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억
인간행동과 심리학 : 오세진.김형일.임영식.현명호.김병선.김정인.김한준.양병화.이재일.양돈규.최창호.이장한 공저, 학지사, 1999, Page 127~158
현재 혹은 앞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정보를 저장하는 과정을 기억이라고 한다. 기억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주로 정보처리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다. 기억은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의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감각 기억은 외부의 정보가 눈이나 귀 등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잠깐 동안 머무는 단계의 기억이다. 이 정보들 중에서 주의를 기울인 정보만이 단기 기억으로 넘어갈 수 있다. 단기 기억은 감각 기억보다 정보를 좀더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으나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용량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대략 7±2의 항목에 불과하다. 단기 기억은 현재에 의식하고 있는 정보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억이라는 말은 장기 기억을 의미하는데, 단기 기억에 있는 정보들이 반복될 때 이론적으로 평생 저장 가능한 장기 기억으로 정보가 전달된다. 장기 기억은 감각 기억과 마찬가지로 용량의 제한이 없으며 거대한 도서관으로 비유된다. 장기 기억에 전달되려는 정보는 기존의 도식이나 지식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저장될 수 있으며, 정보가 저장된 형식이나 다른 지식과의 관련성에 따라서 입력된 정보가 편파적으로 혹은 왜곡되어 인출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기억에 대한 설명을 정보처리적 입장에 근거하여 설명할 것이다. 먼저 기억의 단계와 모델에 대하여 개관한 후에 세 가지 유형의 기억(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억술(memonics)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이용하여 기억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살펴볼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뇌에 타격을 받아서 어제 이전의 일을 전혀 기억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당신은 친구나 매일 만나서 잘 알고 있던 사람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도 무척 낯설어할 것이다. 당신의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떤 사람이었던가에 대하여 회상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오늘 아침에 당신이 목격한 자동차 사고에 대하여 목격자 진술을 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장면에 대한 감각적 장면들이 머리 속에 잠깐 남아 있을 수는 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면 보고 들은 것을 묘사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보아도 그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어에 대한 지식과 그 단어들이 조화되어 의미를 형성하려면 기억의 도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당신에게는 감각적인 삶과 현재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기억은 습득(aquisition), 보유(retention), 인출(retrieval)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습득이란 자극에 주의를 기울여서 그 자극을 기억 속에 집어넣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부호화(encoding)라고 한다. 오늘 아침에 당신이 목격한 자동차 사고를 후에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사고에 대한 정보를 기억속에 저장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 정보를 기억 속에 집어넣어야(부호화)한다.
보유는 정보가 저장되는 단계로, 정보를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보유는 자동적인 과정은 아니며 때로 습득한 정보를 저장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더라도 새로운 정보가 이전의 정보를 왜곡시키거나 방해할 수 있다.
인출(retrieval)은 정보를 사용하기 위하여 저장된 것을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는 과정이다. 때로 인출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능동적인 노력을 해야 정보가 인출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실제 장면에서는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해 낼 수 없다. 이러한 기억의 실패는 기억 과정의 세 단계 중 어느 하나의 단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실패할 수도 있고(습득 실패), 정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질 수도 있으며(저장 실패), 필요할 경우에 이 정보들을 회상하지 못할 수 있다(인출 실패). 습득 실패와 저장 실패의 경우에는 정보가 영구적으로 망각되는 반면에, 인출 실패인 경우에는 망각이 잠정적일 수 있으므로 후에 다시 그 정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영화관람 문의를 하기 위하여 극장의 전화번호부를 살펴본 후에 그 극장에 전화를 건다고 가정해 보자. 바로 전에 걸었던 전화번호는 보통 기억으로부터 빠른 시간 안에 사라진다. 오늘 아침에 버스 안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의 얼굴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회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어린 시절 오랫동안 성장하였던 집의 구조나 몇십 년을 같이 살아온 부모님의 얼굴등에 대한 기억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지속 시간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심리학자들은 기억의 세 가지 유형 혹은 저장 모델을 제시하였다. 기억의 세 가지 모델은 감각 기억(sensory memory), 단기 기억(short-term memory), 장기 기억(long-term memory)이다.
감각 기억은 자극이 중단된 후에 감각적인 자료들이 순간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중의 하나이다. 감각 자극은 어떤 자극이 제시되었다가 제거된 다음에 신경적 활동이 잠시 동안 지속되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단기 기억은 작동 기억(working memory)이라 불린다. 이 기억은 능동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를 마음 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감각적인 자료가 아니라 분석되고 의미가 있는 정보이다. 예를 들어, 지금 신중히 책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이 책의 내용을 단기 기억에 의미 있는 단어들로 잠시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 기억은 어느 한 시기에 한정된 양의 자료들만을 저장할 수 있다.
장기 기억은 무제한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습득했던 지식들이나 사실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도서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이 목격했던 사실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도서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이 목격했던 자동차 사고에 대하여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인생에 있어서 중요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억 혹은 일반적인 지식들은 모두 장기 기억의 보관함에 보유되어 있다.
이러한 기억의 세 가지 모델이 <그림 1>에 제시되어 있다.
<그림 1> 기억 모델에 대한 도식
이 그림은 환경으로부터 정보가 감각 기억으로 유입되고, 정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감각 기억에서 단기 기억으로 전이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델에서 단기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기 기억에서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를 능동적으로 저장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정보를 암송하는 장소가 단기 기억이다. 또한 단기 기억에서는 정보의 저장과 인출이 용이하도록 새로운 정보를 부호화할 수 있다. 3163 이라는 숫자를 '3·1절에 63빌딩을 갔다'는 식으로 외우려 시도하는 것이 그 예이다. 단기 기억에서 정보가 사라지기 전에 그 정보를 능동적으로 시연(rehearsal)하면 이론적으로 평생 지속될 수 있는 장기 기억으로 전이된다
기억에 대한 모델은 기억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간결하게 이해시키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심리학자들이 기억의 세 가지 형태의 모델에 대하여 인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심리학자는 기억을 상호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망상조직(network)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Cowan, 1988). 이 하나의 기억 체계 내에서 새로운 정보가 깊게 혹은 낮게 처리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의 옹호자는 깊게 처리된 정보는 저장이 잘 되어서 회상이 정확하게 될 것이며 낮게 처리된 정보는 저장과 회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망각된다고 간주한다.
기억의 세 가지 저장 모델에는 단점도 있지만 특히 심리학 개론 과정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다. 이 모델은 연구자들이 기억에 대하여 발견해 낸 많은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적인 구성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기억 모델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오감(五感)이 각기 그에 해당하는 감각수용기(sensory register)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감각 기억의 특성에 대해서는 동일한 의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 기억이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Coltheart, 1980; Yeomans & Irwin, 1985; Cowan, 1988).
첫 번째 단계는 아주 잠시 동안 어떤 감각이 머무는 것으로서 보통 100분의 몇 초 안에 사라진다. 약간 더 오래 지속되는 두 번째 감각 기억의 단계는 방금 마주쳤던 것들을 매우 생생하게 다시 회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제시된 자극들에 대한 물리적 특성을 확인하는데, 이 과정은 매우 빠르고 자동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서 정보가 처리된다.
시각적 감각 정보에 대한 감각 기억을 영상 기억(iconic memory)이라고 하는데, 감각 기억 중에서 비교적 많이 연구되어 왔다. 연구자들은 영상 기억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하였다. 피험자들에게 <그림 2>와 같은 자극을 아주 잠깐 동안(대략 0.1-0.2초) 제시한 후에 얼마나 많은 알파벳을 보았는가 질문하였을 때, 대부분의 피험자들이 모든 알파벳을 다 본 것처럼 느꼈지만 불과 네다섯 개의 알파벳을 보고할 수 있었다. 제시된 모든 알파벳은 잠깐 동안 눈을 통하여 뇌로 보내져 남아 있지만 아주 빠르게 자극에 대한 심상이 사라져 버린다.
<그림 2> 영상 기억 실험에 사용되는 자극의 예
한편 피험자들에게 같은 자극을 제시한 후에 특정 줄만을 회상하라는 요구를 하면 그 줄의 알파벳을 정확하게 회상하였다. 피험자들은 자기가 본 알파벳에 대한 영상이 사라지기 전에 보고를 끝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자극에 대한 완전한 시각적 상으로 정보를 "읽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잔향 기억(echoic memory)은 청각적 정보에 대한 감각 기억이다. 당신이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와서 "밥 먹었니?"라고 말을 걸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책에 푹 빠져서 친구가 말을 한 것은 알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 수 없어서 "뭐라고 말했지?"라고 되묻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말한 내용을 되풀이하기 전에 친구의 질문이 당신의 귀에 남아 있어서 "응, 아직 안 먹었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렇게 친구의 질문이 잠깐 동안 귀에 남아 있는 이 기억을 잔향 기억이라고 한다.
시각적인 감각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리에 대한 감각도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잔향 기억은 영상 기억보다는 정보가 더 오래 지속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청각적 감각 기억인 잔향 기억은 어떤 소리가 중단된 다음에 4-5초가 지난 후에야 완전히 사라진다고 한다(Darwin, Turvey, & Crowder, 1972). 영상 기억에 비하여 잔향 기억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것은 방금 들은 문장의 전체적인 뜻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바로 전에 들은 단어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비교적 많은 시간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림 2>의 맨 윗줄에 있는 알파벳 E, R, V, F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 보라. <그림 2>를 다시 보지 않더라도 이 알파벳들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알파벳이 당신의 마음 속에서 활성화되었다고 하며, 이 알파벳은 당신의 단기 기억에 저장된 것이다.
단기 기억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단기 기억은 현재 지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둘째, 단기 기억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을 조합하여 세상에 대한 통합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볼 때, 영화는 한 프레임 한 프레임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우리 눈에는 분리된 그림이 아닌 부드럽게 진행되는 영화로 보인다. 셋째, 단기 기억은 순간적인 메모지의 역할을 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문제를 풀고 있는 중에 정보를 계속 가지고 있도록 해 준다. (4X3)-(2X5)와 같은 간단한 산수문제도 단기 기억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단기 기억이 4X3이 12라는 중간 결과를 저장하고 있는 중에 나머지 단계의 계산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넷째, 단기 기억은 계획이나 현재의 의도를 계속 유지하게 해 준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 복잡한 일련의 연속적 행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단기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정신 능력에 심각한 손상을 갖게 될 것이다.
(1) 선택적 주의
선택적 주의는 정보가 단기 기억으로 들어가는 필터의 역할을 해 준다. 어떤 시기에 노출된 모든 자극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자극들 중에서 많은 것을 무시하고 몇 개의 주요 자극에만 초점을 맞춘다. 주의를 받지 못한 자극들은 단기 기억에 아주 약하게 기록되거나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 당신이 수도 없이 보아 온 100원짜리 동전의 앞면을 상상해 보자. 당신은 아마도 그 동전의 앞면에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한 부분까지 회상할 수 없을 것이다. 주로 색깔과 크기 혹은 동전에 그려진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서 100원짜리 동전에 선택적으로 주의를 하였을 것이다.
무엇이 선택적 주의를 하게 말하고 어떤 종류의 자극에 주의를 집중하는가? 크기가 크고 현란한 색깔이나 그 밖의 강렬한 자극은 보통 주의를 끈다. 기대하지 않았거나 범상치 않은 장면도 주의를 끄는 경향이 있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보다는 사자를 끌고 길을 걷는 사람이 주위로부터 더 많은 시선을 끌 것이다. 정서를 유발시키는 것이나 개인적인 사항에 관련된 것들은 주의를 집중시킨다. '갑'이라는 회사의 주식을 산 사람은 그 회사의 주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2) 부호화
일단 정보에 주의집중이 이루어지면 그 정보가 단기 기억에 저장되기 위하여 부호화되어야 한다. 부호화란 기억 체계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자료를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형태는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이거나 가지고 있는 생각일 수 있다.
시력검사판의 맨 윗줄에 있는 '가'라는 글자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면저 시각적 심상을 이용하여 이 글자를 단기 기억으로 부호화하게 된다. 마치 이 글자가 그려진 그림을 보듯이 이제 눈을 감아도 마음 속에 '가'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대상들이 어떻게 보이는 가에 대한 기억 흔적(memory traces)이 남아 있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들리는 것, 냄새, 맛, 그리고 느낌에 대하여도 흔적이 남아 있다. 기억 흔적은 뇌의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되는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 흔적은 사라진다.
단기 기억에 기억할 내용을 부호화할 때 시각적 흔적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음성적 혹은 언어적 흔적도 이용한다. 단기 기억에서 청각적 흔적은 시각적 흔적보다 더 지배적이라고 한다. 즉, 단기 기억에서는 정보를 언어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교수가 칠판에 써준 낱말 자체는 시각적 정보이지만 이를 필기하기 위하여 단기 기억에 집어넣을 필요가 있을 때는 시각적 흔적보다는 소리(청각적)로 전환하여 입력한다고 한다.
사물들을 기억할 수 있으려면 감각적 상이 사라지기 전에 이를 다시 되돌릴수 있어야 한다. 언어적 표상(representation)은 정보가 단기 기억에 '활성화'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612-0354라는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보았고 이를 머리 속에 입력하려 한다면 전화번호에 대한 심상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으로 이 번호를 반복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소리 없는 반복이 시연(rehearsal)이다. 시연은 어떤 자극이 사라지기 전에 그 자극을 활성화하여 "새롭게"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마음 속에 간직하기가 더 어렵다. 시연 없이도 길거리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예쁜 여자의 치마가 어떤 색깔인지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할 때, 혹은 무관한 수나 무의미 철자들을 기억하려면 열심히 노력하는 시연을 거쳐야 한다.
Peterson 등(1959)은 숫자, 글자, 단어 목록 등이 시연을 하지 않을 경우에 얼마나 빨리 단기 기억에서 사라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하였다. 피험자에게 세 개의 자음(예 : CPQ와 같은 형태)들을 큰 소리로 읽게 한 후에 이를 회상하라고 하기 전에 1,000에서 3씩 빼서 거꾸로 세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렇게 거꾸로 수를 세는 과제는 자음들에 대한 시연을 방해했고, 단기 기억을 자음 대신에 숫자들로 대치시켰다. 보통 글자들에 대한 회상은 20초 내에 사라진다고 한다.
단기 기억의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제한된 용량이다. 어느 한 시기에 몇 개의 생각만을 단기 기억에서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기 기억에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려면 단기 기억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항목들을 버리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Miller(1959)는 피험자들에게 서로 관련이 없는 항목들을 나열한 다음에 그 항목들을 얼마나 많이 회상하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을 통하여 단기 기억의 용량을 측정하였다. 단기 기억의 용량은 평균적으로 일곱 개의 항목이다. 다섯 개 미만의 항목을 단기 기억에서 보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정신 능력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단기 기억의 용량은 아홉 개 항목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단기 기억의 용량은 따라서 7±2 항목이다.
이 항목의 크기는 다양할 수 있다. 하나의 글자일 수도 있고 단어나 문장일 수도 있다. 자극들을 단기 기억으로 부호화하는 중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의미 있는 자극 단위로 묶는 청킹(chunking) 작업이 이루어진다. 아래의 일련의 숫자들을 살펴보라.
3 1 5 4 1 9 6 2 5 8 1 5
위의 숫자는 모두 12개로 되어 있으므로 단기 기억에서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숫자를 315, 419, 625, 815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를 유의미한 자극 단위로 묶는다면 위의 숫자는 네 개의 항목에 불과한 것이다. 정보를 청킹을 통하여 재부호화함으로써 단기 기억에 보다 많이 저장할 수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단기 기억의 저장 용량은 7±2 항목이 아니고 7±2 청크이다.
단기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마음 속에 능동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단기 기억에서의 인출은 완벽해서 실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기 기억의 내용은 즉각적으로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 기억으로부터의 인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Sternberg(1969)는 단기 기억에 있는 항목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피험자에게 일련의 숫자로 구성된 기억 세트(memory set)를 제시하였다. 기억 세트는 숫자의 개수가 한 개에서 여섯 개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기억 세트를 제시한 후에 검색 숫자을 한 개 보여주고 이 숫자가 기억 세트에 있었는지의 여부를 응답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2 7 8 5 4]의 기억 세트(5 단위)를 제시한 후에 3이라는 숫자가 이 기억 세트에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피험자에게 응답하게 하였다.
그 결과 기억 세트에 있는 숫자가 더 많을 경우에 검색 숫자가 기억 세트에 있었는가의 여부를 지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피험자들은 반응을 하기 위하여 모든 숫자들을 마음 속에서 탐색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 세트에 숫자들이 더 많으면 응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그림 3>에 제시하였다.
<그림 3> 기억 세트의 항목 수에 따른 반응 시간의 변화
정보는 단기 기억에 무한정 머무르지 않는다. 단기 기억에 있는 정보는 빈번히 폐기 된다. 단기 기억에서 망각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대치(diaplacement)로서,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정보에서 새로운 정보로 주의를 기울여 시연하는 것을 말한다. 단기 기억의 용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가면 새로운 정보는 이전의 정보를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둘째는 쇠퇴(decay)로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단기 기억의 흔적이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단기 기억에서의 정보는 시연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 흔적이 소멸된다. 이전의 정보를 무시하고 새로운 정보에 주의를 돌릴 때, 이전의 기억 흔적은 즉각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결국 단기 기억에서의 망각은 대치와 쇠퇴 때문에 발생한다.
비록 새로운 정보가 이전의 정보를 대치하는 과정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론적으로 단기 기억의 정보가 쇠퇴만으로도 소멸될 수 있다. Reitman(1974)은 단기 기억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치가 일어나지 않아도 단기 기억의 흔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소멸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단기 기억에서 쇠퇴로 인한 망각은 경미하다. 단기 기억에서의 망각의 주요 원인은 쇠퇴보다는 대치라고 할 수 있다.
정보를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기억이 없다면 인간의 기억 능력은 매우 제한될 것이다. 감각 기억과 단기 기억은 정보를 보유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으므로 다른 유형의 기억이 필요하다. 이렇게 정보를 장시간 보유할 수 있는 기억을 장기 기억이라고 한다. 장기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재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준다. 장기 기억이 없다면 바로 전에 지각하였던 것에서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자마자 그 정보가 사라져 버릴 것이고 인생은 새로운 경험들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장기 기억이 없다면 학습할 수 있는 능력도 존재할 수 없다.
정보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단기 기억에 있는 정보가 장기 기억으로 전이(transfer)되어야 한다. 이때 전이 과정은 여러 요인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한 가지 요인은 단기 기억에 있는 정보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연되는가이다. 시연을 더 오래 할수록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의 전이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정보를 시연하여도 그 정보가 장기 기억으로 전이되지 않고 단기 기억에서 소멸되는 경우가 있다. 단기 기억의 정보가 장기 기억으로 전이되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종류의 시연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유지 시연(maintenance rehearsal)으로, 정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기억해야 될 것을 부주의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유지 시연은 단기 기억의 정보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단기 기억에서는 회상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이시키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다른 종류의 시연은 단기 기억의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이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시연을 정교화 시염(elaborative rehearsal)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미국 여행을 하기 위하여 타야 되는 비행기 번호가 717이라면 비행기 번호를 7월 17일 제헌절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보를 암송할 때, 장기 기억으로부터 날짜나 공휴일에 대한 지식들을 사용한다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식으로 정보를 정교화 하면 장기 기억으로의 전이가 확고하게 나타나 비행기 번호를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
의미적 기억(semantic memory)이란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포함한다. 의미적 기억의 대부분은 '개', '하얗다', '짖다', '친근하다' 등과 같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적 기억은 개념들의 예도 포함하고 있다. '해피'나 '메리'는 개의 이름일 수 있다. 의미적 기억은 개념과 예들 간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해피는 개이며 하얀 털을 갖고 있고 잘 짖으며 사납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의미 기억은 개념들에 대한 지식과 예들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물망(networks)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개념이 활성화되어 의식되게 되면 그 개념들에 연결된 고리로 확산되어 관련된 개념에 대한 활성화는 그 정보를 인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람이나 대상 혹은 사건이나 절차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제공하여 주는 거대한 상호 연관된 개념들의 묶음을 도식(schema)이라고 한다. 장기 기억은 수많은 도식을 가지고 있다. 여행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도식을 생각해 보자. 이는 복잡한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필요한 항목들을 적은 후에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고, 마지막에는 계산대에 물건을 내려 놓고 돈을 지불한다.
<그림 4> 카나리아에 대한 개념과 특성 간의 관계
개념은
원으로, 관계는 화살표로 표시되고 있다.
일단 도식이 형성되면 새로운 경험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든 새로운 경험을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 관련시키지 않은 채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지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과 이전의 정보를 연합하여 인지적 노력을 줄이려 한다.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도식과 연관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새로운 정보를 더 배우기 쉽고 보유하기 쉽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로프, 전구, 캔버스, 종)을 외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권투 경기장'이라는 도식을 제공하면 학습은 훨씬 더 빨리 일어난다. 도식은 문장을 이해하거나 외우는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생각해 보자.
건초더미가 옷이 벗겨진 사람을 살렸다.
기존의 도식과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게 보일수 있다. 적절한 도식이 없다면 잠시 동안은 위의 문장을 기억할 수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쉽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낙하산'이라는 적절한 도식을 제공하면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사라질 것이다. 이제 문장을 이해하고 외우는 것이 더 쉬어졌을 것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그림을 기억하려 할 때도 동일한 도식의 효과가 나타난다. <그림 5>를 보라. 이 그림은 무엇을 나타낼까?
<그림 5> 도식의 효과를 보여주는 그림
a는 꼬마가 전화 박스에서 트럼본을 불고 있는 장면이고, b는 매우 힘센 곤충을 잡은 새의 형상이다. 이제 여러분은 위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훨씬 더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듣게 되면 그림을 도식과 관련하여 저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를 도식과 관련하여 저장하는 것은 이 정보를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만든다는 것 이외에도 추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철수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철수가 짐을 나르거나 물건을 정리하거나 혹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일들이 아르바이트 학생이 슈퍼마켓에서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을 함으로써 철수가 슈퍼마켓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도식에 근거하여 추론을 할 때는 잘못된 추측을 할 위험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제로 지각한 것이나 들은 내용을 기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영희의 알람시계가 오늘 아침에 작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실제로 영희가 늦잠을 자지 않았어도 늦잠을 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
늦잠은 알람시계가 고장난 후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한 도식 중 일부이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신은 후에 영희가 늦잠을 잤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친구에게 잘못 들은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다. 즉, 도식에 근거한 추론을 실제로 들은 사실과 혼돈하여 이 추론을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식은 때로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세부적인 것들을 보충하여 주는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세부적인 것이 부정확한 경우도 많다.
특정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일반적인 도식의 방향으로 왜곡 된다. 이러한 경향은 Carmichael과 동료들(1932)이 수행한 고전적 실험에서 입증되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그림 6>에서 볼 수 있는 윤곽으로 그려진 그림 자극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일한 그림 자극에 대하여 각기 다른 명칭으로 이름을 붙였다.
피험자들에게 후에 기억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을 때, 사람들의 그림은 부여받은 명칭의 방향으로 왜곡되었다.
광고의 원고 작성자는 우리가 들은 내용과 추론한 내용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성을 종종 이용한다. 예를 들어, "올 겨울은 감기 없이 지내세요. P약을 드세요."라는 내용의 광고는 P약이 감기를 예방한다고 추론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까지 감기를 예방해 주는 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P약의 광고를 낸 사람을 허위 광고로 고소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P약이 감기를 예방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 약이 감기를 예방한다고 가정하며 이러한 가정은 소비자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림 6> 도식적 부호화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
우리가 원할 때에 저장된 정보를 인출할 수 없다면 장기 기억에 저장된 정보는 무용지물이다. 책을 읽고 있는 경우 인출은 매우 빠르고 거의 자동적이다. 지면상에서 각 단어를 보자마자 그 단어에 대한 기억은 즉각적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인출이 항상 용이하지는 않다. 때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내용을 탐색하고 정보를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이전에 분명히 기억하였던 사실들이 기억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대부분의 인출과제는 재인(recognition) 혹은 회상(recall)을 포함한다. 재인이란 어떤 자극이 이전에 제시되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목격의 확인 절차는 재인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혐의자들 중에서 어제 강도짓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재인을 필요로 한다.
회상은 정보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장된 정보를 기억으로부터 인출하여야 하기 때문에 재인보다 더 어렵다. 사람들에게 한 단어가 적힌 카드를 제시한 후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자유 회상(free recall)이다. 또한 모든 나라의 수도를 회상하라는 지시도 자유 회상에 속한다. 자유 회상은 인출 단서가 하나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특히 어렵다. 그러나 "캐나다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단서가 주어진 회상 과제이다.
(1) 기억할 수 없는 것의 인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회상할 수 없거나 이를 인식조차 할 수 없을 때에도 정보는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훨씬 더 빨리 학습할 수 있다. 처음에 어떤 내용을 철저하게 학습할수록 후에 그 내용을 더욱 빨리 재학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제 시대에 일본식 교육을 받아서 일본어를 배웠으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일본어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몇 달간 지내면 '잊었던' 일본어가 빠른 속도로 회복될 것이다.
(2) 인출과 프라이밍
프라이밍(priming)이란 기억해야 할 항목이나 이 항목과 관계 있는 것을 기억 검사를 받기 전에 잠깐 동안 제시하는 것이다. 인출은 프라이밍에 의하여 가속화될 수 있다. 프라임(prime)은 예비 단서가 되어서 인출을 쉽게 만들고 개념들을 활성화시킨다. 예를 들면, 바로 전에 어떤 그림을 보았고, 기억 검사 동안에 그 그림이 단편적으로 제시되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백분의 몇초 동안 비춰져도 당신은 그 그림을 비교적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이밍은 심지어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림이나 단어를 확인하는 능력을 높여준다(Jacoby & Dallas, 1981; Jacoby, 1983). 그러나 기억 검사가 이루어지기 오래 전에 자극이 제시되면 프라이밍의 효과는 사라지므로 프라이밍이 인출에 도움을 주려면 기억 검사와 프라임을 제시하는 시간 간격이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
(3) 설단 현상
때로 우리는 어떤 것을 분명히 안다고 확신하지만, 이를 저장된 기억으로부터 인출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의 이름이 혀끝에서만 뱅뱅 맴돌고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설단 현상(tip-of-the tongue phenomenon)의 예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애가 탈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나지 않던 정보가 드디어 생각날 때는 짜증이 쾌감으로 바뀐다.
어떤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 때, 그 단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험에서 밝혀졌다. 위의 예에서 중학교 동창의 실제 이름이 아닌 이름을 열거하여 준다면 그 이름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설단 현상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 단어가 몇 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Brown & McNeill, 1966).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는데도 인출하지 못한다면 마침내는 인출하려 했던 것을 잊어버렸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망각은 일반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 달 전에 본 영화의 세부적인 것들을 기억할 수 없고, 2주전 월요일 저녁을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주 토요일이 오래된 친구의 생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고, 친구에게 학교 신문을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잊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망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망각은 적절한 인출 단서가 없거나, 유사한 기억 내용이 간섭을 해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자연히 나타나는 단순 망각이 있으며, 불유쾌하거나 위협적인 기억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동기적 망각도 있다. 한편, 교통사고나 그 밖에 뇌의 기질적 손상으로 인하여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1) 인출 실패 : 단서의 부재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적절한 인출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 살던 동네, 살던 집의 구조, 그 시절 친구들과 하던 놀이 그리고 학교 건물 등과 같은 것을 회상해 보라. 아주 잊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서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일단 이용할 수 있다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한 회상이 가능하다. 어떤 노래는 특정 인물과 연합되어 있을 수 있고 이 인물은 다른 사람들이나 장소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M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면 오래 전에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같이 춤추었던 여학생이 생각나고 그녀와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과 사건들을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다. 강한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항목들은 적절한 인출 단서가 된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어떤 정보를 학습한 맥락 역시 효과적인 인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초기에 정보를 학습했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에 그 정보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다. Tulving과 그의 동료들(1971)의 실험에서 밝혀진 이러한 현상을 부호화 구체성(encoding specificity)이라고 한다. 이들은 학습하는 상황과 인출하는 상황이 차이가 많을수록 기억을 잘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인출 단서를 제공하는 맥락의 효과는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 만약에 강의를 듣던 강의실 이외의 다른 강의실에서 기말고사를 본다면 일반적으로 그 강의가 이루어진 강의실에서 시험을 보는 것보다 시험 성적이 더 나쁠 수 있다. 여러 연구는 실험실에서 학습한 내용에 대한 기억이 다른 장소에서 검사되면 대략 10% ∼ 15% 정도 감소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Spear, 1978; Smith, Glenberg, & Bjork, 1978).
잠수부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맥락 효과를 지지하였다. 잠수부를 두 집단으로 나눈 후에 한 집단에게는 단어 항목들을 육지에서 보여주었고 나머지 집단에게는 수중 10M에서 동일한 항목들을 학습하게 하였다. 후에 회상 검사를 실시하였을 때, 물 속에서 학습한 잠수부는 육지보다는 수중에서 회상을 더 잘하였고, 땅 위에서 학습한 잠수부는 물 속보다는 육지에서 더 나은 회상을 보였다(Godden & Baddeley, 1975).
(2) 쇠퇴 : 시간의 효과
인출 단서가 없기 때문에 망각이 일어난다는 생각은 우리가 학습하는 것의 대부분은 기억 속에 저장되어 남아 있으며, 학습한 것을 기억으로부터 인출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적절한 단서만 주어지면 된다는 기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기억이 쇠퇴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가면 기억 흔적은 점점 약해져 사라지므로 적절한 단서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인출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람들은 이전의 정보를 더 많이 잊어버린다. Squire(1987)는 성인 남자에게 지난 15년간 방영되었던 TV 프로그램의 이름을 재인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결과 오래된 프로그램일수록 더 많이 망각된다는 것을 <그림 7>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처음에 기억했던 내용이 강렬할수록 망각이 천천히 나타났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한 학생들 중에서 학점이 좋고 더 많은 강좌를 들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년 후에 독일어 시험을 보았을 때 더 많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7> 쇠퇴에 의한 일반적 망각
(3) 간섭과 망각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일치한다. 바로 지난주의 프로야구 성적에 대한 기억은 지난해의 게임 성적보다 일반적으로 더 강렬하고 세부적이다. 시간상으로 더 오래된 기억은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나 쇠퇴만으로 모든 망각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알츠하이머씨 병에 걸린 환자는 어린 시절의 사건들은 쉽게 기억할 수 있지만 어제 일어났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지만 젊었을 때 선수 생활을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스케이트 타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줄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쇠퇴가 망각의 주요 원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간섭(interference)은 점차 기억이 약해지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간섭이란 다른 기억 때문에 어떤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작년의 프로야구 게임 성적을 잘 기억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에 있었던 게임이 많기 때문에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난해의 게임 중에서 한 게임만 시청하였다면 그 게임에 대한 기억은 훨씬 더 명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망각의 주요 원인은 간섭이다.(Anderson, 1983). 두 단어로 이루어진 단어쌍을 학습하고 나중에 첫 번째 단어와 다른 단어가 짝지어진 것을 학습하게 되면 처음의 단어쌍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기억의 회상을 방해하는 효과는 <그림 8>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목록(목록 A와 목록 B)을 동시에 학습하면 목록 B의 내용이 목록 A의 내용을 간섭하여 목록 A를 기억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림 8> 망각에서 간섭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쌍 목록
나중에 학습한 목록 B 때문에 목록 A의 회상률이 떨어지는 것을 역행 간섭(retroactive interference)이라 한다. 이는 간섭의 방향이 역행적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순행 간섭(proactive interference)은 목록 A를 학습하고 다음에 목록 B를 학습시킨 후에 목록 B를 회상해야 될 경우에 나타날 수 있다. 기존의 지식이 새로이 학습하는 내용을 간섭하는 것이 순행 간섭이다.
간섭이 나타나면 원하는 정보의 인출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정보 중 일부를 기억할 수 있으며 적절한 단서가 주어지면 모든 정보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간섭이 없는 경우보다 정보를 인출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은 인출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동기적 망각
때로 간섭이나 쇠퇴 혹은 인출 단서의 부재 이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망각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기억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렸을 적에 성적으로 학대받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생각하기에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고 이러한 참혹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의 약속보다는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한 약속을 더 잘 잊어버린다. 도박꾼은 돈을 잃었을 때는 잊어버리고 딸 때만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동기적 망각은 정신분석가 Freud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그에 따르면, 억압된 기억은 무의식으로 밀려나지만 그래도 사람의 느낌이난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5) 뇌손상에 의한 기억상실
대부분의 망각은 '정상적'이다. 우리는 잊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종종 불평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좀더 심각한 기억 손상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이 손실은 너무나 심각해서 비정상으로 분류되며 기억상실증(amnesia)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기억상실증은 뇌에 심한 손상을 입는 기질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권투 선수들은 특히 기질적 기억상실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미식축구 선수들도 보호 장구를 착용하더라도 기억상실증에 취약하다고 한다.
기억상실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진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으로, 단기 기억은 비교적 온전하기 때문에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으며 뇌손상 이전에 학습했던 내용도 잘 기억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의 환자는 뇌손상 후에 새로 습득한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뇌손상 후에 새로이 만난 사람은 아무리 여러 번 만났어도 항상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행동하기도 하고 새로 이사온 집 대신에 항상 뇌손상 전에 살던 집으로 찾아간다.
둘째는 역행성 기억상실증(retrograde amnesia)으로, 뇌손상 후의 일들을 기억해 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손상 전의 일들에 대한 기억은 상실한다. 역행성 기억상실의 정도는 뇌에 입은 손상에 따라 달라 손상 직전의 몇 분 안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며칠 혹은 몇 년 간의 일을 회상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극적인 경우는 영화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각본 중의 하나이다. 환자는 회복함에 따라 기억이 점차 돌아오는데 처음에는 시간적으로 먼 과거의 일부터 점차 가까운 과거의 순서로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기억할 수 있는 잠재력은 변화가 가능하다. 앞으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요인들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는 약물의 사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기억술의 사용이다.
약물은 기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점차 많이 남용되고 있는 향정신성(psychoactive) 약물은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저하시킨다. 코카인과 마리화나 등은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단기 기억을 손상시킨다. 또한, 이러한 약물과 알코올 등은 정보를 단기 기억으로부터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기억을 증진시키는 약물이 존재할까? 카페인과 암페타민은 중추신경을 계속 각성시켜 공부를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학습하는 속도를 낮추므로 공부에 도움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은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는 데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피소스티그민(physostigmine)이나 아레콜린(arecoline)과 같이 신경전달물질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약물은 기억을 높여줄 수 있다. 이러한 약물은 알츠하이머씨 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에게 투여했을 때 기억이 약간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나 이 효과는 너무 미미하고 일시적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Davis 등, 1982).
타크라인(tacrine)이라는 약물은 아세틸콜린을 파괴하는 효소를 억제시킨다. 이 약이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에 도움이 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가 진행중인데, 이것이 뇌의 아세틸콜린 수준을 증가시킴으로써 기억을 높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어떤 약물은 상태의존적 기억(state-dependent memory)으로 알려진 흥미로운 상황을 유발할 수 있다. 상태의존적 기억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에 대하여 학습할 때 동일한 생리적 상태에 있으면 그 정보가 더 쉽게 인출되는 현상이다. 어떤 약물을 복용한 상태에서 학습된 정보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회상이 어렵다. 그러나 그 약물을 복용하게 되면 '잊혀진' 사실들이 다시 인출될 수 있다. 상태의존적 기억은 부호화 구체성의 다른 예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학습할 때, 이 학습한 것은 환경에 있는 단서들과 연합된다. 이러한 경우에 신체 내부의 생리적 환경이 단서가 된다. 따라서 약물을 복용한 상태가 학습한 것을 인출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어젯밤에 술을 마시며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다시 술을 마시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시 어제의 생리적 상태로 돌아가면 인출 단서가 생기는 셈이므로 그 때의 사건을 회상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잘못한 애인과 크게 싸움을 한 후에는 좋았던 기억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을 섭섭하게 하거나 화나게 했던 기억만 자꾸 날 것이다. 화가 나 있는 내부의 정서 상태가 인출 단서가 되어 그와 비슷한 상태에서의 기억이 인출되기 쉬워지는 것이다.
기억술을 이용하면 기억하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기억술(mnemonic systems)이란 사람들의 기억을 도와주는 의도적인 방법이다. 기억술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연설가에 의하여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억술은 정보를 잘 조직화해서 쉽게 저장하고 인출하는 방법으로, 심상, 연합(association)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도식(schema)까지 이용한다.
기억술은 일반적으로 기계적인 암기보다 처음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정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암기하게 해 준다. 둘째, 문제를 해결하거나 추론을 할 수 있는 정보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1) 심상을 이용하는 방법
잘 알려진 기억술 중에 많은 것이 심상(imagery)을 이용한다. 예를 들면, '고릴라/피리'의 단어쌍을 기억하려면 고릴라가 피리를 연주하고 있는 장면을 머리 속에서 상상할 수 있다. '사람/컴퓨터'의 단어쌍을 기억하려면 어떤 사람이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하거나 혹은 몸통은 사람인데 머리는 컴퓨터 모니터인 장면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단어가 추상적인 개념인 경우에는 심상을 잘 이용할 수 없다.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심상은 머리 속에서 상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민주주의'라는 단어쌍을 심상을 이용하여 상상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장소법(method of loci)은 당신이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매일 가는 길처럼 기억 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일련의 장소들을 이용하는 기억술이다. 로씨(loci)는 라틴 말로 장소라는 뜻이다. 여러 개의 단어들을 외우려고 할 때, 각 단어들을 친근한 장소와 연합시키는 방법으로, 후에 그 단어들을 회상하려고 할 때 마음 속에서 그 장소를 '걸으면서' 그 장소와 어떤 단어가 연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집으로 가서 방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머리 속에서 상상한다. 먼저 대문을 지나서 현관문으로 들어가서, 마루를 거쳐 부엌에 있는 냉장고로 간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서 당신의 방에 있는 책상으로 간 후에 컴퓨터를 작동시킨다. 일단 당신이 쉽게 이러한 정신적 걸음을 할 수 있다면 그 위치만큼 많은 무관한 단어들을 기억할 수 있다. 장을 보아야 할 목록이 포도, 건전지, 우유, 고기, 성냥, 옥수수, 빵이라고 가정해 보자.
우선, 이 목록과 친근한 장소를 연합시킨다. 가령, "대문 앞에 고깃덩어리가 있었고, 현관문 고리에 옥수수가 걸려 있고, 빵처럼 둥근 마루의 카펫을 지나서 부엌에 있는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우유를 꺼내 마시며, 성냥갑처럼 네모난 이층 마루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는데, 책상 위에는 엄마가 포도를 갖다 놓으셨고, 컴퓨터의 건전지가 소모되어서 작동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외워야 할 단어의 목록과 장소를 연합시킨다. 이렇게 한 후에 당신의 머리 속에서 그 장소를 천천히 걸으면 회상이 잘될 것이다.
(2) 정보를 위계적으로 조직하는 방법
단기 기억에서의 청킹은 기억의 한 방법이다. 정보를 의미 있는 단위로 묶고 이 묶음을 서로 연관시킬 때, 그 정보는 기억하기가 더 용이하다. 방금 읽은 수필이나 단원을 개괄하는 것은 그 내용을 회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내용을 쭉 살펴보는 것은 정보를 위계적인 범주로 조직화하고 이 범주들의 각 위계는 다른 위계들을 인출하는 단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위계적으로 조직화하여 기억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사실이 실제 연구를 통하여 입증되었다. Bower와 그의 동료들(1969)은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단어들을 기억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단어들은 모두 112개의 단어들로써, 네 개의 주요 범주로 구분될 수 있었다.
Bower는 피험자들을 두 집단으로 구분한 후에 한 집단의 피험자들에게는 네 개의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그림을 보여주고 나머지 집단의 피험자들에게는 위계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단어들을 보여주었다. 후에 기억 검사를 하였을 때, 위계적으로 구성된 그림을 본 피험자들은 단어들 중에 약 65%를 회상한 반면에, 다른 집단의 회상률은 19%에 불과하였다. <그림 9>는 이 실험에서 사용된 그림 중 하나이다.
<그림 9> 광물에 대한 위계적 도식
(3) 반복 인출
공부할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되뇌기(recitation)하는 데 투자하여 기억하고자 하는 정보를 능동적으로 회상하려 한다. 되뇌기는 당신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또한 어떤 실수가 있다면 이를 수정하게 해 준다.
Gates(1917)는 그의 고전적 실험에서 능동적인 되뇌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더 많은 정보를 회상할 수 있음을 밝혔다. 한시적 기간 중에 80% 가량의 시간을 할애한 피험자들보다 세 배나 더 많은 항목을 암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일정한 분량의 내용을 읽은 후에 책을 덮고 학습한 내용을 머리 속에서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4)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는 PQ4R 방법
기억술에 대한 내용을 읽은 후에 많은 학생들은 실망하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소법과 같은 기억술을 지금 현재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에 적용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은 단어들이나 개념들의 목록을 암기하는 것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잘 회상해 내는 방법은 없을까?
공부 시간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 PQ4R이다(Thomas & Robinson, 1972). PQ4R은 이 방법이 갖는 6단계의 첫 철자들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① 사전 검토(preview), ② 질문(question), ③ 읽기(read), ④ 생각하기(reflect), ⑤ 암송하기(recite), ⑥ 재음미(review).
먼저 어떤 책의 한 장을 공부할 때, 그 장의 주제(topic)를 사전 검토하고 요약을 먼저 읽는다. 주요 부분을 확인하고 그 장의 구성을 위계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전 검토가 끝나면 학습할 내용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만든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질문과 읽기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네 번째의 생각하기 단계에서는 읽는 내용이 이전에 제시된 정보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숙고한다. 일반적인 원리나 결론에 대하여서는 이에 상응하는 예들을 생각한다. 공부하는 내용을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정교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당신의 기존 도식과 그 내용을 연관시키면 기억을 증진시킬 수 있다.
다섯 번째 단계는, 한 단원을 읽은 후에 2단계에서 스스로 만든 질문에 대한 답이나 주요 내용을 외운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다 읽은 후에 재음미를 한다. 이는 암송하기 단계와 비슷하지만, 암송은 단원이 끝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반면 재음미는 한 장이 끝나면 이루어진다. 암송과 재음미는 능동적인 인출을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