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trand  Russell

 

(영국 철학자·수학자 1872∼1970)

영국 철학자·수학자. 트렐레크 출생. 빅토리아여왕시절 총리대신을 지낸 조부를 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철학을 배웠다. 한때는 헤겔적인 관념론의 입장을 취했지만 T.S. 무어의 선도에 의해 극단적인 실재론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수학의 원리(1903)》가 있다. 집합론의 배리를 발견하고, 이후 몇 년간 이것을 해결하는 데 전념했다. 제 1 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반전운동을 전개하고 1916년에는 케임브리지 강사직을 떠나고, 18년에는 6개월간 투옥되었다. 당시 옥중에서 집필된 것이 《수리철학서설, 1919)》이다. 19년에서 30년대의 후반까지는 급진사상으로 일정한 직장을 얻을 수 없어 저술과 강연으로 생계를 이었지만, 특히 교육·성도덕에 관한 그의 평론은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3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몇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40년에는 뉴욕시립대학교수 임명이 반대운동에 의해 무효화되는 사건도 있었다. 44년에는 영국에 돌아와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복귀했으며, 5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만년에는 베트남 반전운동과 원자·수소폭탄 사용금지운동에 힘썼다. 제 2 차세계대전 후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서양철학사(1946)》 《인간의 지식(1948)》 《내 철학의 발전(1959)》 《자서전(3권, 1967∼69)》 등이 있다.

러셀의 철학적 입장은 갖가지 변천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은 1903∼14년의 거의 10년간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 기간의 러셀의 중심적 주제는 <수학의 기초에 대해서>라는 것이며, 그의 탐구동기는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이 입장은 《수학의 원리》에서 이미 명확해졌는데 집합론 등 주요한 수학적 개념을 순수한 논리적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이 시도되고 있다. 《수학의 원리》에서 극단적인 실재론은 기술의 이론을 계기로 해서 점차 약해져가고, 독자적으로 존재자를 상정하는 대신에, 이미 존재가 인정된 대상에서 논리적 구성이 사용되는 것처럼 된다. 이 수법은 《외부세계는 어떻게 해서 알려질 수 있는가(1914)》에서는 물리적 세계를 감각여건에서 구성한다고 하는 형태에서 사용되고 있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을 사용한 분석에 의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러셀의 철학스타일은 20세기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

term :

수학 (Mathematics)   철학 (Philosophy)   Alfred North Whitehead   Bertrand Russell

paper :

site :

Bertrand Russell : University of St Andrews

Wikipedia : Bertrand Russell

러셀 : Britannica :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 ..........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video :

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1/3 : 자음과 모음, 2011/06/27

 

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2/3 : 자음과 모음, 2011/06/27

 

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3/3 : 자음과 모음, 2011/06/27

 

 

초기생애

앰벌리 자작과 앨더리 가문의 스탠리 남작 2세의 딸 캐서린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앰벌리 경은 총리를 2번 역임하고 러셀 백작 1세가 되었던 존 러셀 경의 셋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1874년 디프테리아로 병사했으며, 18개월 뒤 아버지도 죽었다. 원래 러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로 무신론자였던 친구들을 러셀과 당시 10세였던 형 프랭크의 후견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러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아들의 유언을 뒤엎고 이들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으며, 러셀과 형은 결국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는 독실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청교도였으며 엄격한 개인적 양심과 정확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었다. 러셀은 혼자 교육받았기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긴 이상주의적 정서와 형이상학적 깊이(나중에 그는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승화된 성욕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했음)로 가득 찬 치열한 내면적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11세 때 이미 종교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교육에 대해서도 회의했고 정치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가족들과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그는 경험적 문제들 속에서는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11세 때 형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와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가 증명할 수는 없고 믿어야만 하는 것임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셀의 철학활동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지식에 대한 사람들의 허식에 대해서도, 지식의 토대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근거없는 가정(假定)에도 현혹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1차적 목표의 하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느 정도의 확실성이나 불확실성을 가지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회의적이고 꼼꼼한 태도로 탐구하는 데 있었다.

1890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곧 외부인들이 ' 사도회'(The Apostles)라고 부르던 배타적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1893년 수학 졸업시험(우등시험)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었다.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 형이상학자 J. M. E.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몇 년 동안 관념론자가 되었다. 1894년 윤리학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

같은 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건 피어솔 스미스(<트리비아 Trivia>의 저자)의 동생이자 진보적 사상을 가진 필라델피아 출신의 퀘이커교도 앨리스와 결혼했다. 다음 2년 동안 미국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처음 출간한 책은 정통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쓴 <독일 사회민주주의 German Social Democracy>(1896)였다. 1914년에 노동당에 가입할 때까지는 자유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기하학의 토대에 관한 소론 An Essay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다.

초기 철학저작

1898년 당시 트리니티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G. E. 무어와 함께 관념론에 반기를 들었으며,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철학자들이 보통 물리적 실재론자라고 부르는 태도(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보통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3가지 주요목표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이며 잘 알려진 첫째 목표는 인간지식의 겉치레들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 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40)와 마지막 주요저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1948)와 같은 저서들에 나타나 있다. 특히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는 첫째 목표를 분명하게 개관하려 한 책이다. 2번째 목표는 논리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것이었고, 이 목표는 수학이 매우 적은 수의 논리적 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쓴 첫번째 저서인 <수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에 잘 나타나 있다. 3번째 목표는 논리적 분석이었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언어로부터 세계에 대한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기술적 표현(예를 들어 '지금의 프랑스 왕')이 지시하는 대상의 존재를 쓸데없이 가정하지 않도록 언어를 최소한의 필수요소 즉 원자적 사실로 분석했다. 이 3번째 목표는 이른바 '기술이론'과 ' 논리적 원자론' 철학에, 그리고 <물질분석 The Analysis of Matter>(1927)· <정신분석 The Analysis of Mind>(1921)과 같은 저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서들의 주제는 정신과 물질은 같은 '중성적' 요소들의 서로 다른 '구조화'라는 것에 있다.

얼마 동안 라이프니츠에 관한 저서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비판적 해설 A Critical Exposition of the Philosophy of Leibniz>(1900)을 저술한 뒤, 논리학과 수학 분야의 저술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수학의 원리>(1903)의 첫번째 초고를 시작으로 10년 뒤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전3권의 출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수학 원리>(1910, 1912, 1913)는 과거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수학자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다. 두 저자는 <수학 원리>를 통해, 자명한 논리적 원리로부터 수학을 도출해내려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이 저서는 러셀의 다른 논리학 저작들과 함께 오랫동안 논리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러셀의 전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10년의 저술기간 초기에 그는 스스로 '신비스런 계몽'이라고 부르던 일을 체험했다. 이 체험이 있은 지 5분 만에 그는 평화주의자(그리고 남아프리카 보어인과 영국인의 전쟁에서 보어인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반(半)신비적 느낌'에 휩싸이게 되었다. 1903년 그와 첫 부인 앨리스의 사랑은 갑자기 끝이 났으나 이 부부는 1921년에야 이혼했다. 1910년 저명한 작가 오털라인 모렐 여사와 만났으며 그녀와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02년에는 대중적이며, 나중에 그가 느꼈듯이 다소 과장된 수필 <자유인의 기도 The Free Man's Worship>를 출판했다. 1907년 여성의 참정권과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 하원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으며 1908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후기 정치·철학 저작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한 일로 인해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에서도 해고되었으며 1918년에는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수리철학 입문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1919)을 썼으며 <정신 분석>을 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러셀은 도라 블랙을 만나 1920년 그녀와 함께 중국을 방문했고 1921년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1920년에는 소련을 방문했고 같은 해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후에 스탈린주의라 불린 많은 측면을 예언·비난한 소련정권에 대한 뚜렷한 비판서였다.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분석철학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은 뒷날 이 운동에 공감하지 않았다. 논리적 원자론 철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1911년 러셀과 처음 만남)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의 기본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학설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는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줄곧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에서는 '구조의 유사성'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인과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러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저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와는 의견을 달리했다.

1920년대에 쓴 많은 책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원자의 ABC The ABC of Atoms>(1923)·<상대성의 ABC The ABC of Relativity>(1925)와 같은 몇몇 저작은 매우 통속적이며, 그밖에도 <내가 믿는 것 What I Believe>(1925)·<결혼과 도덕 Marriage and Morals>(1929)·<과학적 조망 The Scientific Outlook>(1931)·<교육과 사회질서 Education and the Social Order>(1932) 등을 펴냈다. 날카로운 기지와 함께 정치적·도덕적·지적으로 급진좌파적·반(反)수구주의적 관점에서 쓴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주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윤리학과 정치·사회·교육철학 분야의 전문서를 쓰기도 했다.

1927년에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레그래프 하우스'에서 실험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도라에 의해 계속 운영되었다(두 사람은 1935년에 이혼함). 이런 자유방임에 의한 교육방식은 당시에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있다. 1931년 형 프랭크가 죽자 러셀은 백작작위를 이어받아 러셀 백작 3세가 되었다. 1934년 <자유와 조직 1814~1914 Freedom and Organization 1814~1914>, 1937년에는 <앰벌리 페이퍼스 The Amberley Papers>를 출판했다. 이 2권의 책은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1936년 러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1938년 뮌헨 조약에서 독일에게 영토를 양도하기로 한 영국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좋은 것을 위한 불가피한 서막'으로서 히틀러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1938~39년 미국에서 강의한 뒤 뉴욕에 있는 시립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폴 에드워즈가 편집한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1927)의 부록 참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5년 동안 강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 가난에서 벗어났으나 1943년 이 계약마저 취소되었다. 이때의 강의내용을 토대로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곧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 겸 펠로로 임명되었다. 그후 15년 동안 러셀은 빠르게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번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정치활동

1948년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주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러셀의 사상이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러셀은 크게 실망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언어분석철학에 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뒤 <나의 철학적 성장 My Philosophical Development>(1959)과 몇 개의 논평을 제외하고는 철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하고 미국인 이디스 핀치와 결혼한 1952년경부터 러셀은 점차 기성 권위층의 미움을 산 반면 전세계의 젊은층과 좌익계열에게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1960년대 후반기 동안 그는 매년 1,000장 이상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시지를 받았으며 그중 많은 수가 극동지방에서 온 것이었음). 1954년 BBC 방송을 통해 '인간의 위험'이란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해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방송강연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러셀-아이슈타인 성명', 동서양 과학자들의 퍼그워시 회의(1957년 1차 회의에서 러셀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음)로서, 마침내는 1958년에 시작된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러셀은 핵무장 반대운동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사임하고 더욱 투쟁적인 ' 10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대규모의 시민불복종 운동을 일으킨다는 공식목표를 내걸었고, 1961년 러셀은 아내와 함께 직접 대규모 연좌농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로 감형되었다.

1962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쿠바 위기와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 개입하여 당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와 각국 수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낼 정도로 여전히 왕성한 정력과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워런 보고서가 발표되자 '케네디 암살진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또 자신의 평화 노력을 체계화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과 '애틀랜틱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후 1966년까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유고슬라비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데디예르, 폴란드의 작가 이사크 도이처 등의 도움을 받아 국제전범재판소를 소집하기도 했다. 1967~69년 러셀의 가장 훌륭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서 재치있고 솔직하면서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문체로 쓴 <자서전 Autobiography>을 3권으로 출간했다.

평가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3세대에 걸친 활기찬 생애에서 철학·수학·과학·윤리학·사회학·교육·역사·정치학·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러셀의 탁월한 영향력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그는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음), 기억력, 귀족 특유의 독립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활동의 원천이었던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러셀의 이러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있게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