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때문에 파멸한 비운의 천재 : 앨런 튜링

 

과학혁명의 지배자들 : Ernst Peter Fischer 저서, 이민수 옮김, 양문출판사 (742-2565), 2002 (원서 : Leonardo, Heisenberg & Co : Piper Verlag GmbH, 2000), Page 193~204

 

1. 동성애 때문에 파멸한 비운의 천재

2. 크리스토퍼와의 우정

3. 계산기에 이진법 도입을 제안하다.

4.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니그마 해독

5. 튜링 기계

6. 형태형성에 관한 연구

7. 다른 게이

 

 

1. 동성애 때문에 파멸한 비운의 천재

앨런 튜링 (Alan Turing, 1912 ~ 1954) 이란 이름은 이미 오래전에 서양의 집단의식에 침투했고, 사람들은 그와 그의 육체를 분리해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과학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튜링을 '천재' 라고 부르고, 튜링 기계의 개념을 내면화해 다양한 문제의 계산 가능성과 해결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 사회이다. 튜링은 1954 년 6 월 7 일, 침대에 누워 치사량의 시안화칼륨이 주사된 사과를 먹었다. 그의 나이 겨우 사십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튜링의 자살은 문명 세계의 파국이자 문화 세계의 치욕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환각 상태에 빠진 소인배들과 속물들은 전쟁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만개하고 있던 한 천재를 이 세상에서 몰아 내버렸다. 냉전의 시대였던 1950 년대 초 영국 곳곳에서는 그토록 열광해 마지않던 한 천재에게 줄 배신이라는 선물을 준비할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동성애자는 아무나 쉽게 협박할 수 있는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튜링마저도 자신의 명성을 잃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경찰과 친분이 있는 열아홉 살짜리 젊은이와 관계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튜링을 '성도착자' 로 분류했으며, 심지어 그에게는 입국 허가서조차 발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고국은 튜링을 법정에 세웠다.

영국 하원은 튜링의 성향을 '형편없는 외설' 로 단정했다. 반대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튜링은 금고형을 면하기 위해 동성애적 성향을 치료하기 위한 호르몬 투여를 승낙했다. 그는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았고, 가슴이 커지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 그는 얼마 동안 이런 상황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견뎌냈다. 그러나 그후 그는 차츰 자신의 벽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그는 시안화칼륨에 대해 약간은 생물학적인 탐구로 실험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치명적인 용량을 정확하게 계산해 독을 사과에 주입했고, 그것을 입으로 베어 물었다.

 

2. 크리스토퍼와의 우정

튜링의 어린 시절은 인생의 마지막에도 그랬던 것처럼 고독했다. 1912 년 7 월 23 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인도에서 행정관리로 근무하는 아버지가 휴가 차 고향을 찾았을 때에만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튜링은 학교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성장했다.

말 그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던 튜링은 숫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읽기를 배우기도 전에 벌써 숫자를 알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읽은 책들은 대중 학술서들이었다. 그는 그런 책을 읽으면서 세계가 단순한 사고와 방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깊은 매력을 느꼈다.

튜링은 열다섯 살의 나이에 벌써 수학교과서를 지루해했는데, 모든 명제를 기본원칙에서 쉽게 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운 학술 텍스트를 찾고 있던 중, 아인슈타인의 저서와 아서 에딩턴의 <물리세계의 본성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 이라는 책을 찾아냈고, 이 책들은 그의 지적 호기심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소년 튜링은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유롭게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영국 학자집안의 자제인 크리스토퍼라는 동창생과 우정을 나누면서 이런 수줍음을 극복한 적이 있었다. 안개가 영국의 일부이듯, 동성애 성향이 있는 젊은이들의 우정은 영국 기숙사학교 체계의 일부이다. 튜링과 크리스토퍼 사이에 그런 우정이 싹텄다. 앨런과 크리스토퍼는 함께 화학실험을 했고, 천체 관찰기구를 만들어 별이 가득한 하늘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체스를 두었다. 즉 체스 말을 움직인 사람은 바로 기숙사의 정원을 한 바퀴 달려야만 한다. 만약 그가 상대편이 말을 움직이기 전에 다시 체스판 앞에 도착하면 또 한번 말을 움직일 수 있다. 잘 단련된 주자인 앨런은 체스에 약한 자신의 단점을 그렇게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연습은 유희적인 목적뿐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목적에도 유용했다. 젊은 튜링은 이때 정신적인 작업에 육체적 활동이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눈 시간은 짧았다. 크리스토퍼가 열아홉 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후 튜링은 더욱 학문에 매진했고 점점 더 훌륭한 장거리 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동성애적 성향을 조절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 노력은 그가 자신의 동성애를 인정하기 전인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튜링이 1950 년대의 영국 사람들에게 그런 성향이 얼마나 큰 증오의 대상인지 예감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동성애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언론은 그를 "그리스도교인으로서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를 범했다." 라고 질책했다.

 

3. 계산기에 이진법 도입을 제안하다.

1931 년,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해, 4 년 동안 그곳에서 수학했다. 그때 그는 독일수학을 선도하는 수학자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치에 의해 추방된 수학자들이었다. 튜링은 독일의 수학전통에 놀랐다. 그는 우선 독일에서 발전된 주제를 선택해 연구하면서, 가우스의 오류함수와 힐베르트가 수학자들에게 제기했던 세 번째 문제, 소위 결정의 문제에 몰두했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세인을 놀라게 한 결과를 발표했다. 막 스물다섯 살이 된 튜링은 기본적으로 풀 수 없는 무한히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제시했다. 즉 이미 정립되어 있는 공리의 범주 안에서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한편 그는 다른 모든 기계를 대체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튜링 기계 (Turing Machine)' 라고 부른다. 튜링이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발견을 바탕으로 착안한 것은 전자두뇌와 인공지능기계였고, 그는 그것을 제 2 차 세계대전 후 현실화시켰다.

1937 년, 튜링은 <결정문제에의 응용을 고려한, 계산 가능한 수들에 관하여> 라는 논문에서 위에 간단하게 설명된 인식을 제시했다. 이 무렵 튜링은 미국에 있었고, 1936 년부터 1938 년까지 프린스턴에서 지냈으며 <서수에 근거한 논리시스템>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튜링은 계산기가 더 많은 계산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예를 들어 체스게임같이 복잡한 계산 능력을 필요로 하는 연산도 포함된다), 숫자와 부호의 이진법으로 작동해야만 한다는 아주 친숙한 개념을 처음으로 발전시켰다.

 

4.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니그마 해독

튜링이 한참 새로운 개념의 계산기 연구를 시작했을 때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영국 비밀 첩보기관에 소환되어 버킹엄셔의 블레츨리 파크에 있는 통제코드 및 암호 학교에서 '이니그마 (Enigma)' 라는 독일 암호기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니그마는 무선 통신 신호를 복잡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암호화했기 때문에, 나치의 무선 보고는 새어나갈 염려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선에서 무적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니그마는 암호체계는 역학적으로 물론 전기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단계를 거쳐 실행되는 알파벳의 복잡한 교환이다. 이런 방법의 원리는 제 1 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개발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8 년 독일의 기술자 아르투르 셰르비우스가 소위 로터 원칙에 따른 방법으로 특허 신청을 냈다.

이니그마가 로터 (rotor : 전기 기계에서 회전하는 부분 - 옮긴이), 롤러, 케이블의 연결로 작동될 때, 암호화는 타자로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이런 방법으로 암호 텍스트 (ciphertext) 를 손에 넣은 사람은 그 텍스트에서 다시 평문 (plaintext) 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전제 조건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이 이니그마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암호화할 때처럼 이니그마를 이용해 정확하게 문장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복잡하게 알파벳을 교환한 암호문을 적군들이 다시 정리하는 것은 이니그마 규칙적으로 조정ㆍ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튜링은 수학 팀과 함께 이니그마 코드 암호를 완벽하게 풀었을 뿐 아니라, 기계의 조정을 그때그때 추론하고 계산할 수 있었다. 연합국의 비밀 첩보대는 좌초된 독일군의 U-571 (U-보트로 알려진 독일의 잠수함. 당시 연합군은 이니그마 암호를 해독하지 못해 U-보트의 무차별 공격으로 1000 여 척의 군함을 잃어야 했다 - 옮긴이) 로부터 이니그마 기계를 노획해 영국으로 가져왔고, 이 전과물은 튜링의 작업을 순조롭게 했다.

물론 튜링이 전쟁을 승리고 이끌었다는 주장은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역사가들은 그가 없었다면 영국이 전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으리라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영국군과 정치가들은 종전 후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튜링의 공로에 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예를 들면 튜링의 암호해독 기술로 연합군은 독일이 북아프리카에서 어떤 전략을 쓰는지 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대서양 어느 지점에 독일 잠수함이 배치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정치가들에게 이니그마는 계산 게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여러 이유로 인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튜링과 그의 팀은 적절한 가정과 상대의 사소한 실수를 최대한 이용하여, 모든 조합 가능성을 풀기 위해 필요한 끔찍하게 많은 연산을 짧은 시간 내에 정확하게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5. 튜링 기계

튜링이 1940 년대에 연구한 것은 대형 계산장치의 프로그래밍이었다. 이때 그는 서브루틴 (subroutines) 의 개념과 자동화된 소프트웨어 검증 (automated software verification) 을 발전시켰다. 그는 여기에서 얻은 경험으로 한 가지 매혹적인 질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 질문은 1950 년대에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나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고찰하고자 한다.

어쨌든 튜링은 계산기계 (컴퓨터) 가 뇌를 모방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기계가 더 개선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한 대답이 컴퓨터에서 나왔는지,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뇌의 모조품인 컴퓨터가 훌륭하다면, 기계도 생각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앞선 질문을 명쾌하게 풀기 위해, 긴 철학적 토론 대신 구체적인 테스트를 제안했다.

튜링 테스트 (Turing Test) 는 계산 가능성에 관한 중심 개념인 알고리즘 (algorithm) 이 도입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튜링 기계만큼 그렇게 설득력 있지는 않다. 수학자들은 계속 실행될 수 있고 명백한 결과를 전달하는 문제의 해결방식 (예를 들어 숫자 π 의 소수점 계산 가능성) 을 알고리즘 (알고리즘은 수학용어이자 컴퓨터 용어이다. 수학용어로서 알고리즘은 잘 정의되고 명백한 규칙들의 집합 또는 유한 번의 단계 내에서 문제를 풀기 위한 과정이다 - 옮긴이) 을 통해 이해했다. 사람들은 방정식을 풀 때 알고리즘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여행자가 일곱 도시를 방문하면서 한 점을 두 번 건드리지 않고 가장 짧은 길을 찾는 문제는 유명하다. 어쨌든 당시 수학의 주제는 모든 문제를 알고리즘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모아져 있었다.

1936 년경 고안된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 (컴퓨터 용어로서 알고리즘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컴퓨터가 사용 가능한 정확한 방법을 말한다 - 옮긴이) 에 실제로 사용 가능한 명확한 형식을 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튜링은 알고리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제어하는 보편적인 기계를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이때 그는 특이하게도 알고리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했다.

튜링 기계는 단순한 계산기계지만, 단지 계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우리는 튜링이 활동하던 제 2 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늘날 같은 자동계산기가 아직 없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다만 특별히 넓은 시야를 가진 튜링만이 그런 기계이 본질적인 부분과 작업 방법을 소개할 수 있었다. 또한 튜링 기계의 경우 알고리즘 과정을 각각의 단계로 해체한다. 이런 해체는 가능한 단계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각각의 단계가 간단한 구조로 해체됨으로써 기계에 의해 쉽게 실행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학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튜링 기계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 테이프, 테이프 구동 기구, 읽기ㆍ쓰기ㆍ삭제 헤드, 정보기억장치, 제어반. 기계가 일정한 작업의 단계에서 무엇을 행하는지는 테이프와 정보기억장치 두 개의 요소에 달려 있다. 이 두 개 요소의 모든 가능한 조합은 잠정적인 형태로 제어반에서 재배치된다. 이때 제어반은 영역이 읽혀지는지, 지워지는지 혹은 새롭게 쓰여지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방향으로 테이프가 움직이는지 언제 기계가 서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제어반은 튜링 기계의 심장부로서 덧셈, 곱셈, 뺄셈, 나눗셈 혹은 다른 연산을 수행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표준이기도 하다.

정교하게 프로그램 된 튜링 기계는 셀 수 있고, 계산할 수 있고, 대수학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학적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으며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론상으로 가능한 이 체계는 말 그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무결점 상태는 아닐 것이다.

1936 년 이미 튜링은 모든 알고리즘이 실패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문제는 튜링 기계의 정지 문제이다. 그것은 새김이 들어 있는 테이프로 작업하는 튜링 기계가 무한히 많은 단계 후에 정지하는지, 혹은 그렇지 못한지 하는 문제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때 정지에 대한 질문은 개개의 경우로 대답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6. 형태형성에 관한 연구

튜링은 현대과학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특이하게도 책을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1993 년 그의 《전집 (Collected Works)》 이 단 세 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꺼운 작품이 <순수 수학 (Pure Mathematics)》 으로 288 쪽이고, 《인공지능 (Mechanical Intelligence)》 은 그보다 60 쪽이 더 적다. 우리는 이런 책 제목을 통해서 튜링이 관심을 기울여온 일련의 주제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전집 중 세 번째 책은 튜링을 수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로만 취급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튜링은 사망하기 몇 년 전에 형상형성과 형태형성 과학을 연구했다. 1952 년에 발표한 주요 논문 <형태형성의 화학적인 토대 (The Chemical Basis of Morphogenesis)> 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전집의 세 번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논문에서 튜링은 생물의 발생에서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는 과정인 '형태형성 (morphogenesis)' 을 모의 실험하면서, 몸의 각 부분에 있는 형태 관계지점의 화학적인 반응을 자극하고, 그 속도를 증가시키는 물질의 확산을 토대로 발육하고 있는 태아의 형태를 예측하여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최초의 상동 분산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성으로 인해 자연발생적인 모양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적인 생각이었다. 튜링은 카오스 이론에서 중요한 '대칭 붕괴' 와 '분기 붕괴' 란 현대적 개념을 미리 파악한 것이다.

그 당시까지 사람들은 튜링이 생각한 특별한 메커니즘을 생물체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튜링 시대 이후 분자생물학은 유기체 형태의 발생에 대한 연구가 분자에 대한 설명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튜링의 제안은 개체발생 (ontogenesis) 이 유전 메커니즘과 더욱 일치될 경우, 개체발생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7. 다른 게이

튜링이 남긴 개인적인 글들은 그의 과학적 유산에 비교했을 때 턱없이 적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50 년에 쓴 몇 쪽 분량의 이야기이다. 튜링의 전기작가 앤드류 호지는 그를 크리스마스 때 선물할 물건을 세심하게 고르고, 다른 사회적인 의무에도 신경을 쓰는 세심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튜링의 글에도 자신의 크리스마스 쇼핑, 좀더 정확히 말해서는 한 젊은 남자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 구입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 젊은 남자는 '알렉스 프라이스' 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튜링이 묘사한 것처럼 "그는 늘 동성애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튜링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알렉스가 누군가를 '가졌던'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오랜만의 사건이었지만, 그가 지난 여름 파리에서 (언젠가 말했던) 그 군인을 만난 시점을 생각하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튜링이 인공지능에 대한 논문을 쓰고 알렉스의 선물을 사려 했던 이 시기는 정확하게 1950 년대였다. 호지는 이 부분에 대해 "그는 논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또 다른 게이와의 교제를 고려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어떤 곳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라고 말했다.

호지가 언급한 것처럼 튜링은 런던에서 옥스퍼드 거리를 따라 걸었을 때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동성애자' 를 비상식적이고 역겨운 단어로 폄하했던 1950 년대의 영국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았을 '게이' 라는 말이 옥스퍼드 거리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튜링은 자신의 아주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명성을 잃을 수 있고, 법정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쇼핑에 대한 짧은 이야기만 가지고는 그가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그의 생각을 우리 나름대로 숙고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라도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1939 년, 튜링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논리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만 한다." 라는 명제를 무척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50 년 전의 편협한 인간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오늘날도 여전히 침묵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