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Origin    Alan Turing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 : Douglas Hofstadter, Daniel Dennett 저, 김동광 역, 사이언스 북스, 2001 (원서 : THE MIND'S I :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 , Basics Books, 1981) page 95~122

 

1. 흉내내기 게임

2. 새로운 문제에 대한 비판

3. 게임에 참가한 기계

4. 주요 문제에 관한 반대 견해

 1) 신학적 반론

 2) <진실을 회피한다> 는 반론

 3) 수학적 반박

 4) 의식을 근거로 한 주장

5) 여러 가지 결함을 근거로 한 주장

6) 러블레이스 부인의 반론

7) 신경계의 연속성을 근거로 한 주장

8) 행위의 비형식성을 근거로 한 주장

9) 초감각적 지각을 근거로 하는 논의

 

1. 흉내내기 게임

나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 라는 문제에 대한 고찰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기계> 와 <생각한다> 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가능한 언어의 일반적인 용법을 많이 반영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위험하다. 만약 <기계> 와 <생각한다> 라는 말의 의미가 그 일반적인 용례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발견된다면,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은 갤럽 여론 조사와 같은 통계 조사에 의거해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그런 정의를 시도하는 대신, 그 문제를 다른 문제로 대체시킬 것이다. 그것은 원래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모호한 말로 표현된다.

새로운 형식의 문제는 우리가 <흉내내기 (imitation) 게임> 이라고 부르는 게임을 이용해서 기술할 수 있다. 이 게임의 참가자는 남성 (A), 여성 (B), 그리고 질문자 (C) 세 사람이다. 질문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질문자는 다른 두 사람과 다른 방에 있다. 이 게임에서 질문자의 목적은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인지 밝혀내는 일이다. 그는 이 두 사람을 X 와 Y 라는 명칭으로 알고 있고, 게임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X 가 A 이고, Y 가 B 이다>, 또는 <X 가 B 이고, Y 가 A 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질문자는 A 와 B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런데 X 가 실제로 A 라면, A 는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 이 게임에서 A 의 목적은 C 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질문자가 목소리의 음조에서 상대의 성을 눈치챌 수 없도록 대답은 문서로 이루어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타자를 치는 것이다. 이상적인 배열은 두 개의 방 사이에 텔레타이프를 설치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질의와 응답이 중개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번째 경기자 (B) 의 게임 목적은 질문자를 돕는 것이다. 그녀의 최선의 전략은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제가 여자입니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요!> 라는 식의 말을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남성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로 특별한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약 이 게임에서 A 가 맡은 역할을 기계가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이런 게임에서 질문자는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 사이에서 게임을 할 때와 마찬가지 빈도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이러한 문제가 우리의 최초 문제인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2. 새로운 문제에 대한 비판

우리는 <이 새로운 형식의 문제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뿐 아니라, <이 새로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면 무한 회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두번째 문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새로운 문제는 사람의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 사이에 매우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다는 이점이 있다. 어떤 공학자나 화학자도 사람의 피부와 식별 불가능한 물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런 일이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설령 이러한 발명이 이용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 에 그러한 인조육으로 살을 붙여서 그 기계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설정한 형식은 질문자가 다른 참가자를 보거나, 그들을 접촉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조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여기에 제안된 판정 기준이 갖는 그 밖의 몇 가지 이점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문답법은 우리가 포괄하려는 인간 행위의 거의 모든 분야를 도입시키는 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계가 미인 대회를 보고 눈을 반짝거릴 수 없다는 이유로 불리한 위치에 처하지 않고, 사람이 비행기와 경쟁을 해서 질 수밖에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리한 위치에 놓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게임 조건에서 이러한 무능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증인> 은, 그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매력, 능력이나 영웅적 자질 등을 마음껏 떠벌일 수 있지만, 질문자는 실제로 그것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기계가 이길 가능성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이 게임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사람이 기계를 가장한다면, 그의 성적은 분명 형편없을 것이다. 계산이 느리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금새 정체가 폭로될 것이다. 사고 (thinking) 라 불러야 하지만 사람이 하는 사고와는 사뭇 다른 무었을 기계가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반론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내내기 게임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이 반론 때문에 골치 썩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흉내내기 게임> 을 할 때, 기계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사람의 행동을 흉내내는 것 이외의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런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둘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여기에서 게임 이론을 연구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리고 최선의 전략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대답과 같은 종류의 대답을 내놓는 것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3. 게임에 참가한 기계

앞에서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기계> 라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정할 때까지 명확해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모든 종류의 공학 기술을 기계에 적용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는 공학자 개인이나 공학자 집단이 다음과 같은 기계를 제작할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작동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대체로 실험적인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 작동 방식을 충분히 기술할 수 없는 기계를 제작할 가능성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사람을 기계에서 제외하고자 한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도록 정의를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공학자 집단은 모두 남성이나 여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조건은 실제로는 만족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사람의 피부 세포 하나에서 완전한 개체를 길러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최상의 칭송을 방을 생물학적 기술의 위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사례로 간주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류의 기술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버리도록 촉구한다. <생각하는 기계> 에 대한 현재의 관심이 흔히 <전자 계산기> 나 <디지털 계산기> 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기계가 만들어지면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함축에 따라 우리는 디지털 계산기만이 우리의 게임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계산기는 어떠한 이산적 상태의 기계도 흉내낼 수 있다는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능> 기계 (universal machine) 라 불린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기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속도의 문제를 차치하면, 여러 가지 계산 과정을 위해 그때마다 새로운 기계를 설계할 필요가 없다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각각의 경우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여러 가지 계산 과정을 하나의 디지털 계산기로 처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 계산기는 모두 동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주요 문제에 관한 반대 견해

이제 사전 정지 작업이 끝났고,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관한 논쟁을 진행시킬 차례이다. 우리는 이 문제의 최초의 형식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대체 형식의 적절함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최소한 이와 연관해서 이야기되어야 할 사상들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문제에 관한 나 자신의 신념을 밝혀두면, 독자들이 사태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문제의 좀더 정확한 형식을 고려해 보자. 나는 앞으로 약 50 년 이내에 약 109 배의 기억 용량을 갖고, 평균적인 질문자가 5 분 동안 질문을 한 후 올바른 확인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70% 가 넘지 않을 만큼 능란하게 흉내내기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최초의 문제 설정은 너무 무의미해서 논의할 가치가 없다. 그렇지만 20 세기 말에 이르면, 언어의 사용과 교육 받은 일반인들의 견해가 크게 바뀌어서 기계가 생각한다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모순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나는 이러한 신념을 숨기는 것은 유용한 목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유용한 목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이 증명되지 않은 어떤 추측에도 영향받지 않고, 충분히 입증된 사실에서 또 다른 충분히 입증된 사실로 확고하게 나아간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증명된 사실과 추측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추측이 대단히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유용한 연구 방향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견해에 대한 몇 가지 반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신학적 반론

사고는 사람의 영원 불멸한 영혼의 기능이다. 신은 모든 남녀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었지만, 다른 동물이나 기계에는 영혼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동물과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 견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신학적 용어로 반박할 것이다. 만약 동물이 사람과 함께 분류되었다면 이 논의는 좀더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사람과 다른 동물과의 차치보다 전형적인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차이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가 다른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면, 정통적인 관점의 자의적인 성격이 좀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가령 여자에게 영혼이 없다는 회교도의 견해를 기독교도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나 이 점은 논외로 돌리고, 주된 논의로 돌아가자. 여기에서 인용한 신학적 논의는 넌지시 신의 전능성 (omnipotence) 에 대한 중대한 제약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된다. 신이 할 수 없는 일 (예를 들어 1 과 2 를 똑같이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코끼리에게 영혼을 부여할 자유를 가진다고 믿으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신이 다음과 같은 돌연변이와 관련해서 이러한 능력을 행사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돌연변이란 이러한 영혼의 필요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개량된 뇌를 코끼리에게 제공하는 것과 같은 돌연변이이다. 이와 정확히 똑같은 형식의 주장을 기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swallow) > 가 훨씬 어렵기 때문에 기계의 경우가 다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신이 영혼을 부여하는 데 덜 적절하다고 간주함직한 몇 가지 정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들은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기계를 제작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가 불손하게 영혼을 창조하는 신의 능력을 침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신의 능력을 범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신이 창조하는 영혼들을 위해 아파트를 제공하는 신의 의지의 도구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이든 간에, 나는 신학적 논의에는 그다지 감동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러한 주장은 종종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거에도 그러한 주장은 종종 불만족스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갈릴레오 (Galileo) 의 시대에도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 제10장 13절)>,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동요치 않게 하셨나이다 (시편, 104편 5절)> 라는 구절에서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 의 지동설을 충분히 반박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지식을 기초로 할 때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쓸모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없을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줄 뿐이다.

 

2) <진실을 회피한다> 는 반론

<기계가 생각한다는 사실의 결과는 너무 두렵다. 따라서 기계가 그런 일을 할 수 없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게 믿기로 하자.>

이러한 논의가 위의 형식에서처럼 명백하게 표현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이 형식은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사람이 표현하기 힘든 어떤 측면에서 다른 창조물들보다 우수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인류가 필연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류가 지배적인 지위를 잃을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주장이 인기를 얻는 것은 분명 이런 감정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특히 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생각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더구나 인류의 우월성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의 근거를 이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장이 반박을 필요로 할 만큼 내용면에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위로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로는 아마도 영혼의 윤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수학적 반박

이산적 상태 기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수리논리학의 결과는 많다. 이러한 결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괴델의 정리 (Gödel's theorem) 일 것이다. 괴델의 정리는 충분히 강력한 논리 체계 내에서, 그 체계 자체가 모순이 아닌 한, 그 체계 내에서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언명이 정식화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 밖에 처치 (Church), 클리니 (Kleene), 로서 (Rosser), 그리고 튜링에 의한 몇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결과가 있다. 그중에서 맨마지막 결과가 우리의 고찰에 가장 편리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데 비해, 다른 결과들은 상대적으로 간접적인 주장에서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델의 정리를 사용하려면 그 외에 기계 언어를 통해 논리 체계를 기술하는 수단과 논리 체계의 언어를 통해 기계를 기술하는 수단이 추가로 필요하다. 튜링의 결과는 본질적으로 무한한 용량을 가진 디지털 계산기라는 종류의 기계를 언급한다. 그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이러한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흉내내기 게임과 같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도록 기계를 특수하게 개조하더라도, 그에 대해 기계가 틀린 답을 하거나 한 가지 질문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주더라도 기계가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는 질문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그런 질문이 여럿 있을 수 있으며, 어떤 기계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다른 기계가 답할 수 있는 경우도 가능하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질문은 그에 대한 답변, 즉 <예> 또는 <아니오> 와 같은 간단한 답변이 가능한 종류의 것이며, <당신은 피카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는 식의 질문은 아니다. 기계가 대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질문은 <.... 라고 규격화된 어떤 기계를 생각해 보자. 이 기계는 모든 질문에 대해 '예' 라고 대답할 것인가?> 하는 식의 종류가 될 것이다. 인용문 속의 말줄임표는 어떤 기계에 관한, 표준 형식의 기술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술된 기계가 현재 조사 중인 기계와 특정한 비교적 단순한 관계에 있을 때, 그 대답이 틀렸는지 또는 곧 나올 수 없는지 여부를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이 수학적인 결과이다. 즉 그것은 사람의 지성이 지배받지 않는 종류의 제한이 기계에 가해진다는 것의 증명인 셈이다.

이 주장에 간략히 답한다면, 그런 주장이 어떤 특정한 기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한 한계가 사람의 지성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았으며, 단지 주장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견해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기계에 적절하고 중요한 질문이 주어지고 기계가 분명한 답을 할 때, 우리는 그 답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우월감을 준다. 이런 느낌이 착각에 불과할까? 아니, 이것이 완전히 사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너무도 자주 질문에 틀린 대답을 하기 때문에, 기계가 잘못을 법할 가능성에 대한 증거에 지나치게 기뻐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보잘것 없는 승리를 거둔 상대인 하나의 기계와의 관계에서만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몯ㄴ 기계를 상대로 동시에 승리를 거두기란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주어진 모든 기계보다도 영리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도 그보다 더 똑똑한 다른 기계가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대개 토론을 위한 근거로 흉내내기 게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반론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준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4) 의식을 근거로 한 주장

이 주장은 제퍼슨 (Jefferson) 교수의 1949 년 리스터 연설에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인용하기로 하겠다.

<기호가 어떤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고나 느낌에 의해 기계가 14행시를 짓거나 협주곡을 작곡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기계가 뇌에 필적한다고, 즉 기계가 단지 14행시를 쓴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어떤 기계 장치도 그것이 성공했을 때의 기쁨을 느끼거나 (단지 인위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간편한 장치로서가 아니라), 진공관이 끊어졌을 때 슬픔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아첨을 받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거나 실수를 범했을 때 비참한 기분이 드는 일도 없다. 성적으로 매료되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해서 노하거나 우울해지지도 않는다.>

이 주장은 우리가 행하는 테스트 (test) 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견해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에 따르면,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그 기계가 되어 자신이 생각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경우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해 이런 느낌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누구도 어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사람> 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유아론적 관점이다. 유아론은 가장 논리적인 견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개념의 의사 소통을 곤란하게 만든다. 즉 A 는 <A 는 생각하지만 B 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 데 대해, B 는 <B 는 생각하지만 A 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논의를 계속하기보다,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는 좀더 세련된 관례를 채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제퍼슨 교수가 극단적인 유아론적 관점을 채택할 의도가 없다고 확신한다. 필경 그는 흉내내기 게임을 그 테스트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이 게임은 (경기자 B 를 생략하면) 구두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사용된다. 그런 시험은 당사자가 어떤 내용을 정말 이해하는지, 아니면 <뜻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외우는지> 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구두 시험의 예를 들어보자.

이런 식이다. 14행시를 쓰는 기계가 구두 시험에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제퍼슨 교수는 무슨 말을 할까? 그가 이러한 대답을 기계가 <단지 인위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 으로 간주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대답이 위의 인용문처럼 만족스럽고 일관될 때에도 그것을 <단순한 고안물> 로 간주할 것이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단순한 고안물> 이라는 표현은 누군가가 낭독하는 14행시를 녹음하고 때때로 그것을 틀려면 적절한 스위치를 올리기만 하면 되는 식의 기계 장치들을 포함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결국 의식을 근거로 하는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아론적 입장을 강요받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입장을 버릴 것을 설득당한다고 생각된다. 그 경우 그들은 아마도 우리의 테스트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가 의식에 어떤 수수께끼도 없다는 식의 인상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의식의 존재를 국소적으로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에 연관된 역설과 같은 무엇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우리가 고찰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이러한 수수께끼가 반드시 풀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 여러 가지 결함을 근거로 한 주장

이런 주장은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기계에게 시킬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은 결코 기계가 X 를 행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형식을 취한다. 여러 가지 특성 X 는 앞의 두 문장의 접속 형태 속에 시사되어 있다. 그러면 내가 몇 가지 예를 제공하겠다.

친절하고, 기략이 풍부하고, 아름답고, 우호적일 것 ..... 주도적일 것, 유머 감각을 가질 것, 선악을 분간할 것, 실수를 할 것 ..... 사랑에 빠질 것, 딸기와 크림을 즐길 것 ..... 다른 사람을 누구와 좋아하게 만들 것,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 .....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것, 자신의 생각의 주체가 될 것 ..... 사람처럼 행동의 다양성을 가질 것, 전혀 새로운 일을 할 것 ........

대개는 이러한 언명에 대해 어떤 지지도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언명은 주로 과학적 귀납법의 원리에 기초를 둔다. 사람은 평생 동안 수천 개의 기계를 본다. 그는 자신이 본 기계로부터 수많은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기계는 추하고 각각의 기계는 지극히 제한된 목적을 위해 설계되어 있으며, 원래의 목적과 아주 작은 차이가 나는 목적에 대해서도 무용지물이 된다. 어느 것이든 개별 기계의 행동의 다양성은 지극히 작다 등등..... 따라서 그들이 기계 일반의 필연적인 성질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대개의 기계가 기억 용량이 작다는 사실과 대부분 결부되어 있다 (나는 기억 용량이라는 개념이 이산적 상태 기계 이외의 다른 기계에도 적용 가능할 정도로 확장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 논의는 수학적인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고 그 성질을 말했다면 (사람들로부터 - 옮긴이) 디지털 계산기에 관한 상당한 의구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필경 과학적 귀납법 원리의 비슷한 적용에 기인한 결과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적용은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화상을 입은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고 불을 피함으로써 불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을 때, 나는 그 아이가 과학적 귀납법을 적용한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나는 아이의 행동을 그 밖의 여러 가지 방식으로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업적과 풍습은 과학적 귀납법을 적용시키는 데 지극히 적절한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얻으려 한다면, 상당히 큰 시간 - 공간이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부분의 영국 어린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언급된 무능력의 상당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논평이 필요하다. 딸기 크림 과자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하찮은 일이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이 맛있는 음식을 기계가 즐길 수 있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기계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려는 어떤 시도도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이 무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계의 다른 무능력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가령 백인과 백인 사이, 흑인과 흑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우정이 사람과 기계 사이에서 일어나기 어렵게 하는 것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기계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라는 주장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서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라고 대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좀더 공감이 가고 호의적인 태도로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나는 이 반론을 흉내내기 게임을 이용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몇 가지 산술 문제를 내기만 하면 기계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따. 왜냐하면 기계는 지극히 정확하므로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대응은 간단하다. 기계 (게임을 위해 프로그램되어 있는) 는 산술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질문자를 혼란시키도록 계산된 방식으로 의도적인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산술에서 어떤 종류의 실수를 할 것인가에 대한 부적절한 결정을 함으로써 기계적인 결함을 드러낼 것이다. 비판에 대한 이러한 해석도 충분히 공감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깊이 다룰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이 비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두 종류의 오류를 혼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오류를 <기능상의 오류> 와 <결론의 오류> 라고 부르기로 하자. 기능상의 오류는 기계가 설계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기계적인 고장이나 전자적인 고장에 의한 것이다. 철학적 논의에서는 그런 오류가 흔히 무시된다. 따라서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 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기계는 물리적인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수학적인 허구이다. 정의에 의해 그 기계는 기능상의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계가 결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의 오류는 기계에서 나오는 출력 신호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었을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거짓 명제가 타이프되었을 때 우리는, 기계가 결론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기계는 이러한 종류의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 그것은 <0 = 1> 을 되풀이해서 타이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덜 괴팍한 예를 들자면 기계가 과학적 귀납법에 의거해 결론을 끌어내기 위한 어떤 방법을 갖고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방법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예견해야 한다.

기계가 자신의 사고의 주체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이 가능한 것은, 물론 그 기계가 특정 주제에 대해 특정 사고를 갖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 국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조작이라는 주제> 는 최소한 그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기계가 <x2 - 40x - 11 = 0> 라는 방정식의 해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그 순간 이 방정식을 그 기계의 주제의 일부로 기술하고 싶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주제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거나, 자신의 구조를 변경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계는 자신의 행동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목적을 좀더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은 공상적인 꿈이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실현 가능한 일이다.

기계가 행동의 다양성을 가질 수 없다는 비판은, 기계가 많은 기억 용량을 갖지 못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실제로 최근까지 기억 용량이 천자리 수에 미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반론들은 의식을 근거로 한 주장의 위장된 형식인 경우가 많다. 대개는 기계가 이러한 사항 중 어느 하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기계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의 종류를 기술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다지 감명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방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기계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제퍼슨 교수의 언명에 들어 있는 삽입구를 참조하라.

 

6) 러블레이스 부인의 반론

찰스 배비지 (Charles Babbage) 의 해석 기관에 관한 가장 자세한 정보는 러블레이스 (Lovelace) 부인의 회상록에 들어 있다. 그녀는 그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석 기관은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낸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어떻게 명령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모든 것' 을 할 수 있다 (강조는 러블레이스 부인).> 하트리 (Hartree) 는 이 말을 인용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전자 장치, 또는 생물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조건 반사 (이것은 '학습' 을 위한 기초로 도움이 될 것이다) 를 일으킬 수 있는 전자 장치를 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는 무척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문제이며, 그 가능성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몇 가지 진전을 통해 시사되고 있다. 그러나 배비지의 시대에 제작되거나 구상된 기계가 이런 성질을 가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하트리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의 주장은 문제의 기계가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러블레이스 부인이 활용할 수 있었던 증거로는 기계가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었다. 해석 기관은 어떤 점에서 충분히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부 이산적 상태의 기계가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 기관은 만능 디지털 계산기였기 때문에 기억 용량과 속도만 충분하다면 적당한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 기계를 흉내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러블레이스 부인이나 배비지 모두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에게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장해야 했다는 의무는 없었다.

러블레이스 부인의 반론의 변형판은 기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이 비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는  속담을 내세워 그 순간을 모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독창적인 일> 이 교육에 의해 자신에게 심어진 씨앗이 성장한 것에 불과하거나, 이미 잘 알려진 일반 원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반론의 좀더 정교한 변형판은 기계가 결코 <우리를 불시에 기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좀더 직접적인 도전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논박할 수 있다. 기계는 아주 빈번하게 나를 기습한다. 그 주된 이유는, 내가 기계가 무엇을 할지 예상하기 위해서 충분한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설령 계산을 하더라도 너무 서둘러서 건성으로 하는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전압이 저 전압과 같다고 가정하자. 어쨌든 그렇다고 가정해 보나.> 당연히 나는 자주 틀리고 그 결과는 내게 놀랍다. 왜냐하면 실험이 끝났을 때 이런 가정을 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 나는 불완전한 나의 방법에 대한 훈계에 항변할 도리가 없게 된다. 그러나 놀라움에 대한 내 경험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내 신뢰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지는 마라.

나는 이 답변이 비판자를 침묵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놀라움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창조적이고 지적인 행위에 의한 것일 뿐, 기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앗다고 지적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식을 근거로 한 논의로 돌아가게 되고, 놀라움이라는 개념과는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 논의는 여기에서 종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를 놀라움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아니면 기계나 그 밖의 어떤 것이든 간에 <창조적이고, 지적인 행위> 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기계가 놀라움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견해가 특히 철학자나 수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 제시되는 순간, 그 사실의 모든 결과가 그와 동시에 그 사람에게 떠오른다는 잘못된 가설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가설이지만, 대개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 버린다. 그 당연한 귀결로 우리는 데이터와 일반 원리로부터 단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7) 신경계의 연속성을 근거로 한 주장

신경계는 확실히 이산적 상태 기계가 아니다. 뉴런에 전달되는 신경 펄스의 크기에 대한 정보에 작은 잘못이 있어도 출력되는 펄스의 크기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이산적 상태계 (discrete state system) 가 신경계의 움직임을 흉내내기 힘들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산적 상태 기계가 연속적인 기계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흉내내기 게임의 조건을 고수한다면, 질문자는 이런 차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더 간단한, 다른 연속적인 기계를 생각해 보면 상황이 좀더 분명해진다. 그런 예로는 미분해석기 (differential analyzer) 가 적당할 것이다 (미분 해석기란 어떤 종류의 계산에 사용되는 이산적 상태 유형과는 다른 종류의 기계이다). 이런 종류의 일부 기계는 타자기로 친 답을 내놓기 때문에 이 게임에 참가하는 데 적당하다. 미분 해석기가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할지 디지털 계산기로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디지털 계산기가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령 π 의 값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π 의 값은 약 3.1416), 디지털 계산기는 3.12, 3.13, 3.14, 3.15, 3.16 중 하나를 (예를 들어) 0.05, 0.15, 0.55, 0.19, 0.06 의 확률로 임의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자가 미분 해석기와 디지털 계산기를 구별하기란 지극히 힘들 것이다.

 

8) 행위의 비형식성을 근거로 한 주장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 집합에서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기술하기 위한 규칙들의 집합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빨간 신호등을 보면 멈추고 파란 신호등을 보면 진행한다는 규칙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호등이 고장나서 두 가지 신호가 함께 작동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멈추어 서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을 내린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 즉 교통 신호에서 발생하는 상황까지를 포함하는 행위 규칙을 준비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를 기초로 우리는 기계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앞으로 이 주장을 다시 재현하려고 시도하겠지만, 나는 그 주장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규제하는 데 사용되는 행위 규칙의 명확한 집합을 가진다면, 사람은 기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계일 수 없다.> 이 주장에서는 모든 개념이 부주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삼단논법의 오류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행위 규칙이라는 매개 개념이 주연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 결론 <그러므로 사람은 기계일 수 없다> 는 결론이 오류이다. - 옮긴이). 나는 이 주장이 항상 이런식으로 제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행위 규칙 (rules of conduct> 과 <행동 법칙 (laws of behavior)> 사이에 쟁점을 흐리는 어떤 혼란이 있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행위 규칙> 의 의미는 <빨간 신호를 보면 정지한다> 라는 식의 규칙 (precept) 이고, 사람들은 그 규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의식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행동 법칙> 이라는 말에서 내가 뜻하는 것은 <당신이 그를 꼬집으면, 그는 엉엉 울 것이다> 라는 것처럼 사람의 신체에 적용된 자연 법칙이다. 지금 인용한 논의에서, <자기의 생활을 통제하는 행위의 법칙> 을 <자기의 생활을 통제하는 행동의 법칙> 으로 바꾸면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는 더 이상 극복 불가능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 법칙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은 일종의 기계 (반드시 이산적 상태 기계에 국한되지 않는) 임을 함축하는 것이 참일 뿐 아니라, 역으로 이러한 기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행동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한 행위 규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고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이런 법칙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적인 관찰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충분히 조사했다. 그런 법칙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상황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우리는 이러한 어떤 언명도 정당화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좀더 강력하게 입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법칙이 존재한다면, 분명 우리가 그런 법칙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산적 상태 기계가 주어진다면, 그 기계의 미래 움직임을 예견하기에 충분한 관찰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확실히 가능해질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온당한 시간 이내에, 예를 들어 천년 내에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맨체스터 대학의 계산기에 기억 장치를 1,000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 작은 프로그램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16 자리 숫자로 대답하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누구라도 시도되지 않은 값에 대한 모든 대답을 예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대답에서 무언가를 배워볼 테면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이다.

 

9) 초감각적 지각을 근거로 하는 논의

초감각적 지각 (extrasensory perception - E.S.P.) 의 개념과 그 네 가지 항목의 의미, 즉 텔레파시, 투시, 예지 및 염력에 대해서는 독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과학 개념을 모두 부정하는 것처럼 판단된다. 우리는 그런 현상들을 얼마나 의심하고 싶은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적어도 텔레파시 (telepathy) 에 대한 통계적 증거는 압도적이다. 이 새로운 사실에 적합하도록 우리의 기존 개념들을 재배열하기란 지극히 힘들다. 일단 그 개념들을 받아들이면, 유령과 귀신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개념 중 하나는 우리의 신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얼마간 유사한 다른 몇 가지 법칙과 함께, 물리학의 기존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내 생각에 정말 강력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과학 이론이 초감각적 지각과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문제에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초감각적 지각을 생각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지극히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위로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이, 특히 초감각적 지각과 관련되는 종류의 현상이 아닌지 우려한다.

초감각적 지각에 근거한 좀더 구체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텔레파시 수신을 할 수 있는 뛰어난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디지털 계산기를 사용해서 흉내내기 게임을 해보자. 질문자는 '내 오른손에 있는 카드가 어떤 짝패 (가령 하트인가 스페이드인가 - 옮긴이) 인가?' 라는 식의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텔레파시나 투시를 이용해 400 장의 카드에서 130 번의 정확한 답을 한다. 기계는 임의적으로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104 번 가량 정답을 맞출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자는 상대가 기계인지 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가령 디지털 계산기가 난수 발생 장치를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당연히 그 장치를 사용할 것이다. 반면 난수 발생 장치는 질문자의 염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염력이 기계로 하여금 확률 계산에 의해 예상되는 것보다 더 정확한 답을 하게 만들어서, 그 결과 흉내내기 게임의 질문자가 올바른 확인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염력으로 바로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초감각적 지각을 통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텔레파시가 인정된다면 우리의 테스트를 엄격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 상황은 가령, 질문자가 혼잣말을 하고 있고 참가자 중 한 사람이 벽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는 경우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참가자들을 <텔레파시 방지 (telepathy-proof) 방> 에 들어가게 하면 모든 필요 조건은 만족될 것이다.

초감각적 지각이, 사람이 창조하는 기계와 사람과의 궁극적인 차이라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고 튜링이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간단한 평을 하고자 한다. 만약 이 평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종의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동기가 무엇인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 튜링은 텔레파시에 대한 증거가 매우 뚜렷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인 1950 년에는 그런 증거가 강력했을지 몰라도 30 년 후인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훨씬 약해졌을 것이다.

1950년 이래 이런저런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그것을 보증하는 식의 악명 높은 사건들이 빈발했다. 그런 물리학자들 중에는 훗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초감각적 지각에 찬성한 자신의 발표를 취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음 달에는 새로운 초자연적 악대 차량으로 바꾸어 타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물리학자들, 또한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대부분의 심리학자들도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모든 초감각적 지각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튜링은 초자연적 현상이 충분히 확립된 과학 이론과 어떤 식으로든 화해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달갑지 않은 위로> 를 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와는 견해가 다르다. 설령 텔레파시, 예지, 염력과 같은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또한 전형적으로 그런 현상에 따라다니는 괄목할 만한 특성이 사실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런 현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간단히 물리학 법칙을 수정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학적 세계관에 주요한 혁명이 일어날 때에만 그런 현상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혁명을 열광적으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런 혁명은 비애와 혼란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대상에 대해 그만큼 훌륭하게 작동해 온 과학이 그 정도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을까? 과학의 모든 것을 가장 근본적인 가정에서부터 다시 성찰하는 작업은 엄청난 지적 모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거대한 작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증거는 지난 몇 년 동안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

Douglas.R.Hofstadter   Daniel.C.Denne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