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비판의 철학

 

인공지능의 철학 : 이초식, 고려대 출판부, 1993, Page 26~61
 

1. 인공지능 비판의 시각

2. 배경적 지식과 프레임 비판 - 현상학과 실존철학

3. 기술습득과 전문가시스템 비판 - 드레퓌스

4. 지식표현과 생철학적 비판 - 딜타이

5. 지각경험과 언어철학적 비판 - 비트겐슈타인

6. 기호처리와 의미론적 비판 - 썰의 중국어방 논변

7. 인공지능 비판의 비판

  7-1. 썰의 논지와 분석적 고찰

  7-2. 한국어방 논변

  7-3. 인지주의 논박

 

1. 인공지능 비판의 시각

철학한다는 것은 비판한다는 것이다. 비판함이 없는 철학은 참된 의미의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철학함의 특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확고한 것으로 굳어 버린 기존의 관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공지능의 철학은 일반 대중 다수의 낙천적 기대보다도 소수의 부정적 비판을 경청한다.

"지난 10 년 동안 (1976~85)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다. 이 기간 중의 과학적 발전이나 기술적 발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느끼십니까? 이 진보가 그 이전의 10 년 (1966~75) 에 비해 가속화되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난문제들을 공략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진보의 속도가 감속되었다고 보십니까? " 그리고 " 지난 10 년 동안 귀하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물음들은 잡지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의 편집자들이 인공지능 전문가들에게 제시한 질문 중의 한 뭉치다. (주석: Bobrow and Hayes (1985), pp. 380~381.) 여기서 편집자들은 이미 인공지능의 발전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였다. 그러나 그 응답자 모두가 바로 그 전제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 중에는 인공지능이 발전했다는 생각에 대한 극단적인 반론도 있었다. 드레퓌스 (Hubert Dreyfus) 의 부정적 응답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주석 : 위의 책 p. 381.)

드레퓌스는 "지난 25 년 동안의 인공지능 분야는, 라카토스 (Imre Lakatos) 가 퇴행성 연구프로그램 (a degenerating research program) 이라고 지칭한 것에 꼭 알맞는 실례이다" 라고 한다. 또한 그는 AI 가 뉴웰 (Allen Newell) 과 사이먼 (Herbert Simon) 이 인간의 기호조작의 형식을 모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제시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이 초기 연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소규모 세계 (micro-worlds) 에 관한 연구들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이 분야의 박사학위논문, 잡지, 심포지엄, 단행본 등이 급증했고 민스키 (Marvin Minsky) 와 같은 학자들은 인공지능을 창조하는 문제가 한 세대 (世代) 안에 해결될 것으로 낙천적인 예측을 하였다. 그러나, AI 연구자들은 '어린아이의 이야기 이해 프로그램', '상식적 지식의 정식화', '인간이해에 있어서 이미지와 프로토타이프' 등의 문제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고 그는 평가한다.

보던 (Margaret Boden) 도 인공지능이 지난 십년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인공지능 연구비와 인원의 규모 그리고 매스컴의 선전 등이 상업과 정치적 요인 등으로 인해 급격히 성장 (growth) 했다고 하겠으나, 그 성장이 이 분야의 지적인 발전 (intelligent development) 을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진보의 대부분은 기술적 유용성이고 과학적 이해가 진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석 : 앞의 책 p.381.) 위노그래드 (Terry Winograd) 도 AI 의 이론적 발전이 같은 방향으로 지속해서 발전해 왔다는 데 회의를 표명하였다. 컴퓨터 하드웨어는 그 크기와 비용의 측면에서 혁명적인 발전을 하여 방대한 상황에 걸쳐 경제적인 효용성을 지닌 기술들을 적용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론적 발전보다도 응용과 이익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 넘는 어떤 것을 파악하기 위해 학습과 기억 등에 관한 고도의 사변적이고 부정확한 직관에 호소하는 사람들도 출현했다고 본다. (주석 : 앞의 책 p.382.)

요컨데, 드레퓌스는 AI 를 퇴행성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전폭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보던과 위노그래드는 인공지능의 기술적 유용성의 진보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과학적 이론의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위노그래드는 이론 분야에서도 방향을 달리하여 생각하면 인공지능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공지능을 퇴행성 연구 프로그램으로 단정하는 드레퓌스의 견해와는 차이가 크다.

결국,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드레퓌스의 논지이므로, 우리는 그 속에 담겨진 철학적 성향과 특성들부터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레퓌스는 그의 비판적 시각을, 후설 (E. Husserl) 의 현상학과 이를 계승한 하이데거 (M. Heidegger) 의 실존주의적 현상학으로부터 취하였다고 하기 때문에 그 철학의 노선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드레퓌스의 논지를 이들 철학학파와 연관 지어 검토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그 다음으로는 첫째, 현상학적 기대의 지평이 우리들의 배경적 지식을 이루고 있다는 논지부터 검토해보고, '기대' 의 개념을 인공지능에서 프레임 이론으로 처리하려는 시도에 대한 드레퓌스의 비판을 다루고자 한다. 둘째, 이러한 드레퓌스의 비판은 서구의 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에 대한 반론과 이어지며 그 반증의 사례로서 기술습득의 단계들을 구분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를 통해 전문가 시스템을 구성하려는 인공지능이 성공할 수 없다는 드레퓌스의 논지를 알아본다. 셋째, 현대철학에서 그러한 반합리주의 철학이 생철학과 연결되는 점들을 살펴보고 넷째, 우리는 생철학으로부터 귀결되는 인공지능에 대한 발언들을 음미하고자 한다. 인간의 오해와 기계의 오류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는 것이 그러한 음미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다섯째, 지식이론의 시각에서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을 검토하고 여섯째, 언어비판을 일사 언어에로 옮겨 전개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과 관련된 인공지능 비판의 논지들을 간추리고 일곱째, 마지막으로 일상언어학파에 속하는 철학자 썰 (John Searle) 의 중국어 방 논변 (Chinese room argument) 으로 제기된 인공지능의 언어비판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현대철학에서 현상학, 실존철학, 생철학, 일상언어학파의 철학들이 인공지능의 어떤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 비판하며 이들 비판이 인공지능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배경적 지식과 프레임 비판 - 현상학과 실존철학

Drefus는 Husserl류의 '기대의 지평' 이나 '노에마' (noema) 개념에 의거하여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다는 논지를 펴왔다. 인공지능의 최대 약점은 Husserl의 '기대' 의 개념을 프로그램으로 작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이다. 지능은 이미 저장된 데이터 구조 안으로 맥락자유의 사실들 (context-free facts) 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견된 사실들을 탐색하기 위해 맥락의존적 사실들 (context-dependent facts) 을 갖고 목표지향적 활동을 하는 것이다.

E. Husserl에게 노에마는 이처럼 능동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내용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 유형들에 관한 심리적 표상내용으로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료들을 구조화하기 위한 맥락이나 기대의 내적 지평을 이루고 있다. 달리 말하면, 노에마는 어떤 유형으 대상을 탐색할 때 확실성 있게 기대될 수 있으며 불가침적인 모든 특징들의 기호적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집을 지각할 때 우리는 보이는 앞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각하기 이전에 이미 집에 관해 기대하는 바들의 연속을 지칭하는 내적 지평을 갖고 사전묘사를 함으로써 그 대상의 가능한 다른 의식들, 예컨대, 그 집의 후면이나 내부의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넣는다.

노에마라는 의식내용은 노에시스 (noesis) 라는 의식작용을 통해 달성된 대상 계기이다. 노에마는 노에시스에 의해 나타나므로, 가령, 집의 노에마가 있다고 해서 그 집이 반드시 실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고향집은 전쟁으로 인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실재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고향집의 노에마는 변하지 않고 생생히 남아 있을 수 있다. 노에마가 갖고 있는 기대의 지평이라고 하였을 경우, '지평'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지향적 행위들의 정합성과 부정합성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지각장 (知覺場) 의 끝을 말한다. 우리가 지평선이라고 할 때, 보이는 연속된 대지의 한계를 말하듯이, 한 행동은 다른 행동을 기대하고 그 기대는 다시 또 다른 행동을 기대하여 이런 기대들을 계속함으로써 이루어진 한계가 지평이다.

'고향집' 이라고 하면 '내가 과거에 살던 집' 이 기대되고 '내가 과거에 살던 집' 은 '내가 과거에 그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자며 살던 집' 이 기대된다. 내가 그 속에서 먹고 자며 놀던 일이 전혀 없는 집을 내가 과거에 살던 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기대의 지평은 어떤 주장이나 행위들이 지향적 (intentional) 이고 합리적 (intelligible) 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지향적 행위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지평을 갖는다. 언어적 행동에는 의미가 지평이며 목적적 행동에는 목적의 지시가 지평이다. 이리하여 현상학의 과제는 상이한 종류의 지평들을 밝히는 것이다.

지평을 밝히는 현상학의 과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향성 (Intentionalität) 의 이해를 철학의 본질로 보는 Husserl로부터 유래된다. 모든 의식은 그 무엇에 관한 의식이므로 순수의식의 기본은 지향성이다. Husserl은 지향성의 개념을 그의 스승 브렌타노 (F. Brentano) 로부터 이어받았다. Husserl은 의식의 지향성을 취하면서도 그것이 안고 있는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 노에마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브렌타노에게서 의식적 행동이 지향적이라는 것은, 그 행동이 항상 대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환상적 지각이나 위의 고향집의 예에서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의식은 그 대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대상들에 의한 의식행위의 방향성을 설명하는 일은 난관에 봉착한다. 그러나 Husserl에게서 의식의 방향성은 의식적 행위의 대상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의식 내부적 내용인 노에마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러한 난관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Drefus는 민스키가 1974년에 제시한 프레임 이론 (the theory of frame) 을 Husserl의 기대 지평으로 풀이한다. 인공지능의 시조들은 맥락자유의 논리와 사실들을 기반으로 하여 보편성을 다루는 지능을 밝히려고 하였으나, 민스키는 맥락의존적인 일상적 지식을 표현하기 위해 프레임의 사상을 고안한 것이다. 상식적인 사고를 구조화하여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프레임 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스키는 프레임의 기본사상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바르틀렛 (F. C. Bartlett) 의 '도식' (schemata) 과 과학사에서 발견한 쿤 (Thomas Kuhn) 의 '패러다임' (paradigms) 사상을 계송한 것으로 본다. 물론 민스키 자신도 프레임 이론에는 기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등 현상학적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Drefus는 한층 더 구체적으로 현상학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프레임 이론을 다시금 비판한 바 있다.

프레임이란 필름 안에 있는 하나의 단순 프레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일상적인 사건ㆍ사물이나 일들을 어떤 틀의 형태로 묶어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어떤 어린아이의 돌잔치에 참석한다고 했을 경우, 몇 가지 종류의 정보들이 함께 어울려 있는데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데이터 구조 (data-structure) 로 프레임이 쓰일 수 있다. 프레임은 마디들 (nodes) 과 그 관계들의 망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프레임은 마디들 (nodes) 과 그 관계들의 망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프레임의 그 최상 수준 (top level) 은 고정되고 상정된 상황에서 항상 참이 되는 것을 표현하지만 보다 낮은 수준 (lower levels) 은 특수한 사례들이나 데이터로 채워지는 슬롯 (slots), 즉 터미널들 (terminals) 을 많이 갖고 있다. 돌잔치의 경우, 누구의 돌이라고 하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생후 1년이어야 하며 그 주인공의 부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 참석자가 있다는 것, 돌잔치 장소 등은 이미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돌잔치 프레임에서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최상 수준에 고정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한층 낮은 수준에서는 그의 성별 슬롯이나 그 부모의 생존 슬롯은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빈 자리에, 가령 주인공은 남자이고, 부모는 생존하였다는 값을 배정하는 것을 '궐석 배정' (default assignments) 이라고 한다.

이런 프레임 모델에서 궐석배정은 사전에 기대되었던 바에 의거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한 프레임의 최상 수준은, Husserl이 지적한 대로 파괴되지 않고 불가침적으로 남아 있는 표현의 부분에 해당되고, 슬롯의 궐석배정은 지각하기 이전에 그리는 사전 묘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Drefus는 풀이한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기대되므로 추가될 수 있는 특성이다. 이런 방식의 프레임 구성으로 인해 인공지능의 기술은 정보처리의 수동적 모델로부터 한 단계 올라가 인식자와 그의 세계 간의 상호작용의 맥락을 능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Drefus가 인공지능 비판의 논거로 삼는 철학은 Husserl의 고전적 현상학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현상학이라고 한다.

Husserl에 의하면 지향성은 의식이 경험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로 이해되며 이런 구조는 의식 자체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이 야기되는 방법뿐만 아니라 적절한 종류의 의식적 경험들의 가능성을 지배하는 조건들에 의해 사물들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Husserl은 일반적 대상으로서의 대상들의 경험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지향성의 일차적 주제는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적이다. 인간의 실존은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 로서 문화적으로 조건이 결정되고 의미의 문제는 개인의 심적 내용보다도 규범과 관습의 공적인 조직망 안에서 나타나는 기능으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의미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사물들의 실제적 유용성과 가치를 반드시 포함한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 사상을 따르는 Drefus에 의하면, 문화적 실제들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서 주체의 총체적 세계지식이 되는 '외적 지평' (outer horizon) 은 적절한 사실들과 속성들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의 조건이고 내적 지평을 구조화하는 전제요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맥락이 명확하게 되지 않으면 내적 지평의 노에마는 바르게 분석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대상들의 경험을 지배하는 일반법칙을 발견하려는 Husserl의 시도는 잘못되었고, 구체적 상황들의 프레임을 추상화ㆍ형식화하여 파악하려는 민스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Drefus는 평가한다. 민스키는 쿤의 패러다임을 계승하였으나, 그것이 다른 무엇과도 구별되는 구체성이라는 점을 그는 빠뜨렸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인간의 실존을 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특수성에서 파악하여야 한다고 하는 철학적 시각에서 관측할 때, 그것을 일반적인 어떤 틀이나 프레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수박 겉 핥기 식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Drefus는 특히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삶의 사회적 목표조직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담당한 역할의 맥락들은 사실들의 어떤 집합으로서 표현될 수 없다는 하이데거의 착상에 주목한다. 그러한 실존적 삶은 우리가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를 통해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Drefus가 그처럼 인공지능의 장래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실존에서 보듯이 표현불가능한 (nonrepresentable) 배경규범과 관습들이 상식을 지닌 인공지능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소규모 세계 (micro-world) 안에서 가능함을 보이려고 하고 있으나, Drefus에 의하면 어떤 소규모 세계도 넓은 대규모의 일상세계로부터 고립될 수 없으므로, 소위 소규모 세계라는 것은 참다운 세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어린이들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에서도 잘 나타난다.

3. 기술습득과 전문가시스템 비판 - 드레퓌스

서   론

Hubert Dreyfus 는 표현불가능한 배경규범이나 지식을 논거로  하여, 컴퓨터가 인간과 같은 지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할 뿐 아니라, 이를 다시금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기술습득의 5단계를 제시하였다. 이 논거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오늘날 전문가 시스템 (expert system) 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 동안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인식근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기술습득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전문가들의 실천적 지식 (know-how) 은, 전통적 인식론들에서 상정되어온 바와는 달리 ,표현가능한 것이 아니며 규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고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전통이 소크라테스가 전문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규칙들을 뽑아내어 검토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Dreyfus 는 플라톤의 대화편 <유티프로> ("The Euthypro") 에서 그 실례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종교적 예언자이며 경건한 행위의 전문가인 유티프로에게 경건성을 인지하는 방법을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당신의 행동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는 경건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 그러나 유티프로는 그가 경건성을 인지한 발견법을 보이려고 하지 않고 전문가들이 그 전문 영역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례들만을 말해주었다 비록 유티프로 가 경건한 행위와 불경의 행위를 구별할 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된 규칙들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Dreyfus는 평가한다. 왜냐하면 전문가의 실천적 지식은 그처럼 표현가능한 규칙 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Dreyfus는 소크라테스의 전통에 반대하고 오히려 유티프로의 사상을 되살리려고 한다. 전문가 시스템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파이겐바움 (Edward Feigenbaum) 은 "5세대 컴퓨터의 출현으로 정보처리의 양과 속도가 비약적으로 중대될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계들이 추리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다량의 지식들이 기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가공되어,인간이 제기한 각종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즉, 의료진단에서부터 생산설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경영의 의사결정에서부터 교육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각종 목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가령, 전문의들에게 물어 그들이 진단에 사용하는 규칙들을 뽑아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한다면 그 물음에는 컴퓨터를 전문의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러나 Dreyfus는 이에 반대하여 컴퓨터는 전문가의 일을 결코 할수없다는 견해를 밝히기 위해 기술습득의 5단계를 구분하고 각 단계의 특성을 상세히 지적하였다.

기술습득의 1단계

1단계의 사람은 완전 초보자(novice)로 호칭된다. 완전 초보자는 대체로 이 분야의 경험이 없으므로 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게 되는데,그는 마치 컴퓨터가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듯이, 그 기술에 적합한 객관적 사실들과 특성들을 배우고 그들을 기반으로 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칙들을 익힌다.

완전 초보자에게는 주어진 일 전체에 관한 정합적 판단력이 업기 때문에, 주로 배운 규칙들을 충실하게 잘 따르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다. 몇몇 규칙들을 배워 이에 따라 연습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충고를 듣고 대화를 나눌 여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결국 여기서 배운 사실이나 규칙 등의 요인들은 모두가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므로 맥락자유의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 운전의 경우 완전 초보자가 속도와 거리의 개념을 계기를 통해 배우는 것처럼 구체적 상황 해석을 떠난 특성들을 인지하는 법을 배운다. 안전거리는 속도에 의해 정의되고, 차선을 바꾸는 조건은 속도와 차간거리에 의해 정의되며, 이와 같은 정의들에서는 교통량 상황의 맥락과 같은 것은 무시된다. 일반적으로 완전 초보자는 배운 규칙들을 위반하여야 하는 상황들을 알기 어렵다.

완전 초보자의 심리과정은 분명한 규칙들과 맥락자유의 요소들만을 고려하므로 디지털 컴퓨터가 쉽게 모방할 수 있다.

기술습득의 2단계

2단계는 상급 초보자(advanced beginner)의 단계이다. 실제 상황에 맞는 경험을 어느 정도 얻었기 때문에 상급 초보자는 그 상황에 추가되어야 할 의미있는 요인들의 뚜렷한 사례들을 기록하게 된다. 맥락자유의 사실들과 정교한 규칙들을 다루는 능력을 터득하고 난 뒤의 실제 경험은 해당 기술세계에 대한 학습자의 생각을 넓히는 데 중요한 영향을 준다. 그 학생은 충분한 수의 사례들을 보고 나서 그들을 인지하는 법을 배우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인지된 새로운 상황의 측면들을 지시할 수 있는 주관적 원리들을 마련한다.

상급 초보자는 완전 초보자보다 개선되긴 하였으나 아직 규칙준수의 질 문제를 따질 정도는 못되고 실행을 잘하는 일에 몰두하며 느리고 정돈이 잘안되며 힘들어 하기 마련이다

상급 초보 운전자의 경우, 기어변속 규칙들로 속도를 조절하는 비상황적인 것뿐 아니라 엔진 소리를 알아채는 상황적 요인을 활용하게 되고 보행자나 다른 운전자의 행위를 예측하기 위해 그들의 속도와 위치 그리고 태도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다. 상급 초보자는 맥락자유의 규칙을 갖고서는 상황적 요인들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사례들만 갖고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의견교환을 할 수 있다.

구체적 사례들로부터 상황의존적인 특성들을 배우는 능력은 사람들에게는 쉬우나 컴퓨터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술습득의 3단계

3단계는 유능한 실행자(competence)로 지적된다. 경험이 증가됨에 따라 구체적 상황들에서 나타나는 특성들과 관점들을 설명할 일이 많이 쌓이게 된다. 폭발하는 정보에 대응하기 위해 유능한 기술자는 단계별로 의사결정을 하는 절차를 배우게 된다 우선 그 상황을 조직화하는 전망이나 목표를 선정하여 계획함으로써 관련된 소수의 사실과 특성만올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행을 단순화하고 개선할 수 있다. 목표선정은 완전 초보자가 특성을 인지하는 것처럼 객관적 절차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상급 초보자는 충분한 수의 사례들이 확인될 때까지 특수상황의 측면들을 인지하여 사용해갈 수 있지만, 능력 보유자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조직화할 수 있는 목표나 전망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다. 이런 선택은 행위자와 그 환경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유능한 운전자가 서둘러 여행을 해야 하겠다고 의사결정을 했을 경우, 그의 여행길 선택에는 거리와 시간만이 고려되고 그 주위 경관은 무시될 것이다 .그는 동승자의 숭차감이나 예의범절에 관여하지 않고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 위해 평소보다 앞차를 바짝 따르고 과감히 차선 을 바꾸며 때로는 법을 어기기도 한다. 결단한 것들이 성취되고 교통경찰차가 나타나지 않으면 신나는 기분이고, 가까이 에서 사고가 나든가 교통위반 딱지를 떼는 것을 보면 기분이 흔들리기도 한다.

초보자들은 배운 사실들과 특성들을 인지하고 이들을 다루기 위해 배운 규칙들과 절차들을 적용하는 일에만 관여하므로, 그 성패는 그렇게 배운 요소와 원리들의 타당성 문제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유능한 실행자는 계획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한 연후에 한 행위이므로,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정서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고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성공한 것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실패한 것들도 쉽게 잊을 수 없다.

기술습득의 4단계

4단계는 숙련 기술자(proficient)의 차례이다. 초보자들은 단순히 규칙들만을 따르고 유능한 실행자는 각종 대안들을 음미한 연후에 성취할 목표와 계획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능숙한 기술자는 대체로 그의 과제에 몰두해 있으며 근래에 사태를 다루어온 결과로 얻은 특정한 시각을 갖고서 과제를 관찰한다.

이런 시각을 가진 결과로 그 상황의 어떤 특성들은 뚜렷이 드러나고 그 밖의 다른 특성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거나 무시된다 그후에 나타난 사실들이 그 뚜렷한 특성들을수정해감에 따라 계획이나 기대를 점차로 바꾸게 된다. 심지어는 중요하다거나 뚜렷한 특성으로서 나타난 특성마저도 변화된다. 이 과정에서는 선택이나 숙고가 첨부되지 않는다. .

능숙한 기술자가 과제를 이해하고 조직화하는 것은 직관적이며 자연적으로 적중하는 것이지 언제나 사전의 경험에 의해 명시적으로 사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의식적인 노력 없이 진행되는 사태를 이해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분석적으로 사고한다.

가령, 능숙한 운전자는 비 오는 날 커브를 돌 때 과거 경험에 근거하여 좀 삐르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자 그는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든가, 가속기에서 발을 떼든가 아니면 단순히 가속기를 누른발의 압력을 줄인다.

기술습득의 5단계

끝으로, 5단계는 전문가(expert)의 단계이다. 자신의 기술의 활동세계에 몰두해 있는 숙련 기술자는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의식적으로 결단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경우는 상황적인 이해가 마음에 솟구칠 뿐 아니라 적절한 행위들도 연상한다. 전문가는 고장났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차에 대해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도 이해하고 행동하며 결과들로부터 배운다.

우리가 걷고 말하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 운전을 할 때 보통 의식적으로 심사숙고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기술은 그 자신의 일부이므로 그 기술을 인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마치 그가 일상적 동작에서 그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을 낱낱이 알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도구나 기구들은 전문가의 신체를 확장한 것이 된다.

전문가 운전자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인지작용 없이도 서행이 필요한 때에는 느낌과 친숙함에 의해 알아차릴 뿐 아니라 대안들을 비교 평가 하지 않고도 행동하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알게 된다 그는 그의 행동올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도 적절한 때에 기어 변속을 한다.

초보자는 heuristic 으로 프로그램화된 컴퓨터처럼 규칙들과 사실들을 사용하는 추리를 하지만, 많은 경험과 재능을 갖게 된 전문가는 규칙들을 적응하지 않고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결   론

Dreyfus는 이러한 기술습득의 5단계를 통해 '전문가의 전문성이 반드시 추론을 포함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논지는 곧 소크라테스로부터 현대 인공지능에서 전문가 시스템의 지식 공학을 설계하는 자들이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문가에게 엄밀한 규칙들을 요구한다면 그는 초보자의 수준으로 되돌아가서 기억나는 규칙들, 그러나 전문가로서는 이미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규칙들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Dreyfus는 "만약 그대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라는 소크라테스의 슬로건은 뒤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누구든지 자기의 기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문가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전문가와 같은 전문가 시스템의 설계는 불가능하다.

4. 지식표현과 생철학적 비판 - 딜타이

배경적 지식과 전문가의 실천적 지식을 근거로 한 드레퓌스의 반합리주의 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철학에 의존할 뿐 아니라 생철학 (生哲學) 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생철학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것이 표현 가능한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분석 처리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고, 표현불가능한 생에의 의지 (意志)를 직관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인간의 삶은 부분에로 분석될 수 없는 전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삶은 의식표면에 표출된 것도 아니고 어떤 규칙들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 것이지만 의식된 모든 것이 그로부터 유래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공지능의 지식표현과 관련하여 생철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해석학 (解釋學, hermeneutics) 의 방법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전적 해석학은 텍스트의 해석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고대 희랍신화에서 여러 신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설명해 주는 날개 달린 메신저 신을 호칭했던 'Hermes'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이런 명칭을 지닌 해석학은 희랍의 문헌연구나 성서주석 등의 영역에 제한된 해석을 하는 학문으로서 출발하였다.

슐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 : 1768~1834) 는 문법과 문체들에 착안하여 고전 언어학과 주제별 성서주석을 결합함으로써 제한된 영역에서 벗어나 비교적 일반적인 해석학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관여된 대화자들의 노력을 대조해 본다. 즉, 화자가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해 낱말들을 모으는 일, 그리고 청자부분으로서 그 말들을 이해하여 감으로써 대화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이해는 감정이입적 내관 (感情移入的 內觀) 이나 직관적 언어 분석에 호소하지만 이해를 단순한 정보해독의 수단으로 보는 이론들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을 지니게 된다. 이리하여 성공적인 해석가는 텍스트의 저자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그의 감추어진 동기나 전략까지도 조명하기 때문에 저자 자신보다도 저자를 더 잘 이해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현대 해석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딜타이 (W. Dilthey ; 1833~1911) 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확장하여 역사와 인문학의 철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딜타이에 의하면 텍스트뿐만 아니라 인간의 예술작품이나 사회제도 등도 인간의 내적 체험내용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는 해석학의 세 가지 계기를 구별하게 된다. 구체적 삶은 외부로부터 설명될 수 없고 오직 내부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적 계기로서의 체험 (Erlebnis) 과 외적 계기로서의 표현 (Ausdruck), 그리고 그 표현을 통해 체험했던 바를 따라서 체험하는 이해 (nacherlebende Verstehen) 의 계기가 그것이다.

체험이란 생을 직접으로 파악하는 충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직접' 이라고 함은, 체험에서는 아는 작용과 알려지는 내용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며 그 자체가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체험은, 삶이 역사적으로 발전해 가는 구조연관을 내적으로 파악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삶의 내부적인 측면이다. 체험에는 감각적 경험만이 아니라 의지나 감정 충동들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전인적인 활동이 포함된다. 체험의 이런 특성 때문에 해석학은 경험주의를 넘어선다. 다음으로 표현은 삶의 내적 체험을 외면화ㆍ객관화한 것으로서, 앞서도 지적되었듯이 예술, 사회조직, 법제도, 관습, 도덕, 종교 및 각종 텍스트를 말한다. 그 중에는 신체적 표현과 같은 순간적ㆍ유동적인 것과 예술작품이나 법제도처럼 지속적이고 고정된 것들도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였다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든 작가가 그 작품으로 표현하려 했던 체험을 따라서 체험함을 의미한다. 해석이란 지속적으로 고정화된 표현들의 기술적인 이해를 의미하며 해석학은 역사적ㆍ사회적 현실로서의 생을 연구하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학을 비롯한 생철학의 인간관과 기계관은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데 중요하다. 인간의 삶은 요소들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기계와 같은 복합체가 아니고 요소들의 단순한 결합으로 성립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닌 통일체로서 구조연관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어떤 고정화된 구조를 지닌 실체인 기계가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충동의 체계로서 발전한다. 이러한 발전연관 속에 있는 삶은 고정된 법칙이나 형식화ㆍ추상화된 논리로써 분석될 수 없고 직관이나 체험에 의해 직접 파악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 과거에 체험된 구조관련이 무의식중에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단순히 고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사회적ㆍ역사적 삶으로서 과거에 체험된 사회관습과 언어 등을 지니고 있는 이른 바 취득연관의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삶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삶을 지니지 못한 기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유의 현상들이 일어난다. 특히 인간은 취득관련 속에 있으므로, 인간이 범하는 오류나 실수는 컴퓨터의 그것들과는 구별된다. 인간의 오류들은 그의 삶과 연관지어 보면 어느 정도 납득되는 점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 인간처럼 실수하는 인공지능의 개발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의 자연적 지능과 같은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오류는 인간을 기계와 구별하는 기준으로 꼽힌다.

몰랜더 (Bengt Molander) 에 의하면 컴퓨터에서 오류의 개념은 일차원적이다. 그것은 이론과 자료가 맞고 안 맞는 데에만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오류들은 전형적으로 기술적인 오류이다. 만약 기계가 기대했던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 착오를 탐색하기 위해 관련 이론과 방법론 그리고 사용한 도구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인간의 오류를 발견하고자 할 때에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오류에는 기계의 경우처럼 분명한 '옳고 그름의 표준들' 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의심 없이 어떤 것을 이해했다고 믿기도 하지만 실은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해에 작용한 언어가 잘못 사용될 수도 있고 이해방식의 통념이 그릇될 수도 있으며 이해에 필수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석학적 이해는 추체험으로 간주하는데, 이해자의 체험이 표현자의 체험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이해는 끊임없이 오해에 개방되게 마련이다.

몰랜더는 드레퓌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인간이해의 최선의 길이라고 본다. 대화는 형식적 논구가 충분하지 못할 경우 필요하다. 지식을 얻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음미하는 것이다. 대화로부터 얻는 지식은 대화자들과 긴밀히 연결된 주관적 지식이며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고 본다. 논리학에서 무모순의 원리는 모든 논의에 포괄적인 표준이 되고 있으나, 대화에는 그러한 포괄적인 진위의 표준, 옳음과 그름의 표준이 일반적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독자적인 표준이 없을 때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대화는 다차원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해도 여러 가지 수준과 차원에서 나타나므로, 논리적 사고에만 의존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대화를 다룰 수 없다고 본다.

더욱이 대화는 어떤 일반적 이론에 의거하기보다는 개별 사례들을 살핌으로써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미 알려진 진리나 진리로 가정된 바를 전제로 하여 논리적인 추리를 하기보다는, 직접으로 개별적 사례들에 직면하여 통찰하는 직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해석학의 체험도 이러한 직관으로 풀이될 수 있고, 본질을 파악하려는 현상학적 직관도 결국 개별적 사례에서 출발한다. 하여간 개별자들의 직관을 존중하는 철학들은 논리와 경험에 의거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음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대화가 많은 오해들을 풀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오히려 그 오해들이 우리의 이해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 측면에도 착안할 필요가 있다. 지식의 취득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오해를 전혀 거치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지식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생각은 변증법적 방법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변증법을 존재론으로 보아 절대자나 절대적 진리를 설교하는 것으로 믿지 않고, 대화법으로서 변증법만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항상 정립에 대한 반정립을 예상하기 때문에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또한 이해와 오해의 연쇄를 통해 한층 더 발전된 단계로 끊임없이 진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오해는 이해를 보다 깊이 또는 보다 넓게 할 수 있을 것이다.

5. 지각경험과 언어철학적 비판 -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현대 철학사상들 중에서 특히 실존주의적 현상학과 해석학적 생철학 그리고 대화토론식 변증법의 시각들로부터 인공지능에 관해 비판이 가능한 측면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일상언어학파(ordinary language school)의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 으로부터 인간의 지능을 만들 수 없다는 요지의 논의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을 기반으로 한 논변 중 틸그맨 (Ben R. Tilghman) 의 논지가 흥미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언어와 맥락, 실천과 해석들의 밀접한 상호관계는, 지식기반 시스템과 화행 및 시각 경험들의 다학문적 접근을 하는 인공지능 연구가들이 관심을 두어야 할 바라고 지적하고, 그 실현가능성의 부정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우리의 지각경험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생리학과 신경학이 지각 (perception) 의 본질을 말해 주리라는 가정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학문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보는 바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인과적 요인들을 보고 확인할 때, 신경과 두뇌에서 진행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것이 곧 시각 대상이 무엇이라든가, 이 경험은 '참으로 본' 경우이고 저 경험은 '잘못 본' 경우라는 식으로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작품에서 '봄' 과 '-로서 봄' (seeing and seeing as)을 구분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얼굴을 보는 것과 두 얼굴이 닮은 것을 보는 것을 구분한다. 전자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관점 지각 (aspect perception) 이다. 우리가 한 얼굴을 본 그대로 보고하는 것과 그 얼굴을 누구와 닮은 것으로 보아 보고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어느 어린이를 보고 누구를 닮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 데 반해, 그 어머니만을 아는 사람들은 어머니를 꼭 닮았다고 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이것은 서로 같은 어린이를 보면서도 비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한 경우는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도 그것을 오리로서 보는 경우와 토끼로서 보는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무엇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그 대상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함으로써 모두 이해될 수 없다. 어린이나 그림이라는 대상으로부터 광선이 반사되어 우리의 망막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후로 시신경이 자극된다는 등, 지각의 인과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그런 관점의 차이를 밝혀 주지 못한다. 관점에는 비교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고 비교대상을 선정하고 그것들을 언어로 표시하는 인간의 능력이 전제된다. 비교대상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같은 것도 서로 다르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관점을 보는 것은 하나의 해석을 첨부하여 보는 것이다. 가령, 기계의 설계도를 처음 보게 되면 그곳에 나타난 선이나 원 등이 무엇인지 막막하다. 그러나 궁리하여 선은 기계의 표면이고 원은 뚫을 구멍이며 끊긴 선은 안면의 열쇠 슬롯이라는 식으로 가정한다. 해석이란 이처럼 어떤 것을 직접 이해하지 못할 때 참여하는 과정이다.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이 해석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해석에는 가설형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엇으로서 본다' 는 해석은 인간의 능동적 활동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데 반해, '그저 본다' 는 것은 하나의 상태를 의미한다.

해석이 필연적으로 언어 자체에 포함된다는 언어철학적 논의도 비트겐슈타인의 해석관과 연결된다.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세계에 관한 이론이나 해석을 포함하게 마련이다. 가령, 우리가 낯선 외국땅에서 전혀 모른는 그 지역 말을 배워가는 과정을 상상해 보아도 그러한 세계해석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사용하는 특정한 낱말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그 낱말들이 사용되는 세계를 가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정은 그 언어가 어떤 세계의 해석을 포함한다고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으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가설들을 형성하고 여러 가지로 해석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그 생활양식에 친숙해지면 해석이 필요 없이 직접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어린이가 자기네 모국어를 배우게 되는 과정도 가설 형성을 거치지 않는 사례로 본다.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몸짓, 얼굴표정, 목소리 등으로도 뜻하는 바를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해석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생활양식' (a form of life) 의 개념은 언어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전기 철학에서는 언어를 세계의 그림, 세계의 가능적 또는 현실적 사상들의 그림으로 보았으며 (the picture-theory) 그 언어는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세계 투사의 일반규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기에는 언어와 세계의 대응관계를 기반으로 한 그림이론에서 떠나, 언어의 게임 (language-game) 이론으로 옮겨오면서 언어의 사용문제를 중시하게 되었는데, 언어의 사용에서 생활양식은 불가결의 요소였다. 게임에 규칙이 있듯이 언어사용의 게임에도 규칙들이 있게 마련인데, 후기에는 전기에서처럼 모든 언어 게임에 공통되는 논리적 원리나 일반규칙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 따른 언어 게임의 특수규칙들에 주목하였다.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언어 게임의 규칙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규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규칙의 표현들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정으로 규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규칙을 따라 행동하는 실행을 말한다. 이리하여 해석과 실행은 대비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가설을 형성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게임 규칙의 실행이다. 그런데 이런 실행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고 언어는 다시금 생활양식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특정한 문장이 의미를 얻게 되는 배경인 생활양식의 공유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생활양식을 달리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이해가 성립되기 힘들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설령 사자가 말을 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과 사자의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의 생활양식의 범주 안에는 공유하는 사회생활 뿐만 아니라 자연적 반응도 포함된다. 우리는 사자의 얼굴에서 기쁨과 슬픔을 알아차릴 수 없다. 사자를 연구하는 동물학자가 가령 다양한 꼬리흔들기와 자세들을 범주들로 분류하고 이들을 기분이나 성충동 등에 상응시켜 보아도, 그것은 우리가 인간들 사이에서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생각을 연장하여 기계인 컴퓨터에 적용한다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인간과 같은 인공지능의 제작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두 얼굴의 유사성을 특정한 관점에 한정하면 그런 의미의 유사성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인간들이 보는 관점들을 그렇게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얼굴 모양이 둥글다거나 네모나다는 정도를 넘어 슬퍼보이거나 기뻐보이고 원기왕성해 보이는가 하면 기운 없어 보이기도 하는 등의 관점들을 모두 목록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관점이 윤리적인 태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풀이될 때 그러한 감정과 태도의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인공지능이 가능할런지 의문이다. 

6. 기호처리와 의미론적 비판 - 썰의 중국어방 논변

John R. Searle 은 특히 심신관계를 논하는 심리철학의 측면에서 AI를 강한 것 (strong AI) 와 약한 것 (weak AI) 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강한 AI 에 의하면 마음은 바로 컴퓨터 프로그램이며 결국 적절히 프로그램된 시스템은 그것의 물질적 구조에 관계없이 글자 그대로 마음, 너와 내가 가진 마음과 꼭 같은 의미의 마음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약한 AI 는 컴퓨터가 마음 연구에 유용한 도구라는 견해이다....... 그 후에 일부 AI 연구자들은 AI 의 목적은 하나의 지적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업을 인간이 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도움을 준다" 라는 개념은 weak AI 이고 "수행한다" 라는 것은 strong AI 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전개되어 온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썰이 '중국어 방' 이라는 사고실험에 의해 비판한 것이다. 썰에 의하면, 인공지능을 지배해 온 사상을, '강한 AI' 의 기본사상, 즉 '인간의 마음과 두뇌와의 관계가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하드웨어와의 관계와 같다' 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어 방 논변은 바로 그 주장이 거짓임을 논박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며, 1980년대 이후로 인공지능의 본성과 그 범위나 한계의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이 논변은 자주 언급되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썰이 이 중국어 방 사고실험을 통해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요약된다. "당신이 형식적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함으로써,밖에 있는 관찰자가 보기에, 마치 중국어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처럼 기호처리를 잘하지만 실상 당신이 중국어를 한 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어 이해에 적절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수행이 당신에게 중국어를 이해시키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디지털 컴퓨터에게 중국어를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도 충분하지 않다." 이 주장은 디지털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형식적이고 구문론적이므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즉, 의미론을 포함하는 인간의 마음과 같이 될 수 없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강한 AI 는 잘못된 것이다.

썰의 중국어 방 논변은 50년대 이래로 인공지능 분야에서 지능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서 널리 채용해 온 튜어링 검사 (Turing test) 에 대한 반증 논변으로 간주되어 왔다. 지능이 무엇이냐고 하는 추상적인 논의는 끝없는 논쟁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튜어링은 지능의 실제적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이 지능을 가졌는지, 갖지 못했는지를 검사할 수 있는 게임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것은 세 사람이 하는 놀이를 모의 게임으로 삼고 있다. 셋 중 한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이고 다른 두 사람은 응답자인데 그들은 각기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다음과 같은 놀이를 한다고 하자. 가령, 남자응답자는 자신이 여자인 것처럼 조직적으로 위장하여 질문자를 속이려고 하고, 여자응답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심문자를 도와 바르게 대답하기로 한다. 예컨대, 심문자가 남자에게 "당신의 머리의 길이를 말해 주시요" 한다면, 그 남자는 자신이 여자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나의 긴 머리카락은 9인치 정도입니다" 라고 속일 수 있고 어쩌면 여자는 "내가 여자이니 그 남자 말을 믿지 마세요" 라고 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만약 질문자가 바르게 추측하면 여자가 이기고 그렇지 못하면 남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질문자가 증인들의 얼굴이나 억양을 보고 듣지 못하도록 서로 격리시켜 놓고 전신으로만 질문에 답하기로 되어 있다. 이 게임에서 튜어링이 구상한 아이디어는 남자증인을 컴퓨터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런 게임에서 보통 남자가 질문자를 속일 수 있듯이 컴퓨터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컴퓨터는 지능을 가졌다고 판정하는 것이 튜어링 테스트다.

물론 현재까지 튜어링 검사를 통과한 컴퓨터는 없다. 혹자는 2020년에서 2070년대 사이에는 이 검사를 통과할 지적인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처럼 튜어링 검사는 지능을 행위에 의해 규정하려는 행동주의를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의거하여 생각하는 컴퓨터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이른 바 강한 AI 를 지원한 셈이다.
이에 반해 썰의 중국어 방 논변에 의하면 디지털 컴퓨터는 형식적이고 구문론적이기 때문에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심리적 과정이라는 의미론적 내용을 지닌 지능의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어 방 사람이 제 아무리 중국어로 해답을 잘 해낸다고 하더라도 규정집 다루는 절차만을 익힌 그가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인공지능 비판의 비판

7-1. 썰의 논지와 분석적 고찰

J. Searle 은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추론의 형식으로 간추려 제시하였다. (주석 : Searle (1984), p. 39~41.)

1. 두뇌는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2. 구문론이 의미론이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3.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그들의 형식적 혹은 구문론적 구조에 의해 모두 정의된다.

4. 마음은 심리적 내용들을 갖는다. 특히 마음은 의미론적 마음을 갖는다.

결론 1. 그러므로,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자체로서는 어느 체계의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요컨데, 프로그램은 마음이 아니며 프로그램만으로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썰의 논거에 관해 논평을 해가면서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썰의 전제 1 은 자신이 거칠 게 표현되었다고 하지만 물질인 두뇌 안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의하여 마음이라고 하는 심리과정들이 야기된다고 보는 유물론적 형이상학 (唯物論的 形而上學) 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에 의하면 마음은 세계의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자연적 · 생물학적 현상으로 간주된다. 이런 일원론 (一元論) 의 입장에서 썰은 강한 AI 에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잔재가 남아있다고 비판한다. (주석 : 앞의 책 p. 38.) 인공지능에서 마음은 자연적인 생물학적 세계의 부분 이상의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순수형식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그리하여 정신적인 마음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해당시키고 물질적인 두뇌는 컴퓨터 하드웨어에 대응시킨 강한 AI 는 정신 / 물질 이뤈론 물론을 취하면서도 마음을 외부적 행동에 의해 판별하려는 행동주의를 거부하고 마음의 내부적 심리과정을 긍정하며 이를 인간의 지향성을 통해 밝히려고 하였다.

썰의 지향성이 유물론적 이라는 점은, 지향성을 정신의 본질적 특성으로 보는 현상학이나, 그것을 인간 실존의 주체성과 연관시키려는 실존철학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미 후자들의 철학으로부터 인공지능을 비판해 온 드레퓌스의 견해들을 검토한 바 있다.

다른 한편, 래퍼포트 (W . J . Rapaport) 와 같은 전산학자는 유물론을 취하지만 인공지능이 가능함을 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음은 물질이라고 해도 그것은 특수한 종류의 물질이다. 마음의 심리현상은 알고리즘 (algorism) 이며 그 알고리즘은 적절한 종류의 물질을 작동시키기만 하면 지향성을 산출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 래퍼포트는 어떤 수행장치로 실현된 인간지향성 모방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 수행장치가 지향성을 산출하는 데 필수적인 인과적 능력들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본다. (주석 : Rapaport (1988) 참조.)

 이처럼 의견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일단 전제 1 을 기본가정으로 수락한다고 하자. 그리고 전제 2 는 기호이론 (semiotics) 에 의거하여 수긍되는 것으로 가정하자. 그러나 비록 그런 경우일지라도 구문론이 의미론을 논의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구문론은 의미론의 필요조건이다" 를 전제 2 에 추가된 새 전제 (2 - 1) 로 삼았을 경우,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추가 전제로부터 얻은 결론은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자체로서는 어떤 체계의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지만 필요하긴 하다' (1 - 1) 로 될 것이다.

그리고 전제 3 에서 '형식적 혹은 구문론적' 이라는 표현이 다의적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즉, 그것은 1) 형식적이며 구문론적인 경우, 2) 형식적이나 구문론적이 아닌 경우, 3) 구문론적이나 형식적이 아닌 경우로 분류된다. 문맥적으로 보아 대체로 1) 의 경우를 지칭하는 것 같으나 2) 와 3) 의 경우는 판가름할 수 없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2) 의 경우는 형식적 의미론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컴퓨터는 구문론적 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의미론의 일부인 형식적 의미론이 가능하다고 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3) 의 경우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비형식적인 기술적 구문론 (descriptive syntax) 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되므로, 이를 인정한다면 썰 자신의 주장들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다. 컴퓨터가 기술적 구문론을 할 수 있다는 논거와 기술적 의미론을 할 수 없다는 논거를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제 3 은 정의에 의한 참 (true by definition) 으로 수락한 것이고, 그렇다면 같은 방법으로 전제 4 에 규정되는 마음 (minds) 도 정의에 의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셈이다.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는 데에서도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기술이 있을 수 있으므로, 논의를 한정시키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함으로써 정의에 의한 참을 확보하려는 주장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제 4 는 한 가지 규정방식으로 인정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마음에 관한 불변적 진리를 천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행동주의자들처럼 심리과정과 관계없이 규정할 수도 있으며 기호이론 전체를 포함시켜 마음에는 구문론과 의미론뿐만 아니라 어용론 (語用論, pragmatics) 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끝으로, 결론 1 이 위의 전제 2 와 3 과 4 를 기반으로 한다면 당연히 도출된다고 하겠으나 앞에서 본 것처럼 전제를 달리한다면 결론은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7-2. 한국어방 논변

지금까지는 썰의 논거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으나 인공지능비판에 관한 그의 핵심적 주장은 아무래도 중국어 방 논변에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 논변에 관한 반론은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전개되어 왔으나, 1988 년에 래퍼포트가 제시한 한국어 방 논변이 과목할 만하다. (주석 : 앞의 책 pp. 114 ~ 115.) 래퍼포트는 이미 1986 년에도 썰의 중국어 방 논변을 비판하면서 구문론적 이해와 의미론적 이해의 구분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에 불과함을 논한 바 있다. (주석 : Rapaport (1986) 참조.) 그와 같은 맥락에서 컴퓨터의 사고수행은 인간의 사고수행을 모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종류의 사고가 수행매체들간의 차이, 다시 말하면 하나는 유기체인 신체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체인 컴퓨터 하드웨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 의한 사고는 하나의 동일한 유개념 (類槪念) 적 사고의 두 가지 종개념 (種槪念) 에 불과하다는 논지를 펴기도 하였다.

하나의 시스템이 지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자연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에서 래퍼포트는 컴퓨터가 자연언어 이해 프로그램을 잘 다룬다는 것은 자연언어를 이해한 것이라는 점을 논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중국어 방 논변에 대응하여 이른 바 '한국어 방 논변' (Korean room argument) 이라고 호칭한 사고실험을 제시하였다.

한국어 방 논변은 서울의 대학 영문과에 한 교수를 다음과 같이 상정한 사고실험이다. "그는 영어를 모른다. 영어로 쓰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는 셰익스피어의 전문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훌륭한 한국어 번역판을 읽었으며 그러한 독서와 그의 지적인 혜안을 기반으로 하여 셰엑스피어 희곡들에 관한 몇몇 논문들을 한국어로 발표하였다. 이 논물들은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저명한 영문 학술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것들이 성공적이어서 그는 셰익스피어 전문 연구자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주석 : Rapaport (1988), p. 114.)

이 영문학 교수가 이해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한국어 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이해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해되는 것은 참다운 정신적인 이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결국 컴퓨터가 자연언어처리를 잘하여 한국 영문학 교수와 같은 명성을 얻을 정도라면 그 컴퓨터는 셰익스피어를 참으로 이해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이해하였듯이 중국어 방 사람도 중국어를 이해한 것이 아니냐는 논박이 성립될 법도하다. 한국어 방에서 래퍼포트가 특히 전제로 삼는 것은, 지능이 없으면 영어나 한국어와 같은 자연언어를 잘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어 방 논변은 튜어링 검사와 흡사하지만 페처 (Fetzer) 도 지적했듯이, (주석 : Fetzer (1990), p. 9.) 튜어링 검사는 지적 기계를 판정하는 우리의 신념 상태 (belief states)를 문제삼는 데 반해, 한국어 방 논변은 지적 기계에서 일어나고 잇는 사실에 관해 논하는 것이다.

7-3. 인지주의 논박

중국어 방 논변은 이른 바 '강한 인공지능' (strong AI) 을 거짓이라고 논박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그대로 '약한 인공지능' (weak AI) 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썰 자신도, 마음이 바로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강한 인공지능을 반박하기는 쉽지만, 마음을 연구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약한 인공지능은 모호해서 반박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이의 검토를 위해서는 약한 인공지능의 강성논설과 연성논설 (stronger and weaker versions) 을 구별하고 강성논설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석 : Searle (1990), p. 24.)

특히 54쪽의 전체 2 - 1 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은 심리상태를 갖기에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필요하다는 주장은 약한 인공지능의 강성논설이라고 하며 이 견해는 인지과학에서 널리 수용된다고 해서 이를 '인지주의' (cognitivism) 라고 부른다. 썰의 인지주의 비판은 그것이 거짓이라고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설득력 있는 것이 못된다 (implausible) 고 비판하는 데 그친다. 이리하여 인공지능 비판은 참 · 거짓의 문제로부터 그럴싸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문제로 완화된다.

썰은 인지주의의 지지근거를 6 가지로 열거하고 이를 각각 논파하는 형식으로 비판한다. 첫째 우리는 두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며 그래서 컴퓨터 은유가 최선의 이론이라는 인지주의의 근거이다. 썰에 의하면, 두뇌의 작용을 모르기 때문에, 두뇌의 작용을 역사적으로 보면 제분기나 전화교환기 등 당시 최첨단 기술에 비교해 이해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왔다. 그러나, 완전한 두뇌과학이 등장했더라면 컴퓨터 은유는 필요 없었을 것이므로, 수긍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논조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모르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당시의 첨단과학기술과 유비해 논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그럴싸한' (plausible) 발견의 근거를 가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인간이 하였더라면 지적 (intelligent) 이라고 간주할 만한 행동을 하는 기계들을 우리가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인지주의의 논지다. 튜어링 테스트가 바로 그러한 지능의 기준을 제시하였다고 하겠으나 그런 지능은 표현가능한 세계 안에 한정되었다. 우리가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배경적 지식 (2 절) 과 기술 습득의 실천적 지식 (3 절) 은 표현불가능하므로 인공지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생철학적 직관과 체험의 내용이나 언어사용에서 터득되는 능력이나 태도 등도 모두 표현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지능의 기능이 이러한 표현불가능한 영역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지능을 지닌 기계를 만들 수 없다는 비판은 마땅히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능의 기능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보아 그러한 지능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는 식의 논의에서 떠나, 지능을 다차원적인 기능을 지닌 것으로 고려한다면 그 중에서 일부를 수행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도 하겠다.

페레 (F. Ferré) 에 의하면 지느은 인간 특유의 것이 아니라 침팬지, 개, 말, 돌고래 등 고등동물에도 있다고 보며 그 기능을 다음 일곱 가지로 구분하여 보았다. 지능은 우선 물음에 대한 융통성 있는 응답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되고 (1), 응답의 속도 (2), 식별의 섬세성 (3), 추리의 원근성 (4), 요약 · 통합 능력 (5), 목표달성의 효율성 (6) 에 따라 지능의 정도를 판별할 수 있도록 지능이 변화되며 지능은 목표들 자체의 적절성을 검토 (7) 하는 데에도 작용한다. (주석 : Ferré (1988), p. 30~33.) 우리가 이러한 구분을 받아 들인다면 적어도 컴퓨터는 지능의 (2), (4), (6) 의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겠고 기능 (7) 도 점차로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나머지 기능들도 표현가능한 영역 안에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썰은 인지주의의 세 번째 논거로, "인간과 컴퓨터는 모두 규칙들에 따라 작동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이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의 기능방법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를 꼽고 있다. 이 논거는 인공지능 비판에 관한 우리의 논의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논거를 다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정보처리를 하는 것이요 정보처리란 규칙들에 따라 기호처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도 규칙에 따라 기호처리를 하는 방식으로 정보처리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나 인지과정을 연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산적인 규칙지배의 기호처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썰은 이 논거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컴퓨터의 규칙준수가 같지 않고 정보처리의 의미도 다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인간이 어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그 규칙의 의미나 실제적 내용이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지만, 컴퓨터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단지 형식적 절차들에 의거하여 작동할 뿐이다. 여기서 '규칙에 따른다' 는 것은 인간의 경우에 문자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컴퓨터의 경우는 은유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은유적 사용이 자구적 의미와 혼동되지 않는 한 무해하지만 인지주의의 논거는 혼동한 것이라고 논박한다. 썰은 같은 맥락에서 정보처리의 의미도 구분한다. 즉, 인간의 심리적인 정보처리와 컴퓨터의 유사형식의 정보처리 ('as if' forms of information processing) 를 판별하고 인지주의가 이를 혼동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규칙준수와 정보처리에 관한 썰의 의미구분이 정당함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 혼동을 피하여야 한다는 그의 의도에도 찬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썰의 논의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들이 있다. 우선 이 제 3 의 논거가 약한 AI 의 강성논설이라는 점이다. 즉, "인간의 심리과정은 전산적 과정보다 많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심리 상태는 전산적 상태이며 심리과정은 전산과정이다" 라는 것이다. 이를 논박하기 위해서는 규칙준수와 정보처리의 은유적 사용을 드러 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런 논박이 컴퓨터를 마음연구의 유용한 도구로 생각하는 약한 AI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컴퓨터 은유가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한다는 점을 논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썰과 같은 비판을 전개하는 학자들이 AI 로 주로 '마음연구'에 한정하여 논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AI 를 인지심리학이나 심리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AI 를 고찰하는 것은 그런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넓은 영역에서 문제해결의 도구로서 AI 가 어떠한지 관심을 두게 된다. 이런 관심에서 인공지능에 접근하게 되면 썰류의 비판이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 못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인공지능 비판자들의 논평대로 AI 는 심리연구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떄문에 인공지능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적 기대는 물론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AI 가 심리철학에서는 실망을 주는 침울한 분위기이지만, 언어철학을 비롯해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의 분야에서는 미래의 희망을 내다보는 생동력을 보이는 것 같다.

다음에 제시되는 논거들은 이미 논의된 바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소개만 하기로 한다. 넷째 논거 "유의미한 인간 행동은 내부이론의 산물이어야 한다" 는 인지주의자들이 암암리에 가정하는 것으로서 방법론의 원리로 작용한다고 본다. 플라톤이나 라이프니츠도 가정하였던 내부이론에 의하면, 가령. 언어학습의 능력이나 사람 얼굴의 인지능력은 인간의 어떤 생득구조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씰은 언어학습과 같은 기본능력의 배후에 이론적인 마음의 수준을 가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일은 단순히 두뇌만이 한다고 하는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이런 따위의 형이상학적인 논쟁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다섯째는 이상의 네 가지 논거에 의해 지원받는 것으로서, 두뇌가 전산적 원리들에 의해 작동한다는 확고한 경험적 증거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생성문법으로부터 언어학적인 증거를 들고 있으나,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전산적 규칙들은 기계작동의 형식적 절차일 뿐이며 의미론적 내용이 없으므로 규칙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경험적 증거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컴퓨터 은유가 심신 문제의 손쉬운 해결이며, 전산적 유추가 옳지 않으면 심신 문제 해결의 방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 논거는 결국 심신이원론으로 빠져 거북해지므로 정신과정을 생물학적 자연사의 일부로 보도록 권한다. 이 논쟁도 역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새로운 논의들이 지속될 것이다.