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 프리고진 (Ilya Prigogine)

 

20 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 : Guy Sorman 지음, 강위석 옮김, 한국경제신문, 1991, Page 55~66

 

천재가 아니면 위대한 발견이 없다

과학은 서양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우주는 시계가 아니라 혼돈이다

자연은 나비효과 때문에 예측불가능하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질서는 혼돈에서 태어난다

혼돈은 일반적인 원칙이다

또 하나의 「드레퓌스 사건」

 

"질서는 혼돈에서 태어난다" ... 1917 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1922 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망명했으나 나치스의 등장과 더불어 몰아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벨기에의 브뤼셀로 도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77 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그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 60 여명과 함께 연구그룹을 형성하여 사회학ㆍ생물학ㆍ경제계획ㆍ도시계획 등의 분야에서의 낭비적 구조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토플러 (Alvin Toffler) 는 현대사회의 격변을 이해하는데 계급투쟁설, 적자생존의 원리,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등의 개념으로는 불충분하며 프리고진의 이론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의 특징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과학이 평형폐쇄계를 가정하고 있는데 반해 비평형 불안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주요 저서로 공저인 「구조, 안정과 변동의 열역학 이론 (Thermodynamic Theory of Structure, Stability and Fluctuations, 1971)」과 「혼돈에서의 질서 (Order out of Chaos : Man's new Dialogue with Nature, 1984)」등이 있다.

 

프리고진 (Ilya Prigogine) 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우주의 감춰진 법칙이며 그것은 과학자의 연구과정에서만 드러난다는 사고방식은 완전히 오류이다. 이 벨기에 과학자는 과학적 창의력은 예술적 창의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러블로크가 과학자ㆍ물리학자ㆍ화학자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저술가라고 말한 점은 옳다.

프리고진은 「소산구조 (dissipative structure)」에 대한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스텐저스 (Isabelle Stengers) 와 함께 「신동맹 (The New Alliance)」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찬반의 격론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명해졌다. 프리고진은 벨기에 사람이지만 이름은 벨기에식이 아니다. 그는 4 살 때에 러시아를 떠났다. 그는 그 이후 브뤼셀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의 연구 가운데 주요 업적도 거기서 이룩했다. 그는 브뤼셀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신문들은 그가 러시아 태생임을 대서특필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가 벨기에보다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한가지 써두고 싶은 것은 그가 벨기에 사람이고 총명한 심성의 소유자란 점 이외에 대단히 단순하고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란 점이다. 사실인 즉 내가 뽑은 「진짜 사상가」의 대부분은 유별나게 겸손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점이 이들을 여타의 가짜 사상가들과 구별하는데 어떤 다른 기준보다도 나은 기준이었던 것 같다. 이쯤 해두고 다시 프리고진에게로 얘기를 돌려 그의 비정통적 과학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천재가 아니면 위대한 발견이 없다

『평상시 특히 어떠한 특정 이론이 이미 성숙되어 있을 때라면 과학적 연구는 비개성적으로 되고 맙니다. 그런 가운데 진보는축적됩니다. 한 연구자가 다른 연구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지요.』라고 프리고진은 설명한다. 그렇지만 혁명적인 발견은 「천재군단」의 작품이다. 17 세기가 동틀 무렵 코페르니쿠스ㆍ케플러ㆍ갈릴레오 등의 경우가 그렇다. 최근의 사례로서는 아인슈타인ㆍ브로글맆하이젠베르그ㆍ슈뢰딩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리고진은 묻는다. 아인슈타인이 만약 없었더라면 일반상대성 이론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고. 과학의 진보는 역사적 결정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론이란 사실 잠정적 가설 혹은 개인적 공식 이상 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코페르니쿠스ㆍ뉴턴ㆍ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 이론마저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반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고전역학의 예를 들어 보자. 고전역학은 오늘날에 와서도 옳다. 그러나 다만 혹성 등 「무거운」물체에 한해서만이 이 이론은 옳다. 그러나 다만 혹성 등 「무거운」물체에 한해서만이 이 이론은 옳다. 만약 아원자 세계의 「가벼운」물체의 운동을 연구하게 되면 뉴턴의 이론은 적용될 수가 없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이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양자역학은 20 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 과학이란 반박하도록 되어 있는 일련의 명제들로서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반박될 수 없는 것이라면 과학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마술이나 신비의 영역에나 속하는 것이다.

과학은 서양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만일 프리고진이 주장하는 것같이 과학자란 자연과 담론하는 저술가라는데 동의한다면 어떤 특정 시대 또는 특정 문명은 「천재군단」을 출현시키는데 보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또 데카르트와 갈릴레오가 만든 과학은 어떻게 해서 그 근원이 서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는가. 프리고진에 따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적 및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과학은 어떤 한 집단의 사람들이 가진 우주관에 의존한다. 만일 사람들이 지고의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믿게끔 교육되어 있다면, 그래서 그 창조주는 세계를 처음으로 만들고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면, 그 사람들은 전우주적인 법칙의 존재와 식별가능한 미래를 믿고 있는 셈이 된다. 17 세기에는 자연법칙은 지고한 입법자가 만든 것이라고 믿어졌다는 사실을 프리고진은 상기시킨다. 이러한 신의 법칙을 해독하는 것이 과학자의 책무였다. 그리고 과학자는 무소부지라야 할 것을 요구받앗다. 17 세기 서양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난 것은 당시의 지배적 이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서양 과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바로 그것의 화신이었다. 이러한 고전적 과학의 개념은 신이 영원한 법칙의 보증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전통을 가진 계열에 서는 마지막 사람이었다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명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신적 진리와 우주적 법칙은 인간의 으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탄생을 위하여 필요했던 합리적이고 막강한 신에 대한 믿음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절실한 것은 막강한 신권이 약한 왕권과 균형되어 있다는 믿음이라고 프리고진은 첨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의 고뇌를 불러 일으키고 지성적 토론을 태어나게 하는 정치적 및 사회적 게임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다. 독립적 사상이 태어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중세 유럽에 있었던 교황과 왕사이의 끝날줄 모르던 언쟁이었다고 프리고진은 말했다. 이러한 지적「게임」의 또 하나 특출한 예는 19 세기의 빈이었다. 빈은 우리 시대의 가장 경이적인 이론적 건축의 출생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프리고진은 유럽식 모델을 중국의 것과 비교한다. 왜 근대과학이 중국에서 먼저 발생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시 한번 문화적 성격을 띤다. 전제적 권력은 사회질서에 혼란을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모든 혁신을 전통적으로 압제하여 왔다. 그 점 이외에도 중국 사회의 신학적인 기초는 전체론 (holism) 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세계관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현상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은 유럽과는 달리 약한 신권과 강한 왕권으로 특정지워진다. 중국 사람들의 기본적 발견, 예컨대 나침반ㆍ화약ㆍ키 등이 광범한 실용적 혜택을 낳지도 못하고 주요한 역사적 변천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과학자는 자기의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없다. 사실 과학자는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에 대단히 의존적이다. 돈이나 권력 등 어떤 주어진 시대의 문화적 환경은 연구활동의 궁극적 경로를 결정하는데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 갈리레오의 경우까지 멀리 되돌아 갈 것도 없이 프리고진은 생물학 연구가 현재 왕성해지고 있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자기의 견해가 옳음을 증명해 보인다. 이 현상은 암에 대한 점증하는 공포와 우주과학에 대한 관심의 새로운 고조, 즉 창조신화에 대한 인간의 흥미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시계처럼 조종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세계관은 고전적 과학을 태동케한 역사적 문화적 환경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구식일 뿐더러 나아가서 완전한 오류이다.

우주는 시계가 아니라 혼돈이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느긋하게 고전적 과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고전이론에서 우주의 법칙은 단순하고 대칭적이며 결정론적이고 가역적이다. 이런 고전적 모형의 상징적 표현은 시계이다. 그것의 운동은 돌이킬 수 없으며 예측이 가능하다. 이 모델에서는 물질세계는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고 반면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채택한 이원론적 입장인데 서양 철학은 아직 그 자취를 지니고 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한편에는 역사학ㆍ심리학 등의 사회과학과 다른 편에는 엄밀과학으로 분류하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우리 문화에는 이 이분법이 정착되어 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본질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엄밀과학에서는 모든 법칙에서 시간은 배제되어 있다.

역학적 모델이 양자물리학에 의한 혁명을 맞게 된 것은 20 세기 초의 일이다. 양자물리학의 수준에 이르면 고전물리학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우리는 불확실성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물질의 구조는 결정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확률론적 모델로써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애초에는 이것을 관측자의 인간적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착오인 것으로 과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불확정성은 관측자의 탓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금세기가 저물어가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과학계의 대부분 사람들은 물질은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이며, 우주는 종전까지 불변이라고 믿어오던 바와는 달리 역사를 지닌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시계처럼 작동하고 있는 아니라 하나의 예측불가능한 혼돈이다. 결정론적 이론은 인과론적 관계 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런 결정론적 이론은 확률론적 계산에 의하여 밀려나게 되었다. 프리고진은 뉴턴적 고전물리학을 이용하여 지금부터 500 만년후의 지구 위치를 예측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구의 안정된 주기적 운동은 규칙이라기 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대부분의 동학적 체계는 불확정적이다. 프리고진은 자기 주장을 마치는 말로서 일기예보의 예를 든다.

자연은 나비효과 때문에 예측불가능하다

프리고진은 묻는다. 어떻게 하여 혜성의 운동은 한 세기 전에 예측할 수 있는데 다음 주의 일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가. 기상학자는 기껏해야 4 일 정도의 일기를 예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은 못한다. 일반사람들은 만일 기상대가 보다 나은 시설만 갖춘다면 일주일이나 나아가서 한 달까지의 일기예보도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원천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일기는 본질적으로 예측불가능하다. 기상은 불확실성이 종합되어 만들어지는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불확정적인 동학 체계이다. 우리 지구사의 어느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아주 경미한 변화가 엉뚱한 곳에 퍼져 큰 충격을 주는 수도 있다. 이것이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 다. 베이징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이 미세한 바람이 계속해서 증폭되어 종국에는 캘리포니아에 엄청난 폭풍을 만든다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좋아하는 다른 한 가지 예는 동전이다. 우리가 동전을 던지면 동전의 표면과 이면이 나올 확률이 통계적으로는 같다. 그런데 컴퓨터를 이용하여 그 동전의 비궤적을 그려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동전이 떨어졌을 때 어느 면이 나올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이런 종류의 계산이 불가능한 이유는 동전은 반드시 불확실성의 구역을 통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기점」이다. 불확정적 동학체계 안에서는 비록 초기존건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동전이 떨어져 표면이 나올 수도 있고 이면이 나올 수도 있다.

다른 예를 또 하나 더 들어 보자. 이번에는 성경에서 나오는 얘기다. 요셉은 바로 (Pharoah) 왕에게 7 년 동안 풍년이 들고 거기에 이어 7 년동안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나일강의 홍수는 수천년간 측정되어 오고 있다. 그 기록을 컴퓨터로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이것이 혼돈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

경제학자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장기간에 걸쳐 가격변동이나 주식시장을 관측한 결과 「나비효과」와 비슷한 현상이 주식시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쿄 거래소에서 일어난 대수롭잖은 변동이 월 스트리트에서는 폭락사태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좀 더 확증적인 실례들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더 거론하는 것은 프리고진은 삼간다. 그러면서 이 몇 가지 간단한 예들을 가지고 결정론적 세계관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간단히 얘기하면 확률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적 현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프리고진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질서는 혼돈에서 태어난다

결정론적 법칙의 자리를 확률성이 차지하게 된 것을 두고 과학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프리고진은 놀라움이라고 대답한다. 과학자들이 놀라는 이유는 무질서로부터 항상 그 어떤 질서정연한 구조가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도 일찍 말한 바 있듯이 우리 우주에 관해서 가장 놀라운 일은 비록 크지 않으나 그래도 일부나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무질서에서 태어나는 질서, 이 말이 현대과학을 요약할 수 있는 말로서는 아마도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그의 전문분야인 물리화학에서 프리고진은 그가 말하는 소산구조를 발견하였다. 불균형상태라고 해서 반드시 무질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완전한 질서를 가진 구조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이 될 때도 있다. 이런 구조를 소산구조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구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프리고진은 전통적 물리학에서는 질서를 균형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음을 지적하였다. 결정체는 이 모델에 포함되는 기본적 형식이다. 그 바람에 모든 종류의 불균형은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불균형은 무질서를 일으키지만 똑같이 질서를 생성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우주를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항상 혼돈과 질서가 서로 바뀌며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바뀜은 더 높은 에너지 수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우리 우주의 자연스런 운동이 아닐까.

혼돈은 일반적인 원칙이다

물리화학반응의 수준에서 검증된 진리를 기타 일반현상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불균형의 원리는 단순히 하나의 비유에 불과할 뿐 새로운 일반원리까지는 되지 못하는 것일까.

프리고진은 초기의 혼돈 (약 150 억년전에 일어났던 폭발) 상태로부터 생겨난 우주는 은하계와 혹성을 형성하며 스스로를 조직화시켰다고 지적한다. 생명은 자연의 우연한 선택의 산물이며 그 자체는 그 이래로 보다 거대한 조직 및 복잡성을 향해 진전되어 왔다.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질서나 경제발전은 규제되지 않은 개별적 경제행위의 연속에서부터 일어났다. 민족들의 운명도 이와 같은 양식을 밟는다. 거대한 변동과 함께 하는 혼란의 시기 (대중운동, 갈등) 다음에는 새롭고 보다 집약된 에너지를 갖춘 사회질서가 태어난다.

이와 같이 사회를 「혼돈」에서 접근하는 분석방법에서 본다면 정치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질서를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프리고진은 그 요점을 설명해 준다. 만일 정치지도자들의 말이 옳다면 정부는 눌러야 할 옳은 단추를 알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질서정연하게 통치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지는 교육이 아직도 과학의 최근 이론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고 여론이 아직도 낡은 뉴턴 물리학의 포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생긴 여파에 불과하다. 프리고진의 모델은 시계적 우주관과는 영원한 모순 관계에 있다.

프리고진은 수많은 예증을 든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가지만 해도 그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제 1 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라예보 저격사건은 나비효과를 설명해 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좀더 최근의 사례는 1987 년의 블랙 먼데이의 주가 대폭락이 있는데 프리고진은 이와 관련된 어떤 결정론적 설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전문가들의 말을 믿는다면 주가하락은 달러 가치하락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으며 달러 가치하락은 미국의 무역적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은 나비효과가 나타난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1987 년 주가폭락은 다른 모든 경우도 그랬지만 본질적으로 결코 예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비록 금융전문가들은 이런 일이 닥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 만일 이것을 알아 맞힌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프리고진은 질서있는 현상이 혼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보아야 한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과학모델을 사회이론에까지 확장한다는 것은 야심이 과도한 탓은 아닐까.

또 하나의 「드레퓌스 사건」

그러나 프리고진은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간다. 그가 공언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목표는 모든 학문을 하나의 서로 연결된 전체로 엮어내는 것이다. 학문을 분야별로 쪼개는 것, 즉 크게 사회과학과 엄밀과학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사회과학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또 물리학은 우주법칙의 공식을 구하는 것으로 나눈데서 온다. 그러나 과학에서 혼돈이론이 나오면서 이러한 이분법은 물리학적 현상도 제 나름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비가역적 법칙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결정론적 입장에 가담하는 사람은 프리고진과는 정면으로 대비된다. 이런 사람은 예측할 수 있는 것만을 과학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프리고진의 혼돈적 질서라는 것도 실은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어떤 수준 이상으로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프리고진은 주장한다. 혼돈은 그 말의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예측해 내기 위해서는 무한대로 많은 변수에 대한 자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리고진은 이른바 합리주의자들이 현대과학이 발견한 원리에 배치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그는 많은 과학자들이 아직도 과학 이전적인 사상 (prescientific ideology) 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과학자들이 생명ㆍ우주ㆍ시간에 대하여 지배적인 종교가 내리고 있는 것과 동일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빅뱅 (Big Bang) 이론인 바 프리고진은 이것을 아마도 틀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빅뱅은 그것이 일종의 「세속적 기적」이기 때문에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주고 있다. 시간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그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된 거실 터이고 따라서 창조주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시간은 빅뱅전에도 의심할 바 없이 존재라고 있었어야 한다. 따라서 빅뱅은 영원한 불안정 상태를 특징으로 삼고 있는 이 우주에서는 그다지 가능한 일로 볼 수 없다. 만일 빅뱅이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혼돈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프리고진의 주장은 시작 따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 없다. 우주 이전과 현재의 우주는 하나의 연속적인 변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장 최근에 개발된 우주관을 용납하려는 과학자나 철학자의 수는 매우 적다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혼돈과학은 역사상 가장 최근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에 관한 얘기는 듣지 말기로 하자』라는 것이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잡힌 상식적 반응이다.

프리고진의 목표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유럽 과학의 전통을 지키는데 그 핵심이 있다. 1715 년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와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은 서로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이 서신왕래에서 그들은 신과 우주적 법칙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 세기가 지난 뒤 독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덴마크 물리학자 보어 (Niels Bohr) 는 결정론과 확률론의 역할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적은 노트를 교환하곤 했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근본적 관심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직 유럽에서만 과학은 지적 놀이로서나 실용적 가치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정열적 추구로서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적 연대감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유럽 과학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기를 중단했다고 프리고진은 말한다. 각 연구자들은 꽉 밀폐되어 있는 자기의 연구실하고 결혼생활을 한다. 때로는 미국 같은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낸다. 예컨대 프리고진이 자기의 전문분야 아닌 곳에 침범하고 있다고 해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각자는 자기의 영역」만을 지킨다는 것이 오늘날 과학의 한결 같은 원칙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어 프리고진은 설 땅이 없어지고 있다. 과학계는 프리고진을 용서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 프랑스 수학자 톰 (René Thom) 이 그렇다. 그에게는 혼돈과학 따위는 얼토당토 않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