 세가 넘으면 아이들은 자기 주변의 세계가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청소년이 된 아이들은 가정과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오직 가설적인 전제만을 가지고서도 연역적 규칙을 이용하여 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가능성으로부터 사실을 구분해낼 수 있게 된다.

이 단계부터는 점차 정신의 게으름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작은 발전이라도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점부터 우리는 크든 작든 스스로의 힘을 발전해나가야 한다. 이전에도 간단히 주어지는 것은 없었고 모두 스스로 구성해야 했지만,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없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과정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수백 년이 넘게 걸렸다.

인지발달이 이처럼 4 단계에 걸쳐 목표에 도달한다는 피아제의 이론은 오랫동안 확고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결국 심리학자들은 성인의 시기로 이행하는 그 다음 단계도 찾아냈다. 우리의 지능은 16 세 이후에도 계속 발달한다는 것이다. 피아제는 이 나이에는 이미 성인의 정신이 완성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5 번째 단계에서 본성은 우리를 완전한 탐구의 자유에 내맡기기에 앞서 아직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부여한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4 단계에서 이미 습득한 가설수립의 능력을 고려해볼 때 지극히 당연하게 제기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에서 출발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두 개의 서로 다른 추측 또는 설명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는가? 가령 누군가가 테니스를 잘 치거나 피아노를 잘 친다면 그것은 고된 훈련의 결과인가 아니면 재능의 덕택인가? 그리고 이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창조자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단순히 빅뱅의 결과인가?

이런 양자택일의 문제를 일단 염두에 두고서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가설은 항상 서로 대립하며 시비를 가리고자 한다. 결정은 특히 행동이 요구될 때 (그것이 비록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이라 해도) 필요하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양자택일 안에 모두 일정 부분의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안다. 성공은 물론 고된 훈련의 대가이지만 재능 역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가지 견해에 어떻게 반응할까? 3 단계까지 아이들은 서로 다른 설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틀리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대부분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며, 부모나 친구와 같은 외부의 견해에 뚜렷하게 영향을 받는다. 4 단계에서는 그 어느 쪽의 설명도 아이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이들은 대개 부정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가령,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갈고 닦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또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재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아이들은 두 가지 설 (재능이냐 노력이냐, 창조냐 빅뱅이냐) 을 종합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방식의 결합 가능성을 찾아내든 내부로부터, 즉 나름의 생각을 통해서 그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아이들은 이제 대립되는 관점을 보완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설을 찾고자 노력한다. 16 세가 넘어가면서 아이들은 두 가지 이상의 견해나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높은 단계의 사고력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불확실성의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를 견뎌내면서 아이들은 '인생' 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처음의 생각이 언제나 끝까지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그것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불확실성은 통찰의 전 단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지식을 통한 세계의 정복이 시작된다.

상상 속의 힘

과학적 인식은 상식의 단계를 넘어 발전해 나간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아이들의 지능발달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은 이런 진행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과학의 발전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장애는 아이들의 지능발달을 저해하는 장애와 원칙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시간적) 과정의 유사성은 피아제가 실시했던 운동과 자극의 연구에도 이미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어린아이와 과학의 발전과정을 정확히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 사용하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물리학자들이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과학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개념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유사성의 문제는 개체의 생물학적 발달 (개체발생) 이 종의 진화과정 (형태발생) 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널리 알려진 주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헥켈 Erich Haeckel 이 처음 주장한 이런 '생물발생법칙' biogenetic law (여기에는 많은 제한조건과 보완이 필요하다) 은 확고한 유전 메커니즘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종의 생물학적 진화는 유전자의 분자적 구조 안에 흔적 (기록) 을 남기며, 개체의 발생 또한 유전자의 정보를 통해 통제되고 실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는 유전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성장하는 개체는 조상의 육체적 형식을 물려받을 수는 있지만 무형의 생각은 물려받을 수 없다. 아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간혹 주장되는 것처럼) 과학의 발전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종류의 반복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반대로 과학이 아이들의 발달을 반복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이나 과학이나 발달과정에서 비슷한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양자의 이런 유사성은 아이의 경험이 언제나 시간적으로 어른의 경험에 선행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어린아이였을 때가 있다) 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다소 이해하기가 쉽다. 둘의 정신적 발달이 나란히 진행된다고 할 때 그것은 상이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발달의 원칙적인 일치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인지적 발달의 이와 같은 유사한 전개는 정신이 고유한 발달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을  관찰하려면 우리는 그 발달과정을 위로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운동 분석에 이러한 인지적 발달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역사적으로 역학 mechanics 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텔레스는 대상의 운동에 작용하는 원인으로 특이하게도  외적 힘과 내적 힘의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내적인 힘이라는 생각이 다소 낯설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런 힘은 어린 시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가령 팔을 들어올려 돌을 던질 때 이런 내적 힘이 사용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생명이 없는 물체에도 이런 내적 힘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으며 따라서 모든 형태의 운동을 목적과 결합시켰다 (그는 근본적으로 힘을 생명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으며, 생명을 외적 질료와 내적 형상인 '에이도스' eidos 로 구분했다).

내적 힘에 관한 이런 생각은 운동 분석의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이 시기의 아이들은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이 구체적인 어떤 장소에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흔히 바람이 나무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나무가 자기 힘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이들은 물리학에 대해서, 즉 운동과 힘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 단계의 사고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은 운동이 끝나는 자연스러운 지점, 즉 물체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지점에 도착하는 과정에 대한 생각에서도 나타난다. 아이들에게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가령 돌멩이가 운동을 끝내는 지점은 땅바닥이고, 연기가 운동을 끝내는 지점은 공기 중이란 사실은 아이들에게는 자명하다. 이때 공기는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으며, 이런 운동을 추진하는 힘의 문제는 아예 아이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다.

운동 분석의 2 단계는 서로 부딪히게 배열된 구슬들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구슬 한 개는 궤도에 고정되어 있다. 이 구슬은 움직이지 않는 중간요소로서 한쪽에서 구슬이 굴러와 부딪치며 가한 충격을 반대편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다른 구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전달' 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아이들은 굴러온 구슬이 고정된 구슬에 부딪친 후 가만히 정지하고, 그 대신 반대편의 가만히 있던 (그러나 고정되지는 않은) 구슬이 운동을 시작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가?

1 단계의 아이들은 이것이 '전염' 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아주 유기적인 상상력이다. 마지막 구슬이 전염되고 나서 (여전히 제 힘으로) 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3 단계의 아이들은 운동하는 구슬이 추진력을 발생시키면 그 힘이 고정된 가운데 구슬을 거쳐 정지해 있는 세 번째 구슬에 전해져 그 구슬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추진력' impetus 이라는 개념은 아주 명확하게 내적인 힘과 구분된다. 이때 아이들은 하나의 중간 단계, 즉 2 단계를 거쳐 이 개념에 도달한다. 2 단계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내적인 힘이라는 개념에 기대지는 않지만, 아직 이런 추진력과 외부의 힘을 구분할 줄 모른다.

아이들의 이와 같은 발달단계는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하여, 그의 주석자로 그라마티코스 Grammatikos 라 불렸던 6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필로포노스 Johannes Philoponos 를 거쳐, 14 세기 프랑스의 철학자로 '추진력'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뷔리당 Jean Buridan 으로 이어지는 발달과정과 연계된다.

다시 한 번 요약해보자. 우리는 개체발생과 과학적 발전의 정신적 유사성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과학적 지식의 발달은 아이들의 사고단계의 발달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이들이 운동의 원리를 학습하는 과정을 추적해 나가면서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생각함으로써 발생하는 혼동을 관찰하게 된다. 3 단계에서 아이들은 추진력을 운동의 원인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4 단계에 가면 완전히 뒤바뀐다. 이단계에 도달하면 아이들은 마침내 추진력이 외적인 힘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인과관계의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은 가속도를 발견할 수 있었고, 마침내 뉴턴적 표준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들은 이제 4 단계에 이르러 추진력을 단순한 (가속되지 않은) 운동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성인들에게도) 운동을 동일하게 유지되는 속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속도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쉽다. 이것이 바로 상식이다.

정신발생학적으로 가속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동안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도 추진력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힘든 여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지적 능력이 완전히 성장한 후에도 우리가 고전물리학자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인이 되어 주변세계를 둘러볼 때 우리는 패턴이 고안해낸 물리학적 세계상을 다소 불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유클리드가 고안한 기하학적 세계상은 그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우리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유클리드기하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될 때의 놀라움이다.

성인의 세계

아이들은 먼저 객체에 대해서, 즉 자신의 위치와 무관하게 지속성을 지닌 대상에 대해서 배운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아이들은 대상이 자신의 관찰과 무관하게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객체가 더 이상 자기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안다. 유리구슬을 통에 넣고 그 통을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고 해도 두 살짜리 아이는 그것을 (정신적인) 눈에서 놓치지 않으며, 필요할 때면 즉시 그것을 찾아낸다.

이렇게 매우 일찍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객체의 지속성을 확보함으로써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유 속의 대상들 (원자, 에너지, 화학적 결합 등등) 을 구체적인 사물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나중에 원자와 그 구성요소들이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사물의 관념이 이렇게 현미경 속 영역까지 확장된 것은 우리의 상식에 각인된 객체 개념에 기인한 것이다. 상식적 객체 개념의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하는 첫 번째 객체가 어머니라는 살아 있는 존재란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바라보면서 발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처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존재로 여긴다. 현실을 생명을 지닌 것으로 보는 시각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여러 초기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그리스인들 (아리스토텔레스) 에게, 그리고 도교나 힌두교에서 자연은 각각의 부분과 운동이 모두 적절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 조화로운 '유기체' 로 이해되었다. 이런 유기체적 패러다임은 (익숙지 않은) 비유기체적 과정들에 (익숙한) 생리학적 기능을 부여하여 이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자연에 대한 유기체적 관념은 19 세기 초에 다시 등장했다. 특히 독일에서 자연은 정신을 통해 혼이 불어넣어지고 조절되는 유기체로 이해되었다. 자연세계의 규칙성을 이렇게 어떤 유기적 존재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매우 편하고 자연스럽다.)

이런 객체의 개념과는 별도로 우리에게는 또한 공간을 기하학적 단위들을 통해서 분석하는 인지능력이 생겨난다.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운 '기하학적 능력' (이것은 피아제가 인헬더 Bärbel Inhelder 와 함께 발표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은 우리가 가시적인 공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발달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대부분 견고한 물체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 물체들의 확고한 형태는 직선으로 진행하는 빛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스스로의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얼마인가라는 문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세 각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도록 여러 조각을 붙여서 만든 삼각형이 있다. 아이들은 여기서 삼각형의 세 각이 서로 이웃하도록 조각을 배치하여 세 각의 합이 180 도란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나이가 6 세 이상인 아이들은 삼각형의 조각들을 이런 식으로 밑변이 일직선 (180 도) 이 되도록 이어 붙여 이것이 세 각의 합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 아이들은 두 조각, 즉 두 개의 각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도 일직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익숙해진 후에도 아이들은 다른 삼각형으로 다시 이런 180 도의 직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에 상응하는 귀납적 반응은 7 ~ 8 세의 아이들에게서 비로소 관찰할 수 있다. 이제 아이들은 한 각이 작아지면 다른 각은 커진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한다. 삼각형들의 크기가 비슷할 때 아이들은 한결 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점차 아이들은 스스로의 사고력을 통해 삼각형의 크기가 더 커져도 각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 세 정도가 되면 아이들은 이런 일반화의 과정을 모두 완수한다. 이제 아이들은 삼각형의 각을 모두 합하면 '항상' 일직선의 형태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와 관련된 발달과정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피아제는 10 세 이후에 급속한 발달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이제 불가피한 필연의 감정을 얻게 된다. 세 각을 합하면 '항상' 일직선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직선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는 이제 두 각이 직각이면 삼각형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도 명확해졌다. 이런 경우 삼각형 대신 두 개의 평행한 직선이 생겨난다. 이 두 직선은 결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으며 둘 사이에는 어떤 각도 생겨날 수 없다.

유클리드가 2 천여 년 전에 가르쳤던 기하학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생물학적 발달은 우리가 완벽하게 유클리드적이라고 여기는 세계를 제시했다. 우리는 현실이 유클리드가 묘사한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를 들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 도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학습된 경험들을 확고한 믿음으로 머릿속에 고정시켜 놓았다. 세계는 절대로 다를 수가 없다.

비유클리드적 현실

칸트도 이미 이와 비슷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인식론에 관한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항상 성인의 두뇌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미 인지발달과정이 종결되어 유클리드적 세계상이 완성된 성인 (또는 청소년) 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유클리드기하학의 타당성이 어디서 연유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칸트는 이를 통해 제시된 세계사이 관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적 직관 자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유클리드기하학은 공간적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칸트의 이런 논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암묵적으로 유클리드기하학이 진리임을, 그것이 세계를 올바르게 기술하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이 유클리드기하학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기하학적 세계상은 그처럼 직관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우주는 비유클리드적이고 휘어져 있다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19 세기의 수학자 리만 Bernhard Riemann 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의 상식은 물론 이렇게 제시된 휘어진 공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이런 부조리한 생각을 잠재울 논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논리들은 상식의 또 다른 취약점을 드러낼 뿐이었다.

가령 어떤 철학자들은 유클리드기하학에 들어맞도록 사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완벽하게 평평한 평면을 완성하려면 먼저 대략적으로 평평한 평면을 두 개 만든 뒤, 두 개의 평면을 서로 마주 붙였을 때 동시에 모든 지점에서 접촉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표면을 다듬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런 식으로 세 각의 합이 정확히 180 도인 삼각형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 유클리드기하학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물질도 완벽하게 단단하지 못하다는 (상식적인) 사실에 부딪혀 좌초되고 만다. 항상 형태가 일그러질 수 있으며, 아무리 미세하게 일그러진 것이라도 유클리드기하학과의 괴리를 드러낼 수 있다. 게다가 이 주장을 좀더 정확히 분석해보면 '접촉' 이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정확히 정의하려면 원자 차원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원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접촉' 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

이제 다시 시간의 범주로 돌아가보자. 시간의 진행을 추적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완전히 성공할 수도 없다. 이는 시간이 감각을 통해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의 공간을 눈으로 본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은 볼 수가 없다. 시계를 볼 때에도 우리는 바늘의 공간적 위치 (또는 숫자) 를 볼 뿐이다. 그러므로 이때 시간은 공간적으로 전달된 단위이다. 우리가 (특히 어린아이로서) 직접 관찰하는 것은 대상들의 움직임과 그 속도이다. 피아제와 그 동표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은 처음에는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시간의 진행을 대상의 움직이는 속도와 자주 혼동한다.

시간을 분석하는 또 다른 어려움은 물리적 시간 (이 시간은 사건과 동시에 또는 사건의 결과로 표현된다) 이 체험된 시간 (이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이나 나이를 먹어가는 것과 같은 연속적 진행으로 표현된다) 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시간은 이와 또 다른 것으로 조작적 시간이라 불린다. 이것은 물리적 시간과 체험적 시간 사이의 관계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서 인지적 조작에 근거한다.

시간의 심리학에 관한 또 다른 연구들은 속도가 일차적으로 파악되는 직관적 범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 직관을 통해 아이들은 따로따로 거리와 시간을 구성한다 (7 세가 될 때까지 시간은 완전히 직선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아이들은 속도상승의 효과를 지나온 거리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평가한다. 아이들에게 시간은 거리와 속도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두 단위를 서로 나누면 시간이 생겨난다는 것을 아이들은 10 세가 지나면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런 연구들은 시간과 속도가 처음에는 별개의 단위로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뒤 점차적으로 종합된다는 피아제의 기본적인 관찰결과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고 나면 두 단위는 근본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지며, 이와 함께 우리의 상식은 모든 사건의 연속에 대한 개인적 시간을 구성한다. 하지만 상식이 구성하는 시간은 고전물리학이 생각했던 보편적 시간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타당한 순서

지금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시간은 우리 모두를 담고 있는 결코 찢어지지 않는 신비의 자루와도 같은, 즉 실존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운동의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좌표, 즉 인과성 causality 의 이념을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시간 이념은 정확히 분리되어야 한다.

인과성 개념은 두 가지 뿌리에서 나온다. 그중 한 가지 뿌리를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에 이미 욕구와 바라던 결과의 결합을 통해서 알게 된다. 아기들은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를 먹고 싶을 때 소리를 지르며 운다. 그러면 엄마는 얼른 안아서 젖을 물려준다. 소망 - 행위 - 성과의 이와 같은 결합은 인과관계의 관념으로 이어지는 작용구조에 대해서 아직은 선명하지 못한 어떤 느낌을 만들어낼 것이다. 두 번째 뿌리는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 박혀 있다. 즉, 엄마가 웃옷 단추를 풀면 먹을 것을 얻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이와 같은 인과적 형식은 비언어적 개념으로서 어른들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과적 사고형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둘은 모두 직선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언제나 하나가 다른 하나에 뒤이어 나타난다.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난 것은 우리의 직관적 이해에서도 벗어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들에게는 일단 욕구가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구름이 무엇 때문에 하늘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이를 욕구와 연관시켜 대답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명령에 연관시킨다). 이런 욕구는 도처에서 나올 수 있다. 형제나 달님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서 나올 수도 있다. 상식의 범주 내에서 인과성에 대한 이런 생각을 성인이 될 때까지 유지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중심 욕구, 즉 창조자의 욕구에 의해 좌우되는 우주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될 것이다.

원인의 개념은 이렇듯 자신의 고유한 활동감정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로써 인과성과 목적성의 개념은 처음부터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을 분리하고, 모든 자연적 현상의 배후에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하는 태도를 갖지 않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상식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의 원인을 살펴볼 때 이 문제와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인과성의 발달과정에서 피아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기에 주목했다. 여기서 이 개념의 뿌리는 자아의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엄마의 젖가슴을 발견했을 때 아이는 '젖을 먹는다' 는 목표에 도달한다. 목표는 '나는 젖을 먹고 싶다' 가 아니다. 여기에 자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아직 객체로만 이루어져 있고, 오직 성인 관찰자만이 아기의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손이 아이의 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아이 자신은 자기 두 손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객체로 볼 뿐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객체 개념의 지속성이 확보되면서 바뀐다. 2 세가 되기 전에 아이들은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완결짓는다. 세계는 이제 주체와 객체로 나뉜다.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자기 움직임의 원인이자 지배자란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전달된 에너지

욕구와 결과의 결합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인과성은 어떤 물리적 결합도 없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과성은 어느 정도 마술과도 비슷하다. 마술사는 관객들에게 사건의 실제적 사슬을 감추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마술쇼에서 펼쳐지는 모든 신기한 일들에 실제로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술사가 보여주는 작용들에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사건들의 사슬에서 한 고리가 다른 고리의 원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영국의 철학자 흄 (David Hume, 1711 ~ 76) 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사건이 진행되는 규칙적인 순서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술을 볼 때 놀라는 것은 몇 가지 순서들이 다른 순서들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탓이다.

바로 이와 같이 상식은 인과성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어진 사건들 사이의 연결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성인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그리고 비이성적으로 유지한 사람은 완전히 결정론적인 우주관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모든 것은 항상 다른 것에 뒤이어 나타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흄의 비판적 견해는 매우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렸고, 그후로 많은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불필요한 원인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되었다. 이제 '무엇 때문에' 란 질문 대신에 '어떻게' 가 더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인과적 관계 (예를 들면 돌을 던져서 유리창이 깨지는 것) 와 밤과 낮 같은 시간적 연속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일까? 대답은 '구분할 수 있다' 이다. 이 답을 로렌츠 Konrad Lorenz 는 1941 년에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어떤 형태의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천둥은 번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천둥은 번개와 같은 이유에서 발생한다. 즉, 하늘과 땅 사이에 전기적 방전이 일어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방전으로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이 에너지의 전달이 인과적 결합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이 간단한 인과성의 근거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간과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거의 연구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에는 인과적 결합 (원인지향) 과 시간적 결합 (과거지향)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언어사용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사건 A 와 B 사이의 논리적 결합만이 있다. 언제나 돌에 맞으면 깨진다' 뿐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이제 사고의 발달에 관한 관찰을 끝마치고 사고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다시 수감각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는 사고의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해주는 많은 실마리들이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어린아이들의 능력은 매우 과소평가되고 있다. 피아제가 4 ~ 5 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한 뒤 이들이 아직 제대로 된 수감각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사람들은 이 방면의 전문가든 문외한이든 아무도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흔히 말하듯이, 아이들은 어리석은 존재이니까. 심리학자가 만약 2 살짜리 아이들이 뛰어난 수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실험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2 살짜리 아이들도 이미 수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이 '놀라우리만치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증명되었다. 아이들과 아무런 언어적 소통이 없이 이루어진 이 실험을 데블린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심리학자들 (보스턴 출신의 밀러 Jacques Mehler 와 비버 ,Tom Bever) 은 병과 컵 대신에 사탕을 두 줄로 늘어놓았다. 첫째 줄에는 4 개의 사탕이 놓여 있고 둘째 줄에는 6 개가 있다. 양쪽 줄의 사탕들은 각각 다른 간격으로 배치되었으며 줄의 길이도 서로 달랐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둘 중 어느 줄에 사탕이 더 많으냐고 묻는 대신 마음대로 한쪽 줄을 선택해서 놓여 있는 사탕을 먹도록 했다. 결과는 모든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형태로 나왔다. 모든 아이들이 여섯 개의 사탕이 있는 줄을 선택했다. 줄의 길이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아이들은 어느 줄에 사탕이 더 많은가 뿐만 아니라, 사탕의 수와 배치방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까지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결과는 2 세나 4 세 아이에게서 모두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놓고 우리는 수감각이 천성적인 것인지 아니면 관찰을 통해서 습득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 대한 대답도 발견했다. 그들은 우선 생후 4 ~ 7 개월 사이의 젖먹이들이 점 2 개와 3 개를 구분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보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생후 며칠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들조차도 이러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실험은 갓난아이들을 엄마의 무릎에 앉힌 뒤 앞에 세워놓은 스크린에 2 개 또는 3 개의 점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도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특성, 즉 아기들이 새로운 것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성향이 이용되었다. 실험의 측정단위로는 아이들이 각 점에 시선을 주는 시간이 사용되었다. 실험에서 3 개짜리 점을 계속해서 보여주다가 2 개짜리로 화면을 바꾸면 아기는 여기에 주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밖에도 '마투다' 라는 무의미한 3 음절의 소리를 계속해서 들려주다가 똑같은 음질로 '도마' 라는 역시 무의미한 2 음절의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아기는 훨씬 더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아이들이 수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의 신호들이 뇌 안에서 상이한 신경세포들 또는 신경절들을 활성화시켜서 수량의 차이를 지각할 수 있게 만들 것이란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런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갓난아기들이 수를 인식할 뿐 아니라 계산도 할 수 있는지를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을 실시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절한 실험 방법을 개발하는 일이다. 심리학자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한 가지 중요한 관찰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마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이런 관찰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 현상, 즉 '물리학의 법칙과 모순되는' 현상을 볼 때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술사가 마치 인과의 법칙을 넘어선 듯한 행동이나 묘기를 보일 때 어른들이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갓난아기들도 공이 방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아기들은 대개 공에 매달린 가느다란 줄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기들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는 주변의 다른 물체들보다 이 공을 더 오랫동안 바라본다.

무언가를 쳐다볼 때 아이들은 그것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때 놀라움을 표시한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의 기대반응에서 힌트를 얻어 실험을 고안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주었다. 인형극에서는 처음에 2 개의 인형이 등장하여 우산 뒤로 사라진다. 잠시 후 우산을 치우면 하나 또는 두 개의 인형이 다시 시야에 등장한다. 만약 아기들이 계산능력이 있다면 인형 하나하나를 좀더 오래 응시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같은 인형극 실험에서 이번에는 인형을 3 개 등장시켰더니 아기는 전보다 좀더 오래 (1 초 정도 더) 인형을 쳐다보았다.

비슷한 실험에서 사람들은 아이들이 덧셈뿐만 아니라 뺄셈도 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아기들이 다룰 수 있는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실험에서는 2 - 1 = 1 의 계산만이 실시되었다. 심리학자들은 심지어 아이의 뇌가 수와 관련된 감각적 신호에 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인형극 실험에서 우산 뒤로 사라진 2 개의 인형을 2 개의 공으로 대체한 뒤에 다시 나타나게 했을 때 아이들은 별로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2 개 대신에 1 개의 공을 나타나게 했더니 아이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 실험은 피아제가 내놓은 양의 불변성 이론도 뒷받침해주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대상 자체 (형태나 색깔, 장식 등등) 보다 대상의 수가 더 중요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직 한 살이 안 된 아이들은 4 미만의 수에만 관심을 보이므로 실험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3 보다 더 큰 수는 나중에야 배우는데, 이는 아이에게 정말 의미심장한 발전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로써 아이는 동물들이 멈추어선 경계를 뛰어넘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만이 침팬지의 능력을 뛰어 넘는 수준의 수감각을 발전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돕는 것은 어떤 특성인가?

머릿속의 숫자

갓난아기들이 1 개의 인형과 2 개의 인형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해서 아이들의 머릿속에 숫자 같은 것이 들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그런 것을 지니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심리학자들은 어른들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숫자를 다루는지 먼저 연구했다. 얼핏 듣기에는 간단한 연구가 될 것 같지만, 우리가 오늘날 '수' 라는 단어에서 1870 이나 4711 또는 0 부터 9 와 같은 숫자들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이런 기호들은 '제 3 의 원숭이' 들 (인간을 진화적 혈통에 근거해서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이 3 보다 더 큰 수를 배우기 시작한 발달초기에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신적 수준이 낮거나 시야가 좁을 사람을 가리켜 흔히 '셋까지도 못 세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3 이상의 수를 배워서 '하나, 둘, 셋 그리고 많이' 로만 표현되던 '많은 수' 를 셀 수 있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진화과정에서 서서히 발달하기 시작한 손가락이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자기 손을 잘 볼 수 있어야만 손가락으로 세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배우기 위해서 아이들은 오늘날에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손가락의 도움을 받아 수를 세기 시작한다. 이런 보조수단을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종종 사용한다. 오늘날 자주 사용되는 '디지털' digital 의 어원인 라틴어 '디기투스' digitus 가 원래 손가락을 뜻하는 말이라는 사실도 이런 손가락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디지털시계는 시간을 두 개의 바늘이 아닌 숫자로 보여주는 시계이다. 그밖에도 두뇌연구자들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계산을 할 때 뇌에서는 손가락의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손가락과 더불어 셈을 시작했을 것이며, 셈의 결과를 표현하고 기록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과 체계도 어느 순간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표기방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라비아숫자' 가 그것이다. 손가락이 아닌 10 개의 기호를 사용하는 이 수체계는 1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도에서 발전되어오다가 7 세기에 아라비아 (이슬람) 수학자들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 수체계가 유럽에 본걱적으로 정착된 것은 1200 년 무렵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0, 1, 2, 3, 4, 5, 6, 7, 8, 9 라는 형태의 숫자를 처음으로 유럽에 퍼뜨린 사람은 이탈리아의 피보나치 Fibonacci 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 "숫자가 어떻게 머릿속에 자리잡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머릿속 수의 질서는 이 숫자들을 통해서만 탐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서도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실험은 실험대상자에게 2 개의 숫자를 제시하고 어떤 숫자가 더 큰가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3 은 2 보다 큰가? 8 은 9 보다 큰가?

실험자는 실험대상자들이 이렇게 쉬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측정하여 숫자가 커질수록 대답하는 데 걸린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령 79 와 63 또는 72 와 69 를 비교하게 하는 등 질문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어 여러 번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숫자들이 차례로 늘어서 있는 '내면의 자' 를 사용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우리 머릿속에는 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한 방향으로 줄지어 늘어선 숫자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숫자들이 진행하는 방향 (오른쪽, 왼쪽) 이 우리가 읽고 쓰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방향은 우연히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여기에는 어떤 더 깊은 맥락이 작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실험결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 (아라비아어는 이렇게 쓴다) 의 경우, 내면의 자에 늘어선 숫자들도 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시 말해서 셈하기와 말하기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와 수학적 기본능력 사이에도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계산능력이 언어능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관찰되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실험대상자들에게 간단한 계산문제를 두 가지 언어로 제시했다. 즉, 한 번은 실험대상자들이 수업을 들을 때 사용했던 언어로, 또 한 번은 그렇지 않은 언어로 문제를 제시했다. 그러자 제시된 언어와 수업에서 사용된 언어가 다른 경우 해답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값을 계산해야 할 때만 그랬다. 대략적인 결과만 말해도 되는 경우에는 문제를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계산을 할 때 일차적으로 선천적 수감각이 작용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대략적인 값만 제시할 경우 사람들은 언어의 도움 없이 선천적인 수감각만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 하지만 정확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 수감각은 언어능력에 의지하여 정교한 값을 계산해낸다. 실제로 최근에 두뇌연구자들은 실험대상자가 정교한 값을 계산할 때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조직의 부위 (전전두엽 prefrontal 영역) 가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실험결과가 옳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국어가 초기의 계산능력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이를 질문의 형태로 바꾸어 말해보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수학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존재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대답이 충분히 가능하다. 국제적인 산술테스트에서 동양의 아이들이 항상 서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서유럽의 언어에서 상당히 복잡한 숫자어들이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11 과 12 를 아시아 언어에서는 '십 - 일' 과 '십 - 이' 로 간단하게 쓰는 반면에 독일어에서는 '엘프 elf' 와 '츠뵐프 zwölf' 라고 별도의 개념을 사용하여 쓴다. 중국의 숫자어들은 전체적으로 아라비아숫자의 구조와 잘 맞아떨어진다. 예를 들어 숫자 25 (영어로 'twenty five') 를 한국어에서는 아무런 새로운 개념 ('zwanzig' 나 'twenty') 을 끌어들이지 않고 간단히 '이 - 십 - 오' 로 표기한다. 반면에 불어의 경우 70 에서 99 까지의 숫자어는 극도로 복잡한 형태를 보인다 (97 을 나타내는 불어 'quatre - vingt - dixt - sept' 를 그대로 직역하면 '사 - 이십 - 십 - 칠' 이 된다).

지금까지 관찰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간단한 계산문제를 정확히 푸는 데 언어능력이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더 높은 차원에서의 수학적 증명에도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라고는 볼 수 없다.

셈하기에서 말하기로

언어와 수가 같은 기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독일어 '셈하다' (zählen) 와 '말하다' (erzählen) 의 형태적 유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사성은 독일어에서만이 아니라 영어나 불어에서도 나타난다. 영어의 '말하다' (to tell) 는 '분리하다' 또는 '분배하다' 를 뜻하는 고대독일어 'tellen' 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또 불어의 '말하다' (raconter) 에서는 '셈하다' (compter) 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고, 유럽어의 원조격인 라틴어의 '수' (numerus) 는 '이름' (nomen) 과 형태적 유사성을 보인다. 독일어의 '말하다' (erzählen) 는 과거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마치 '숫자' (Zahlen) 처럼 늘어놓는 행위를 뜻한다. '이야기' (Erzählung) 속에는 삶의 에피소드들이 마치 숫자들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셈하는 능력은 학생이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기본조건에 속하고, 말을 잘하는 능력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큰 재능에 속한다. 셈하기는 사물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고, 말하기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진화과정에서 더 우선권이 부여된 것은 언어능력이었던 듯하다. 즉, 언어능력은 계산능력보다 더 확고하게 유전자의 손에 맡겨졌고, 이는 커다란 이점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골치 아픈 문제도 안겨주었다. 아이들이 잘못된 문장을 듣고서도 올바르게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은 이점이라 할 수 있지만, 말을 할 때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점은 골치 아픈 문제이다. 진화에서 언어습득이 얼마나 중요했나는 생명체에게 소리 내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경우 듣는 능력은 모체 안에서 이미 형성되는 반면에 소리 내는 능력은 출생 후에 처음으로 생겨난다. 만삭의 임산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듣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둘인 셈이다. 물론 둘이 이해하는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말이다. 뱃속의 태아가 무언가를 지각하고 그 내용을 계속 간직한다는 사실은 갓 태어난 아기가 뱃속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인식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난아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텍스트를 읽어줄 때 더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은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그러나 갓난아기의 말하는 능력은 듣는 능력만큼 좋지 않다. 갓난아기의 후두부는 아직 구강 속에 높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숨쉬기와 삼키기를 동시에 하는 데 편리하다. 음식물이 후두의 측면을  지나 식도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구강구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뀐다. 대개 생후 1 년이 지나기 전에 후두부는 현저히 내려온다. 아기들은 소리 내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질식사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은 위험이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자신의 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런 위험이 시작되는 순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아이들은 소리에서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거울 속의 인간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며, '나' 이외에 '너' 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너' 를 자신의 행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발생심리학자 프랑코 Fabia Franco 는 관찰을 통해 이 사실을 발견했다.

어린아이들에게 뭔가 기이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예를 들어 실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장난감 거미) 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손으로 그 미지의 물체를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를 낸다. 이것은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는 행동으로 생후 9 개월 된 아이나 18 개월 된 아이 모두에게서 관찰된다. 둘의 차이는 9 개월 된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는 반면에 18 개월 된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반응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18 개월 된 아이는 이 세계 안에 무언가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나' 와 '너' 를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런 능력이 말을 배우는 시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이제 '너' 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비슷한 시점에서 (대략 생후 18 개월 정도) 또 하나의 성숙단계가 출현한다. 이 단계는 내부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으로 외부 사정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바로 거울보기이다. 생후 18 개월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대부분 거울을 피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서 항상 자기행동을 따라 하기만 하는 재미없고 지루한 아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거울 속에서 쳐다보고 있는 아이는 더 이상 다른 아이가 아니게 된다.' 심리학자 비숍 Nobert Bischof 은 『신화의 역장 力場 (Kraftfeld der Mytben)』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늦어도 생후 20 개월 무렵이면 아이는 자신이 가시적 외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터득하게 된다. 거울에 대한 초기의 거부감은 이제 서서히 실험적 관심으로 바뀌어간다. 아이들은 거울 앞에서 자기 몸에 조작을 가하기 시작한다. 천이나 모자로 머리를 꾸미고 그 효과를 감상한다. 놀이를 하다가 문득 자신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는 그 상태로 곧장 거울로 달려가 자기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를 관찰한다. 빰에 예쁘게 무늬를 그려주면 거울로 가서 변화를 관찰한 뒤에 '자기' 얼굴의 그 부위를 손으로 만져본다.

거울에 비쳐진 얼굴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능력은 놀랍게도 감정이입 empathy 의 능력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두 가지 능력의 관련성은 발생심리학자 도리스 비숍 - 쾰러 Doris Bischof -  Köhler (주석 : 도리스 비숍 - 쾰러는 노베르트 비숍의 부인이다. 두 사람은 슈탄베르거 호숫가에 살고 있다.) 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감정이입은 타인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끼는 능력을 말한다. 1989 년에 발표한 글에서 비숍 - 쾰러는 '거울상' 과 '감정이입' 의 두 가지 현상을 통해 '사회적 인지능력의 출발' 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에서 심리학자는 아이들을 (엄마가 곁에 있는 상태로) 한 여학생과 함께 놀게 하다가 어느 순간 여학생에게 일부러 슬픈 일이 생기게 했다. 가지고 놀던 곰인형의 팔이 갑자기 빠져버리자 여학생은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이들의 반응을 두 가지로 나뉘었다.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인식할 줄 아는 아이들은 여학생을 불쌍하게 여기며 자신의 장난감을 대신 가지고 놀라고 주는 등의 호의적인 행동을 보였다. 거울 속의 얼굴을 아직 낯선 사람의 것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노는 일에 열중했다. 감정이입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 속으로 옮겨놓는 능력으로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커다란 맥주홀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축구팬들이 자기 팀의 경기에 열광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감정의 전염 역시 우리는 아주 일찍부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까지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타인의 감정에 갑자기 전염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웃거나 우는지를 종종 모를 때가 있으며, 그때의 감정은  명백히 다른 사람의 감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런 감정의 전염은 감정이입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감정이입은 타인과 똑같은 감정을 자기 안에 느끼는 것을 말한다.

천성적으로 다르다

위에서 말한 감정이입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처지나 상황을 지각하는 능력을 넘어서는 미묘한 행동방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 속으로 투입하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감정이입의 능력과 더불어 30 여 년 전부터 발생심리학에서 '마음의 이론' 이라 부르던 것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마음의 이론' 은 정신이나 심리에 관한 어떤 학문적 이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4 ~ 5 세의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의 이론' 은 누군가가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상을 얻을 수 있음을 아이에게 인식시킨다. 연극에서는 종종 관객들이 무대 위의 배우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가령 무대 위의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인물이나 셰익스피어 「실수연발」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두뇌가 똑같은 장면을 자신과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능력은 아이들이 스스로 발달시켜야 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발달시키고 나면 아이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이론', 즉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과 다른 생각들에 대한 표상 능력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이나 생각, 인물을 대할 때 자기와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주로 감성이 아닌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감정이입과 같은 감성적 능력은 이제 덜 중요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4 ~ 5 세가 되면 아이들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자신을 투입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이 등장할 때마다 과학자들이 항상 묻는 것은 거기에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는가이다. 실제로 자기 또래의 아이가 실수로 넘어져서 상처가 난 것을 보았을 때 취학 전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한 결과,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비슷한 정도로 다친 아이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돕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남자아이들은 객관적으로 다친 아이의 관점에 서서 '육체적' 상처를 점검한 뒤 구급차를 부르거나 응급처치를 하려고 한 반면, 여자아이들은 먼저 다쳐서 아파하는 아이를 위로했다. 여자아이들은 풍부한 감정이입과 함께 다친 아이의 '정신적' 안정에 더 신경을 썼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도움을 주었지만 걱정과 배려는 2 개의 X - 염색체를 지닌 쪽에서 찾아볼 수 있노라고 도리스 비숍 - 쾰러는 성적 차이를 다룬 심리학책 『천성적으로 다르다』에서 밝혔다.

이제부터 인간의 완성과정에서 지금까지 소홀히 다루어진 성적인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이 생겨날 때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왜 남자들은 남의 말을 잘 경청하지 못하며, 여자들은 차를 후진하여 주차하지 못하는가? 이 두 번째 질문은 심리학자인 피즈 Pease 부부의 스테디셀러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남자와 여자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달리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차이들을 생물학적 방식으로 (간혹 너무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대단히 재치있게 설명하고 있다.

성의 차이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아주 하부단계로 내려가서 염색체에서부터 출발하기를 권한다. 유전자 차원의 성은 일찌감치 정해지며 처음부터 명료하다. 여자는 두 개의 X - 염색체를 지니고 남자는 한 개의 X - 염색체와 한 개의 Y - 염색체를 갖는다. 수정란은 오직 이와 같은 유전자적 성을 지닌다. 더 이상의 세분화된 성적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임신 7 주 무렵에 Y - 염색체가 활성화되어 몇몇 세포들에 생식기의 형성을 유도하는 신호가 전달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눈에 띄는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환이 발달하면서 이제 과학자들은 그 다음 단계인 생식선 gonad 차원의 성에 대해서 말한다.

생식선은 우리가 호르몬 또는 성호르몬이라고 알고 있는 유명한 전령물질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흔히 안드로겐 androgen 이란 개념으로 지칭되는 남성호르몬은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테스토스테론 testosterone 이다.

XX 세포를 지닌 '여성' 배아는 일주일 정도, XY 세포를 지닌 '남성' 파트너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다음 난소 ovary 라고 부르는 생식선을 만들어 에스트로겐 estrogen 과 프로게스테론 progesterone 같은 여성호르몬을 분비한다. 여성호르몬은 유전적으로 남성인 배아에서도 적은 양이나마 생성된다. 테스토스테론도 마찬가지로 유전적으로 여성인 배아에서도 소량 만들어진다.

유전자적 성의 분리가 상당히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호르몬들은 이처럼 서로의 경계를 조금씩 넘나든다. 물론 이 경계란 것은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에스트로겐을 명백히 여성호르몬으로 분류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남자의 성적 성향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남성적 발달에 적지않은 역할을 수행한다.

계속해서 상이한 성적 특질의 형성과정을 기술하려 한다면 이제부터는 생식기의 형성과 상이한 뇌조직의 형성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형태적 성과 정신적 성은 서로 분리되는데, 여기서는 주로 후자를 살펴보겠다. 우리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행동방식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뇌조직에 맞추어져 있다.

두뇌에서 출발하여 성호르몬을 개관하려면, 뇌하수체가 생식선과 화학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그에 속하는 전령물질인 생식선자극호르몬 gonadotropin 이 시상하부 hypothalamus 의 지시하에 분비된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시상하부의 활동은 남녀에게서 각각 다르게 진행되는데 가장 명확한 예가 여자들의 월경이다.

태아가 발달할 때 남성호르몬은 뇌조직 생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경생리학과 연계를 맺고 있는 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일상적인 행동패턴들의 기초가 형성된다고 본다. 실제로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각 뇌의 다른 영역을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남자의 경우 두 뇌반구가 여자보다 훨씬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자들은 말을 할 때 왼쪽 뇌반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머리 전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근거로 여자들이 말을 할 때 남자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말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여자들은 말할 때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은 남자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된다.

환경 유전자

발생과정에 있는 배아가 보이는, 최초의 성적 특징을 띤 행위는 Y - 염색체의 '남성적' 활동이다. 여기에는 SRY 라는 이름의 유전자가 등장하는데, 이 유전자는 자라나는 생명에게 남자의 외모를 부여하는 분자적 사건들을 촉발시킨다. SRY 가 없으면 그냥 여성의 육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몇몇 과학자들은 여성을 더 자연스러운 성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SRY 는 남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행동의 형성에도 관여한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의 활동이 남자의 성적 선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때 한 가지 흥미로운 관찰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남자들 중 동성애자들이 양성애자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남자형제가 많다는 사실이다 (여자형제의 수는 아무런 상관성도 보이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어머니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남성의 발생에 추가적으로 필요하며 SRY 인자에도 도움을 주는 어떤 유전자의 작용을 모체가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유전인자는 PCDH222 라고 불리며 시냅스 결합을 돕는 단백질을 형성한다. 모체의 면역반응은 약하게나마 이 유전자의 활동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반응이 자식들에게서 거듭해서 일어나면 어느 순간 정상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뇌가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남자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용은 지극히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나타나야 한다. 뇌가 보통사람들과 조금만 달라야지 너무 많이 달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어떤 외부적 영향들이 (비록 모체로부터 오는 것이긴 하지만) 발생과정에 있는 뇌에 작용하는지를 알려주는 유전적 메커니즘도 규명했다. 여기서는 필요한 경험이 축적될 때까지 뇌의 성장을 지연시켜주는 유전자들의 활동이 관찰되었다. 이 유전자들은 매클린턱이 정확히 예측했던 것처럼, 주변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뒤에야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험의 메커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유전자들이 발견됨으로써 과학자들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1995 년에 심리학자 해리스 Judith R. Harris (당시 그녀는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업을 끝마친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많은 이론적 지식과 그보다 더 풍부한 실제적 경험으로 무장한 무직의 할머니였다) 는 명망 높은 학술지 <심리학 리뷰 Psychological Review> 에 어린아이들의 사회화과정에 관한 글을 발표하면서, 아이의 발달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가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부모는 아이의 인성 발달에 중요하고 장기적인 영향력을 갖는가? 오랜 연구 결과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부모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의 유전자? 아니면 나 자신?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만들어진 상태가 나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